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름시름 병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전쟁이 끝났다. 끝난 줄 알았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평화공원이 들어섰지만, 핵은 사라지지 않았다. 희생자 통계의 숫자조차 되지 못한 사람들이 죽고, 피폭된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도 비키니섬에서, 모스크바에서 영국과 프랑스와 중국에서, 인도에서 핵실험은 계속되었다. 핵폭발은 미국 스리마일섬에서 체르노빌과 프랑스, 후쿠시마로 이어졌다.
    원폭이 떨어진 자리에는 조선인들도 살고 있었다. 강제징용으로, 또는 가난을 피해 고향을 떠나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해방과 피폭 이후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피폭자들은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평생 자신이 피폭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던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이하 ‘협회’) 정원술 회장을 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은 원폭 자료관,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 건물과 함께 합천에 자리하고 있다. 정원술 회장과 같이 걸으며 건물 소개를 받았다. 복지회관은 한일 정부가 원폭 피해자 지원에 합의한 뒤 1996년에 설립되었고, 현재 78명이 입소해 살고 있다.
    복지회관 뒤에는 작은 위령각이 있다. 1,160명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위령각은 일본의 한 종교단체가 조선인 원폭 피해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며 1997년에 설립해주었다. 일본 종교단체 덕분에 협회는 위령제를 처음 지낼 수 있었다. 올 3월에 협회 회장이 되었다는 정원술 회장은 합천에 세계평화공원을 만들고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를 세우는 게 마지막 바람이라고 했다.

    인터뷰는 원폭에 대해, 피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시작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을 얼버무리자, 정원술 회장은 “아이, 편안하게 하입시다.”며 기록자의 마음을 얼러주었다.
    편하게 하자고 했지만, 질문을 들을 때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뜨고 답을 할 때까지 침묵이 길었다. 말을 꺼내기까지 한참 입술을 그러모으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78년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말들이었다.

합천군 합천읍 대야로991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복지회관 ⓒ 정윤영

  

# ‘우리는 원폭을 덮어쓴 사람들’─원폭 피해자 1세

    모르지. 사람들은 모르지그래. 피폭된 사람은 거의 세상을 다 버리고(떠나고). 64퍼센트가 세상 버렸더만. 지금 제일 적은 나이가 보자, 칠십여덟이에요. 저는 43년(생)이니까 만 팔십이 됐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카는 것은 숨기고 싶죠. 원폭이라는 이 피해가⋯⋯ 그 원폭을 맞아가지고⋯⋯ 참⋯⋯. 방사능물질이 유전된다 해가지고 이것도 자랑거리 못 된다 아입니까. 그래서 저도 일체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이야기를 밝히게 된 것은 회장이 되고부터 안 밝힐 수가 없더라고. 여러 군데서 이렇게 질문도 들어오고 이러다 보니까 내가 원폭 피해를 입었다, 그때부터 알리게 됐죠. 남한테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좋은 인식은 못 받고 있거든요. 또 국가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고 이러니까 참 어려운 생활을 해왔죠. 그렇습니다.

    여기(협회) 온 것은 우리 중모님(둘째 큰어머니)께서 이런 게 있으니까 하라고 해서 등록하게 됐죠. 그런데 실질적으로 나와 같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협회를) 몰라서 등록을 안 한 사람도 많고 등록해봐야 실질적인 혜택도 없었고 남한테 좋지 못한 인상만 주기 때문에 등록을 안 했다. 그런데 우리 회원들이 일본하고 많은 투쟁과 소송 끝에 건강관리수당이라든가 치료비를 받게 되니까 나도 해야지 하고 (등록을 했지요).
    (그런데 등록하기가) 아주 또 까다로워요. 여러 가지 이유로 등록을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국가에도 책임이 있어요. 국가에서 등록을 해줘야 되는데, 국가 돈 주는 거 아니거든, 일본서 건강관리수당을 주고 치료비를 주는데. 그러니까 국가에서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걸 안 하고 있는 데 대해서 참⋯⋯ 참 불만이 많아요. 한 사람이라도 더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고 조치를 해줘야 되고 정부에서도 더 관심을 가해주는 것이 맞지 않느냐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저랑 어머니랑) 2005년 5월에 등록을 했어요. 건강관리수당이라 해가지고 연령별로 금액이 약간 차이가 납니다. 건강관리수당, 치료비가 다 나오고 상당히 도움이 되죠.
    건강수첩 받는 거, 아이 어렵죠. (일본에서 피폭자로 인정을 받아 건강수첩을 받아야 협회에 등록할 수 있다.) 참 그기 나도 또 불만이야. 일본서 사는(살던) 사람이 한국 오면 이웃이 몇 명이나 살겠습니까? 그런데 건강수첩 받으려면 두 사람을 증인 세우라고 합니다. 증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 나이 두 살 때 왔는데. 증인 세우는 게 제일 문제래요. (직계가족끼리는 증인이 될 수 없고 호적상 주소가 원폭 구역이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로운데다 증인을 직접 찾아야 하기 때문에 건강수첩 받기가 쉽지 않다.) 더 어려운 것이 지금 거의 다 죽어뿌고. 일본서 (인정) 안 해주겠다는 뜻이지. 나도 증인 구하기 힘들어가지고 한 1년 가까이 끌었지요.
  

