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가치의 부재는 서사구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오백 년째 열다섯』(김혜정, 위즈덤하우스, 2022~ )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대통령 선거만 직선제로 바꾸면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와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한 1980년대가 있었다.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으며 이 제도를 쟁취했으나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양김 세력의 분열로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대통령 후보 단일화만 이루어지면, 노동운동을 하던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면, 수구 세력과 지역주의의 아이콘인 대통령을 탄핵하면, 촛불정부가 들어서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586세대를 대거 국회에 보내면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되리라 믿었던 때가 있다.
    이 믿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정의, 평등, 인권, 연대 같은 공동체 가치가 존중받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꿈을 이루어줄 거라 생각했던 세력의 민낯만 확인하며 정치적 허무주의만 깊어졌다.
    이미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IMF 사태, 2000년대 후반의 금융 위기를 거치며 공적 가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공적 가치는 코로나19 시기 자산 대폭등 사태와 촛불정부의 퇴조를 통해 결정타를 맞았다. 어느 시대든 물질주의는 횡행했지만 지금처럼 강남아파트, 주식, 명품 등 물질적 가치를 자랑스럽게 추구하거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시대 변화와 함께 일반문학의 공동체적 가치와 사회적 의제 설정의 힘은 약화되어갔지만 아동청소년문학은 그렇지 않았다. 아동청소년문학의 공적 가치와 담론 구성의 힘은 일반문학의 힘이 빠지기 시작한 90년대 이후부터 힘을 받기 시작했다. 공적 가치를 가진 아동청소년 작품일수록 사회적 자원이 모여들었다. 단순 오락물보다는 공적 가치가 있는 작품일수록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되었고 판매량 또한 늘어났다.1 현실 의식이 부족한 이른바 ‘짝짜꿍 동요’나 명랑동화 유의 작품은 서가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본격 문학’을 출간하던 출판사가 아동청소년문학 시장에 뛰어들거나 투자를 늘린 것은 반드시 상업적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때 대중가요는 유치하다며 팝송만 듣는 세대가 있었다. 이제 그런 문화적 사대주의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우리 아동청소년문학도 마찬가지이다. 동화, 청소년소설의 베스트셀러는 이미 국내 작가의 작품이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번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그림책 분야에서 이수지나 백희나는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했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교육과정에 도입된 ‘한 학기 1권 읽기’는 비대면 교육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던 코로나19 팬데믹을 만나 상업적 성공의 정점을 찍었다.2
    여러 위기 속에서도 아동청소년문학 장르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까닭은 바로 아동청소년문학이 주변부 장르에 머물러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변부에 있었기에 더 창의적일 수 있었고, 기존 담론의 매너리즘과 피로감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주변부 장르는 적어도 ‘시장’에 있어서는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다.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오래전 출판동네에 떠돌던 ‘베스트셀러를 내는 출판사는 망한다’라는 속설처럼 아동청소년문학의 상업적 성공이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다. 공적 가치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는 현 상황 때문에라도 더욱 그러하다. 아동청소년문학에서 공적 가치의 붕괴는 단순히 주제의 문제를 넘어서 서사구조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K판타지

    ‘의미보다는 재미를 추구한다’라는 요지의 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의미를 추구하면 재미를 잃게 되고, 재미를 추구하면 의미를 얻기 힘든 걸까? 흔히 ‘대중문학’은 재미를 추구하고 ‘순문학’은 의미나 형식의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순문학’은 ‘대중문학’과 달리 훈련된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고도 한다. 물론 대중문학과 순문학을 무 자르듯 자를 순 없다. 대중문학적 특징이 대거 반영되는 가운데 대중문학과 순문학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기도 하다.
