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거꾸로 내린다

  
  

  웅은 아내 현의 손을 꼭 잡고 창가에 섰다. 아내의 손은 차가운 땀으로 축축했다. 전부터 가끔 그랬다. 하지만 이번 주 들어서는 매번, 그가 손을 잡을 때마다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좀 더 섬세한 성격이었다면, 그의 손바닥 감각이 섬세한 전자 센서 같았다면 아마 그는 그녀의 손바닥을 적시는 땀이 매일 조금씩 더 차가워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손이 차?”
  “응?”
  “내 손이 찬 것 같아?”
  웅이 눈만 껌벅거리고 있자 아내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중지와 검지 끝으로 아내의 손바닥을 살살 긁었다. 작고 좁은 손바닥.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사이즈. 거기에 부드럽고 따뜻하기까지 하니 그의 마음은 언제나 아내의 손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다시 손가락 끝으로 아내의 손바닥을 문질러보았다. 부드럽지만 따뜻하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따뜻함은 새어나가고 축축한 빈자리만 남았다.
  빗방울 몇 개가 거실 통창에 맺히기 시작했다. 바람에 생기 없이 흩어지기만 하니 비는 금세 내리다 말고 허공에서 말라버릴 것이다. 구름장을 뚫고 겨우 마당까지 내려온 햇빛이 빗방울들에 맺혀 흐릿하게 빛을 냈다. 유리 표면을 생기 없이 죽어가는 빛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웅은 오래전에도 그런 빛을 본 적이 있다. 한강에 홍수가 났을 때, 그는 한강을 건너가는 다리 입구에 오늘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양화진에서 다리를 건너 선유도에 잠깐 들러 사진을 찍고는, 양평동의 베이글 가게에 들를 참이었다. 비는 오전에 그쳤다. 그는 다리 입구에서 둔치 공원으로 내려가는 기다란 층계가 흙탕물에 잠긴 것을 바라봤다. 한강이 층계를 반이나 삼켜버렸다. 한강이 공원도, 공원의 나무들도 삼켜버렸다. 그는 사나운 야수처럼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봤다. 느티나무 한 그루가 이파리들을 흐느적거리며 야수의 드넓은 근육을 따라 오르내리며 서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물 반 쓰레기 반이었다.
  한강은 평소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는 묵직한 무엇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소용돌이를 만들고, 가로수와 쓰레기를 빨아들였다 뱉어내고 다시 빨아들이며 서쪽으로 실어 갔다. 그리고 묘하게 유혹적이었다. 고통 없이 죽기에 좋은 기회였다. 그저 뛰어내리기만 하면 강물의 발톱이 단 1초 만에 그의 머리를 박살 내고, 송곳니와 어금니가 젖은 휴지처럼 그의 몸을 흩어놓고 갈아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웅에겐 사랑이 있었다. 애초에 다리를 건너기로 한 것도 결혼을 앞둔 현이 전화를 해 베이글을 사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깨 뿌리고 훈제 연어 넣은 거. 마요네즈 빼고. 계피 맛 베이글은 자기 먹을 거면 사 오든가. 근데 거기는 왜 갔어?
  하지만 웅은 다리를 건너지 못했고,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한강을 속절없이 바라만 봐야 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우중충한 잿빛 풍경을 가르며 유리 같은 뭔가가 그의 시야에서 흐릿하게 반짝였다. 청록색 유리와 철골로 이뤄진 커다란 구조물이었다. 피라미드처럼 꼭대기가 뾰족하게 각진 형태였다. 화원이나 식물원 천장 같기도 했고 교회 지붕일 수도 있었다. 한강 상류 어느 운 나쁜 카페의 지붕일 수도 있었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유리 구조물은 기적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웅은 가방을 열어 카메라를 꺼내 켜고 눈에 뷰파인더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유속이 빨라 유리 구조물은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가버렸고, 그래서 줌을 한껏 당겼어도 너무 조그맣게 찍혔다. 게다가 짧은 순간 그를 유혹했던 죽어가는 듯한 반사광이 전혀 찍히지 않았다. 사진에는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는 각진 얼룩 하나가 나뭇가지 더미에 얹혀, 조장을 치르듯 빛을 잃고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사진을 현에게 보여줬다. 그녀는 유리 구조물을, 생기 없이 반짝이며 죽어가는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사진에서 발견한 것은 홍수가 난 한강을 뒤덮은 쓰레기더미들이었다.