“그게 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부모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운이 좋았다 그래요. 1945년 8월 6일이가. 참⋯⋯ 그날따라서 부친이 일하러 나가기 싫더라 이거지. 아마 마차를 끈 것 같아요. 우마차 안 있습니까. 마차에 군수 물품을 나르는 그런 작업을 한 것 같아요. 그날따라서 일하기 싫어서 좀 늦게 오동나무 그늘에서 작업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빛이 팍 하더라 이기지. 다른 불빛하고 틀리겠지. 아주 뭐 불빛이 번쩍거려서 어머니한테 아들 데리고 뒤뜰에, 뒤뜰 대나무밭으로 피신하라 했는기라. 이미 끝나는 상황이지만은 우리는 참⋯⋯ 원폭을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래요. 아버지가 그날따라서 께으름을 부렸고 그늘에서 작업을 했고.
    부친은 이제 아무것도 모르고 작업준비를 해서 직장에 갔지. 이기 원폭인 줄도 모르고 갔겄지. 가다 보니까 집채도 무너지고 시체도 깔려 있고 이기 뭔가 싶지. 시내로 가니까 화상, 열풍에 의해가지고 막 강물에 막 뛰어 들어갔다 그래요. 그 참상⋯⋯ 이루 말할 수 없더라.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그 많은 사람이 뒤엉켜가지고 강물이 완전히 핏물이더라 이거지. 그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참⋯⋯ 이런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고. 동네 한 분도 그 강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요. 구제할 도리가 없더라 이거지. 그게 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강물이 핏물이 되어가지고 흘러가는 모습, 그 이야기하면서 자꾸 가슴을 쓸어내리고 하셨어요.

    부친도 이야기하지만은 사체 수습(할 때)도 차별이 있었고, 또 치료도 일본 사람 위주로 했지, 한국 사람은 등한시했던 것 같아요. 일본 갈 때는 끌려갔지만은 나올 때는 밀리듯이 나온 기라. 그래 나오니까 정부에서는 무대책이지. 참⋯⋯ 우리가 불쌍한 것이요,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 국민으로서 차별대우(받다가) 원폭을 덮어써가지고 한국에 나와서⋯⋯.
    참⋯⋯ 제가 제일 가슴 아픈 것은 부모님은 (19)39년인지 40년인지 확실히 모르겠어요, 강제동원 되어 간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한 4, 5년 일본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나왔다꼬. 생활 터전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우리 부친도 사촌 형님 집에 얹혀사는 거지. 셋방살이하면서 농토가 있나 뭐가 있나. 그 생활이 더 어려웠어요.
    그러고 좀 있으니까 6·25까지 터져뿟지. 그러니까⋯⋯ 당시만 해도 사농공상이라. 장사를 제일 천시했거든. 근데 우리 엄마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행상을 했어요. 행상을 하면서 터전을 잡아가지고 우리들 공부도 시키고. 당시에는 장사하는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했거든. 부친은 농사⋯⋯ (마름)살이라든가 하시고. 힘들었어. 친척 집 살면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한 거야 이루 말할 수 없지.

