유령과 나

  

  나는 고장 나버렸다.
  음악이 나오지 않는 라디오는 라디오 모양을 한 고물일 뿐이다.
  고장 난 사람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 봄날, 조퇴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환한 햇살도 예쁜 꽃도 산들바람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세상은 그저 우울뿐이다. 그리고 두려움.

  우리 아파트 입구에 트럭이 서 있었다. 창을 새로 해 넣는 건지 트럭엔 커다란 통유리가 실려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엔 나 말고도 어린 아기를 데리고 있는 가족이 한 팀 있었고 산에 다녀오는지 등산복을 입은 노인분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나는 아기나 강아지를 좋아했지만, 이젠 누가 말을 걸까 무서워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오늘은 내 방 실외기에 비둘기가 앉아 있지 않으면 좋겠다. 8층인 우리 집은 비둘기가 딱 좋아하는 높이인지 늘 비둘기 한두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닫힌 창문으로 쿠션을 던진다. 처음엔 날아가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이젠 꿈쩍도 안 할 때가 더 많다. 내가 저를 무서워하는 걸 아는 모양이다.
  내 평생 최고로 열심히 공부했던 시험에서 오히려 성적이 쭉 미끄러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사는 게 무서워졌다.’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는 엄마 아빠나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없었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려졌고 선생님 말소리가 귀를 거쳐 뇌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아침에 눈 뜨는 게 두려운 아이가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막 도착한 순간이었다.

  꽝!

  하고 지축을 울리는 큰 소리가 등 뒤에서 난 것은.
  좀 전에 본 통유리를 사람들이 옮기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나 생각했다. 그런 소리치곤 너무나 크긴 했지만.
  사람들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뒤돌아보았다.
  쓰러져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빈혈이신가⋯⋯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기의 엄마가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어떡해! 14층 할머니야⋯⋯ 떨어지셨나봐!”
  사람이 떨어졌다고?
  “우리 옆집 혼자 사시는 할머니예요. 불쌍해서 어떡해. 딸이 이 근처에 산댔어요. 지금 직장에 있을 텐데.”
  “일단 관리실에 전화하고. 경찰에도 알려야지.”
  나는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19차가 경적을 울리며 도착했다. 여자 구조대원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의 딸인 듯 보이는 아줌마도 달려왔다. 할머니를 보더니 울부짖으며 끌어안았다. 할머니의 팔이 축 늘어지는 게 보였다.
  “엄마! 내가, 내가 미안해! 내가 괜히 올라오라고 해서. 그냥 고향에 살게 둘걸. 내가 괜히. 으흑흑!”
  들것에 할머니를 실은 뒤 구급차가 떠났다.
  열일곱 평생 처음 본 죽은 사람은 그렇게 내 시야에서 떠나갔다.