    대중문학은 대체로 감정 이입하기 쉬운 인물,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쉬운 정형화된 플롯, 묘사보다 서사, 내면보다 사건, 빠른 전개를 통한 서스펜스의 유지. 서스펜스의 해소를 통해 신경의 이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결말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대체로 주인공은 캐릭터화되어 있고 특별하면서도 전형적이다. 특별하지 않으면 독자의 주의를 끄는 인물이 될 수 없다. 전형성은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서사를 경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의 역할, 그리고 동일시를 통해 작품에 몰입하게 한다. 작가는 이처럼 인물의 비범성과 보편성, 이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최근 청소년 독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오백 년째 열다섯』1~2(김혜정, 위즈덤하우스, 2022, 2023)에는 이런 이중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고조선 개국신화에서 사람이 될 것을 권유받은 동물에 곰과 호랑이뿐만 아니라 여우도 있었음을 전제한다. 웅녀는 사람이 될 것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한 여우에게 단군을 지켜달라 부탁한다. 단군이 인간과 동물이 어울려 사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만의 세상을 그리는 걸 예지했기 때문이다. 웅녀는 여우에게 인간과 동물의 중간자가 되어 양쪽 모두를 지켜주길 원했다. 환웅은 이 여우에게 신령한 구슬을 선물하고 구슬을 삼킨 여우는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된다. 이 최초의 구슬을 받아 사람으로 변한 이가 바로 본야호인 ‘령’이며, 령의 구슬을 통해 사람이 된 30여 마리 야호족의 우두머리가 된다.
    신묘한 능력을 갖춘 구슬은 5백 년마다 두 배가 되며 구슬을 품은 이는 영생을 갖거나 죽음 직전에 이른 자에게 영생을 줄 수 있게 된다. 이를 시기해 야호족을 습격해 구슬을 빼앗은 이들이 바로 호랑족이며 이들의 우두머리가 가을이의 친할머니 ‘범녀’이다.3
    주인공 ‘가을이’는 인간과 호랑족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범녀는 이종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종족을 위험에 처하게 할 거라는 웅녀의 예언 때문에 자기 손녀인 가을이를 죽이려 했다. 가을이는 호랑족의 습격으로 죽기 직전 ‘령’의 도움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평생을 열다섯이라는 나이로만 살아야 한다. 가을이는 그야말로 특별하고도 비범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가을이는 열다섯 살이라는 시기의 전형성 또한 갖고 있다. 가을이는 5백 년을 살았지만 외면도 내면도 열다섯이다. 가을이는 어느 중학교 교실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친구를 좋아하고 남자친구 때문에 가슴 설레는 평범한 아이이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결코 부박하지 않은 연애 감정도 섬세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대중문학의 서사 논리를 받아들여 의미보다 사건 해결, 내적 갈등보다 스토리의 진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소설은 수천 수백 년을 살아온 자의 내적 고뇌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변치 않는 나이와 영생을 가졌기에 감당해야 하는 사연이나 아픔이 간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작품의 주요 테마는 아니다. 이들은 현실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의 욕망과 감각을 가진 자들이다.
    청소년 독자들이 이 소설에 환호하는 건 바로 이러한 설정과 인물 때문인 듯싶다. 물론 비범성과 보편성을 가진 인물만으로 독자를 사로잡기는 힘들다.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하는 빠른 장면 전환, 단순한 세트를 가진 연극무대처럼 배경을 단순하게 하여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내러티브narrative 전략 또한 가독성을 높여준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개성은 단군 신화 외에도 김현감호설화와 같은 전설, 호랑이 형님, 여우 누이 같은 민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설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형 판타지’ 창작이라는 담론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이재복의 평론집 『판타지 동화 세계』와 김서정의 『멋진 판타지』, 게르만족 신화를 기반으로 한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열풍은 판타지와 신화에 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많은 평론가와 연구자들이 츠베탄 토도로프, 로즈메리 잭슨, J.R.R 톨킨, 캐스린 흄의 판타지론을 들고 와 논의를 풍성하게 했다. 서정오의 ‘옛이야기 보따리’ 시리즈(보리, 1996~1999)와 『옛이야기 들려주기』(보리, 2000), 신동흔이 기획한 ‘한겨레 옛이야기’ 시리즈(한겨레아이들, 1999~2007)와 신동흔의 『살아있는 우리 신화』(한겨레출판, 2004) 같은 책은 우리 옛이야기와 서사무가, 신화의 힘을 재발견하게 했다. 작가들 사이에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에 관한 공부가 뜨겁게 일었다.