    많이 시달렸습니다. 저도 늘 아팠어요. 사람이 시름시름⋯⋯ 참 활발한 생활은 몬했다 보지. 직장에 가면은 곤드레만드레하는 기라. 구석 같은 데 가서 기대가지고 푹 쉬고. 1년을 견딜라 카면은 한 달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로 몸이 쇠약했어요. 1년에 한 번씩 치료를 받고 직장에 복귀하고 그랬어요. 그러나 겉으로는 또 안 나타나니까 나로서는 참 고통받은 기(야). 시름시름 병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크게 아픈 데 없이 시름시름. 백혈구 부족에 위염에, 기관지에. 크게 아픈 데 없지만 사람이 약화되는 것 같아요.
    부모님도 저와 같은 현상이었어요. 부친은 60에 세상 버렸어요. 큰 병 없이 농사짓다가 이래, 옛날에는 소로 농사 많이 지었거든요. 소를 시(세)워놨는데 소가 달아나던 모양이지? 그 소 잡으러 가다가 몸이 워낙 약하다 보니까 쓰러져가지고. 심장마비죠 그쟈? 평생 고생만 하다가 병원 한번 몬 가보고 세상 버렸을 때 참⋯⋯ 부친 생각하면 참 자꾸 눈물이 나요. 그게 또 제가 한이 맺혀요. 몸이 아프면 큰아들 몬 살게 만든다고 병원에 안 갔어요. 그 당시에 이만큼 혜택 있었으면 부친께서 오래 안 살았겠습니까? 아마 우리 부친 같은 사람이 많을 겁니다. 예전에는 몰랐지. 원폭 때문에 아픈 줄 몰랐지. 그게 원폭인지도 모르고 돌아가셨지.

    (건강수첩) 등록하고부터 알았죠. 일본서 왔다 카는 건 알지만은 원폭을 당했다 하는 것은 동네에서도 몰랐고 협회에 등록하고부터 (원폭 때문에 아프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거 뭐 좋다고, 이야기해봐야 국가서 인정해줍니까? 사회에서 오히려 뭐, 질시를 받는 기지. 냉대받고. 밝히기를 모두 꺼렸어요. 결혼할 때도 얘기 안 했지, 자랑거리가 아니니까.
    부친 형제들도 일본에 갔다 와가지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가족들도 원폭증 있습니다. 몸이 안 좋고 아들이 피부병이 있어요. 병원에 가니까 못 나슨(낫는)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이상한 기라. 그거 보면은 원폭도 대물림된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 (미국과 일본의 공동연구기관인 방사선영향연구소는 ‘유전성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공식 발표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근거로 유전성을 부인하지만 이를 뒤집는 연구 결과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1)

    건강수첩을 받고 보니까 그 당시 수당이 40만 원씩 나오더라고. 제때 치료를 받고 이러니까 그때부터 몸이 확확 회복되더라고요. 치료, 특별한 것도 없어요. 병원에서 특별한 병도 없다그래. 병원에 들어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참 좋은 기라.
    모친은 여기 회관에 7, 8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300명이 대기하고 그랬어요. 어머니도 대기를 좀 했죠. 일본서 건강관리수당 나오고 치료받고 이러니까 자연사하신 거지. 아흔둘에 세상 떴으니까. 지금 오니까 아버지는 원폭 후유증이다, 그래 느껴져요. 당시 치료해주고 그랬으면 더 오래 살(았겠)죠. 나는 항상 그걸 느꼈어요. 수당 받고 제때 치료받고 이러니까 오래 살 수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건강과 경제력은 같이 간다. 나는 그래, 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다.”

    지금 (피폭) 2세, 3세가 한 3천여 명 있는데, 정부 혜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부 병원에서 의료비 약간 혜택이 있어요. 그거라도 받아볼까 싶어서 등록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특별법을 만들어가지고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매년 8월 6일에 위령제를 지냅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예산이 400만 원입니다. 참 너무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얘기 힘들어요. 가급적 금전 관계는 말하기 싫어요. 차라리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게 낫지, 국민들에게 지탄받기는 싫습니다. 그러나 78년 지난 현재까지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이나 위령비 하나가 없다, 이런 것은 참 너무 합니다.

    이때까지 어느 대통령 하나 히로시마에 참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통령이) 위령비에 참여한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일본으로 갔습니다. 원폭 희생자로서 감개무량하다 안 할 수 없어요. 16명이 가려고 했는데, 소식 듣고 너무 기뻐서 그랬는지 다 몬 가고 14명이 갔다 왔어요. 우리도 같이 위령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호소를 했는데도 무관심하더라고요. 그건 좀 서운했어요. 그러나 대통령이 참배한 것은 참 고맙고 좋습니다.