*

  그날로부터 일주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창밖의 어둠 속에 유령이 서성이는 것 같았다. 유령이 창백한 얼굴로 내 방을 들여다볼 것만 같았다.
  비척대며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앞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엘리베이터 타기 싫은데.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나는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타려나. 다음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자애가 너무 희미했던 것이다.
  얼마나 희미했냐면 무슨 홀로그램처럼 뒷계단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단발머리에 칼라가 넓은 세일러복에 검은 구두. 옷차림도 영화에서 본 옛날 교복 같았다.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한낮인데 얼음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무서워하지 마! 나는 유령이야. 그러니까 죽은 사람.
  여자애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소리 내어 말한 건 아니다.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부드럽게 울렸다고 말하는 게 좀 더 비슷할 듯하다.
  ―일주일 전에 죽었어. 신참 유령이지.
  ‘일주일 전이라면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인데⋯⋯.’
  ―그래. 그게 나야.
  “헉, 제 생각이 들려요?”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가 두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럼. 너도 내 생각을 듣고 있잖아.
  여자애가 빙긋 웃었다. 그렇게 희미한데도 웃는 건 똑똑히 보였다.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면 돼. 그럼 다 들을 수 있어.
  ―뭐예요. 남의 생각 함부로 읽지 마요. 프라이버시 문제라고요.
  나는 열심히 생각으로 항의했다.
  ―어쩔 수 없어. 나는 유령인걸.
  여자애⋯⋯ 아니, 할머니인가. 암튼 유령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나는 뛰어내린 게 아냐. 이불 털다가 떨어진 거야. 실수야 실수.
  그 현장에 내가 있었던 것까진 모르는 모양이다. 이불 없었는데. 유령이 거짓말을 하다니 급 신뢰감이 떨어졌다.
  ―이런, 그 자리에 있었군.
  유령이 살짝 민망해하며 한숨을 쉬었다.
  ―실은 술에 취해서⋯⋯ 뭐, 실수라고 할 수도 없겠다. 늘 취해 있었으니.
  거짓말도 민망하지만 진실을 듣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하긴 유령까지 될 정도면 세상일에 미련이 많은 성격일 수도 있겠다.
  ―미련 같은 건 없어.
  유령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왜 유령이 되신 거예요?
  ―나도 몰라.
  유령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말이 진짜였어. 떨어지는 동안 내 일생이 되감기한 필름처럼 스쳐 가더라. 늘 취해 있던 최근 수년간을 지나서 이사 오기 전 고향에 살 때, 영감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딸을 키우던 때, 딸이 태어났을 때, 갓 결혼했을 무렵…… 그러다 지금 네 나이 무렵이 되었는데, 그때 내가 참 예뻤더라고. 반짝반짝 빛이 나더라. 그땐 몰랐는데. 그런 생각을 해서일까. 나는 죽었고 다음 순간 이런 모습의 유령이 되어 있었어.
  ―다시 소녀로 돌아갔다고요?
  유령이 자기 교복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렇게 되었어. 죽으면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끝이 아니라고요? 죽으면 모두 유령이 되나요? 유령이 되어 영원히 떠돈다고요?
  ―그건 아니야. 이런 일은 예외적인 모양이야.
  ―어떻게 알아요? 처음 유령이 되었잖아요.
  ―그냥 알 수 있어. 아무튼 죽음은 끝이 아니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단계야. 유령이 되는 건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또 오랜 시간 가능한 것도 아닌 거 같아. 일주일째인데 벌써 이렇게 희미해졌잖니.
  ―처음엔 지금보다 더 잘 보였어요?
  ―그랬지. 더 뚜렷했고 더 무거웠어. 그래서 낮엔 숨어 있어야 했어. 이 아파트 지하에 숨어 있었지. 그리고 밤이 되면 올라와 조금 돌아다녔어.
  ―저런⋯⋯.
  ―그렇지? 언제까지 여기 있게 될진 모르겠지만 좀 속상하더라고. 세상일엔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 그런데 난 왜 이런 모습으로 여기 남아 있는지 이해가 안 됐어.
  유령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너를 본 순간에야 알 수 있었지.
  ―나를⋯⋯ 나를 어떻게 알았어요?
  유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몰라. 밤마다 네가 두려움에 떠는 소리가 온 아파트를 울렸는걸.
  ―그게 들렸다고요?
  ―유령이잖아.
