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항일독립운동의 흐름

  

  지금은 인천의 변방, 철책으로 가로막힌 접경지역이지만, 분단되기 전 강화도는 한강 하구를 기반으로 국내외 지역과 수도권을 연결하고, 온갖 물산과 사람들이 오가는 교통의 중심이었다. 또한 서울 방어를 맡은 최전선 기지로서 정치,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와 같은 지역적 조건 때문에 강화도는 외세와의 충돌 때 항상 가장 먼저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1800년대 후반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때도 마찬가지였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강화도조약에 이르기까지 5년 단위로 전쟁의 참화를 겪었던 강화 주민의 수난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강화 주민들은 조선 정규군과 함께 대외항쟁의 주체 세력으로 나섰다. 이는 지역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이업동도異業同道를 내세운 조선 양명학과 봉건사회를 극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 사상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된 강화의 국권회복운동, 항일독립운동의 초기 지도그룹이 강화학파라 불리는 양명학자와 기독교 세력이었음이 이를 반증한다.

  

강화진위분견대의 대일 항쟁

《매일신보》에 실린 이동휘 사진(1935년 2월 15일자)

  강화의 항일독립운동은 1907년 조선 군대 해산으로 촉발되었다.
  강화진위대는 1900년 6월, 조선진위대 1연대 1대대로 700명의 병력이 주둔하였다. 이동휘1는 1903년 5월 참령(현재의 소령계급) 승진과 함께 강화진위대장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1904년 일본군이 한국주차군이란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방비 업무를 맡게 되면서, 1905년 2월 강화진위대는 수원진위대대의 분견대로 50여 명의 병력 규모로 축소되고 말았다. 이동휘는 서른 살의 청년 무장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인물이다. 강화진위대장으로 재직하면서도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반대하고자 만든 보안회의 평의장으로, 대한협동회, 공진회 등에서 활동하였고, 대한자강회 강화지부를 결성하는 등 항일단체 활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윤명삼, 유경근, 김광찬 등 지역 인사와 의형제를 맺고,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교육구국운동에 나서 ‘강화의 바울’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강화진위분견대는 1907년 8월 11일 해산할 예정이었으나, 서울 시위대 해산 과정에서 군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이틀 앞당겨 8월 9일 오후 5시 강제해산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군대 해산 정보를 미리 입수한 강화진위분견대의 일부 군인들은 8월 2일 전등사에 모여 저항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8월 9일 오후 5시 강화진위분견대 해산 때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의 지휘로 50여 명의 분견대원과 500여 명의 강화 주민들이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한 뒤 곧바로 강화 군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이자 강화 군수인 정경수가 도피했다가 3일 뒤 체포되어 강화읍 동문 밖에서 처단된다. 8월 10일 일본군 14연대 소속 1개 소대가 기관총 2문과 함께 오후 4시경 갑곶에 상륙하였다.
  상륙 과정에서 갑곶 성벽에 매복한 봉기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 5명 사살, 5명 부상이란 전과를 올렸지만 화력의 열세로 후퇴하여 동문 부근에서 일본군과 대치한다. 8월 11일 새벽 전투가 개시되었고, 7시경 우월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들이 강화 읍내를 장악하고 수색 작전을 펼쳐 저항하거나 눈에 띄는 자들을 모두 사살하였는데 그 숫자가 50여 명에 달했다.
  연기우, 지홍윤은 봉기군을 이끌고 양사면 산이포에서 한강 하구를 건너 황해도와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하여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8월 12일 일본군이 재차 증원 부대를 급파하였으며, 8월 13일부터 일진회 회원 16명이 강화도에 들어와 일본군과 함께 봉기 군인들을 색출하고 사살하는 데 앞장섰다.

