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자리를 탐색하는 청소년문학

    

    1. 부정의한 돌봄 사회

    매들린 번팅Madeleine Bunting은 시장의 가치로부터 돌봄을 지탱해주던 이상들이 힘을 잃어 이제 돌봄은 “반문화적인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고 돌봄의 위기를 진단한다. 그는 “돌봄에는 자신의 욕망보다 타인의 필요를 우선하는 자기희생을 발휘할 것이 요구되므로, (돌봄은) 자아의 욕망과 실현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대한 저항이 필요한 것”이 되었고, 주류 문화에 저항자가 되는 상황에 처함으로써 돌봄이 결국 “문화적인 고아 신세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1 돌봄이라는 용어가 의존성과 맞닿아 있는 한 개인의 역량과 자립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돌봄은 평가절하의 대상이 된다. 성취 지향적이고 경쟁적인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자질구레하고 비생산적인 영역으로 간주되기에 돌봄의 이상과 가치는 줄곧 폄하되곤 했다.
    가성비와는 거리가 너무도 먼, 누군가를 온전히 갈아 넣어야 가능한 이 돌봄 노동의 패턴은 기피 현상을 초래하고 외주화를 거쳐 결국 저임금·이주 노동자들, 여성들에게 전가되며 특정 젠더나 계급에 편중된다. 이와 같은 편향은 인간이 타인의 돌봄에 의해 형성된 존재임을 망각하게 하며, ‘내’가 돌봄과 무관할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돌봄을 무익한 것으로 만든다. 돌봄이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닌 보편의 윤리이자 모두의 문제임을 환기하기 위해서는 돌봄의 행위가 “그 취약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를 돌보는 촘촘한 사회적 장치와 연결망을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작업”2임을 깨닫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인식 전환의 기본 전제는 누구나 돌봄의 대상과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심지어 돌봄으로부터 소외될 수도 있음을―에 있다. 돌봄이 실현되는 방식들이 어떻게 삶과 연결망을 이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것이 새로운 질서와 전환의 상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문학의 영역(자리)에서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돌봄 수혜자와 제공자 사이의 경계에 놓인 청소년에게 돌봄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상상력의 추동은 청소년문학의 중요한 서사적 자원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최근 청소년문학은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된 진실을 비추며 돌봄의 공백을 메우는 보편적 서사에서 더 나아가 보다 다채로운 서사적 탐색을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돌봄의 상호관계적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찰하고, 혈연 바깥으로 관계를 확장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등, 다양한 행로를 더듬어가며 변화의 잠재성을 탐색해가고 있다. 이 글에서는 김려령의 『모두의 연수』(비룡소, 2023), 백온유의 『페퍼민트』(창비, 2022), 최정원의 『저희는 이 행성을 떠납니다』(비룡소, 2023)를 중점으로 다루며, 세 편의 청소년소설이 돌봄을 둘러싼 다층적 현실 속에서 어떠한 측면을 서사화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영 케어러와 돌봄의 무게: 백온유 『페퍼민트』

    『페퍼민트』는 ‘프록시모 바이러스’ 감염 후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영 케어러Young Carer ‘시안’의 양가적 감정을 다룬다. 영 케어러는 질병, 장애 등을 겪는 가족을 돌보는 아동이나 청년을 지칭하는 용어로 돌봄을 제공하지만 정작 돌봄의 수혜는 받지 못하는, 즉 돌봄으로부터 소외된 자이기도 하다. 이들의 생애주기 특성상 영 케어러는 인생의 대부분을 돌봄을 받는 위치에서 불시에 돌봄의 주체로 전환되어 혼란을 겪는다. 느닷없이 의존적인 상태가 뒤바뀌는 데서 오는 당혹감과 자신의 필요와 욕망보다 타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투명 자아’로서의 삶3은 영 케어러가 겪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의 주된 요인이 된다.
    취약한 신체를 돌보기 위해 수반되는 노동들 대부분이 물리적인 활동을 요구하기에 기술의 발달에도 돌봄은 여전히 오프라인 활동이다. 돌봄 대상자의 곁에 늘 존재해야 하는 물리적 접근성은 돌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4 이 물리적 접근성은 돌봄 제공자가 돌봄 노동에 단단히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며 이에 따른 책임감과 부담감 사이에서의 갈등을 유발한다. 시안은 엄마의 취약한 육체를 돌보며 “식물적인 인간을 돌보는 일과 식물을 기르는 일은 어느 정도 닮아 있”(10쪽)음을 터득하지만, 엄마는 마치 배설물처럼 시안의 삶에 자꾸만 흘러들어 잠식한다.

