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로 가서 무언가가 된다는 것

  

〈필자 주〉
지난해 나는 코로나19 이후 노동 현장에서 배제된 장애인을 찾아다녔다. 취재를 시작한 후 현재까지 8명의 장애인을 만날 수 있었다.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발달 장애인, 지체 장애인 등 장애의 유형은 다양했다. 이 글은 2명의 지체 장애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 1명은 남성이고 1명은 여성이다.
강경식은 1969년생으로 2000년 7월 노동 현장에서 추락 사고를 겪은 후 장애를 갖게 되었다. 지난해 봄, 광주의 한 쟁아인기관에서 그를 만났다.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삶의 여정과 더불어 장애인에게 일자리는 무엇이고 현재 일자리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설명해주었다. 이에 대해 간략하게 담고, 나는 되도록 그의 생애 서사에 초점을 두었다.
여직임은 1966년생으로 어린 시절 홍역과 소아마비를 겪은 후 자체 장애를 갖게 되었다. 내가 만난 다른 여성 장애인들과 달리, 그녀는 할아버지와 세력 있는 집안의 보호로 어린 시절 장애 의식 없이 당당하게 자랐다. 나는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주변 환경에 따라 한 인간의 사고와 태도가 결정된다. 그런 그녀도 사회로 나간 후엔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피해갈 수 없었다. 주변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 강경식, 1969년생, 지체장애

  저는 목을 다쳐서 지체 장애인이 됐어요. 하지는 전체 마비, 상지는 부분 마비가 됐어요. 손가락은 못 쓰는 편이에요. 저는 2000년도 7월 29일 날 사고가 났어요. 지금도 날짜를 기억해요. 금호건설. 원청은 금호이고 저희는 바로 밑에 하청 회사였어요. 그때 ‘안전관리팀’에서 일을 했습니다. 아침에 저희가 먼저 나가서 현장 조사를 하고 나서 인부들이 작업을 시작하거든요. 근데 뒷걸음을 치다 안전망 있는 곳에서 추락을 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안전망이 부실했던 거죠. 지하 3층으로 추락했는데, 그냥 떨어졌으면 죽었을 것인데, 다행히도 안전 로프에 다리가 걸려 이렇게 장애를 입게 되었어요.
  그날 목숨은 건졌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를) 만지려고, 내리려고 했어요. 그 와중에 외쳤어요.
  “내가 많이 다친 것 같다. 나 만지지 마라.”
  잘못 만지면 잘못되어버리거든요. 그때 그 판단을 했어요. 119가 와서 구조되어서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그날 의식은 잃지 않았어요.
  몸에 감각이 없어요. 목만 살아 있는 거예요. 그 무렵에 의료 파업이 있어가지고, 치료를 바로 해야 하는데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었어요. 병원에서 환자를 다 안 받아버리니까. 돌다 돌다 동아병원에서 수술을 했어요.
  산재 처리 문제로 재판을 좀 오래 했어요. 보상이 적었어요. 산재도 등급이 있거든요. 우리나라는 노동자가 회사의 과실을 입증해야 되잖아요. 안전 로프가 충실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나서 반영이 됐어요. 그때가 제가 딱 서른 초반에 겪은 일이에요.

  