  ―그럼⋯⋯ 찾아오지 그랬어요.
  ―찾아갔지.
  소름이 오싹 끼쳤다. 밤마다 두려움에 떨면서 떠올렸던 것들이 나의 헛된 상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유령이 나를 찾아왔었다니.
  ―창문으로 너를 봤지. 말을 걸까도 생각해봤지만, 8층 높이의 창문에서 너에게 인사하면 그렇지 않아도 겁 많은 네가 그대로 죽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되더라고.
  ―그랬겠죠.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진심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낮에.
  하지만 유령이 나를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도움이 안 돼. 너 지금 나 안 무서워하잖아.
  ―에? 그⋯⋯ 그거야⋯⋯.
  ―내가 안 무섭게 생겼다고? 유령이 다 무섭게 생겼을 거라는 건 편견이야.
  이 유령은 사실 외모뿐만 아니라 말투도 어렸다. 존댓말을 해야 할지 눈앞의 모습에 맞추어 반말을 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리고 뭐 비둘기는 무섭게 생겨서 무서워하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
  ―유령이잖아. 네가 두려움에 먹힌 아이라는 것 정돈 알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널 도와줄게. 너에게서 두려움을 가져가줄게.
  ―어, 어떻게요?
  ―딱 하루만 나랑 같이 있자.
  나는 정색을 했다.
  ―어떻게 같이 있어요?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텐데. 할머니는 너무 희미하잖아요!
  유령이 방긋 웃었다.
  ―방법이 있어. 난 영혼이잖아. 그리고 아주 가벼워. 그다지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
  무슨⋯⋯ 공간?
  ―나한텐 보여. 네 영혼의 방은 밝고 깨끗해. 그걸 둘러싸고 있는 두려움이 빛을 막고 있을 뿐이지.
  유령이 빙그레 웃었다. 다시 소름이 쫘악 끼쳤다.
  ―쉬워. 내가 네 안으로 들어가면 살짝만 자리를 내어주면 돼. 같이 있는 거지. 딱 하루만.
  “그건 그냥 도와주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미쳤단 소리를 들을 터이다.
  유령이 쭈굴하게 말했다.
  ―그럼⋯⋯ 딜이라고 하지 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사기꾼 유령 같으니. 거짓말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그건 빙의잖아요. 내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요. 몸을 뺏길 수도 있잖아요. 절대 안 돼요.
  ―그런 게 아냐!
  유령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나한텐 그런 힘이 없다고.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고 희미해지고 있는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난 알아.
  유령이 힘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저 하루만⋯⋯ 그래, 딱 하루만 가장 행복했던 때의 내가 되어 살아보고 싶어. 살아 있는 어린 몸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싶어. 그뿐이야.
  유령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안 될까? .
  ―⋯⋯ 딱 하루예요.
  ―물론이지!
  유령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정말 허락해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내게서 두려움을 가져가준다는 유령의 말을 믿어서는 아니었다. 내가 하루 만에 변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무서워서 기절하거나 부들부들 떠는 일 없이 유령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신기했다.
  나는 그냥 할머니가 좀 가엾었다. 죽은 사람이 하는 부탁치곤 소박하지 않은가. 아마 이 유령은 살아생전에도 누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을래? 하면 떡볶이, 이랬을 것 같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아, 진짜. 제 생각 다 읽지 말라고요.
  ―하지만 난 유령⋯⋯.
  ―아 됐어요. 노력해보세요. 짜증 나. 세상에 유령이 엄청 많은 건 아니죠?
  그런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프라이버시란 게 없을 테니 말이다.
  ―그건 노코멘트 할게.
  나는 유령을 째려보았지만, 막상 진실은 또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노인인지 내 또래 여자아인지 헷갈리는 이 유령과 잠시 그 영혼의 방이란 걸 같이 쓰기로 마음먹었다. 유령도 만났는데 이런 경험쯤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왠지 막 모험을 하는 것 같아 조금 설레기도 했다.
  ―이거 봐. 예전의 너라면 그런 생각만으로도 겁에 질렸을 거라니깐.
  ―그건 할머니가!
  좀 허술하고 만만한 유령이라 그런 거죠. 에이, 진짜.