    그거 알아? 우리는 견디고 있어. 이 악취를, 시린 소독 냄새를, 좁은 침대를. 엄마는 뭘 견디고 있어? (121쪽)5

    배설물을 처리하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주는 일은 엄마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시안은 이 원초적이고도 무거운 책임감이 수반된 돌봄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눌러 담으며 투명한 자아가 되어간다. 대부분의 영 케어러는 가족을 돌보며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모순을 느끼며, 능력 향상과 미래 지향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현실에 의문을 품게 된다.6 이들이 겪는 감정은 당대 사회적 분위기와 조응한다. 경쟁 사회에서 학업과 교우 관계, 다양한 경험 등을 쌓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청소년들에게 가족을 돌보는 일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열등감을 유발한다.
    더구나 동질성이 강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돌봄 노동의 경험은 이해받기 어려운 것이기에, 영 케어러는 타인과의 심리적·관계적 거리두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간극은 시안을 향한 학교와 병원에서의 상이한 평판에서도 드러난다. 병원에서 시안은 “요즘 애들”(13쪽)답지 않은 기특하고 책임감 있는 ‘보호자’이자 ‘간병인’이지만, 학교에서는 “개념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미친년”(118쪽) 취급을 받는다.
    시안은 자신이 생애주기에 따른 과업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음을 ‘해원’을 통해 가시화한다. 시안은 가족들에게 바이러스를 옮긴 해원의 가족들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와 달리 평범한 이십 대를 상상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에게는 없는 “자기 삶에 대한 각별함과 애틋함”(159쪽)을 본다. 엄마를 놓고 싶은 자기 안의 욕망과 무의식이 해원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중첩되어 시안은 해원에게 다소 가학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전가한다. 그리고 끝내 해원에게 간병살인을 의탁하고야 만다.
    상황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해원은 시안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며 결국 시안이 짊어진 돌봄의 무게를 나누려 한다. “돌봄에는 신체의 배설물로 엉망진창인 물리적 현실을 기꺼이 다루고자 하는 마음”과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마주하고 직면하고 버티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곁에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 같이 수반된다.7 전자가 엄마를 향한 시안의 마음이라면, 후자는 시안을 향한 해원의 마음으로, 이들의 감정은 서로 중첩·교차된다.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한평생 혼자 살지 않는 이상, 결국 누구 한 명은 우리 손으로 돌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191~192쪽)

    시안은 해원, 그리고 간병인 ‘최선희’ 선생님과 자신의 돌봄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며 자신을 둘러싼 겹겹의 감정들을 한 꺼풀씩 덜어낸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 모두가 서로 돌보는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돌봄은 언어로 형상화되기보다 말없이 수행되는 경우가 많기에 비가시화되고 묵인된다. 돌봄에서 겪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감정들을 직면하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부정이라는 고립된 “그늘을 벗어나 한걸음, 햇볕이 있는 곳으로”(265쪽) 나아가는 작은 실천의 기점이 되지 않을까.
    