  

정미의병투쟁의 전개

  봉기군과 강화 주민의 저항은 1907년 8월 9일 오후부터 8월 11일 오전까지 3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홍윤, 연기우가 봉기군을 이끌고 경기, 황해도 등으로 이동하여 유격 투쟁을 벌이고, 이능권 등의 지휘로 강화도의 산악지대인 북단의 송해면, 하점면, 양사면, 남단의 화도면, 마니산 일대, 교동도 등에서 항일유격전을 1908년 말까지 끈질기게 이어갔다.
  섬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1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항일유격전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이능권李能權(1864~1909)의 역할이 크다. 그는 강화읍 국화리 출생으로 서울 시위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중 고종의 밀명으로 헤이그로 떠나던 평리원 검사 이준의 비밀 호위 임무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 군대가 해산되자 바로 귀향하여 봉기군과 강화 주민을 규합하여 항일투쟁에 나섰다. 친일파 양학진을 처단하고, 강화도 곳곳에서 군량과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산악을 활용한 유격전을 이어갔다. 1909년 초 일본군의 총공세에 밀려 강화도를 탈출하였다가 체포된 그를 일본군은 “폭도의 수괴”로 지목하였다. 1909년 11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뿐만 아니라 오윤영, 김동수, 차복만, 김덕순, 김용기 등 소규모 의병들은 군자금 모집, 주재소 습격, 일본군과의 교전 등을 끈질기게 이어갔다. 그 밖에 장봉도, 교동도, 강화 남단의 장화리 등을 근거지로 하는 해상 의병투쟁도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봉기군을 섬멸하고자 몇 차례에 걸쳐 병력을 증강시켜 출동하였다.
  봉기군의 유격전이 오랜 시간 동안 끈질기게 이어진 것은 우선 이들이 일본 군경의 대규모 공격에 맞설 정도의 전투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능권을 체포한 뒤 송해면 신당리의 무기 은닉처에서 다량의 총과 탄약을 회수한 것에서 보듯 봉기군의 물적 기반은 매우 탄탄했다. 또한 해산 군인들이 대부분 강화 출신이었기에 군인과 주민 간에 혼연일체가 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순무공작을 통해 봉기군과 주민들을 분열시키려 했으나 강화주민들은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봉기군에 동참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봉기군의 지속적인 항일전은 일제의 대규모 탄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1908년 11월 일제는 용산 사령부와 개성, 해주, 연백의 수비대에서 차출한 141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 작전에 나섰다. 토벌대 외에 경찰, 보조원, 일진회원 등 상당수 무장 회원을 동원하기 때문에 실제 병력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로 1909년 초 강화의병투쟁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의병투쟁의 경험은 강화의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훗날 강화 3·18 만세운동에도 봉기군 출신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때문이다.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계몽운동

  강화의 교육계몽운동은 매우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감리교, 성공회와 같은 기독교 전파와 이동휘의 걸출한 지도력이 결정적이었다.
  강화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00년 전후이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강화에서 기독교 신자가 급증하였다. 특히 이들은 교회를 세우면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잠두의숙(1908년 합일학교로 개칭)이 대표적이다.
  이동휘는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후 1904년에 육영학교를 설립한다. 그리고 1906년 봄 20여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고종을 알현하고 ‘보창학교’라는 교명을 받는다. 보창학교는 일반 교과목 외에 체력 단련과 군사훈련을 강조하였다. 이를 지켜본 외국 선교사들은 군대에 버금갈 정도의 엄정한 규율이라고 회고하였다. 강화읍의 보창학교에 이어 면별로 보창지교가 속속 설립되었는데 1907년 이전에 이미 24개의 학교가 이동휘의 관리 밑에 있었다. 짧은 기간에 수십 개의 학교가 동시다발적으로 설립된 것은 다른 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것은 강화 주민들의 근대교육과 국권회복에 대한 강한 열망과 전적인 지원, 이동휘를 비롯한 선각자들의 뛰어난 지도력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진명학교(성공회),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계명의숙도 눈에 띈다. 계명의숙을 세운 이건승은 조선말 최고 문장가인 영재 이건창의 아우이자 양명학자로 위당 정인보의 스승이다. 그는 을사늑약 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사재를 털어 계명의숙을 설립했다. 한일합방 후 간도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동휘는 1908년 2월, 학무회를 결성하고, 기존의 21개 보창지교, 진명학교, 계명의숙, 기타 4개교 외에 31개교를 더 설립하여 아동의 강제 의무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보창학교를 중학교로 확대 개편하고, 사범속성과를 설치하였으며, 중성학교(훗날 강화여중의 모태)에도 사범과를 두어 근대 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였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교육계몽운동은 급격히 쇠퇴한다. 일제 당국은 국권회복, 민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를 폐쇄하고 강제로 공립학교로 전환하고 식민지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강화읍의 보창학교는 1907년 해산군인 봉기 이후 일본군에게 학교를 빼앗기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끝내 고종으로부터 받은 적석사 토지 및 임야 도조를 빼앗기고 1915년 폐교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강화 3·1만세운동