  내가 나를 인정을 안 했으니까

  저는 꿈이 평범했어요. ‘돈을 많이 벌어야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생계를 도맡으니까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뿐였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알바를 시작했어요. 첨 한 게 꽃집 알바. 꽃꽂이 같은 거 해서 다발도 만들고 배달도 하고. 그다음에 구둣방에서도 일했어요. 천막집에서 천막 만드는 보조 일을 계속했죠. 호프집 서빙도 했어요. 그런 일을 꽤 오래 했지요.
  그렇게 일하면서 학교 다녔고 공고를 졸업하고 중간에 취업 현장에 바로 나갔어요. 그때 취업했던 데가 삼정건업입니다. 그 회사에서 집 짓는 일을 했는데, 저는 외장 도색이며 건물 바깥 외벽 페인트칠 같은 것을 했어요. 그 일을 꽤 했어요. 4년 정도 하고 군대 갔다 나와가지고 새시 회사에서 일을 했어요. 창틀 문틀 설치하는 일이에요. ‘효정샤시’라는 곳에서 꽤 일을 했고, 그후에 금호건설 하청 회사에 입사를 했는데, 들어간 지 1년 좀 넘어서 그 사고가 났어요.
  그땐 의사 얘기가 사지 마비로 침대에서 못 일어난다고 했거든요. 다친 부위들이 꽤 심각했거든요. 이 정도가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대개 저같이 다친 분들은 상지도 균형 감각을 전혀 못 잡거든요. 하반신은 사용을 전혀 못하고 상반신은 어깨와 팔 정도는 쓰고, 목 아래로는 감각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통증이 없으니까 더 불안한 거죠. 통증이 있으면 어디가 어떤 상태이고 아픈지를 아니까 관리를 하게 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까.
  사고 전 상태의 몸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많아가지고, 보통 재활을 그렇게 오래 안 하는데, 저는 병원 재활을 5년 이상했어요. 사적으로 하는 재활에 돈이 많이 들었죠. 내 상태가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만 가졌어요. 병원에 있으면서도 바깥에서 자가 치료를 병행했어요. 그래서 이 정도까지 온 것 같아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보다도 뭐가 제일 두려웠냐면,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 무서웠죠. 재활 끝나고 나서 낮에는 거의 안 돌아다니고 밤에만 돌아다녔어요. 사람들 시선을 피해 다녔어요.
  무서웠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예전하고 전혀 다른 내 모습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장애를 얻고 2년 넘게 주변에 말을 안 했어요. 아주 가까운 극소수 사람에게만 얘기를 했어요. 사고 후 1년 넘게 눈만 살아 있었거든요. 중환자실에서 누워만 있었어요.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어요. 한 해 두 해 사람들에게 연락 안 하다 보니까, 연락하려다가도 망설여지고 하니까, 그게 쌓이다 보니 더 못하게 된 것 같아요. 친구들 중엔 5년도 더 지나서 내 소식을 알게 된 경우도 있어요.
  재활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고 살까를 고민했어요. 그때 어느 정도 산재 보상금이 나와서 생곗거리를 찾고 있는데, 내 몸으로 직접 할 만한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다 장사를 한번 해볼까 해서 포차를 하게 됐어요. 저는 명의만 빌려주고 했죠. 내가 육체적으로 오래 가게에 있기 어려우니까 가끔 나갔어요. 돈은 내가 대고 사람을 따로 썼죠. 쌍촌동 먹자골목에서 장사를 했는데, 빨리 망했죠. 1년 정도 한 것 같아요. 사장 따로 종업원 따로니까, 이게 장사는 사장이 직접 관리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포차 열고 처음엔 사람들이 그럭저럭 찾아와서 괜찮았는데 한 달 지나면서 서서히 줄어들었어요. 초기에 투자를 많이 했는데 계속 투자할 수 없어서, 아무래도 서비스도 떨어지고 하니까 손님도 빠지고…….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들하고의 관계나 시선들은 계속 신경 쓰였고 불편했어요. 남의 시선을 어떻게 극복해야지 하는 생각은 따로 없었어요. 왜냐면 내가 나를 인정을 안 했었으니까!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다는 걸 인정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는데 이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요.

  