*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기분이 별로긴 했다.
  냉동실 문을 열면 화아아 나오는 그 냉기 같은 것. 그런 게 내 안으로 스르륵 들어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고 나자 시력에 맞지 않는 콘텍트렌즈를 낀 것처럼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색하고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조금씩 나아졌다.
  신기한 건 여전히 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유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우린 각자의 자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마저 합체될까봐 살짝 두려웠는데 다행이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대화해본 게 얼마 만인지. 솔직히 좋았다. 외롭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그럼 이제⋯⋯ 뭐 할까요?
  ―음, 글쎄. 뭐 하지.
  막상 별다른 계획을 세워놓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살짝 실망했다. 하긴 내가 투명해지거나 날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유령이 내 안으로 들어온 거뿐이니 할 수 있는 게 별다를 게 없는 건 당연했다.
  ―특별한 걸 바라는 건 아냐. 네 또래가 하는 걸 나도 해보고 싶어.
  ―음, 그래요? 그럼⋯⋯ 피시방이나 갈까.
  수영을 그만둔 후로 게임은 그나마 나의 유일한 취미고 위안이었다.
  ―쳇, 그런 곳에선 내 말이 들리지 않을걸.
  그건 곤란했다. 모처럼 유령과 대화하는 이 신기한 경험을 게임 따위에 몰두하느라 날릴 순 없지.
  그렇지만 이 유령은⋯⋯ 정말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다.
  ―어디 누가 금괴 숨기는 거 못 봤어요? 살짝 훔쳐 와요. 우리.
  ―어린 게 벌써부터 그렇게 돈을 밝히면 못써.
  쳇. 애같이 굴 땐 언제고 꼰대 같은 소리 하시네.
  ―나 꼰대 맞거든.
  난 살짝 시무룩해졌다. 내 쓸쓸하고 빈곤한 일상을 유령에게 들키기 싫었다. 삶의 마지막 하루를 선물 받은 유령인데⋯⋯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왜⋯⋯ 조용하세요?
  ―감동했잖아. 나.
  ―쳇.
  ―진심이야. 누가 나를 위해 막 고민하는 모습 처음 보는 거 같아.
  대체 이 유령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훨씬 덜 산 나도 그 정돈 아닌데.
  나는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우리 집 거실에 친구들이 모여 함께 컵라면을 먹고 게임을 하며 놀던 것, 아빠 엄마랑 놀이공원 갔던 것, 좋아하게 된 가수의 콘서트를 가려고 돈을 모으던 일.
  이상하다. 불행은 아주 크게 느껴지는데 행복은 소소한 기억으로만 남다니. 그래서 행복보다 불행의 무게가 더 무거운가보다.
  ―그럼⋯⋯ 수영이나 하러 갈까요.
  나는 쭈뼛대며 의견을 냈다. 사실 안 간 지 꽤 되었고 지금도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게 식은땀이 날 정도로 두려웠지만 딱히 유령이 즐거워할 만한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 좋아. 나도 수영 배우고 싶었어. 결국 못 배우고 세상 떠나는 줄 알았는데 네 덕분에 헤엄치는 기분도 느껴보겠다.
  ―배우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다니는 체육문화센터에 할머니들도 수영하러 많이 오시던데.
  유령은 말을 돌렸다.
  ―그 체육센터, 어디 있는지 알아. 강변길 걸어서 가자.
  ―그러죠 뭐.
  ―아이, 좋아라. 어서 가자.
  ―잠깐만요. 집 가서 옷 갈아입고 수영복 챙길게요.
  ―너네 집 구경하는 거야? 좋다!
  음, 확실히 영혼이 십 대로 변한 게 맞는 것 같다.