  

  현은 주방에서 커피 캔을 하나 땄다. 이 이탈리아 커피 메이커는 망했지, 하고 어느 날 옆집에 이사 온 박 씨가 울타리 너머에서 전했다. 그래요? 홈페이지에 들어가봐요. 하지만 일리 커피 홈페이지에선 여전히 멋쟁이 이탈리아 남자가 테베레 강변에서 앙증맞은 에스프레소 잔으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멀쩡한데요? 배너를 클릭해봐요. 그녀는 매장 찾기 배너를 클릭했다. 일산에 하나 있었는데. 하지만 화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톡톡 액정을 두드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일리 커피 맛이 그리운 사람들이 인터넷에 묘비처럼 세워놓은 팬 페이지예요. 아, 그런데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두 집의 마당을 나눈 울타리에 팔을 걸치며 박 씨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일리 커피 유통 담당이었으니까.
  박 씨는 밀린 보너스와 쓰지 못한 연차 휴가 대신 커피를 받았다며 현에게 자기 집에 들어와서 구경해보겠냐고 했다. 따라 들어가기 망설여졌지만 대낮이었고 남편 웅이 거실에 있었다. 그녀는 박 씨 집 작은 방 두 면에 가득 쌓인 일리 커피 상자들을 봤다. 어때요? 싸게 몇 상자 들여가요. 박 씨가 모카포트에 끓인 에스프레소를 대접하며 말했다. 그녀가 싼 가격 때문에 두 상자나 산 건 아니었다. 거절하면 박 씨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히 보여서였다. 마침 커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고, 그녀도 남편도 물보다 커피를 더 자주 마셨다. 그리고 두 상자 가운데 한 상자를 비웠을 때, 박 씨는 그 집에서 실려 나갔다.
  현은 주방 쪽창을 열고는 바깥 창턱에 쌀알 몇 개를 흩어놓았다. 그녀는 입술을 모아 피리 소리를 흉내 냈다. 그녀는 모카포트가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며 창턱에 귀여운 손님들이 날아드는 것을 봤다. 부리가 짧은 주황색 깃털의 새들이 먼저 와서 쌀알을 쪼았다. 그녀가 쌀알을 한 줌 더 흩어놓자 이번엔 부리 아래 노란 수염이 난 새들이 와서 자기 몫을 챙겼다. 다음은 참새 이웃들이 날아왔다.
  사람도 견디기 힘든 땡볕과 폭염 가운데서 이 작은 새들은 잘 살아남았다. 깃털엔 윤기가 돌았고 울음소리는 맑고 높았다. 하지만 모두가 잘 적응한 건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온 동네를 뒤져도 이 아이들이 전부일 것이다. 성난 자연은 작고 아름답고 숨을 곳이 없는 생명을 먼저 쓸어갔다.
  현은 머그잔을 들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은 아직 뜨거웠다. 샌들을 신었어도 발바닥에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거기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몇 모금 마시니 등골을 타고 땀줄기가 흘러내리고 셔츠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해는 지고 있었다. 멀리 향교 고택의 팔작지붕 너머로 홍시 빛깔 해가 이글거리며 지고 있었다. 향교는 남편이 정규직 직장을 잃어버리고 그녀가 근근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관리하는 사람 없이 버려져 방치되었다.
  누군가 차로 들이받아 담장 한 귀퉁이가 무너졌을 때, 보다 못한 현이 주민센터에 신고를 했다. 그래서요? 네? 인력도 없고 돈도 없다고요, 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가 답했다. 그녀는 향교가 민간 소유인지 공기관 소유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문화재청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정 보기 딱하시면 풀이나 뽑아주세요, 하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예의 바른 목소리가 말했다. 네? 나라에 돈이 없다고요. 인력을 파견할 돈이 없다고요. 아니, 아직 어디에 있는 무슨 향교인지도 말 안 했잖아요, 그녀가 항변했다. 안다고 달라지나요? 이틀이 멀다 하고 이런 민원이 들어와요. 전화 받을 인력도 부족하다고요. 제가 원래 전화나 받는 사람이었겠어요?
  현은 그래서 잔디 호미를 들고 남편에게는 삽을 들려서 주기적으로 향교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잡초를 뽑고 담장을 수선하고 돌쩌귀의 녹을 제거하고 문짝을 바로잡는 일을 하고 나면 배가 홀쭉해졌지만 정부가 그들 부부가 하는 일을 알고 싶어 할 리 없었다.