  죽기 살기로 해야 여행을 할 수 있어요

  친구들이 오면 밤에만 잠깐씩 술을 마시러 갔죠. 그때만 외출했어요. 휠체어 타고 들어갈 만한 문턱 없는 가게가 몇 곳 없는 거예요. 그게 가장 불편했고, 또 하나는 업주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니까, 손님으로 안 받는 거예요. 그러면 장소를 옮겨야 되는데, 제가 깡이 있어서, 막 버티고 “못 가겠다. (나를 손님으로) 받아라” 했어요. 그럼 안 좋게 대접하죠.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라 매번 힘들죠. 밥 먹으며 우리가 웃고 떠들다가도 옆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이 돼요.
  대부분 장소들이 장애인들이 돌아다닐 수 있는 여건이 안 돼요. 그래서 한 곳에 고정적으로 간다든가 해요. 이렇게 활동 영역이 정해져 있어요. 돌아다닐 곳이 거의 없거든요. 쉴 수 있는 공간도 거의 없고.
  저만의 공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엄청 하다가 ‘운전을 한 번 도전해야겠다.’ 그래서 어렵게 배워 면허증을 땄지요.
  제일 편한 데가 차 안 공간이에요. 장애를 입고 가장 잘한 게 운전면허 딴 것이에요. 안전벨트를 안 하면 운전을 못 해요. 균형을 못 잡으니까 쏠리거든요. 핸들을 놓칠 수 있고.
  장애인에 대한 운전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디까지 핸들을 돌리는지, 안장력은 얼마나 되는지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거예요. 그게 제일 어려웠죠. 통과했을 때 정말 큰 산 하나를 넘은 거 같았어요.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운전해보니까 더 힘들었어요.
  저는 기립성 저혈압증이 있거든요. 졸도, 기절하는 현상이 있어서 운전중에 이게 오는 거예요. 또 하나는 안전띠를 해도 균형을 못 잡아서 핸들을 놓쳐버리는 거예요. 지금이야 몸이 적응을 하고 단단해지고 해서 괜찮지만, 그땐 그게 안 됐어요. 회전 구간에서 코너링을 하잖아요. 그러면 운전대를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걸 극복하고 난 후에야 차라는 것이 저한테는 제일 좋은 공간이 됐지요. 그래도 도움을 받아야 운전할 수 있어요. 저는 손을 못 쓰니까 휠체어를 접고 들어 올리는 게 안 돼요. 장애인의 운전을 도와주는 장치들이 있는데, 그래도 누군가가 휠체어를 접어주고 놔줘야 돼요.
  장애가 없었을 때는 여행하는 것을 참 좋아했거든요. 산에 가는 거 바다에 가는 거. 금요일이 되면 무작정 기차를 타고 떠났어요. 부산이나 서울, 강원도에도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장애 입고 여행을 가봤는데 너무나 불편한 거예요. 제주도도 가보긴 했는데 휠체어로 여행한다는 게 하나의 도전인 거예요. 죽기 살기로 해야 여행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조금 욕심부리면 함께 간 사람들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더 힘드니까, 그게 눈에 보이니까, 그게 제일 힘들어요.
  제가 장애 입고 한 10년 정도는 편견이 심했거든요. 사람들 얼굴에 써져 있는 게 보여요.
  ‘이 친구가 불편하면 집에 있지 왜 나왔을까?’
  그게 보이니까 많이 불편했죠. 그래서 되도록 사람을 만나는 것, 함께 밥을 먹는 것,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 전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상당히 좋아했는데…….
  포차 망하고 나서 아는 친구가 집에 찾아와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비슷한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라.”
  그래서 ‘실로암사람들’이라는 장애인 기관을 찾아갔어요. 거기서 목사님이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여기 강의가 하나 있는데, 들어가서 한번 들어봐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인권 교육을 듣게 됐어요. 장애 여성들이 겪은 이야기들이었어요. 단순히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쌍소리를 듣고 험하게는 돌팔매질을 당한 일도 있고.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같은 사람인데 왜 그랬을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때 장애 인권에 눈이 뜨였어요. 그후로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계속적으로 활동을 했지요.

  

  날마다 같은 시간에 어딘가로 가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일을 하고 싶은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뻔해요. 장애인한테 맞는 일자리에 대한 교육이 같이 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장애 정도가 약한 친구들 위주거든요. 괜찮은 일자리는 경쟁이 어려워요. 점수에 따라 선발하는데, 저 같은 중증 장애인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전일제 여덟 시간 일자리는 대부분 들어갈 수 있는 구조가 안 돼요. 이런 일자리는 200만 원 정도 급여가 되니까 괜찮은 일자리잖아요. 그런데 이런 일자리는 저희에겐 거의 없어요. 그렇다면 장애 정도에 따라 분리해서 따로 받아야 되거든요. 중증 장애인들에게 맞는 일자리 계발이 필요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죠.
  국가 정책적으로 장기적인 고민이 없어요. 그게 제일 큰 문제 같아요. 이게 단시일에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일자리는 장애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인데, 이 문제를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그때그때 푸는 거예요. 이름만 ‘맞춤 일자리’이고 실제 맞춤 일자리가 전혀 없거든요. 단순히 사무 보조라고 해서 몇 명 선발해서 주민센터나 복지관에 파견하는 것 말고는 청소 같은 일회성 단발성 단순 일자리들이에요. 장애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지속적인 일자리가 필요해요.
  그런데 공무원들이 순환제잖아요. 5년 정도 있다가 가는데, 이쪽 일은 어려우니까 대부분 공무원이 1년 이내에 떠나버려요. (장애인 일자리 정책을 세우려면) 전담 공무원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요.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등에선 장애인 당사자들이 택배 일을 한다는데, 왜 우리는 못할까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장애인 일자리를 마련하려면 기본 환경을 어느 정도 마련해야 한다는 거구요.
  저희가 복지관에 일자리를 신청하면 연계해 주는데, 저는 우리 지역 안에서 일하고 싶은데 하남공단 등 타지로 연계가 돼요. 내가 사는 지역에서 일하고 싶은데, 없어요. 이 안에서 다양한 일자리를 계발하고 연계해줘야 하는데 이런 고민이 없다는 게 아쉽지요.
  그리고 최저임금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게 급여를 줘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장애인 일자리는 예산의 우선순위에서 늘 밀려요. 예산이 수반되지 않는 정책은 공염불이잖아요.
  장애인에게 일자리는 행복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죠. 노동을 통해서 삶이 완성되거든요. 내가 장애를 입기 전엔 돈을 많이 받는 일을 찾곤 했는데, 장애를 입은 후엔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조건인지 알게 됐어요. 날마다 같은 시간에 어딘가로 가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누구에게는 별 게 아닐지라도 저희에겐 절박하고 소중한 거예요.