  내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나는 창밖을 흘깃 보았다. 역시나 비둘기 녀석이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얄미운 놈. 하지만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덜한 것 같았다. 유령이 재잘대고 있어서 그런가. 유령이 든든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청바지에 티를 입고 수영복 가방을 어깨에 메니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파트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너 강변길로 접어들었다. 보통 버스를 타고 다녀서 강변길로 걸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우린 걸으면서 얘길 나누었다.
  ―참 좋다. 바람도 시원하고.
  ―그렇게 좋은데 왜 한번 안 가보셨어요? 강좌도 되게 많고 값도 싼데.
  ―그 꼬맹이,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데 자꾸.
  유령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을 폭 쉬었다.
  ―난 이곳에 온 지 몇 년 안 돼. 원래 살던 동네는 어릴 때부터 살아서 친구도 많았는데. 참 재미났었지. 이 동네 와선 친구를 못 사귀었어.
  ―그러면 왜 이사하셨어요? 아무리 따님이 있어도⋯⋯ 나이 들면 자식보다 벗이라던데.
  ―영감 죽고 나서 내가 술을 너무 마셨거든. 영감과 나는 사이가 좋았어. 동네 사람들이 딸에게 일러서 딸이 가까이 살자며 나를 불러올렸지. 그래도 자기 옆에라도 두면 나을 줄 알고.
  ―아깐 누가 나를 위하는 거 처음 본다고 하시고선.
  ―내가 그렇게 말했어? 오랜만이라고 했겠지.
  ―아니거든요.
  유령은 민망한 듯 대꾸했다.
  ―생각이란 게 원래 그런 거야. 너도 그렇잖아. 자꾸자꾸 한쪽으로만 쏠리고 고여선 뱅글뱅글 맴돌지.
  할머니 딸이 울면서 하던 말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유령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딸아인 나를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 하지만 난 걔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즐겁게 사는 척했지. 다 내 잘못이야.
  강변길이 이렇게 예뻤나. 어제 비가 와서 공기가 시원하고 맑았다. 신록이 싱그러웠다. 길가엔 풀꽃들이 소복소복했다.
  ―너 그거 아니? 다음 앱에 들어가면 꽃 마크 있지? 꽃 검색할 때 그거 누르고 사진 찍으면 꽃 이름 알려줘.
  ―할머니 같아요.
  ―할머니 맞거든?
  풀꽃들이 많았다. 다 이름 모를 꽃이었지만 작고 귀엽고 예뻤다. 꽃 이름이 궁금해져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유령이 알려주는 대로 꽃 검색 버튼을 누르니 카메라 표시가 떴다. 나는 꽃에 대고 버튼을 눌렀다. 꽃이 찍히니 조금 있다 이렇게 떴다.
  [60퍼센트의 확률로 꽃다지입니다.]
  ―치. 나도 꽃다지는 안다. 꽃다지는 노란색이잖아. 이건 흰 꽃이고. 그리구 60퍼센트가 뭐야.
  ―왜, 난 좋은데. 나이 먹을수록 단정 짓지 않는 말투가 좋더라.
  ―저는 싫어요. 그만큼 구분이 안 가는 거잖아요. 장미나 벚꽃이라면 90퍼센트 이상 나왔겠죠.
  ―알고 보면 우린 다 비슷해. 아주 조금 다를 뿐이야.
  ―엇, 노란색도 있어요! 정말로 꽃다지일까요?
  ―아니야. 잘 봐. 꽃자루가 다르잖니. 얘는 그 아이돌들이 하는 손 하트처럼 생겼고, 얘는 조그만 국자처럼 생겼잖니. 서로 다른 꽃이야.
  ―와, 진짜 그렇네요. 꽃자루가 다르게 생겼네요. 대단하세요!
  유령은 내 칭찬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유령은 감동하면 말문이 막히는 특징이 있었다.
  우린 마침내 그 꽃의 이름을 알아냈다.
  콩다닥냉이. 너무 귀여운 이름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풀꽃 하나에도 잘도 예쁜 이름을 붙여주었구나.
  ―맞아, 콩다닥냉이! 전에도 검색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어. 나이 드니 무얼 새로 기억하기가 어려워져. 이미 많은 것으로 꽉 차 있어서 그런 거 같아. 얘야, 용서해줘. 볼 때마다 예뻐서 이름을 알고 싶었던 거니.
  ―제가 뭘 용서를 해요.
  ―아니, 너 말고 얘. 이 꽃한테 한 말이야.
  유령은 잠시 물을 머금듯 이름을 머금는 것 같았다.
  ―이젠 기억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를 이루는 것이 거의 없어서 이렇게 가벼우니 이름 몇 개 정돈 품고 갈 수 있을 거 같다.