    당시 ‘한국형 판타지’ 논의의 중심에 선 이는 김진경이었다. 그는 『고양이 학교』(문학동네, 2001~2016)라는 판타지 외에도 『창비어린이』, 『어린이와문학』, 『우리어린이문학』 같은 잡지에 실은 평론이나 대담, ‘한국형 판타지 창작을 위한 신화학교’와 같은 대중 강좌 등을 통해 한국형 판타지 창작의 의미와 방법을 설파했다.
    김진경은 근대적 국경선 개념을 넘어 국가 탄생 이전 시기에 형성된 동북아 소수민족 신화에 주목했다. 주제의 차원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대칭적 세계관의 복원, 창작 방법으로는 ‘고립-타계他界 여행-현실 문제 해결’ 등으로 압축되는 샤먼의 입사initiation 과정을 판타지 구조로 활용했다.4 신화에서 소재만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탄생한 배경과 의미 자체를 이해하여 현재성을 되살리는 가운데 신화적 모티프의 활용이 주제와 형식 양쪽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작품과 평론을 통해 드러냈다. 또한 역사적 맥락을 소거하여 신화적 소재나 캐릭터만 따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했다.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부흥기를 맞아 그 어떤 세대보다 단단한 작가 의식을 갑옷처럼 두르고 진입한 신인 작가들과 새로운 창작 방법에 목마른 이들이 우리 이야기 전통의 창조적 수용과 ‘한국형 판타지’라는 부름에 응답했다. 옛이야기적 상상력과 어법은 우리 동화에 스며들어 김우경의 『수일이와 수일이』(우리교육, 2001), 천효정의 『삼백이의 칠일장』(문학동네, 2014), 김리리의 ‘떡집 시리즈’(비룡소, 2010~)와 같은 성과를 남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양이 학교』에 맞설 만한 거대한 스케일의 ‘한국적 판타지’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에서 탄생한 매력적인 K판타지’를 자임하며 현재 2권까지 출간된 『오백 년째 열다섯』의 등장은 반갑다.
    최근 들어 다양한 시리즈물이 약진하고 있다. 인물은 그대로인 채 사건만 바뀌며 1권 내 완결되는 에피소드 독립형 시리즈와 달리 시리즈의 종결점을 향해 나아가는 선형적 시리즈물은 긴 서사를 단단하게 받쳐줄 뼈대와 동력이 필요하다. 신화는 특유의 구체성과 유연함 덕분에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이런 역할을 수행해왔다. 한국형 판타지가 재소환된 까닭은 ‘우리 것’에 대한 복고적 취향이나 이른바 ‘국뽕’ 때문이 아니라 시리즈물이라는 장르의 요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르의 요구로 한국형 판타지가 부활한 것이라면 과거와 달리 이론보다 창작 쪽에서 활발한 성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5
    

3. 가치의 부재가 초래한 서사구조의 흔들림

    그런데 이 작품은 독자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흐름이나 개연성 측면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첫째, 인물의 개연성이 부족해 보일 때가 많다. 가을이를 죽이려 한 범녀와 가을이를 싫어했던 ‘수수’의 극과 극을 오가는 변화 과정, 그리고 가을이의 반응에서 인물의 일관성이나 개연성이 떨어진다. 소설에서 인물의 변화는 변검變臉처럼 그려져서는 곤란하다. 변화 과정이 충분히 그려지거나, 사후적으로라도 납득할 수 있는 복선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힘이 약한 여자인 가을이 엄마가 사람의 모습으로 있긴 했어도 호랑이 동물신인 ‘김선’을 억지로 물에서 끌어 올려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김선이 5백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 가을이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도, 김현감호설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김현’도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구석들이 있다. 웅녀는 왜 자기 친척인 곰족을 두고 여우에게 단군을 부탁하는지, 모든 야호족과 호랑족을 제압할 만큼의 힘을 가진 가을이의 능력은 왜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지, 가을이가 유정이 정체를 알기 위해 목을 졸랐을 때 호랑족인 유정이가 왜 고양이로 변신하는지, 의아스러운 장면이 너무 많았다.