    3. 돌봄은 모두의 것: 김려령 『모두의 연수』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유명한 격언은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가정뿐 아니라 공동체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는 곧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공동체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성은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잠재적 ‘맘충’이라는 시선을 견뎌야 하고, 아동은 ‘노키즈존’이라는 팻말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전면 부정당하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과연 저 격언은 유효할까. 우리 사회가 엄마가 된 여성과 아동을 엄격히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는 지금, 돌봄은 매우 제한적인 선택 안에서 축소된다. 육아는 이제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 선택의 이면에는 언제나 불평등, 강요, 이데올로기, 권력 등이 존재하고 이 모든 책임은 폭탄 돌리기 하듯 돌고 돌아 결국 가장 취약한 개인―대체로 엄마-여성―에게 돌아온다.
    김려령의 『모두의 연수』는 퇴색해가는 옛 격언을 회생하듯 ‘명도단’이라는 마을 공동체가 어떻게 ‘보편적 돌봄’을 실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8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난산으로 엄마가 죽고 이모부의 식구들 손에 자란 ‘연수’는 복잡한 가족사 안에서 설명되기보다 그저 “대흥슈퍼 손녀일 뿐”(61쪽)이다. 간혹 연수가 입양되었다는 소문이 돌아도 “우리 집에서 우리 손으로 키웠으면 우리 손녀지, 뭘 따져”(61쪽)라는 할아버지의 명쾌한 정리로 연수는 그렇게 명도단을 놀이터 삼아 모두의 연수로 자랐다. 명도단을 휘젓고 다니는 연수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것, 이것이 명도단 공동 육아의 기본 원칙이다. 명도단 사람들은 연수의 목소리와 감정에 반응하는 민감한 레이더를 가진 것처럼 연수의 모든 것을 돌보고 책임진다. 그렇게 명도단 사람들의 손을 탄 연수는 “세상에서 보호자가 가장 많은 아이”(64쪽)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내 부모를 뺀 모두의 연수”(107쪽)라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명도단의 암묵적인 규칙들. 특히 침묵은 주요 덕목이었다. 그것에 대한 보상은 신뢰였다. 내가 알게 된 어떤 것들을 침묵함으로써 내 존재도 그들의 침묵 속에서 용인됐다. (130쪽)

    비록 연수의 마음에 “부모와는 성격이 다른 보호자라는 내면의 벽”(64쪽)이 존재하긴 하지만 보호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는 것이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아는 연수는 그저 태연하게 지내왔다. 남들과 조금 다른 자신의 존재를 명도단에 자연스럽게 융화시키기 위해 침묵의 대가로 신뢰를 얻는 등 나름의 애를 쓰면서 말이다.
    보호자들만으로 충만했던 연수의 삶은 느닷없는 아빠의 등장으로 혼란을 겪는다. 자신이 생부라는 이 남자는 연수 엄마의 보육원 동기로 자신에게 연수 엄마가 수면제를 먹이고 나쁜 짓을 해서 “그날의 증거물”(91쪽)로 연수가 태어난 것이라 주장한다. 연수는 잔인한 탄생 비화를 알게 된 것도 모자라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딸이라는 사실과 마주하자 판타지 속에 넣어왔던 부모를 불행한 역사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그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연수는 자신이 조금 더 빨리 유전자 검사를 했더라면 그의 세 치 혀에 모두가 상처받는 일이 없었을 거란 후회를 하지만 모든 책임은 그 누구보다 가해자에게 있음을 이내 깨닫는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명백한 피해자니까. 누가 더 바보 같았느냐고? 그건 아마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 비례하지 않았을까. 서로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각자의 방식으로 인내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우리가 서로에게 가진 아낌의 속살이라고 부르고 싶다. (중략) 내가 부모가 아닌 보호자와 지내도 행복한 이유였다. (309~310쪽)

    연수는 명도단에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긍정하고 속살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마음의 깊이를 배운다. 개별 존재들의 ‘차이’를 지우고 두텁고 단단한 ‘아낌의 속살’을 나눌 수 있는 공공의 장소로서 명도단은 돌봄 공동체로서 여느 가정이나 지자체보다 그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모두의 연수』에서 돌봄은 연수의 할머니나 이모 등 여성에게 전가된 ‘선택’이 아닌 명도단 공동체 모두의 ‘몫’으로 확장된다. 부모와 가족에게 한정된 혈연중심주의는 돌봄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버리기 쉽다. 이는 매우 쉬운 방법으로 돌봄을 떠넘김과 동시에 우리 모두 그 노동에 빚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은 특히나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서 그 의미를 개인의 돌봄을 공동체에 전가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여기서 마을은 단순히 누군가를 돌보는 행위자를 지칭하기보다 아이가 보고 느끼는 세계를 의미하며 아이는 가장 가깝고 친밀한 이 세계를 흡수하며 성장한다. 다양성과 포용, 소통과 협력 등이 개인적인 노력과 학습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한, 마을은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며 다시 회복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4. 차이를 횡단하는 돌봄 메이트: 최정원 『저희는 이 행성을 떠납니다』

