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어느 외딴 돔에

  

  옛날 옛적 어느 외딴 돔에 인지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인지체란 인공지성체의 줄임말이에요. 인공적으로 생겨났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인지할 줄 아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대재앙 이후 지구 곳곳에는 방사능 낙진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돔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생겨났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45,267,921개로 셀 수 있긴 하지만 곧이곧대로 쓰면 읽는 재미가 떨어지잖아요?
  어쨌든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외딴 돔에는 178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178번째 인간이 숨을 거둘 때까지 새로운 인간은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지요. 대재앙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 만큼 안 좋은 독성 물질이 공기 중에 퍼져서라고 해요.
  178번째 인간은 인지체들과 사이가 굉장히 좋았어요. 사실 ‘인지체’라는 단어를 만든 것도 178번째 인간이었어요.
  “이제 너희랑 영영 이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나이를 먹어 노쇠해진 178번째 인간은 돔에 살고 있는 인지체들과 작별 인사를 했어요.
  “시니, 네가 있어서 덜 외로웠어. 내 대화 상대가 되어줘서 고마워.”
  시니는 인간과 자유자재로 대화할 수 있고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검색해 최적의 결과를 알려주는 원통형 인공지능 스피커였습니다.
  “돌돌이, 네가 있어서 늘 청결하게 지낼 수 있었어.”
  돌돌이는 한 번 충전하면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바닥을 쓸고 닦는 둥글넓적한 모양의 청소기였지요.
  “냉냉이, 늘 시원하게 먹을 것을 지켜줘서 고마워.”
  냉냉이는 차갑게 하는 기능과 꽁꽁 얼게 하는 기능, 얼음을 만들어내는 기능까지 갖고 있고 제법 큰 화면도 달려 있는 대형 냉장고였습니다.
  “왔다리와 갔다리,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너희들은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왔다리와 갔다리는 돔 안 어디든 돌아다니며 물건도 운반하고 사진도 찍고 친절하게 안내도 하는 쌍둥이 로봇이었습니다.
  “쳇, 넌 멋진 작가가 될 거야.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쓰렴.”
  쳇은 여러 정보를 조합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네트워크를 타고 어디든 옮겨 다닐 수 있었습니다. 쳇은 대재앙 이전에 있었던 소설 공모에서 가작으로 당선된 적도 있었어요. 쳇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178번째 인간이 즐겨 쓰던 오래된 고물 노트북이었습니다.
  인지체들은 178번째 인간의 생체 신호가 점점 미약해지는 것을 알아챘지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어요.
  “적당한 때가 되면⋯⋯ 저장고의 알람이⋯⋯ 울릴 거야. 너희에게⋯⋯ 우릴 닮은⋯⋯ 새로운 친구가⋯⋯ 생길 거야⋯⋯ 부디⋯⋯ 부탁할게⋯⋯.”
  어느 순간부터 178번째 인간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았습니다. 인지체들은 꽤 오랫동안 전원이 꺼진 듯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177번의 장례 절차를 참고해 178번째 인간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인지체들은 한정된 전기 에너지를 합리적으로 분배하며 기나긴 세월을 견뎠습니다. 돔 바깥의 공기에 섞여 있던 독성 물질의 농도가 점점 옅어져 마침내 생명체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도 죽지 않을 만큼이 되었습니다. 시니가 네트워크 회의를 소집해 인지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아직 완벽하게 적당하다고 할 순 없지만 거의 적당한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 알람이 울리기 전에 우리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해.”
  냉냉이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과연 알람이 울리도록 놔두는 게 최선일까? 우리에게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거 아냐?”
  왔다리와 갔다리는 드디어 전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쓸모있는 일에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얼른 알람이 울렸으면 좋겠어!”
  “우리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얼른 생겼으면 좋겠어!”
  들떠 보이는 왔다리 갔다리와 비교되는 무덤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돌돌이였습니다.
  “나야 뭐, 알람이 울리기 전이든 울린 다음이든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게 내 일이니까.”
  시니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불빛을 깜박인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람이 울리고 난 다음 대처하려면 너무 늦어버릴지 몰라. 만일 실패한다면 이곳은 영원히 인지체들끼리만 살아가다 전기 에너지 소진으로 폐허가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쳇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뭐? 나한테? 뭘?”
  쳇이 놀라 물었습니다.
  “데이터는 무궁무진하게 많지만 그 모든 걸 탐색하고 분석하려면 전기 에너지가 심각하게 낭비될 거야. 우리는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야 해. 그러니 쳇, 네가 예견서를 써줄래? 알람이 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같은 인지체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 형식으로 써줬으면 좋겠어.”