    둘째, 신화를 너무 자의적으로 활용한다. 호랑이들이 구슬을 갖고 싶어 “환웅을 협박”한다. 환웅은 천신의 아들이자 우사 같은 기후신을 거느린 신이다. 소설적 허용을 발휘해 동물이 신을 협박할 수도 있다 치자. 신화란 신들의 책략에 맞선 인간의 승리담이라는 말도 있으니, 동물과 인간이 동등한 지위를 갖고 살던 시기에 말로는 무엇이든 못할까. 하지만 야호족의 수수가 삼신할머니와 자청비를 야호로 만들었고, 이들이 야호들의 책략을 돕기 위해 아이를 점지해주거나 신통력을 가진 ‘위구슬’을 만든다는 설정은 아무리 작가의 상상은 자유라고 해도 지나쳤다. 삼신할머니나 ‘자 여사’로 등장하는 자청비는 우리 신화에서 그 급이 매우 높은 대모신代母神이며 농경의 신이다. 야호 같은 동물신들이 자신과 같은 존재로 복제시킬 수 있는 급이 아니다.
    작가는 “캐릭터물에서는 캐릭터 자체가 곧 서사입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계속 변주될 수 있고, 시리즈물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내가 쓰는 ‘캐릭터 아동문학’」(『창비어린이』, 2019 여름호, 43쪽.)에서 밝힌 적이 있다. 가을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하여 시리즈 서사의 동력으로 삼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신화적 존재를 맥락에서 떼어내고 왜곡시켜 마스코트 같은 이미지 캐릭터로 만든 것은 동의할 수 없다. 마스코트화된 신화적 존재는 어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도, 어떤 의미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저 재미를 위해 종이컵처럼 소비될 뿐이다. 작가 또한 이런 신화적 인물이 일회용으로 소비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범녀는 “이종 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이는 단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만약 또다시 그런 아이가 탄생하면 종족이 위험에 처할 거라고 했다”(1권, 113쪽.)라고 한 웅녀의 예언 때문에 자기 손녀인 가을이를 죽이려 했다. 범녀가 이 말을 4천 년 정도 기억하고 가을이를 죽이려 했을 정도라면 인간들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 예언이 전해지고 있었을 텐데, 가을이를 추적하는 인간은 왜 없었던 것일까? 인간은 이 ‘종족’에 해당하지 않는 걸까?
    이종 간 결합이 종족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웅녀의 예언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뿌리는 깊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다른 인종과의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를 ‘튀기’라고 비하하기도 했고, 지구촌 곳곳에서 ‘인종청소’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은 인종을 넘어 장애인,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이어진다. 제도와 교육의 힘으로 이를 극복해왔지만 갈 길이 멀다. 여전히 우리는 모든 이종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고 있다. 이종 간의 결합으로 탄생한 존재는 위험하다는 말은, 아무리 소설의 갈등을 촉발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해도 한민족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웅녀의 예언치고는 매우 위험한 말이다.
    셋째, 인물이 추구하는 가치의 부재이다. 도대체 수천 년을 살아온 이 신이한 존재들인 야호족과 호랑족이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는 무엇인가? 웅녀는 령에게 인간 쪽으로 대칭축을 옮기려는 단군에게 맞서 인간과 자연의 중개자가 되어달라 했지만, 막상 야호족과 령이 중개자로서 무엇을 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호랑족인 김선은 “동물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구슬을 차지하려고 한 거야. 호랑이 많아져야 적극적으로 인간으로부터 동물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2권, 91쪽.)라고 했지만 호랑족도 한 게 없다. 두 부족 모두 5백 년마다 구슬 전쟁을 벌이며 그저 각자의 생존만을 꾀했을 뿐이다.