  강화 만세 시위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 황도문, 염성오, 장윤백 등은 모두 강화 기독교계의 지도급 인사였다.
  3·1만세운동은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라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국내외에서 이에 호응한 독립운동이 계획되고 있었다. 또한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사망하자 반일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기독교가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때 강화, 김포 만세 시위 준비 계획을 맡은 이는 이동휘의 동지였던 송암 유경근松庵劉景根(1877~1957)이었다.
  유경근은 월곶 포구(현 연미정 아래)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집에 교회와 광창학교(이후 월호보창학교로 개칭)를 설립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폐교하고 1913년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상동교회를 통해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종로 관철동의 조선여관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서울로 유학 온 강화, 김포 출신 학생들과 깊은 교류를 맺었다. 또한 북간도에서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하던 이동휘는 물론 상해의 독립운동가와도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집, 청년들의 해외 밀송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황도문, 조종환, 고경진, 윤인혁, 오영섭 등은 강화의 만세 시위 지도자들에게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전달하고, 서울의 시위 상황을 알렸다. 이들과 접촉한 유봉진, 황유부, 염성오, 유희철 등은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와 선두교회 인사들과 논의하여 3월 18일 강화읍에서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3월 13일 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날 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 한차례 만세시위가 있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황유부 등은 「독립선언서」「강화인민에게」「국민회보」「독립가」 등의 격문을 수백 매 등사하고, 김유의 등 기독교계 여성 신자들은 각처로 격문을 전달하였다. 유봉진은 시위 계획을 알리고 강화도와 인근 섬을 다니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18일 오후 2시, 강화읍에 약 1만 명(일본군 추계 2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유희철이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하고 백마를 탄 유봉진이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시위 군중들은 강화 군수에게 몰려가 만세 부를 것을 종용하고, 경찰에 체포된 시위대를 석방시켰다. 시위 군중들은 늦은 밤까지 강화읍을 돌며 만세를 부르고, 다음날 온수리에서 모이자, 각 면을 돌면서 만세를 부르자고 결의한 뒤 밤 11시경 해산하였다.
  19일 아침 경찰과 용산에 주둔하던 군인 50여 명이 급파되어 각 촌락을 수색하며 시위 주동자와 참가자들을 체포하였다. 체포 과정에서 온수리 주민들이 항의하자 시위대 해산 조건으로 체포된 이를 석방하기도 했다.
  20일에는 합일학교 교사인 구연준을 비롯한 김한영, 김영희, 조구원, 고제몽, 오영섭 등이 강화 간부와 상인들에게 독립운동가를 검거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내고, 수십 종의 문서를 작성하여 강화 읍내에 살포하였다.
  3월 18일 만세 운동은 그 후 강화 곳곳으로 확산되어 4월 말까지 이어졌다.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났고, 밤에는 산에 올라 횃불 시위를 벌였기에 일제 당국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5월 들어서면서 시위가 잦아들자 일제 당국은 주모자 체포 작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98명이 체포되고 그중 43명이 구속되었다.
  강화의 만세 시위는 경남 진주 만세 시위와 함께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사례이다. 이것은 장날을 택한 뒤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계획적으로 잘 준비하였고, 진압 병력이 늦게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시위 지도부들이 정미의병투쟁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많았던 것도 이유로 들 수 있다. 3·1만세 운동을 계기로 직접적인 독립투쟁과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1920년대 강화의 다양한 사회운동

《매일신보》에 실린 조봉암 사진(1933년 11월 15일자)