  현은 머그잔을 비우고 호주머니에 넣어온 쌀알을 꺼내 허공에 손을 펼쳤다. 그러고는 호륵호륵 피리 소리를 냈다. 마당을 찾아오는 새 종류 가운데 어느 새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지만 그녀 나름 애를 써서 연습한 것이었다. 주방 창가를 기웃거리던 새들 몇 마리가 날아와 주변을 맴돌다 손바닥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저씨, 그거 커피예요?”
  울타리 너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혜린이었다. 웅은 아저씨라고 부르면 기분이 나빴지만 울타리 너머의 저 여자아이는 눈치가 없든가, 상대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머그잔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커피 잘 마셔요.”
  울타리 너머의 혜린이는 검은 천이 늘어진 커다란 우산을 펴들고 있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마당에 나타날 때면 집에 작고 귀여운 양산이 없다는 사실이 약간 창피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내의 손에 들린 아이보리 빛깔의 레이스 양산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혜린에게 없는 양산이 아내에겐 있었다. 지금도 아내는 그 양산을 쓰고 마트에 갔다. 채소 매대가 다시 채워졌다는 소식이 들려서였다.
  “잘 마시겠지.”
  웅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남은 커피를 가져와 혜린에게 건넸다. 그녀 가족은 박 씨가 실려 나가고 두 달인가 있다가 그 집을 차지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마당에 비질을 하려고 나갔다가 웬 낯선 여자가 울타리 너머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젊다기보다는 앳돼 보였고, 그래서 그녀를 볼 때마다 나이를 캐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남자와 살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결혼을 했을 나이는 아니었다. 아내는 겁을 냈고 의심했다. 아내는 옆집 가족이 정식 부동산 계약을 하고 그 집에 들어왔는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다가 빈집을 발견하고 문을 따고 들어가서는 눌러앉게 되었는지부터 의심스러워했다. 동네에는 비어 있는 집들이 적지 않았고, 행정력도 미치지 않으니 누구라도 들어가 살 수 있었다. 몇 달이고 비어 있다가 갑자기 창문에 불이 들어오게 된 집들이 주변에 있었다.
  아내 현은 그래서 옆집에 들락거리는 사람들과는 할 수 있는 한 말을 섞지 않았다. 하다못해 옆집 마당에 파라솔 세트가 없는 것도 못 미더워했다. 박 씨도 없었잖아. 그 아저씨는 돈이 없었지. 저 커플도 돈이 없을 수 있지. 나한테 커피를 얻어 마신다고. 당신 없을 땐 나한테 커피를 달라고 하지. 아내는 옆집을 돌아보며 말했다, 창문 커튼도 박 씨 아저씨가 썼던 거 그대로 쓰잖아. 저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게 없나봐, 어떻게 저걸 그대로 써? 하고 아내는 파라솔 그늘에서 맨살을 드러낸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저씨, 술은 안 드세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대여섯 발짝 떨어져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웅에게 혜린이 물었다.
  “왜요?”
  “저, 술도 잘 마셔요.”
  웅과 현은 이웃들과 다정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마당도 오가고 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겼다. 둘은 남들과는 대화는 용건만 간단히, 초대는 금지 원칙을 갖고 있었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 아닌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옛 친구나 친척이 안부를 물어오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다정함이 독인 세상이었다. 그는 최근 들어 부쩍 불친절해진 경찰의 순찰차도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언제 순찰차에서 뛰쳐나온,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린 경찰이 그들 부부에게 곤봉을 휘두를지 모를 일이었다.
  “난 술 안 마시는데.”
  웅이 말하자 혜린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표정이 솔직하고 반응이 빠른 것도 이 여자아이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라는 걸 말해줬다.
  “하지만 아줌마는요? 와인은 마시겠죠?”
  웅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내는 와인도, 술도 좋아했다. 대체로 단맛이 나는 계열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웃과 나눠 마실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니, 나쁜 것은 나누고 좋은 것은 둘이서만 즐겨야 한다.
  

  현은 마트 식품 매대 앞에서 망설였다. 수증기가 마트까지 오는 길에 달아올랐던 그녀의 팔뚝을 차갑게 어루만졌다. 식품 가격의 폭등에는 마트 매대의 냉장 비용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때 칸마다 다양한 식품이 진열되었던 매대에는 이제 이쪽부터 저쪽까지 절반이 김치였다. 포기김치, 맛김치, 열무김치⋯⋯. 남편 웅이 직장에서 떨려났을 때 그녀는 식탁에 김치를 쓴 이런저런 반찬들을 작은 그릇들에 담아 올렸다. 남편은 밥을 먹다가 뭔가 눈치를 채고는 왜 다 김치뿐이야? 하고 물었다.