    오오가와 강(을 봤는데) 부친이 이야기한 피눈물의 강, 아비규환이 돼가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평화대교를 보니까 강물이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로운지 몰라요. 내가 물끄러미 바라봤어요. 내가 부친한테 듣던 강물하고는 다르게 너무나 평화롭더라고. 그 강물이 우리 동포 희생자의 영혼을 담아서 태평양 멀리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고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게 있어요. 우리의 아픔을 알아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돌아가신 영혼들에게 위로의 땅이 될 수 있도록 추모공원 조성에 관심을 가져주면 제일 좋겠습니다. 크게 바람은 없습니다. 단지 식민지 국민으로서 일본에 끌려가서 인권탄압(당하고) 원폭을 덮어쓰고 한국에 와가지고 삶의 고통을 겪었다 하는 걸 정부로서는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걸 물어보시는데⋯⋯ (오염수 방류는) 참 민감한 사항인데,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원칙으로 따지면. 원칙은 무조건 안 되는 거죠. 그러나 불가항력이라면 우예하겠습니까. 안 할 수 없다면 뭐 대책이 나와야 되는 거 아입니까. 참 어렵습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서 참 상당히 답답한데 후쿠시마 원전수 오염수 때문에 얼마나 지금 시끄럽습니까. 제일 불만이⋯⋯ 우리는 원폭을 덮어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번쯤은 실상이 어떤지 한번 들어봐야 됩니다.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어요. 참⋯⋯ 우리를 너무 등한시하고 멸시한다.
    국가에서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독였으면, 우리를 빨리 알려가지고 지금과 같이 원폭에 대해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그랬다면은 어땠을까. 지금 늦어도 너무 늦다, 만시지탄이라⋯⋯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겠습니까, 그런 심정입니다.
  

# “알 수가 없잖아예. 유전이라카는 거는.”─원폭 피해자 후손

일본에는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반드시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합천으로 보내온 수천, 수만의 종이학이 평화를 기원하는 문구와 함께 자료관과 복지회관 곳곳에 걸려 있다. ⓒ 정윤영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복지회관에서 원폭 피해자 후손을 만났다. 몇 분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신의 정보가 드러나는 것을 끔찍하게 꺼렸다. 절대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피폭자들을 빨리, 더 많이 알려야 했다고 했다. 그래야 피폭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않겠냐고 하기도 했다. 여러 번 설득한 끝에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피폭 후손이라는 얘기를 남에게 하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어렵게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 이름과 나이, 성별 정보는 모두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두 사람은 피폭 후손에게 갖고 있는 사람들의 편견에서 자유롭길 바라지만, 그들 역시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에게 원폭증이 유전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상반되어 보이는 말들을 들으며 원폭이 떨어진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원폭과 피폭에 대해 당사자도 한국 사회도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싶었다.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안을 더 키웠다.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이나 전범국가인 일본도, 자국 정부인 한국도 심지어 고향 사람이나 이웃도 피폭자에게 관심이 없다.
    80년 동안 사실과 소문, 몸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와 보상 소송 사이에서 피폭자와 후손들은 살기 위해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A 씨는 합천이 ‘한국의 히로시마’로 알려져 있지만, 합천에 살고 있는 피폭자들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고 또 한 번 말했다. A 씨는 글 쓰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건강수첩을 받을 때 준비했던 서류들을 보여주었지만, 녹음은 끝내 거절했다.
  

“얘기하기 싫어요, 솔직히.”