  ―⋯⋯ 김연이요. 외자예요. 제 이름이요.
  음. 그냥 이름 정돈 알려줘야 할 거 같았다.
  ―알아.
  ―어, 아시는구나.
  ―⋯⋯ 옆에 있는데, 있는 줄 몰라줘서 미안했다.
  이제 한참 걸어와서 꽃이 멀어졌는데 유령은 또 사과를 했다. 사과를 잘하는 유령이었다.
  ―햇빛이 제법 초여름 같구나. 나비는 하늘하늘 날고 꽃이 만개했다가 지고 실록은 조금 더 울울해졌구나. 참 예쁘다.
  ―떠나기 싫으시겠어요.
  ―그건 아니지만…… 좀 슬퍼졌어. 내가 봄같이 예뻤을 때 내가 얼마나 예쁜지 몰랐다는 게.
  어느새 체육센터에 다 왔다. 산책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구나. 다 온 게 조금 아쉬울 만큼.
  센터에 안 온 지 반년도 더 된 거 같은데 체육센터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앞 화단에 봄이라고 새 꽃모종을 옹기종기 심어놓은 게 변화라면 변활까.
  ―구린내 나요.
  ―꽃모종에 거름 줘서 그래. 만물은 모두 상하고 낡고 시들어가면서 냄새를 피워. 그래도 이 거름 냄새는 정답잖니. 새 꽃을 피우게 할 테니 말이다.
  때론 소녀 같은 말투로, 때론 할머니 같은 어조로 말하는 유령이었다. 그런 유령이 하는 말들이 싫지 않았다.
  센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왼쪽 통유리로 수영장 안이 훤히 보였다. 다행히 자유시간이어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한낮이라 사람이 아주 많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어릴 때부터 하던 수영을 그만두게 된 건 우울감이 깊어지면서 내가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걸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고 다녔지만, 약을 먹으면서 주의력과 집중력도 점점 떨어져서 머리를 잘 말리지 않아 툭하면 감기에 걸렸다. 겨울에. 그래서 못 가는 날이 늘어났고 결국 안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도 내 일상도 텅 비어갔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때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유령이니깐 뭐.
  ―그사이 살이 많이 쪄서 수영복이 끼네요.
  나는 이실직고했다. 1년도 채 안 된 시간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변했다.
  오랜만의 풀장 풍경에 마음이 긴장되었지만 심호흡을 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일렁이며 내 몸을 감쌌다. 물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나를 반겨주는 것만 같다. 가장 깊은 라인으로 들어가 자유형으로 물살을 갈랐다. 팔을 돌리고 물을 차며 빠르게 나아갔다. 익숙한, 하지만 잊혔던 쾌감이 차오른다.
  ―와우! 너 수영 진짜 잘한다! 아주 기분이 좋아. 나는 것 다음으로 신난다.
  ―하늘 날아보셨어요?
  ―그럼. 유령인데. 8층을 걸어 올라갔겠니?
  ―크크. 그렇네요.
  살이 많이 쪄서 슬펐던 마음이 발포성 알약처럼 포르르 녹았다. 내내 유령이 떠들어서 좀 시끄러웠지만 좋아해주어서 다행이었다.
  사실은 나도 좋았다. 내가 수영을 좋아했단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스스로 놀랍다.
  ―다시 수영하러 다닐까요.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릴 땐 좀 더 정성껏 말리려 애썼다. 탈의실 드라이어가 열이 너무 약해서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여러 번 잘 말리려고 노력했다.
  ―응. 그래. 이 좋은 걸 왜 안 하니. 수영도 그렇게 잘하면서.
  맞아. 내가 잘하는 것도 있었지. 찾아보면 더 많을지도 몰라.
  ―큰일 났어요. 귀가 먹먹해요.
  ―귀지가 불어서 고막이 막혔나보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빼야 할걸.
  ―내일 갈래요.
  난 부끄러웠다.
  ―안 돼, 오늘 가! 나 기구로 귀지 빼는 기분 느껴보고 싶어! 엄청 시원할 거 같아.
  진짜 이 유령⋯⋯ 어이없다.