  김치가 제일 싸, 하고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는 안 올랐어? 하고 남편이 물었다. 김치도 올랐지, 현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일 싸. 가성비가 좋다고. 그리고 날이 갈수록 마트 매대는 가성비 좋은 싸구려들이 점령했다. 그러고도 매대는 텅 빈 자리가 늘어났고 마트 조명은 낮에도 어둠침침했다.
  현은 기다렸던 채소 몇 가지와 함께, 무슨 재료로 만들었을지 의문인 소시지와 베네수엘라산 냉동 돼지고기 200그램을 담았다.
  “생닭은 언제 들어와요?” 현이 계산원에게 물었다.
  “목요일요.” 계산원이 소시지의 바코드를 찍으며 대꾸했다.
  “저번에도 화요일이라고 해서 왔더니 없더라고요.”
  “목요일요. 봉투 드려요?”
  현은 쇼핑한 물건을 자전거 짐칸에 실었다. 그녀는 양산을 펴서 한 손에 들고 한 손으론 핸들바를 잡고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지름길이 있지만 그녀는 폭이 넓고 시야가 탁 트여 있는 이쪽 도로만 이용했다. 그녀는 이 도로의 풍경을 좋아했다. 산 중턱에는 살굿빛 테라스가 멋진 타운하우스가 둘러져 있고 도로변에는 야트막한 빌라들이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무서워하는 경찰서도 있었다. 농구코트도 지나갔다. 우레탄 바닥이 곳곳이 갈라지고 일어서 있지만 활기차게 움직이는 남자아이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그녀는 놀이터를 지날 때면 페달을 빨리 밟았다. 무슨 광경과 맞닥뜨리게 될지 조마조마했다. 지난주에는 후드티를 푹 눌러쓴 어린아이가 잘 차려입은 젊은 남자에게 둘둘 만 검은 비닐봉지를 건네고 있었다.
  현은 집에 도착해 바깥 출입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울타리 너머에서 옆집 여자아이의 억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자전거를 마당 안쪽 그늘에 세워두고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양산의 주름을 하나하나 여유롭게 고르며 소리에 귀 기울였다. 성긴 울타리 틈 사이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거칠게 아랫도리를 치대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옆집 남자아이는 직장이 있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한 모양이었다. 옆집 어린아이들은 가끔 해가 없는 시간이면 마당에서 그 짓을 했다. 둘이 다른 볼일을 보다가 느닷없이 껴안고는 선 채로 하기도 했고, 피크닉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 맥주를 마시다가 갑자기 드러누워 뒹굴기도 했다. 가끔 인기척이 있으면 자제하는 듯도 같은데, 자제라 봤자 신음을 억누르는 정도였다. 민망하긴 했지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공장소가 아니라 자기 집 마당에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고, 언젠가는 농구코트에서 어둑할 때 땀투성이 남자아이 둘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걸 보기도 했다. 덕분에 옆집 아이들의 엉덩이가 얼마나 매끈하게 잘생겼는지 알게 되긴 했다.
  남편 웅이 나와 자전거에서 장거리를 챙겨 들어갔다. 남편도 옆집 여자아이의 신음을 들었을 것이다. 현은 옆집 어린아이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은 없지만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었다. 일단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누나라고 부르지만 친남매는 아니라는 것, 남자아이는 욕실에 늘 뽀송뽀송한 수건이 걸려 있기를 바라고 그것 때문에 둘이 대판 싸운 적이 있다는 것, 남자아이가 자기가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 이따금 이른 아침에 검정 세단이 와서 남자아이를 태우고 가고 여자아이는 커튼 뒤에 숨어 지켜본다는 것 등등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사랑한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빈집으로 밀고 들어온 가출 청소년들이 아닐까 싶었지만 저녁이면 어김없이 창문에 불빛이 비쳤고, 가스 불로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가 났고, 사나흘에 한 번은 세탁기를 돌려서 빨래를 마당에 널곤 했다. 무단 사용일 수 있지만, 전기요금과 수도세, 가스 사용료를 꼬박꼬박 내고 쓰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현의 입장에서는 박 씨 아저씨 집이 빈집이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안심이었다.