    피폭 2세 A 씨의 부모님은 히로시마 구스노끼마치에 살았다. 아버지는 방적 공장에서 일했다. 원폭 투하 당시 집이 무너졌고 집에는 엄마가 있었다. 집이 부서지고, 조선은 해방되었다. A 씨 부모님과 형제들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평생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괴로워했다. 매일 고열과 구토, 두통에 시달렸다. A 씨를 비롯해 동생들을 임신했을 때도 엄마는 약물치료를 받았다. 동네 사람들이 너희 엄마 눈썹은 안 아프냐고 물을 정도로 엄마는 안 아픈 데가 없었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A 씨도 엄마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엄마가 건강수첩을 받을 때를 이야기하며 A 씨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는 듯 말을 삼켰다. 건강수첩을 받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에는 원폭 후유증으로 알려진 증상에 체크하는 항목이 있다. 총 열한 가지 항목이 있고, 각 항목에는 세부 항목이 적게는 둘, 많게는 다섯 개씩 달려 있다. 갑상선과 폐 질환, 구토와 백내장 등 여러 증상 가운데 한 개만 해당이 되어도 원폭증을 인정받는다. A 씨의 엄마는 열한 가지 항목 가운데 열 가지에 해당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건강수첩을 바로 받았다.
    엄마와 아빠, 형제 한 명까지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셋 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고 했다. 병원비만 한 달에 5천만 원이었다. 남은 가족들이 병원 근처에 방을 잡고 번갈아 입원실을 지켰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눈물부터 났다. 누가 죽었다는 얘기일까 싶어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아야 했다. 형제는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가족들은 원폭증이라고 확신했다.
    피폭 2세. A 씨의 고통은 부모 형제들의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자녀들이 늘 걱정이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언제, 어디가 아프지 않을까 무서웠다. A 씨 자신도 갑상선에 ‘포도송이를 달고 산다’고, 계속 추적관찰 하면서 산다고 했다. 피폭 후손들끼리 만나면 어디가 아프다, 어디가 안 좋다 하는 얘기들 뿐이다. 병원에 가도 병명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었다.
    A 씨는 평생,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부모님과 일찍 세상을 떠난 형제를 생각하면 원폭 얘기는 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피폭자들이 보상을 많이 받았다고 티가 나도록 수군거리는 게 싫었다. 그런 사람들을 붙잡고 일일이 건강관리수당은 일본 정부가 주는 거라고, 한국 정부가 주는 보상금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한다 한들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 말 않는 게 최선이었다.
  

“아버지처럼 억울한 사람들”

    피폭 2세 B 씨는 아버지가 한 살 때 피폭되었다. 조부모님과 함께 “못 먹고 사니까 벌어먹으러” 히로시마에 갔다가 원폭 이후 “핍박받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어릴 때 멀건 피죽 먹고 살던 기억을 잊지 못했다.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평생 일만 했던 아버지는 나이가 들고 편하게 살 수 있겠다 생각할 즈음 암에 걸렸고 10년 넘게 투병 중이다. B 씨는 부모님과 함께 살며 아픈 부모님을 돌보고 있다.

    할아버지는 제가 열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기관지가 안 좋으셔서 맨날 기침하셨고, 용각산을 많이 드신 것 같아예. 할머니는 다리에 맞았대요, 그걸. 다리를 끌고 다녔어예. 아주 옛날부터 지팡이 짚고 다녔고. 아버지는 기억이 전혀 없다 카는데, 할머니는 한 번씩 저한테 이야기를 하셨거든예. 그것(원폭) 때문에 다리 아팠다는 기지. 항상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약을 많이 드셨어예. 자녀를 열 낳았는데 세 명밖에 안 살고 다 죽은 거예요. 할머니는 다리를 끌지예, 할아버지도 (몸이) 안 좋으니까 일손을 놓고 아무것도 안 했어예. 아버지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셔가지고 일해가지고 다 먹여 살렸지. 아버지가 먹여 살렸다고. 벌어오시면 그걸로 할머니 약 사주고 이랬지.
    아버지가 엄청 열심히 사셨거든예. 사는 게⋯⋯ 원래 가난도 물림되잖아예. 못 살아서 일본에 갔고, 폭탄(원폭) 맞아 다시 한국에 왔고. 먹고살 게 없으니까 그냥 막노동하니까 큰돈 못 모으고. 우리한테도 또 물림이 됐잖아예. 아버지가 내가 중학교만 나왔어도⋯⋯ 한 번씩 이야기하시더라고.
    힘들게 살아가지고 자식들 다 키우고 이제 좀 편안했으면 싶었는데 병이 와가지고 제가 많이 울었어예. 아버지가 예순아홉 되던 해(14년 전)에 직장암. 갑자기 막 설사를 하는 기라. 처음에는 변비가 심하더만도. 큰 병원 갔더만 직장암이라 캐가지고 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는 기라. 2년 전에도 폐암 수술하시고. 큰 수술을 두 번 하고 나니까 머리가 다 빠져가지고. 살아 있는 게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막 죽고 싶다고 그러고. 아버지가 어릴 때 외갓집에서 피죽 있잖아예, 물만 많이 넣고 끓인 거. 그런 걸 막 주신다고 그러데. 그게 자기가 몸이 안 아프면 (그런 생각 안 할 건데)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
  

“결국은 피폭 그거잖아예.”