  

  

2 인형의 나라에서 보낸 한 세월

    ─ 여직임, 1966년생, 지체장애

  저는 ‘직녀’예요. 음력 칠월 칠석,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에 태어나서 할아버지가 ‘직녀’라 이름 붙이시려다 놀림당할까 봐, ‘짤 직, 맡을 임’ 자를 써서 ‘여직임’이 되었어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예요. 담양 향교에서 몇십 년 동안 전교典校를 하셨어요. 여중에 다닐 때, 하교 시간에 맞춰 할아버지가 향교 다리에 쭈그리고 앉아 계셨어요. 저 주시려고 향교에서 한과나 다른 간식을 들고 나와 계신 거죠. 그렇게 인자하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어요.
  다른 장애인들 말이, 저 같은 장애인들은 드문 케이스래요. 어릴 때부터 차별 안 받고 자존감 높고 내 의사와 주관이 뚜렷하고. 우리 시대엔 장애를 가문의 망신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정에서조차 차별과 학대를 받는 경우가 많아요. 제 또래 장애 애들 보면 부모가 벽장에 가두고, 교육도 안 시키고, 심지어 같은 형제들 수발들게 하고, 가족들부터가 함부로 한 거죠. 그 시대에 소아마비 겪은 애들은 저처럼 걷는 사람 드물어요.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하죠.
  저는 할아버지 덕분에 그런 거 모르고 자랐어요. 집에 손님이 오면 저부터 불렀어요. 우리 딸, 세상에서 제일 이쁜 손녀라고 이렇게 컸다고 절 불러요. 남들도 저를 쉽게 못 놀렸어요. 왜냐, 제가 울타리가 짱짱하거든요. 저희 집안이 지역 유지이기도 했지만, 할아버지가 저희 엄마한테 그랬어요.
  “아이 인생이 먼저다. 그러니 너는 집안일 신경 쓰지 말고 아이 치료에 전념해라.”
  길을 열어주신 거죠. 종갓집이고 아버지가 장손이다 보니 제사가 많았어요. 그런데도 아이를 치료받게 하라고 해서 엄마가 저를 데리고 안 다닌 곳 없이 다녔어요. 서울 세브란스병원까지 갔는데, 완치는 불가능하고 더 진행만 안 되게 한댔어요. 그 덕분에 이 정도 장애에 그친 거죠. 우리나라는 소아마비 세대가 1985년으로 끝났어요. 1985년 학계에 5명 발생 보고하고 더 이상 한국에선 발생되지 않아요. 소아마비 세대는 제가 제일 젊어요.

  

  은혜 받아서 장애인 됐다구요?