*

  집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자니, 우리 아파트랑 마주한 행복아파트 진입로가 북적북적했다.
  ―아, 맞다. 오늘 야시장 열리는구나!
  ―야시장⋯⋯?
  심장이 갑자기 두근두근했다.
  ―제 심장 박동수 맘대로 올리지 마시라고요.
  ―미안.
  ―야시장 안 가보셨어요? 철마다 아파트 돌아가며 열리는데?
  ―⋯⋯ 그러게. 왜 그랬지.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나도 야시장은 지난해 이후로 안 갔는데.
  수영장도 갔으니, 야시장도 갈 수 있겠지.
  ―야시장 구경 가요.
  ―그런데⋯⋯ 돈 있니?
  ―아까 카드 들고나왔어요.
  ―넌⋯⋯ 착해. 나 때문에 이러는 거 나도 안다.
  ―할머니 덕분에 저도 야시장 구경하는 거니까 좋네요.
  길을 건너니 날씨가 좋아선지 야시장 인파가 엄청나다. 아파트 진입로가 넓고 길어서 행복아파트 야시장이 가장 규모가 큰 편이기도 했다.
  탕후루, 회오리감자, 찐만두, 갖가지 토핑을 올린 호두과자, 기름진 냄새를 풍기는 전과 구이들, 먹거리도 풍성하고 풍선 터뜨리기, 사격, 바이킹, 놀이도 다채롭다. 맛있는 냄새들, 반짝거리는 전구 불빛들, 웃으며 저마다 셀카를 찍는 사람들.
  가슴속에서 누가 웃음총을 쏜 것처럼 비눗방울 같은 웃음이 몽글몽글 솟구쳐 올랐다. 이 기분은 할머니 것인지 내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도 사진 찍자! 나도 셀카 찍어보고 싶어.
  ―우리라뇨. 그냥 저죠. 할머니는 나오지도 않을 텐데. 저 사진 찍는 거 싫어해요.
  ―기념사진 한 장만 찍자아.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잖아.
  ―하지만 찍히는 건 그냥 저 혼자라니까요.
  ―아닐걸. 나중에 봐봐. 아닌 거 알 거야.
  나는 못 이기고 지나가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줌마에게 쭈뼛거리며 부탁했다.
  “저⋯⋯ 저기, 사,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래요?”
  “오, 그래. 학생, 이쪽으로 서봐. 여기가 포인트가 더 예뻐. 그렇지. 좀 웃어봐. 아이, 예쁘네. 한 장 더 찍을게. 삼 세 번이니까 한 장 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 사진 찍어주는 데 왜 이렇게 진심일까. 왠지 웃긴데 고마웠다.
  나는 핸드폰 갤러리를 확인했다. 무슨 심령사진처럼 유령이 찍히기라도 했나 확대까지 해서 살폈지만 전혀 아니었다. 사진 속에선 나 혼자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유령이 한 말은 옳았다.
  나는 나중에 사진을 출력해 책상에 액자로 놓아두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반짝거리는 조명 아래, 나는 웃고 있었다. 아줌마가 웃으라고 해서 웃었을 뿐인데 그래도 나는 좀 좋아 보였다. 하루 종일 기뻐하며 조잘대는 유령을 담고 다녀서인지도 모른다.
  사진을 볼 때마다 그날 유령과 내가 한 일들, 본 것들, 먹고 마신 것들,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 모든 기억 속에 유령이 있었다. 그래서 유령을 떠올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함께 찍은 그 사진을 나는 자주, 오래 들여다보았다.