  3·1만세운동 후 일제는 종전의 무단통치 방식 대신 소위 문화통치를 실시했다. 조선인 차별 완화, 언론의 허용, 근대 교육의 확대 등 여러 유화정책을 실시했지만 이는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전에 비해 합법 공간이 넓어져, 다양한 사회운동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유경근의 제자였던 박길양, 서봉준, 이상필 등이 주도적으로 청년, 사회운동을 펼쳤다. 특히 약관의 나이로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부상한 조봉암曺奉岩(1898~1959)의 영향력이 무척 컸다. 반면에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인사들 중 황범주, 고성근 등이 면장으로 취임하는 등 일제 당국에 협조하거나 박헌용, 이득년처럼 독립투쟁 전선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3·1운동 이후 강화에서 조직된 청년 단체2들은 주로 야학회, 강연회, 토론회, 체육, 오락 활동, 기타 산업을 진흥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개최한 강연회는 언제나 수백 명에서 천여 명에 이르는 청중이 참석하였으며, 이와 같은 활동은 매번 언론에 보도되었다. 또한 체육, 오락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강화 청년단체들은 중앙 모임에 따로 지역 대표를 파견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다. 지방 순회 강연회를 나설 때도 해주, 개성, 강화가 중심지였다.
  당시 강화 청년운동의 중심인물로는 박길양, 김이옥을 들 수 있다. 박길양은 유경근의 제자로 그를 도와 상해임정 독립공채 모집에 나섰다가 1921년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시대일보》 강화지국장으로 엡윗청년회와 성현구락부를 통합한 강화중앙청년회를 결성하고 조봉암의 권유로 화요회에 가입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가입,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복역 중 일제의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김이옥金以玉은 강화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다. 그녀는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합일학교에서 3-4년간 교사 생활을 하면서 여성운동에 전력하였다. 1927년 11월 상해로 가서 조봉암과 결혼하고 딸을 두었으나 1932년 조봉암이 상해에서 체포되자 강화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뜬다. 이미 김조이와 결혼을 했던 조봉암, 김이옥의 결혼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조봉암은 1920년대 청년 사회주의자의 대표 주자였다. 그는 강화 3·18만세운동으로 옥살이를 하고,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의 유학 생활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1922년 8월 귀국하여 뛰어난 웅변술과 토론 실력으로 급격히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1922년 베르흐네우딘스크 한인공산주의자 연합대회에 국내 대표로 참가했다가 최종 협의 대표로 뽑혀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이때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순회 강연회를 통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25년 4월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이때 조봉암의 주선으로 17인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하는데 정경창3, 조용암(조봉암의 동생), 김조이(조봉암의 부인)가 포함되었다. 그후 상해에 머물며 김이옥과 동거하다가 1932년 체포되어 7년간 신의주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밖에 1920~1930년대 강화 지역 사회운동의 중추로 주목할 인물은 서봉준(徐鳳俊), 이상필4 등이 있다. 서봉준은 박길양과 고락을 같이한 인물로 1926년 강화 유지들과 함께 강화진흥회를 창립한다. 당시 회장은 최상현(합일학교 교장) 부회장은 황우천(강화산업조합 창립자)이었다.

  

1930년대 이후 강화의 사회운동

  1920년대 중반까지 그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사회운동이 펼쳐졌으나 1930년대 이후 특기할 만한 사회운동이 눈에 띄지 않는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통치체제가 지방에까지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지방 사회의 식민지적 재편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화는 전형적인 농촌사회로 농업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소작쟁의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와 같은 현상을 “마물과 같은 동척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하지만 강화는 50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가진 극소수의 대지주가 대부분의 농토를 소유했고, 소작농 비율이 80퍼센트 이상임을 감안했을 때 단순히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들어오지 않은 것만으로 소작쟁의가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당시 소작쟁의의 주된 원인은 소작권의 변동, 가혹한 소작료 탓이었는데, 강화에서는 소작권 변동이 2.3퍼센트에 불과했고, 소작료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 높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운동가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도시와 달리, 섬의 특성상 사회운동을 이끌 선진적 지식층이 빈약한 탓이라고 여겨진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의 사회운동 세력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6년에는 서봉준, 김근호의 주도로 신간회 강화지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과 감시로 별다른 활동을 펼치지 못한 채 해산하였다.
  1926년 4월 순종 인산일을 전후하여 길상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일반 학교는 총독부의 지시로 학생들의 망곡, 봉도식 등을 철저히 억제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휴학을 단행하거나 독자적인 봉도식을 거행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길상보통학교이다. 4월 30일 상장을 단 학생들을 구타한 교장, 교사 처벌을 요구하며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며 등교 거부에 나섰다. 학부형도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언론이 길상보통학교 동맹휴학을 다투어 보도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길상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은 만세운동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또 1935년 이동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낙향해 있던 유경근이 강화 주민들과 함께 이동휘 추모식을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기도 했다.
  1930년대 이후 직물 산업이 번창하였다. 평양에 소재한 미쯔이물산으로부터 원사를 공급받아 목면과 인견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속속 들어섰다. 강화의 대지주였던 홍씨가가 설립한 조양방직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직물산업이 활황을 이루자 황우천은 산업조합을 창립한다. 회원이 1만 명에 이를 정도로 산업조합은 강화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또 강화진흥회, 강화번영회 창립에 앞장서고 서봉준, 김근호(박길양 처남)와 함께 한성은행 유치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황우천은 한국전쟁 당시 아들인 황주익(강화군인민위원장)과 함께 월북하였다.6