  저는 집안에서 배려의 아이콘이 됐어요. ‘무조건 쟤한테는 양보해야 되고, 쟤한테 우선권이 있고, 좋은 건 먼저 쟤한테 주고’. 아버지도 어딜 가실 때면 절 데리고 갔어요.
  “니가 많이 보고 많이 겪어야 살아가는 데 도움 된다.”
  저는 초등학교 때 다방도 가봤어요. 아버진 뭔가를 사 오더라도 꼭 제 것을 사 오세요. 그래서 제 밑에 막내가 막내 대접을 못 받았어요.
  학교 다닐 때도 전 당당했어요. 초등학교 땐 언니 오빠들이 공부를 다 잘해서 반장을 하고 있었어요. 학교 선생님들이 제가 누구 동생인 걸 알잖아요. 교감선생님이 아빠 친구였구요. 저 어릴 때 할아버지가 집안 사람들과 동네에 엄포를 놓으신 거야.
  “저 아이를 그 누구라도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말을 함부로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저도 누가 저를 놀리면 가만 안 있어요.
  근데 초등학교 때 같은 반 남자아이가 그걸 모르고 절뚝발이라고 저를 놀린 거예요. “절뚝발이가 뭐할 수 있어? 달려와서 나 잡아 봐.”, 그래서 “너 말 다 했냐?” 하니까, “다 했다. 어쩔래? 니 같은 것이 뭐 잡을 수 있겠냐!” 하길래, “그래, 그러면 내가 잡아서 널 어떻게 해도 니가 책임져.” 하고는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다가 내 주변에 얼쩡거리는 순간 딱 잡아서 반 죽여버렸지. 여자애들은 이미 쟤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안 놀리죠. 근데 남자애들은 호기로 그러잖아요. 옆에서 애들이 구경하는데,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울 오빠를 부를 거니까 어쩔래? 나 또 놀릴래?” 그랬더니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다신 절 안 놀리게 됐죠.
  난 어릴 때부터 누가 나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걸 저절로 느낀 것 같아요. 보통 장애인들은 사람 많은 곳 가면 잘 못 걸어가요. 저는 애기 때부터 당당하게 고개 쳐들고 걸어가요. 보란 듯이!
  어릴 때 어떤 사람이 전도한답시고 저한테 ‘은혜받아서 장애인 됐다’고 그래요. 미쳤어! 정말 메다꽂아버리고 싶더라구요. 치기 어린 마음에, “그럼 당신 따님 장애인 만들어서 축복받게 하세요. 은혜받으세요.” 그래서 신앙생활 안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신앙생활 해요.
  저는 생후 8개월 때 홍역과 소아마비를 동시에 앓아서 심하게 장애가 됐어요. 엄마가 큰 언니한테 “애기 좀 봐라. 새참만 주고 올게.” 하고 나가셨는데, 그 사이에 큰 언니가 놀러 가버린 거야. 와서 봤더니 애기가 마루에서 토방으로 떨어져 까무러쳐 있더래요. 젖을 물리려고 안아 세웠더니 그대로 주저앉더래. 눈도 뒤집혀 흰자위밖에 없고.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돌 때잖아요.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바로 병원 갔더니 소아마비라고.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여러 군데로 퍼져요. 거의 척추서부터 시작하는데, 주로 척추 밑으로 퍼지거든요. 소아마비는 대게 다리로 가죠. 두 다리로 퍼지는 사람도 많은데, 저는 다행히 왼쪽 다리로만 가서 그나마 꾸준한 치료 덕분에 보정구 없이 여지껏 다녀요. 지금은 나이도 먹었으니까 보조기구를 착용하라고는 해요.
  소아마비도 열 때문에 신경과 핏줄과 근육이 차단돼요. 고열로 시신경과 청신경이 끊어져 시각 장애 청각 장애 오는 것처럼. 그래서 굉장히 빈약하게 자라요. 제 다리를 보면 두께가 반반이에요. 멀쩡한 다리 이런 데, 아픈 다리는 그 반밖에 안 돼요. 다리에 영양이 안 가니까 자랄 수가 없지. 영양이 가는 신경, 힘줄, 근육이 다 끊어져 있으니까, 한마디로 죽은 거죠.
  소아마비는 진행이지 좋아질 수가 없어. 왜냐, 보통 비장애인도 시간이 지나면 디스크며 척추 협착, 좌골 신경 등 몸에 안 좋은 게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근본적으로 짝짝이고 중심이 기울잖아요. 당연히 나빠질 수밖에. 오죽하면 휠체어 타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휠체어가 (나와) 한 몸이 돼요.