    제3회 비룡소 틴 스토리킹 수상작인9 『저희는 이 행성을 떠납니다』10는 지구상에 홀로 남은 외계인 아기의 무사 귀환을 책임지게 된 두 지구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지구인들의 이 종을 초월한 돌봄은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선행”(81쪽)이라는 아주 보편적이고 단순한 감각 위에서 수행된다. 접점이 전혀 없는 이들의 첫 만남은 ‘나래’와 ‘원호’가 각각 길을 가다가 우연히 ‘보보’를 발견한 데서 시작된다.
    나래와 원호는 보보의 이름표를 통해 그가 ‘KMSRX-3’, 일명 ‘무지개’라고 불리는 외계 종족임을 알게 되고, 아이를 발견시 주민센터로 연락해달라는 문구를 보자 “곤란한 상황에 처한, 그냥 귀여운 아기”(81쪽)를 데려다주기로 한다. 다만 원호는 외계인을 실제로 처음 봤다는 단순한 호기심에, 나래는 길 잃은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여 “희박한 용기를 긁어모았다.”(26쪽)는 점이 다를 뿐, 이들은 그저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기의 시간을 조금 내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무지개 종족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이들의 단순한 의도는 거대한 임무로 전환된다.
    무지개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하자 ‘침략자’가 아닌 ‘피난민’의 모습으로 지구에 방문해 이민 요청을 했고 이후 지구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지구인들은 무지개의 과학기술을 전수받아 보다 윤택한 삶이 도래할 것을 기대해 이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들과 접촉 후에도 달라지는 것 없이 비슷한 일상이 지속되자 지구에서 외계인은 공생의 대상이 아닌 자극적이고 새로운 콘텐츠 소재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외계인의 고유성이 아닌 지구인과 다른 점을 “필사적으로 찾”(114쪽)아 “외계인들의 삶을 찌르고, 파헤치고, 웃음거리로 삼”(157쪽)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의 평화를 깨야만 하는 사람들”(114쪽)이 존재하는 지구는 무지개들의 최종 정착지가 아니었다. 빛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무지개는 “그들의 힘이 알려지고 가치가 매겨지는 순간마다”(91쪽)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도망쳐야 했다.

    따뜻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사람들.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구인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모사해 냈지만 그들의 본래 모습은 한없이 무에 가까운 빛이다. 존재하지 않는 모습으로는 소통할 수 없고 소통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빛은 힘이고 힘은 두려운 것이었다. (90쪽)

    타인에게 수용되기 위해 무에 가까운 본연의 모습을 카멜레온처럼 바꿔가며 자신의 고유성을 위협받은 무지개들은 결국 지구를 떠났고 그 과정에서 보보는 손을 놓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나래와 원호는 남들의 눈에 들키지 않게 보보를 수송선에 무사히 태워야 하는 새로운 미션에 직면한다. 앞서 살펴본 두 소설과 비교했을 때 이 소설의 경우 돌봄 행위와 관계성은 비교적 덜 구체적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의 일환으로서의 돌봄 실현에 좀 더 의미를 두고 싶다.
    나래의 신중함과 원호의 무모함이 보보를 끝내 지켜냈고 보보는 무사히 귀환에 성공한다. 이 둘은 보보를 지키고 돌보는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해간다. 지나치게 무거운 나래와 지나치게 가벼운 원호는 서로의 다름 가운데 보보를 돌보며 타인에 대한 호의와 선행을 실천하는 동력을 얻는다는 접점을 이루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은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적 인식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래. 난 너희랑 다르지.
    그렇게 나래는 안전한 거리까지 뒤로 물러났다.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기로 하면서. 그런데 원호는 어느새 그 도로를 한걸음에 가로질러 넘어와 있었다. 분명히, 이 아이도 저쪽 편에 서 있는 아이였는데. (150쪽)

    특히 자신의 세계가 늘 부정되었던 나래에게는 이 경험이 더욱 값진 것으로 체감된다.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웃음, 시끌시끌한 소란, 즐거운 이야기, 그것은 친구들의 것이지 나래의 것은 아니었다.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진 보보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 나래는 그럼에도 “분명히, 이런 우리를 기다려 주는 누군가”(127쪽)가 있다는 믿음으로 느슨한 연대 안에서도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음을 경험한다. 갑작스레 보보를 맡게 되었을 때만 해도 “희박한 용기를 긁어모았”던 나래는 이제 “한아름만큼”의 용기를 품을 수 있는 두둑한 마음을 얻는다.