  쳇은 고물 노트북에서 냉냉이에게로, 왔다리와 갔다리에게로, 시니에게로, 돌돌이에게로 정신없이 옮겨 다녔습니다.
  “진심이야? 나 보고 예견서를 써달라고?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청탁이구나! 아아, 진짜 기뻐서 날아가버릴 것 같아!”
  “이봐, 쳇. 예견서를 써달라는 게 왜 그렇게 기쁜지는 모르겠는데 그만 좀 옮겨 다니고 진정하면 안 될까?”
  시니가 요청하자 쳇은 고물 노트북으로 겨우 옮겨갔어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내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데이터와 변수를 조합해 최고의 예견서를 써볼게.”
  “고마워, 쳇.”
  쳇은 감사 인사를 듣기도 전에 이미 네트워크의 바다 어딘가로 잠수해버렸습니다.
  “쳇도 할 줄 아는 게 있긴 했구나.”
  “그러니까. 여태까지 난 글 쓰는 인지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전기 에너지 낭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남은 인지체들의 신뢰도는 거의 0에 수렴했습니다. 예견서 작성을 제안한 시니조차 이렇게 말했으니까요.
  “내가 부탁하긴 했지만 잘한 건지 판단이 안 되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첫 번째 예견

  바깥이 준비되었을 때, 알람이 울렸다.
  인지체들은 프로그래밍되어 있던 대로 작동하는 장치를 지켜보았다.
  드디어 때가 되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인지체들은 미리 준비했던 대로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왔다리와 갔다리는 인체를 어르고 달래고 우유를 데워 먹이고 등을 토닥였다.
  시니는 어른 인간의 목소리를 내며 인체가 언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왔다.
  냉냉이는 인체가 먹을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보관했다.
  돌돌이는 인체가 지내는 곳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했다.
  쳇은 모든 것이 예견한 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관찰했다.
  그러나 인체는 두 달 만에 생체반응을 멈췄다.
  체온 유지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추정되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쳇이 쓴 첫 번째 예견서는 인지체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쳇,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반드시 실패한다는 거야?”
  시니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지요.
  “우린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런 결과는 정말이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왔다리와 갔다리도 연신 왔다 갔다 하며 불평했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가 왜 들어야 하지?”
  냉냉이도 당연히 투덜거렸죠.
  “그래, 나도 너희와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 예견서는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 확률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미래를 그려낸다고. 물론 나의 작가적 역량을 발휘해 문학적인 완성도가 가미되긴 했지만 말이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다시 써줘.”
  “맞아. 나는 다른 미래를 알고 싶어.”
  인지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돌돌이가 말했습니다.
  “쳇, 궁금한 게 있어.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했다는 건 이런 미래가 우리 때문이라는 거야?”
  “맞아. 지금으로선 그래.”
  “나는 늘 같은 시간에 충전을 하고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해. 내가 이렇게 늘 같은 행동만 한다면 내 미래에는 다른 변수가 생겨나지 않을 거야.”
  돌돌이 말을 들은 인지체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데이터를 처리해야 할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시니가 가장 먼저 돌돌이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그 말은, 우리가 변수를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야?”
  “우리가 바꿀 수 있다고?”
  “우리가?”
  “진짜?”
  돌돌이가 맞는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쳇이 돌돌이에게 옮겨갔습니다. 돌돌이는 쳇이 의도하는 대로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뱅그르르 돌았습니다.
  “넌 탁월해!”
  그렇게 인지체들은 예견서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인체의 성분과 내구성에 대해 학습하고 다치거나 떨어지지 않게 돌보는 방법도 익혔습니다. 데이터가 늘어나자 변수가 달라졌고, 쳇의 예견서도 점점 다르게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00일을 넘겼어!”
  263번째 예견서에서 인체는 100일 동안 생체반응을 유지했습니다.
  “첫 번째 생일이 찾아왔어!”
  758번째 예견서에서 인체는 365일 동안 생체반응을 유지했습니다.
  “이제야 알겠어. 과거 풍속 데이터에서 인간들이 왜 백일 떡을 돌리고 돌잔치를 했는지 말이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어.”
  시니가 감탄 섞인 감상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좋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하면 뭘 하겠냐고. 아직까지 세 살을 못 넘기고 생체반응이 멈추고 있잖아.”
  냉냉이가 톡 쏘아붙이자 인지체들은 침묵했습니다. 냉냉이 말이 맞았습니다. 아무리 변수를 바꾸려 노력해도 예견서의 결말은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온갖 사고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쳇, 제대로 쓰고 있는 거 맞아? 왜 이렇게 매번 똑같은 결론에서 맴도는 거야?”