  산책로에서 아기보다 강아지를 더 많이 만나는 게 우리 동네다. 하지만 오늘만은 역대급으로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도 많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새빨간 탕후루나 회오리감자나 마약옥수수나 커다란 뽑기 따위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우리도 탕후루를, 회오리감자를, 호두과자를 사서 먹었다.
  ―탕후루는 그냥 설탕물 입혀 얼린 딸기라고 왜 말 안 해줬어.
  ―맛있잖아요.
  ―돈 아까워.
  ―제 돈이거든요?
  유령이 기분 좋아할 때마다 내 심장이 자꾸 간질거려서 웃음이 났다. 자꾸 웃다 보니 배가 아팠다.
  원뿔 모양의 인디언 천막 아래 손금쟁이가 손금을 봐주고 있었다.
  ―손금 보자!
  ―돈 아까운데.
  ―뭐라고 할지 너무 궁금해.
  머리도 수염도 새하얀 손금쟁이는 나를 척 보곤 내가 내미는 만 원을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두 사람분 내야지.”
  ―어멋, 놀래라!
  우린 놀라서 웃으며 도망쳤다.
  ―그 손금쟁이 용하네!
  귀를 찢는 비명이 들려서 보니 바이킹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높게 올라갔다. 맨 끝에 앉은 아이는 90도로 밑을 볼 정도였다. 나는 입을 헤벌리고 정신없이 구경했다.
  ―저렇게 무서운 걸 어떻게 타죠? 어후. 보기만 해도 무섭네.
  ―바이킹이 무섭다고? 하늘을 날아봐라.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어우, 됐어요.
  ―타보자. 내가 꼭 잡아줄게.
  참 나, 손도 없는 유령이 어떻게 나를 잡아준다는 건지. 나는 투덜대면서도 못 이기는 척 줄을 섰다. 왠지 유령이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있는 것이 유령이 내 마음에 깨소금처럼 뭔가를 잔뜩 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와, 진짜 너무 무서웠다. 바이킹이 무서웠다는 뜻이 아니다.
  유령이 너무나 가벼워서, 처음 내 안에 들어왔을 때보다도 더 가벼워져서 콩자루 같은 영혼의 방에서 자꾸만 날아가버리려 했던 것이다. 유령이 날아가버릴까 두려워 꼭 붙들고 있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끝이었다.
  ―우와, 너무 신난다! 이 신나는 걸 못 타볼 뻔했네! 너도 재밌지? 신나지?
  내리면서 다리가 좀 후들거렸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이 쓸쓸했다. 나는 텅 비어 있었다.
  ―비었으니까, 이제 채우면 돼.
  유령이 다독이듯 속삭였다.
  ―아기들 좀 봐라! 아이들 예쁜 것 좀 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은 처음 보는구나.
  키 차이가 도레미로 나는 여자아이 셋이 예쁜 대왕 풍선을 하나씩 꼭 쥐고 재잘거렸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꾸만 입꼬리가 귀에 걸리게 웃고 있었다.
  “풍선 줄 꼭 쥐어. 놓치면 날아가버려요.”
  “아기들이 너무 예뻐요. 몇 살이에요?”
  나도 모르게 한 질문에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15, 17, 19!”
  대체 자랑스러움의 포인트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막 손뼉을 쳐주고 싶긴 했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이 세상에 없었을 막내 꼬마는 풍선 하나를 쥐고 세상을 통째로 쥔 듯이 함박웃음을 물고 있었다.
  ―이런.
  ―왜요.
  ―가야 할 순간이 왔나봐. 기쁨이 헬륨가스처럼 나를 자꾸만 띄워 올려. 마음이 행복으로 충만해지니까 내가 공기보다 더 가벼워졌지 뭐야.

  쿵.

  심장이 떨어졌다.

  ―가지 마세요. 아직, 가지 마세요.
  ―나도 아쉽구나. 하지만 가야 해.
  ―잠시만요! 인사는, 인사는 해야지요.
  ―나를 위해 용기 내어줘서 고마워. 나를 기억해줘!
  ―당연하죠. 이,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는걸요.
  유령이 공기보다 가볍게 웃었다.
  ―이젠 아닐 거야. 셀 수 없는 날들을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채워나갈 거야. 슬플 땐 오늘처럼 용기를 내어라. 넌 잘할 거야. 내 말 믿어라, 얘야.
  ―믿어요.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너, 너무⋯⋯ 늦게 만나서⋯⋯ 아쉬워요. 안녕히 가세요.
  ―나도 그렇단다. 너를 조금 일찍 만났더라면, 발견했더라면.
  유령이 깃털처럼 가벼운 손길로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늘 아쉬운 거니. 오늘을 얻어서 괜찮다.
  ―저도요. 저도요.
  ―그럼⋯⋯ 이제 놔주렴.
  ―네?
  ―네가 내 영혼을 꼭 쥐고 있단다. 그걸 놓아라.

  나는 울면서, 할머니의 영혼을 놓았다.
  바람이 휙 불자 은방울처럼 맑은 웃음을 남기고 할머니의 영혼이 포로롱 날아갔다.

  유령은 내 영혼을 얼렸던 두려움이란 괴물을 데려간단 약속을 지키진 못했다. 그건 애초에 지킬 수 있는 약속이 아니었으니까 괜찮다.
  나는 눈물을 닦고, 이별이란 선물을 안고, 내일을 향한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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