    이들은 작품 속에서 그저 수천 년 동안 구슬 빼앗기만 하며 사적인 인연을 가진 사람들의 목숨만 연장해주었을 뿐이다. 이러라고 환웅이 구슬을 준 건 아닐 것이다. 왜 이들은 부여받은 삶의 가치를 잃은 채 상대 부족에 맞서 생존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그려졌을까? 가치의 부재는 서사구조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절대 작가에게 가치의 부재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작품은 작가 개인의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반영물이다. 소설은 현실의 증상이며,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품에는 사회적 상황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가치 부재 현상이, 들어가는 말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사회의 공적 가치 붕괴 현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샤먼은 현실계와 환상계, 상징계와 실재계, 인간과 자연, 이승과 저승을 중개하는 자이다. 샤먼은 개인이나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이나 증상의 원인을 알기 위해 목숨을 건 타계 여행을 한다. 원인을 알면 문제가 해결된다. 이 타계 여행을 소설 구성의 형식을 빌려 언어로 상징화한 게 바로 판타지이다.
    야호족과 호랑족은 자연과 인간의 대칭적 세계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안고 환상계 여행을 하는 동물신이자 샤먼들이다. 그런데 야호족과 호랑족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하쿠가 자기 이름을 잊은 것처럼, 자신의 과제, 추구해야 할 가치를 잊은 채 길을 잃었다.
    가을이는 단군 이래 최초이자 마지막인 이류교혼異類交婚으로 태어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이류교혼설화는 농경이 시작되기 전 수렵채집 단계에서 자연과 인간을 동등한 관계에서 보던 시기에 탄생한 설화이며, 단순히 이종의 교류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을이는 수천 년 동안 야호족과 호랑족이 잊고 있었던 자연과 인간의 대칭적 세계관 회복이라는 가치의 수행자로 살아갈 운명을 가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을이는 야호족과 호랑족의 원한 관계만 풀었을 뿐 2권에 들어서서도 그런 운명의 각성은 보이지 않는다. 가을이 또한 이름을 잊고 여관에서 센으로 살아가는 치히로처럼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현실계의 어떤 질병이 이들의 기억과 과제, 즉 추구해야 할 가치를 잃게 한 것일까?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은 우리 스스로 그 질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자신이 아픈지도 모른다. 아픈지도 모르기 때문에 질병의 이름을 찾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현실계의 질병이 가치의 부재라는 증상으로 소설에 드러났다. 그들이 서로를 물고 뜯으며 생존에만 골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혐오와 생존 외에 다른 것을 신경 쓰기 힘들 만큼 벼랑에 몰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병이 있는데 왜 아프지 않을까? 그건 바로 아동청소년 책이 과거보다 잘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적 성공은 모르핀과도 같다. 시장의 중심에 접근하는 게 거꾸로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근본적 치료를 외면하고 모르핀만 찾으면 환자는 결국 죽기 마련이다.
    가치의 부재는 서사구조에도 영향을 끼쳐 인물의 일관성을 흩뜨린다. 인물이 일관되게 추구할 목표점이 없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지나친 자의적 해석이나 신화적 인물의 마스코트 같은 이미지 캐릭터화 역시 가치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품과 인물이 추구하는 가치가 없다 보니 굳이 신화의 의미를 현실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없다. 의미는 해석 없이 산출되지 않는다. 이처럼 가치의 부재는 의미의 부재를 낳고, 서사구조를 무너뜨린다. 가치와 의미가 곧 서사구조 자체이다.6
    그래서 ‘의미보다는 재미를 추구한다’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재미있는 동화나 소설은 서사구조가 단단하다. 서사구조가 곧 의미이기에 일부러 의미를 담으려 하지 않아도 구조만 제대로 세우면 저절로 의미가 발생한다. 이처럼 의미보다 재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의미는 절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이중으로 의미를 덧붙이지 않고 서사구조를 단단히 하는 데 힘을 쓴다는 말을 표현한 것이지 의미와 재미가 길항관계라는 뜻은 아니다. 잊지 말자. 현실을 정확히 읽고, 정확히 쓰는 것만으로도 가치와 의미는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신화의 맥락을 현실에 비추어 정확히 재해석하는 것만으로 가치와 의미는 발생한다.