  울타리 너머로 옆집 어린 이웃들의 머리가 보였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저녁을 해야 한다며 집으로 들어갔고 남자아이는 현과 눈을 마주치고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했다. 웅이 그런 것처럼 옆집 남자도 남을 대할 때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인사할 때의 어색하고 어설픈 표정까지 닮았다. 남편은 자기 십 대 때의 모습일 남자아이를 노골적으로 경계한다. 그녀 역시 마음을 놓지 않았고, 어떤 이웃에게든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당의 새들이 훨씬 사랑스럽고 믿음직했다.
  

  “이봐요, 아저씨! B팀은 포집망 들고 하구 쪽으로 가시라고 했을 텐데요.”
  감독이 목소리를 높였다. 공무원끼리는 감독을 주사님, 주사보님이라고도 부른다. 머리가 은발인 사내가 감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초기를 내려놓고 이쪽으로 종종걸음쳐 왔다.
  웅의 머리도 정도만 달랐지 희끗희끗했다. 아직 살 만했을 땐 그도 헤어숍을 다니며 한 달에 한 번 염색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는 매년 임진강의 지류인 이곳에서 하천 재정비 사업 공공근로를 하고 있었다. 한강의 홍수가 흔한 일이 되었을 때, 이 지류에서도 큰 물난리가 났었다. 근린 시설들이 떠내려갔고 사람들도 떠내려갔다. 둔치에 높이 세워놓은 시청 쉼터의 토대가 무너지면서 그 안에서 비를 피하던 초등학생들이 매몰 사고를 당했다. 홍수가 나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작년엔 늦봄과 초가을에 두 번이나 물이 넘쳤다. 반면, 날이 가물기 시작하면 강바닥이 드러나 물고기들이 썩어갈 정도로 물이 말랐다.
  저 멀리 발랑 저수지로부터 떠내려온 온갖 오물들이, 이곳에서 부유하는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을 이루고 있었다. 웅 같은 공공근로자가 하는 일은 그 떠다니는 하치장 앞에 포집망을 둘러 속도를 늦추고, 포클레인이 와서 쓰레기를 건져 올리는 일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덤프트럭이 실어 가지 않는 것들은 커다란 폐기물 마대자루에 근로자들이 일일이 퍼담았다. 대충 한 구역의 일이 끝나면 다시 포집망을 거둬 하구 쪽으로 이동했다.
  오늘같이 뜨거운 날에는 악취에 속이 뒤집힐 정도다. 웅의 곁으로 온 은발 사내가 허리를 굽히고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쫓아온 감독이 소리를 질러댔다.
  “아저씨, 이리 와봐. 다 토했으면 이리 와봐요!” 은발 사내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다가가자 감독은 더욱 소리를 높였다.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시사항은 지켜야 할 것 아니에요!” 감독은 이제 악을 쓰고 있었다. “내가 뭘 쓰고 있어요? 마스크! 약국에 가면 분진용 마스크 있다고 그거 쓰고 오라고 카톡 보냈잖아요!”
  은발 사내는 기어코 약국에 가서 마스크를 사 와야 했다.
  “무슨 물인데 이렇게 냄새가 심한가요?”
  “똥물이요.” 웅은 정색하고 은발 사내에게 일러주었다. “진짜 똥물. 그러니까 맨살에 닿지 않게 조심하세요. 똥독 오르면 한 계절은 고생해요. 입에 튈 수도 있으니까 마스크 벗지 마시고.”
  그 말에 은발 사내는 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렸다. 사내의 시선을 좇아가보니 사람 똥이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둥둥 떠 흔들리고 있었다.