  

  그 말이 제일 가슴 아팠어요

  중학교 이상 올라가니까 신체적 발달이 되잖아요. 다리를 더 저는 거예요. 상체가 발달하다 보니까. 그런 차에 여수 애양원에서 수술한 삼촌이 있었어요. 그 삼촌이 다리를 짚고 다녔는데, 정말 멀쩡해진 거예요. 아버지 생각에 저렇게 심한 경우도 좋아지는데 우리 딸은 완전히 고쳐지겠다 생각하셔서 애양원 가서 수술 날짜를 잡은 거예요. 난 수술하기 싫었어요. 이대로 살 거라고 했더니, 그 삼촌 봤잖냐고.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고등학교 휴학을 하고 키를 줄이는 수술을 했어요. 양쪽 다리 길이가 10센티미터 정도 차이가 나니까 길이 차이를 줄인다고 멀쩡한 다리도 바보 다리로 만들었지. 허벅지 대퇴부를 절단해서 다시 나사를 박아 붙여서 키를 5센티미터나 줄였어요. 그래서 지금의 키가 됐어요. 수술 마치고 우리 오빠 등에 업혀서 집으로 갔어요. 상태가 좋아진 게 아니라 더 안 좋아졌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이런 일 어딨냐고 대성통곡하고. 2차 수술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어요. 그 사이 친구들은 이미 졸업했고, 난 다리가 아프니까 공부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졌어요.
  졸업 후, 서울에서 디자인 학원을 다녔어요. 의류 업계에 의외로 장애인이 많았어요. 왜냐면 몸이 아프니까 앉아서 하는 일이 맞으니까. 장애인이 접근하기 나은 직업이죠. 의상실 하는 분들 중에도 장애인 많으세요. 재단 같은 거 배워서 종사하는 분도 많고. 수제 구두 제작하는 분들 중에도 장애인 많아요. 농인의 경우엔 네일아트, 바리스타를 많이 해요. 남성 장애인들은 금은 세공을 많이 해요. 정밀하고 장시간 앉아 있는 데 익숙하니까. 여자분들은 봉제 분야로 많이 나가고요.
  학원 소개로 간 첫 직장은 완전히 바닥인 거예요. 디자인 회사에서 막내는 모든 치다꺼리를 다 해야 하는데, 내 자존감에 너무 힘든 거예요. 제일 싫은 게 커피 심부름이었고, 자재 옮기고 하는 것들, 나는 힘쓰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여지없이 시키더라고요. 디자인 계통은 그 순서를 밟아야만 다음 단계로 가요. 내가 이 짓 하려고 디자인을 배웠나 싶더군요. 내가 기존에 살아온 생활과 너무 다르니까. 무엇이든 내가 다 참아야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 해야 하는 거잖아요. 장애가 있으니까 신체적으로도 더 힘들었고, 척추 디스크가 생겼어요. 장애인으로 살면서 처음 겪은 아픔이에요. 이래서 장애인들은 힘들게 사는구나. 그 상처가 커요.
  그때만 해도 장애인 인권 이런 게 없어서, 장애인 차별과 학대, 폭언이 당연시되는 사회였어요. “병신 주제에 능력이라도 있어야지.” 그 말이 제일 가슴 아팠어요. 직장 상사가 한 말이죠. 그래서 쳐다봤어요. “쳐다보면 어쩔 건데?” 그러는 거예요. “저 돈 없어서 여기 다니는 거 아니에요. 능력 키우고 배우러 온 거예요. 그렇게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럼 어쩔 거냐고 물어요. “첫 월급 받고 그만둘 거예요.” 첨부터 그랬어요. 제가 부당함을 참고 온 거는 내 월급을 무슨 일 있어도 받고 그만두려 그랬어요. 맘대로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때는 장애인 차별 신고하고 그럴 곳이 없었어요. 지금은 장애인 차별하고 학대하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기하면 되는데, 그때는 비장애인한테도 그런 폭언을 함부로 하던 시대잖아요. 그런데 장애인한테는 얼마나 더 심했겠어요. 전 어지간하면 안 울거든요. 자존감 뿜뿜이었던 사람이 바닥을 치니까 밤마다 울었어요.
  심지어 대놓고 ‘한 번 하자’는 둥, 미쳐버리겠어. 진짜 개새끼들 욕 나와. 나는 딱 쳐다봐요. “뭔 말이세요?”, “뭘 알면서 왜 그래? 진짜 몰라?” “네 몰라요.”, “그럼 됐어.” 그러는 거예요. 한 달 반 동안 그런 일들을 겪어버리고 나니까, 그 수치감, 모멸감.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는 이렇게 힘든 거구나!’ 그 상처가 커요. 한 달 반 동안 직장 체험하면서 장애인으로서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기어이 첫 월급은 받아내고 그만뒀어요.