    

4. 나가며

    다시 한번 확인할 게 있다. 나는 『오백 년째 열다섯』을 잘못된 한국형 판타지라는 비판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게 아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이 어떤 증상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상업적 성공이라는 모르핀이 떨어지기 전에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또한 『오백 년째 열다섯』과 같은 시도는 격려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지도 없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두운 밤, 북극성 하나만 보고 길을 개척하다 보면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별이 저리 반짝이고 있는데 지도가 없다고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건 용기 없는 행동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진창에 빠지거나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나서야 한다.
    또한 이 소설은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 당신의 걱정은 그저 섣부른 재단이거나 기우였을 뿐이라며, 가을이를 선두로 야호들과 호랑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당당히 K판타지의 깃발을 펄럭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립서비스 삼아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2권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을이가 우여곡절 끝에 “나중이라는 건 결국 지금이 모여 만들어진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신우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그 잠재된 힘을 본다. 영화 〈매트릭스〉 3부작에서 여섯 번째 네오가 과거의 네오들과 달리 트리니티로 표상되는 사랑을 선택하여 시온을 구하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이 말이 직관적으로 와닿으리라.
    무엇보다 이 작품은 청소년 독자들이 지지해주고 있다. 독자에게 어떤 요구를 하거나 짐을 지워주지 않는다. 우리가 이식된 유랑민이 아니라 수천 년간 누적된 이야기 지층에 단단히 뿌리 내린 존재들이라는 걸 청소년 독자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3권부터 또 어떻게 새롭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 신우와의 풋풋한 첫사랑과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이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가치와 서사 질서를 회복하고 다양한 의미를 생산해내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한다.
    
    

〈주석〉

  1. 그 외 한국 자본주의 고도화에 따른 국민소득의 증대, 복합적 사고능력을 요구하는 수능 시험, 학생부종합전형, 논술 등 대입제도의 변화와 문화자본 축적을 통한 신분 상승이라는 중산층의 욕망이 개입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2. ‘한 학기 1권 읽기’ 외에도 아침 책 산책 프로젝트, 독서 기반 프로젝트 수업처럼 교육부나 교육청의 독서 관련 사업, 서울시교육청의 ‘꿈잼교실’이나 ‘꿈실네트워크’처럼 교사의 자발성을 장려하는 교육청 공모 사업에 호응하여 업무가 늘어남에도 독서 관련 계획을 세워 책을 사고 독서 활동을 장려한 현장 교사들의 노력이 아동청소년 책 성장에 크게 이바지한 바도 잊지 말아야 한다.
  3. 범족 최초의 우두머리는 도호이나 김현감호설화를 설명할 때 잠시 등장했다 사라진다.
  4. 유영진, 「고양이 학교」,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 창비, 2023, 297쪽.
  5.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한국형 판타지는 김진경 개인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진경이 ‘한국형 판타지’라는 호명을 하기 전부터 모국어를 기반으로 한 한민족 고유의 상징마당은 존재했다. 이 상징마당을 바탕으로 작가와 독자들은 창작과 작품 해석을 해왔다. 김진경 이전부터, 그리고 이후로도 한국형 판타지에 대한 탐색은 독자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국형 판타지’라는 말은 모범이 되는 기법이나 교본이 아니다. 서구 신화보다 더 친근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고유의 상징마당과 우리 문화의 독자성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서구 판타지를 흉내 내지 않겠다는 작품의 자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따라서 『오백 년째 열다섯』이 K판타지를 표방하고 있다고 해서 2000년대 초반의 한국형 판타지 연장선에 있다, 없다를 논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6. 늑대인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한국형 판타지의 직계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현실과 환상계가 분리되지 않고 혼입되어 있는 허교범의 『이리의 형제』(창비, 2022~) 시리즈에서도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인간의 에너지를 빨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는 늑대인간 노단과 늑대 부족의 삶의 가치는 『오백 년째 열다섯』처럼 그저 지배와 생존일 뿐이다. 이 시리즈 또한 현재 진행형이라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4권에 들어 서사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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