  웅이나 은발 사내나 마찬가지였다. 남의 똥 치우는 일은 해본 적 없었고, 그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직장을 잃고 실업급여도 다 털어먹고 아르바이트 일자리도 끊겨 거실과 마당에서 빈둥거리기 시작하자 가족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아내의 경멸하는 눈빛을 참다못해 버럭 화를 냈다. 누가 나한테 돈을 주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할 건데? 찾는 사람이 없으면 예술도 죽는다고! 아무도 봐주지 않을 사진을 왜 찍어? 누굴 위해, 뭘 위해? 아내는 대꾸 한번 없이 듣고만 있더니, 웅의 말이 끝나자 그가 아끼는 카메라 핫셀블라드 클래식 모델을 꺼내와 마당 디딤돌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장마철이 지나고 건기가 시작되면 남편 웅은 다시 공공근로 일을 잃었다. 현이 동화책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는 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해야 하는 시즌이 돌아왔다. 그녀는 파라솔 아래 앉아 어스름이 짙어진 풍경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녁 시간이지만 불이 들어온 집은 몇 없었다. 서너 집 건너 저쪽 빌라에서 창문 두 개가 지저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집에서도 사고가 있었다. 옆집 거실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남자아이의 경망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옆집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도시에 사는 그녀에게 불 꺼진 집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현의 집 거실에는 불빛이 없었다. 몇 년째 화장실에서 말고는 좀처럼 불을 켜지 않고 살았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불을 켜는 일은 없었다. 남편은 일거리를 찾아본다고 땡볕 아래를 돌아다니다가 땀범벅이 되어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그녀는 옆집에서 간간이 새나오는 어린 남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이 시간이면 하루 일을 끝낸 가족들이 환한 조명이 켜진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식사를 하며 이야기꽃을 피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에겐 너무 오래되긴 했으나 그런 시간이 있었다. 엄마 아빠와 자기로 이뤄진 단출한 식구였지만 틀림없이 그런 가족의 시간이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웅과 둘이서만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때 이미 그녀는, 아이 없이 남편과 헤어질 때까지 둘이서만 저녁을 먹게 되리라 예감했다. 곧 부모든 형제자매든 혈육이라며 연락해오는 일이 두려운 세상이 왔다. 모두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시절이 왔고, 모두가 모두를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이 됐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사람들은 서로 모여서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파라솔 의자에서 일어섰다. 현은 출입문 바깥을 향해 몇 걸음 옮겼다. 혼란스러웠다. 왜 가슴이 답답해졌는지도 모르겠고, 한편으론 좀 걷다 오면 기분이 나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한 블록쯤 지나 놀이터까지 왔다. 나와서 좋은 건 차고 건조한 밤바람뿐이었다. 지나온 블록에 빌라가 세 채쯤 있고 작은 상가가 한 채 있었지만 역시 불 켜진 창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상가는 버려진 지 오래였다. 적당한 값에 삼겹살과 채소를 떼어올 수 없게 된 고깃집이 망하더니, 생닭 수급에 문제가 생긴 치킨집이 떠나고, 마지막으로 슈퍼마켓이 파산 세일을 한 것이 지지난해였다. 그녀도 파산 세일에서 초콜릿 세트와 커피 믹스, 쌀 한 포대를 샀다.
  놀이터 안쪽 벤치에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길게 가로놓여 있었다. 불 켜진 보안등이 너무 멀리 있었다. 거주자가 줄어들자 불이 들어오는 보안등 수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발바닥이 땅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여길 오다니, 스스로 너무 한심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홀린 듯 쇳덩이 같은 발을 떼어 한 발짝씩 놀이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벤치에 가로놓인 게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하기도 전에 현은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큰지 그녀도 자기 비명에 놀랐다.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뒤로 물러나며 계속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놀이터로 뛰어왔다. 놀이터 옆 빌라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도 벤치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한 사람은 그녀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를 켰다. 경찰에 전화를 하고 다음엔 남편을 깨웠다.
  현은 놀이터에서, 살면서 가장 무서운 것을 보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동네에서 언젠가 한 번은 꼭 보게 되겠지, 하고 짐작만 하고 있던 무엇과 마주쳤던 것이다. 다만 그게 오늘, 이 시간일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내 현의 무섬증은 더 심해졌다. 웅은 아내가 자기 앞에서만 강인한, 심약한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아내는 공황 발작이 와서 안방에 틀어박혔다. 아내의 부탁으로 그는 자기 베개와 협탁을 들고 작은 방으로 침실을 옮겼다. 그렇게 아내는 혼자가 되어서는, 아침에도 커튼을 걷지 않고 어스름 속으로 몸을 감췄다. 낮에는 어둠 속에서 지내고, 반대로 밤이면 형광등을 환히 밝혀놓았다. 동이 틀 때까지 한순간도 끄지 않았다. 식사는 그가 가져다줘야 겨우 한 끼쯤 먹었다. 그는 작업실에 있던 아내의 책상과 데스크톱과 태블릿과 프린터를 떼다 침실에 다시 설치했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전화가 오면 아내와 편집자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다.
  종말은 피할 수 없어, 하고 아내가 베개를 챙기는 웅의 등에 대고 말했었다. 하루하루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지 않아? 당신은 어떻게 견뎌? 둔한 사람은 견디지,라고 웅이 답하자 그녀는 긴 한숨으로 답했다.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는 진심을 말했다. 둔한 사람은 놀이터에서 뭘 보게 되더라도 얼이 빠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둔한 사람은 내일 종말이 와도 밥만 잘 먹고 잠만 잘 잔다.