  

  살기 싫어서 가요. 슬퍼하지 마세요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이 고마운 줄 알았어요. 그전까지는 부모가 관리를 못해서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거라고, 나는 당연히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일을 그만두고 담양 집으로 내려왔어요. 한의원 다니면서 허리 디스크 치료를 받고 백수로 6년 동안 용돈 타서 살았죠. 주로 여행을 했어요. 무박여행을 다녔어요. 막차 타고 가서 새벽에 도착하면, 역에서 첫 버스 오기를 기다려요. 첫차 타고 내가 원한 목적지 가서 여행하고 거기서 막차 타고 오는 식으로요.
  그런데 마냥 이렇게 부모님 밑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돈 탈 때도 마음 편치는 않고, 인생이 허망한 거예요. 삶을 잘 살아야겠다, 누구처럼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나도 없었어요. 너무 무기력해서 삶에 애착이 없었어요. 이렇게 살 바에는 머리 깎고 절에 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애양원에서 만난 곡성 도림사의 스님 한 분과 인연이 있었거든요. “스님 나 받아줄 거예요?” 했더니 언제든지 오래요. “웃자고 한 소리 아니예요. 난 절실해요.” 그런데 그때 여동생 결혼 앞두고 절에 가기가 그래서 결혼식 끝나고 가자 하고 미뤘는데, 그러다 어떤 계기로 내가 건축회사에 취업을 하게 됐어요.
  둘째 언니 소개로 경기도 안산의 건축회사에 들어갔어요. 6개월 일했어요. 근무일지 쓰고, 단순 사무와 경리를 봤죠. 그때 경상도 남자를 사귀었는데 장손이었어요. 근데 그 남자 집에서 누나랑 엄마가 나를 만나러 온 거예요. 결혼 못하게 하러 왔다가 내가 그럴 거 아니라 하니까 그럼 왜 만나느냐고 화를 내는 거예요. 그냥 친구처럼 만났는데, 사람 만나는 것도 죄냐고 했더니 “적은 나이가 아닌데, 결혼할 것도 아니면 우리 아들이랑 헤어질 수 있겠네”라는 거예요. 그때 장애인으로 두 번째 충격을 받았어요.
  여성 장애인이라고 해서 나를 보지도 않고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못 만나게 하려고 설쳤구나.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우리 집에서는 이 세상에 우리 딸이 제일이고 어디에 대도 안 부족한데, 내가 다리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취급 당해야 하는구나. 그러니까 인생이 더 허망한 거예요. 내가 굳이 살 필요 없겠다. 어차피 내 인생은 험난하고 고통의 연속일 텐데, 굳이 연명할 필요가 없잖아. 그래서 수면제를 모았어요. 살기가 싫은 거예요. 여관에 가서 3일 치 숙박료 계산하고, ‘나 죽을 거 아니니까 놔두세요’ 부탁하고. 약 먹고 몸이 붕 뜨더니 이렇게 죽는구나. 유서에도 “살기 싫어서 가요. 슬퍼하지 마세요.” 딱 두 줄만 썼어요. 우리 부모 슬퍼할까 봐. 슬퍼하지 말라고. 제일 슬퍼할 사람은 부모니까. 그런데 깨어나더라고. 죽으려고 했는데, 죽는 것도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럼 살 바엔 열심히 살아야지! 그 계기가 됐어요.
  그 후 안산 둘째 언니네 집 옆에서 비디오 가게를 했어요. 제가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컬트 무비도 좋아했고. 비디오 가게 하면 취향도 맞고,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까. 가게에 오던 손님이 애아빠가 됐어요.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한 남자였어요. 헤어지고 난 후에도 그 뒷모습을 보고 싶어서 한참을 바라봤어요.
  결혼하겠다고 하니 그쪽에선 내가 장애인이니까 반대하고, 양가에서 반대했어요. “우리 그냥 살자. 너하고 나하고 서른이 넘었는데 부모 동의가 필요해?” 그래서 같이 살았고 큰애를 낳았어요. 형식이나 그런 건 나는 안 중요해요. 큰애를 낳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인정을 해준 거예요.
  제가 인생이 굴곡지고 파란만장해요. 남편이 너무 매력적이고 잘해요. 근데 도박을 해요. 원래 도박했다가 나 만나서 끊었는데, 생활이 안정되니까 카드 도박으로 하룻밤에 아파트 한 채를 날리고 와요. 그래서 이혼하고 광주에 내려왔어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학습되었으니까