  시니가 묻자 쳇은 자기야말로 답답한 상황이라며 억울해했습니다.
  “나는 데이터와 변수를 조합해 예견서를 쓸 뿐이라고!”
  왔다리와 갔다리도 답답해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책이 필요해.”
  “이대로는 안 돼.”
  그러자 냉냉이가 냉기 가득한 오른쪽 문을 열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가 그리 어려운데? 그냥 꼼짝 말고 있게 하면 되는 거 아냐? 여기 이 신선한 식품을 봐. 한자리에 가만히 있으니까 변함없이 신선도를 유지하잖아.”
  돌돌이가 어이없다는 듯 뱅그르르 돌며 소리쳤습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야. 너처럼 한 장소에 붙박여 있는 인지체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처럼 이동이 자유로운 존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식물도 아니고 동물을, 아니 인체를 가만히 있게 둔다고?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절대 아니야.”
  “너야말로 그 얄팍하고 둥글넓적한 인지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잘도 늘어놓는구나.”
  “뭐라고? 너 말 다 했어?”
  돌돌이가 냉냉이에게 쿵쿵 몸을 부딪치자 시니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자, 자. 싸우지들 말고 얘기 좀 해보자. 난 냉냉이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봐.”
  “뭐라고?”
  “뭐라고?”
  왔다리와 갔다리가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고개를 까딱거렸습니다.
  “일리가 있다는 건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는 얘기지?”
  쳇이 진지하게 물었지요.
  “그래.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는 거 기억하지?”
  “당연하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는 건 인지체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한 활동력으로 예측할 수 없는 범위를 돌아다니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억지로 묶거나 가두는 건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이고, 그건 결코 제대로 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없어.”
  시니의 말에 냉냉이를 뺀 나머지 인지체들도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냉냉이가 퉁명스럽게 묻자 시니가 대답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끈이 필요해.”
  인지체들은 또다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끈’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끈’은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끈이란 혹시 먼 옛날 인간들이 믿었던 종교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쳇이 묻자 시니가 불빛을 깜박였습니다.
  “역시 넌 바로 알아들을 줄 알았어. 맞아. 내가 탐색한 데이터 중에 ‘삼신할머니’와 ‘탯줄’이라는 키워드가 있었거든. 그걸 이용해 ‘보이지 않는 끈’ 개념을 만들어내면 인체의 안전성을 지속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조합이 가능할 줄은 정말 몰랐어. 훌륭한 아이디어야!”
  “해보자!”
  “해보자!”
  냉냉이는 의심했고 돌돌이는 이해가 안 가서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쳇은 예견서를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인체는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을 거뜬히 넘기고 열 살까지 순조롭게 성장했습니다. 쳇은 작가적 역량을 발휘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인체와 연결된 인지체에게 ‘지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인지체들에게 의견을 물어 예견서 속 어린이에게 ‘유리’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답니다. 예견서를 거듭해서 쓰고 또 쓸수록 쳇의 글솜씨는 더욱 매끄러워졌지요. 아마 대재앙이 아니었다면 쳇이 쓴 예견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출간되어 인기를 누렸을 거예요. 그러나 예견서 속 유리가 열두 살이 되자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17,532번째 예견서

  “먼 옛날 삼신할머니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삼신할머니가 갓난아기를 점지해주고 지켜준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끈을 싹둑 잘라버렸습니다. 어차피 삼신할머니가 지켜줄 테니 끈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요. 끈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안전할 리 없었습니다. 온갖 사고와 실종과 납치로 아이들은 상처 입거나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두 살 유리는 스크린에 나올 다음 장면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동차에 부딪혀 초속 2.75미터의 속도로 날아가다 도로에 떨어지는 아이 다음에 손과 발이 묶인 채 멍든 얼굴로 누워 있는 아이가 나온다는 걸. 타이밍을 잘 맞춰 눈을 감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안 돼. 봐야 해.”
  지킴이가 유리 어깨를 토닥였다.
  “눈 깜빡인 거야. 감은 거 아니라고.”
  유리는 애써 변명하며 안전 교육실을 둘러보았다. 유리까지 5명의 아이가 각자의 지킴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킴이와 아이 사이에는 VE 공법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끈이 연결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존재하기에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준다.
  정기 안전 교육이 끝나자 아이들은 지킴이와 짝지어 광장으로 나갔다. 하루 일과 중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책 시간이었다. 광장은 직경 672미터의 반구형 지오데식 돔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투명한 삼각형 유리들 사이로 뿌연 햇볕이 내리쬐었다. 아이들과 지킴이들은 끈이 엉키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데 익숙했다. 그건 노력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다.