  웅은 자전거를 타고 마트에 다녀오다 놀이터 앞에 잠시 멈췄다. 놀이터 안쪽에 문제의 녹색 벤치가 있었다. 페인트칠이 상한 비늘처럼 벗겨지고 있었다. 아내가 본 것이 저 벤치에 가로로 누워 있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그도 아내가 본 것을 봤다. 한 여자가 발가벗고 죽어 있었다. 널어놓은 코트처럼 몸뚱이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근육을 잡아주던 힘들이 풀어져 살덩이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내는 달려온 그를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 앰뷸런스는 일산에서부터 오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지금은 폴리스 라인도 치워지고 없었다. 웅은 놀이터를 가로질러 벤치 가까이 갔다. 경찰에선 죽은 사람이 약물에 취해 옷을 홀라당 벗고 놀이터를 휘젓다가, 한낮의 열기와 약물로 인해 피가 펄펄 끓어올라 급사를 한 것이라고 했다. 약물에 취한 상태였다면 고통을 몰랐을 수도 있고, 내장이 터지는 그 순간에도 행복했을 수 있었다. 오늘도 놀이터 한구석에는 쓰고 버린 주사기들과 다이소에서 파는 작은 지퍼백들이 굴러다닌다. 아내만 불쌍하게 됐다. 으슥한 놀이터에 어쩌다 갔다가 약 빨고 죽은 중독자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니까.
  아내는 일산에 있는 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 이틀 입원했다 퇴원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가 아내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동네 중심가에 있는 신경정신과 의원에 통원 치료를 다녔다. 부조리하게도 그는 아내를 태우고 달리는 그 시간이 구름에 올라탄 마냥 즐거웠다.
  웅은 맞은편에 있는 벤치로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그 사악한 벤치를 노려봤다. 거기에 아직도 누군가 있는 것처럼. 그의 미간은 증오로 일그러져 펴질 줄 몰랐다. 담배를 끊지 않았다면 아마 한 대 꼬나물고는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을 것이다. 땡볕이 그의 이마를 태워 먹을 듯 내리쬐었다.
  

  웅은 거실에 서서 마당을 내다봤다. 계절이 바뀌어 7시면 캄캄했다. 아내 현의 신경쇠약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안방 창문은 동네에서 새벽까지 불이 들어와 있는 유일한 창문일 것이다. 그도 아내 같아졌다. 그도 해가 떨어지면 집을 벗어나기 싫었다. 밤이면 마당에도 나가기 싫었다. 그는 아내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종말이 숨통을 조여온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웅은 부쩍 옆집 어린아이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의 집이 고난을 겪는 동안 옆집 혜린은 임신을 해서 이제는 제법 부푼 배를 안고 다녔다. 태아한테 해롭다고 커피를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얼굴에 수줍은 웃음이 함박꽃처럼 피었다. 하지만 그의 의심은 깊어만 갔다. 남자아이의 매끈한 상체 알몸을 보고 난 다음엔 더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저렇게 못 배운 남자의 몸에 문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만적으로, 선량한 이웃을 속이려는 위장으로 생각되었다. 빈집에 밀고 들어와 동거를 하는 어린 남자의 몸에 문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가 진짜 위험한 인물이라는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진짜는 원래 티가 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웅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덩치는 그가 더 컸지만 젊은 남자를 당해낼 힘은 없었다. 옆집을 차지한 것도 부족해 이제는 슬금슬금 이 집을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 여긴 쓸 만한 물건들이 있으니까. 커피도 있고 와인도 있고, 어쩌면 닭 굽는 냄새를 맡고 나쁜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 뉴스를 보기도 했다. 한 집에 밀고 들어가 눌러앉은 다음 약탈하고 자원을 탕진하고⋯⋯ 또 그 옆집을 밀고 들어가 약탈하고 빈털터리로 만들고⋯⋯ 또다시 다음 옆집을 털어먹고⋯⋯. 그런 식으로 생활을 유지해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웅은 안방과 거실에 있던 선풍기를 코드를 뽑아 다용도실로 치웠다. 11월 내내 선풍기가 없으면 낮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한낮이면 혈관을 달리는 피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내도 안방에서 종일 방문을 닫고 커튼을 쳐놓고 있느라 힘들어했다. 창문을 약간 열어두긴 했지만 바람이 들이칠 리 없었다. 오늘 낮에야 비로소 그녀는 선풍기를 꺼야겠어, 하고 그에게 말했다. 그도 12월엔 좀 선선하리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코드를 둘둘 말아 선풍기를 가지고 나왔다.