  강화 항일독립운동사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강화학파로 대표되는 개신유학자와 초기 기독교 국권회복운동과의 연관성이나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세력 관계, 흐름이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다. 특히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아마 한국전쟁 당시 좌우 대립과 희생,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조건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분단을 넘어서지 않는 한 강화의 올바른 역사의 탐색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쉬운 점은 강화도 항일독립운동의 뿌리인 성재 이동휘, 죽산 조봉암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추모사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강화의 근대 정신을 형성하고, 반일무장투쟁으로 3·1운동 무렵까지 영향을 끼쳤던 이동휘와 그를 이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조봉암을 기억하는 일은 강화의 항일독립운동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된다.
  또한 강화의 항일독립운동은 한강 하구를 기반으로 경기, 황해 지방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김포의 정인섭이 강화의 3·1만세운동기념비에 기록된 까닭이나 연백의 애사 편강렬 추모비가 강화 평화전망대 마당에 세워진 것을 이해하려면 한강 하구를 기반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분단체제를 넘어서 북한과의 화해, 교류, 협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 강화를 포함한 한강 하구 항일독립운동사가 기획될 날을 기대해본다.

  

  

주석

  1. 성재 이동휘(誠齋李東輝: 1873~1935) 함경남도 단천 출생. 대한제국 군인, 정치가이자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1903년 강화진위대장 부임 후 보창학교 설립 등 애국계몽운동과 1907년 강화진위대의 무장항일투쟁의 정신적 지주였다. 1912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이갑, 신채호, 정재관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으며, 1914년 대전 무관학교 설립,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볼세비키에 가담, 1918년 5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 조직, 연해주 한인적위군 편성 등 북간도, 연해주지역 무장독립투쟁,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으며, 1921년 상해 임시정부 개혁을 둘러싸고 안창호 등과 대립하다가 임정을 탈퇴한다. 그런 와중에 이동휘는 상해파 조선공산당의 영수로서 활동하였고, 1921년 레닌이 후원한 독립자금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김구가 측근인 김립을 모함하여 암살하였다. 생애 말년에는 항일운동가, 사회주의자와 가족들을 후원하는 국제혁명자후원회 원동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1935년 모금 활동을 하던 중 심한 독감에 걸려 사망하였다.
  2. 당시 조직된 강화청년단체는 강화엡윗청년회, 강화엡윗여자청년회, 흥천엡윗청년회, 조산엡윗청년회, 월오엡윗청년회, 교동엡윗청년회, 하점경신친목회, 강화중앙청년회, 삼산엡윗청년회, 갑자청년회, 화동청년회, 강화군청년연맹철산청년회, 송암청년회 등이다. 『인천항일독립운동사』 하,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21, 186쪽 참조.
  3. 정경창(1899~) : 강화 출신으로 1924년 강화중앙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인천노동총동맹에서 활동하였으며,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1925년 11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소재 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4. 이상필(1890~1932) : 강화 하점면 망월리 출생. 우당 이회영 망명 때 동행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군자금 모집차 입국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후 연백 청송학원 교사, 양도면 흥천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강화 청년, 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1932년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5. 『신편 강화사』 상, 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 2003, 673쪽 참조.
  6. 이시우, 「유라시아체계와 전쟁전후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2012. (http://www.leesiwoo.net/?p=791)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