    병원에 자주 가거든예. 혼자 못 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휴가를 내야 되는 기라. 건강수첩 있어예. 그런데 암에 걸렸어도 특별 수당을 못 받는 거예요. 거리 제한이 있어예. (폭심지에서) 3.5킬로미터 안에 있어야 수당 받거든예. 우리는 5.1킬로미터라고 하더라고예. 5.1킬로미터. 왜 암이 걸리느냐고 그러대예. 근데 암이 한 번도 안 걸렸으면 억울하지 않은데 두 번이나 걸렸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한 번도 안 걸리는 암을 두 번이나 걸리고⋯⋯ 원폭 피해가 없다고 볼 수 없는 기지. 다른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결국은 (피폭) 그거잖아예. 그런 사람 많을 거예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거리 (제한) 때문에 못 받은 사람도 있고 수첩 없는 분도 많이 있고. 억울하지.
    건강수첩은 2001년에 받았어예. 건강수첩을 내려면 보증을 서야 되거든예. 할머니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내가지고 그나마 그거(건강관리수당)라도 받고 이러니까 좀 나은데 그것도 안 나왔다 카면은 힘들잖아예. 요즘은 보증 서 줄 사람도 없고. 특별 수당 못 받아도 병원비라도 받는 게 다행이다 (했죠).
    건강수첩 받고 나서 아무래도 신경 쓰이고 그렇지. 할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러니까 우리한테 영향이 있을까 싶어 건강에 좀 신경을 쓰는 편인데, 그게 뭐 신경 쓴다고 됩니까. 유전이라 카는 거를. 나름대로 신경 썼는데 다리도 아프고 뼈도 신통치 않고 그래.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기지.
    형제들도 건강하지가 않아요. 뭐라 캐야 되노, 병원에 가면 병명 없이 아프다 카는 거 있잖아예. 여동생도 한 번씩 머리가 아프대요. 진통제 같은 거 먹고 이래 하거든예. 그러면 좀 낫고. 큰 병이 있는 건 아니고 자질구레하게 아픈 것 같아.

    오염수 방류예? 그래, 참 큰일입니다 지금. 우리 가족도 막 이야기하거든. 함부로 생선 사지 마라, 회 먹을 생각하지 마라. 이제, 우리 식구들이 영향을 받아 이렇게 돼 있으니까, 우리가 항상 보는 게 그거(피폭 후유증)잖아예. 큰일은 큰일이라.
    피폭이라는 게⋯⋯ 여기(복지회관)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시는 게 진짜 피해 많이 입은 사람들은 다 돌아가셨다. 그때 즉사하셨다. 지금 살아계신 분들은 그나마 경미한 상태라고 하시는데 유전이 되고 이러니까 무서운 거지그래. 알 수가 없잖아요. 그게(증상이) 한 대 걸러서 나올지 두 대 걸쳐서 나올지 모르는 거잖아.
    저도 결혼 30년 됐거든예. 결혼하고 아버지가 수첩을 냈단 말입니다. 배우자가 한 번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내한테 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 통해서 들었어. 원폭 피해자라 카면 결혼 안 했다 이런 식으로. 그 얘기가 내 귀에 들어왔어. 지금 어쩔 수 없이 사는 건데 안 아프면 괜찮지만도 할머니도 아팠고 아버지도 아팠는데 알 수가 없잖아예, 유전이라 카는 거는. 우리 애들도 다 컸는데 알 수가 없는 기지.
    한 번씩 그런 말 들을 때는 좀 그런 게 있어요. 사람들이 원폭 피해자들 돈 많이 받아먹고 잘산다 이야기하길래 막 열이 났어요. 지금도 그래예. 그게 참 터무니없는 거잖아그래. 자기들끼리 다 소문이 나가 있는데, (아니라고 한다고) 그걸 누가 믿어줍니까? 안 믿어주지. 그런 게 좀 억울하고 그래예. 아버지처럼 억울한 사람들⋯⋯ 어떻게 좀 해줬으면, 일본에서 좀 해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예전에 돌아가신 분들은 수첩도 못 낸 분들이 많잖아예. 자녀들 때문에 밖에 못 내놓는 사람 많거든예. 좀 이제 원폭 피해자들을 사람들이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이 말이지.
  
  

정윤영

르포작가. 공저 『숨은노동찾기』 『마음은 굴뚝같지만』 『숨을 참다』 등이 있음.

  
  

〈주석〉

  1. 김기진·전갑생, 『원자폭탄,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 도서출판 선인, 2012,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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