  우리 딸 다섯 살 때, 천재도서 광주지사에 취직했어요. 4년 일했어요. 판매, 서류, 경리, 상담 등 멀티로 일했어요. 직원이 총 30명 가까이 됐죠. 그때 제 나이가 서른다섯인가 그랬고, 부장이 나보다 한 살 어렸어요. 제가 전산 다루는 게 서툴잖아요. 컴퓨터 켤 줄도 모른다고 막 뭐래요. “첨부터 잘하는 사람 있어요?” 내가 일도 못하면서 너무 당당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놀라버렸어.
  처음에 상무가 나 오는 거 반대했대요. 여성 장애인이고 경력도 없고 나이도 많다고. 상무는 사장 친구예요. 말이 너무 거칠었어요. 다 상무를 무서워하고 싫어해. 나하고 상무하고 나이 차이가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인가 났었어요. “상무님 여동생 있죠? 사모님 있고? 제가 물론 일 못해서 답답하고 복장 터지겠지만 제가 일이 숙달될 때까지만 기다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이게 생업인데 그만두기를 바라셔요?” 했더니, “아따 말을 어째 그렇게 혀요?” “하시는 말이 그렇잖아요. 저도 사람인데 너무 함부로 하잖아요.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왜 있겠어요? 상무님도 태어날 때부터 잘했어요?” 내가 당당하게 그래놓고 업무를 빨리 배웠어요.
  직장 생활에 감사했어요. 농땡이 안 치고 청소하고 책 정리하고 상담, 판매, 장부 정리하고 다 했어요. 출근은 칼이고 퇴근은 고무줄이야. 영업 나갔다 온 사원이 마감을 해야 퇴근을 해. 출고와 입고, 반품 리스트 작성해야 하니까. 우리 딸 어린이집 다닐 때잖아요. 제가 출근하면서 시간 되면 병원에 전화를 해요. 딸이 혼자 병원 가서 약 받아서 약국에서 약 먹고 어린이집 냉장고에 항생제를 둬요. 아기가 몸이 약했어요. 가습기 피해자예요. 난 그걸 몰랐어요. 애기 어릴 때 가습기에 약 사다 넣었거든요. 근데 카드 말소해서 내역이랑 영수증을 안 가지고 있잖아. 일주일에 세 번 감기 천식, 병원엘 다녔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애기를 위한다고 가습기 살균제를 많이 썼더라구요. 근데 그 피해를 증명하기가 어렵더라구요.
  처음엔 장애인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지내다 보니 내가 활발하고 능력도 있고 새롭다고 하대요. 새로운 장애인을 경험한 것 같다고. 여대리는 기존 장애인 같지 않고 기 안 죽고 자기 주장도 강하다고.
  첨부터 대리였어요. 거기는 승진이나 이런 건 없어요. 남자들만 과장에서 부장되고 조금 승진되지. 영업직 직원들만. 여사원들은 만년 대리로 지냈어요. 월급만 조금씩 올라갔죠. 그때 돈으로 120만 원이 첫 월급이었어요. 최저임금 기준이 없었어요. 그만둘 때는 150만 원 정도 받았어요. 저는 직장 생활에 감사했어요.
  장애인도 능력이 나은 사람 있고, 떨어지는 사람 있고 비장애인과 다르진 않아요. 근데 내가 학업의 길이나 뭔가를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비장애인보다 장벽이 높다는 거죠.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적인 시선 속에서 비장애인들과 소통이나 관계 형성이 힘들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거를 역량이나 능력으로 판단해 버리더라구요. 마음을 열고 조금 기다려주면 좋겠는데, ‘아, 저 사람은 장애인이니까 하다가 그만두겠지.’ 그래서 장애인이 그걸 못 견디고 스스로 그만둬. 그런 일이 다반사죠. 장애인들은 그게 버거워요.
  특히 여성 장애인은 자존감이 바닥이에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학습되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멸시받고 차별받고 학대당했으니까. 첫째 가족과 사회로부터, 결혼해서는 시댁에서. 그러다 보니 피해의식도 강해요.
  제가 여성 장애인들에게 평생 교육을 많이 해요. 자존감 근육 키우기 교육을 하는데, 근데 그때뿐인 게 많아. 살아온 내내 몸에 배어 있잖아요. 한순간 안 바뀌거든요. 학습할 때는 돼. 지나고 보면 그전의 본모습으로 돌아가. 나는 그게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요. 직장에서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면, 왜 나를 차별하나 항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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