    보보의 눈에 보이는 자신은, 지금보다는 덜 겁먹은 모습이었으면 했다. 지금 보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래뿐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 줌도 안 되는 줄 알았던 용기가 한아름만큼은 생기는 것 같았다. (108쪽)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과 경험은 대의명분으로써의 실천적 행위보다 어쩌면 매우 단순한 원리에서 비롯될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차이’가 아닌 ‘고유함’을 먼저 찾는다면, 그리고 그 고유함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면, 적어도 우리는 행성을 찾아다니며 부유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5. 상호 의존적인 돌봄 사회를 꿈꾸며

    무관심과 냉소의 세계에서 돌봄은 보편적 윤리가 아닌 약자의 윤리로 인식된다. 매들린 번팅의 지적대로 돌봄이 “반문화적인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면 돌봄을 삶의 영역으로 되돌리기 위한 움직임은 필수 불가결하다. 돌봄은 “우리가 그 세계 안에서 되도록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세계를 지속시키고 유지하고 고치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11을 포함하는 노동일 때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 돌봄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자 역량임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존하고 돌보면서 ‘서로’ 사람이 되는, 시민적 관계 맺기로 서로 ‘감응 있는 책임’을 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것은 ‘직면’”이다.12 돌봄을 둘러싼 다양한 현실을 바깥으로 밀어내기보다 직면하고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할 때 돌봄은 우리 삶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소설들은 복잡한 감정들을 수반하는 돌봄의 곤경을 가시화하고(『페퍼민트』), 이를 모두의 것으로 돌려 그 무게를 조금씩 나누고 견디며(『모두의 연수』), 서로를 단단히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끈(『저희는 이 행성을 떠납니다』)으로 연결된 돌봄 공동체를 상상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그리고 돌봄을 누군가의 전유물로 전가하지 않고 공동체의 몫으로 그 총량을 소분화한다.
    하지만 현실의 돌봄은 여전히 비가시화된 영역에서 누군가의 독박으로 수행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무엇보다 돌봄은 물리적 육체노동에 한정되지 않는 상호관계적인 정신노동이기에 애정과 존중이 근간이 되어야 함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 어떻게,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이것은 돌봄을 둘러싼 현실과 이론의 인지적 부조화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문학적 행위이다. 돌봄은 늘 우리의 삶 가운데 놓여 있어야 하며 문학은 마땅히 그 자리를 다양한 경로로 탐색해야 하는 ‘문학적 몫’을 지닌다.
  
  

김젬마

1986년 인천 출생. 2020년 평론 「모성 위에 세워진 유토피아」로 제12회 창비어린이신인문학상 수상.

    
    

〈주석〉

  1. 매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 김승진 옮김, 반비, 2022, 64쪽.
  2. 백지연, 「삶의 전환을 꿈꾸는 돌봄의 상상력: 황정은과 이주혜 소설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30쪽.
  3. 투명 자아transparent self는 다른 사람의 필요가 식별되는 자아로 자신의 필요를 알고 있지만 타인의 필요를 우선으로 간주하는 자아를 뜻한다. 에바 킷테이는 돌봄 노동을 ‘의존 노동’이라고 부르며, 의존 노동은 이러한 자아를 필수불가결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에바 페터 킷테이, 『돌봄: 사람의 노동』, 김희강·나성원 옮김, 박영사, 2016, 114~115쪽 참조.
  4. 매들리 번팅, 앞의 책, 19쪽.
  5. 『페퍼민트』는 ‘창비청소년문학’과 ‘양장’으로 출간되었고, 이 글에서 인용 면수는 양장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하 인용은 쪽수만 표기함.
  6. 시부야 도모코, 『영 케어러』, 박소영 옮김, 황소걸음, 2021, 123쪽.
  7. 매들린 번팅, 앞의 책, 66쪽.
  8. 보편적 돌봄이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더 케어 콜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41쪽.
  9. 틴 스토리 킹은 ‘청소년 심사위원제’를 통해 청소년들이 직접 심사에 참여하여 작품을 선정한다.
  10. 이하 인용은 쪽수만 표기.
  11. 매들린 번팅, 앞의 책, 70쪽.
  12. 김영옥 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책, 202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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