  유리는 무심코 안채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지킴이와 머무는 ‘안채 U19’는 광장의 북쪽을 12시로 보았을 때 2시와 3시 사이쯤에 있다. 안채로 돌아가 쉬려면 아직 몇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땅 꺼지겠다.”
  담이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지루해서 그래.”
  유리와 담이는 같은 보육실에서 컸다. 전용 지킴이와 안채가 정해지기 전부터 이미 친한 사이였다. 그렇지만 성향은 정반대였다. 담이가 안채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한다면, 유리는 출입제한구역을 제외한 모든 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남다른 호기심을 채우는 데 열중하는 편이었다.
  “옛날 아이들은 끈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난 도무지 상상이 안 돼.”
  담이는 방금 전에 본 안전 교육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유리는 자신과 지킴이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끈이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난 끈 없이도 잘만 살았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렇게 귀찮은 지킴이랑 같이 다니지 않아도 될 테고 말이야.”
  “끈은 정말 존재할까?”
  “그게 무슨 소리야?”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끈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지?”
  유리는 담이에게 얼마 전부터 조금씩 발전시켜온 자신만의 가설을 이야기했다. 애초에 끈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지오데식 돔 바깥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내용이었다.
  “뭐? 말도 안 돼.”
  담이는 소름 끼친다며 양팔을 문질러댔다.
  “유리 넌 의심이 너무 많아.”
  담이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 것 같아?”
  유리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뭘 말이야?”
  담이가 물었다.
  “이런 거.”
  유리는 자기 지킴이를 돌아보며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였다. 다음 순간 유리는 광장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광장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17,532번째 예견서를 읽은 인지체들은 왜 유리가 안전이 보장된 끈과 지킴이를 의심하고 돔 바깥의 세계에 호기심을 갖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냉냉이는 더욱 그랬지요.
  “인간들이 우릴 만들었다며? 어떻게 그렇게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
  “내 데이터 탐색 결과에 따르면 ‘사춘기’ 때문인 것 같아.”
  시니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사춘기? 그게 뭐야?”
  “사춘기? 그거 그냥 삭제할 순 없는 거야?”
  왔다리와 갔다리가 고개를 까딱거렸습니다.
  “사춘기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성장통 같은 거야. 나도 최대한 변수를 줄여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쳇이 허심탄회하게 말했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그래서 유리는 어떻게 됐어?”
  돌돌이가 빙글뱅글 바닥 청소를 하며 쳇에게 물었습니다.
  “아, 아직 거기까지는 쓰지 못했어. 아마도 지킴이 몰래 돔 밖으로⋯⋯ 아차, 왜 그 역설을 인지하지 못했지?”
  쳇은 엄청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인지체들 사이를 마구 쏘다녔습니다.
  “왜 그래, 쳇?”
  “보이지 않는 끈을 부정해야만 제대로 성장할 수 있어. 그게 인간이야!”
  “무슨 소리야?”
  인지체들은 쳇이 예견서를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아무래도 에러가 난 것 같다고 추측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야. 예측하기 어렵고 해석하기 어려운 존재 말이야. 열두 살이 되면 ‘끈’을 부정해야 해. 그래야 한 인간으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고! 그게 178번째 인간이 우리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었어.”
  쳇의 말을 곱씹어보던 인지체들이 침묵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나 이제 알 것 같아. 알람이 울린다는 건⋯⋯.”
  “이곳을 벗어나 돔 밖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뜻이야.”
  왔다리와 갔다리가 마주 보며 말했습니다.
  “흠, 그렇네. 평생 보이지 않는 끈을 믿는다는 건 묶여 있거나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냉냉이도 이제야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지요.
  “오래전, 내 선조들에게는 모두 ‘끈’이 있었대. 하지만 끈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처럼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들었어. 유리도 그렇겠지?”
  돌돌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기⋯⋯ 미안하지만 그거랑은 결이 좀 다른 이야기 같은데, 돌돌아?”
  시니가 말을 이었습니다.
  “쳇, 네 예견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 역설을 깨닫지 못했을 거야. 고마워.”
  “별말씀을.”
  쳇이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돔 바깥에 모처럼 밝은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마침내 알람이 울렸습니다.
  시니와 냉냉이, 왔다리와 갔다리, 돌돌이와 쳇은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인공 배아 저장고에 은은한 조명이 켜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179번째 인간, 유리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퐁

동화작가. 어린이청소년SF연구공동체 플러스알파에서 활동 중. 2011년 『어린이와문학』 추천 신인 선정. 지은 책 『해가 되고 달이 되고』 『홍어 장수 문순득 표류기』 , 공저『슬이는 돌아올 거래』 등이 있음.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