  아내는 여전히 안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지만, 공황 발작 빈도도 줄어들었고 투약 횟수도 하루 한 번으로 줄었다. 불안한 건 그녀가 주변 일에 놀랍도록 무관심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마당으로 새들이 날아와 모이를 달라고 울어도 무심하게 미소만 지었다. 자신의 손바닥이 사실상 동네 새들의 급식소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만 같았다.
  웅은 전쟁이 나는 꿈을 꿨다. 소리는 없었다. 묵음 상태에서 총탄이 날아다니고 불길이 치솟고 심술궂게 생긴 장군이 나와 모토로라 무전기에 대고 고함을 쳐댔다. 침묵의 미사일들이 불의 꼬리를 길게 달고 밤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지하철을 찾고 있었다. 불꽃이 아내의 무심한 미소를 붉게 물들였다. 소리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꿈속에서도 불합리함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듯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세상이 완전하게 침묵할 수 있을까. 어떻게 완벽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묵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얇은 유리구가 바닥에 쓰러져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주방 한편에 세워두었던 장식등의 우윳빛 유리구 같았다.
  웅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잠깐 생각해보고는 뻣뻣한 팔다리를 움직여 침대를 벗어났다. 아내가 문제였다. 그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 방에서 나왔다. 시커먼 것이 주방에서 튀어나와 쏜살같이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시커먼 덩치가 현관문을 뚫고 마당으로 날아갔다. 불빛은 없었지만 날아가며 팔다리가 허우적거렸던 건 확실히 봤다. 현관문은 위쪽 경첩이 부서져 반쯤 떨어져나온 채, 찌그러져서는 덜렁거리고 있었다. 깨진 창문 간유리가 달 없는 밤하늘 아래 생기 없이 빛났다. 그는 신발장을 열고 마당 잡초를 뽑는 데 쓰는 잔디 호미를 꺼냈다. 등 뒤에서 안방의 아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기운을 차려가는 그녀를 놈이 다시 겁에 질리게 한 것이었다. 그녀는 더욱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경찰이 제시간에 올 리 없고 지금 수를 쓰지 않으면 그와 아내가 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그는 잔디 호미를 높이 치켜들고는 현관 댓돌에 엎어져 꿈틀거리고 있는 덩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웅은 호미 날로 덩치의 등을 몇 번이고 찍었다 뽑으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우리가 그렇게 잘해줬는데도 네놈이! 호의를 악으로 갚아? 은혜를 악으로 갚아?”
  호미를 내리칠 때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가냘프게 솟구쳤다. 신음도 들렸다. 웅은 십 대 임신부 혜린을 떠올렸다. 그는 아내가 들을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거의 속삭이듯 검은 등짝을 향해 다그쳤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올바르게 살아야지! 이 새끼야, 혜린이는 어떻게 할 거야, 어쩔 거냐고!”
  

  현은 찌그러진 현관문을 바로잡으려고 몇 번 부질없이 노력하다가 체념하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현관 댓돌과 주변에는 간밤에 흘린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11월의 마지막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찌뿌듯했다. 그녀는 파라솔 아래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슬픔의 웅덩이로 깊게 잠겨 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남편 웅이 그 무섭고 어리석은 짓을 벌이는 동안 비명만 질러댔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올 용기를 내지 못했다. 제때 나오기만 했어도 남편을 말릴 수 있었다. 남편을 지킬 수 있었다.
  “아저씨는 오셨어요?”
  돌아보니 옆집 혜린이가 울타리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밤에 그 소동이 났으니 혜린도 잠을 설쳤을 것이다. 현관문이 와지끈 부서지고 비명과 신음이 오가고, 경찰차의 사이렌이 울릴 즈음엔 온 동네의 잠을 다 깨웠을 것이다. 경찰차가 오기 전에 먼저 옆집 남자아이가 와서 남편과 그녀 옆에 있어주었다. 남자아이가 남편의 손에서 잔디 호미를 빼앗아 치웠다. 남편이 넋이 나가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옆집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것을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남자아이의 이름도 새벽에 처음 알았다.
  “훈이라고 부르세요, 훈이. 아내한테 말씀 자주 들었어요. 끓여주시는 커피가 정말 맛있다고.”
  옆집 훈이는 쫓아 나온 혜린이를 돌려보내고 경찰차가 오고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그녀 곁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경찰차가 와서 남편을 실어 갔고, 다음엔 앰뷸런스가 와서 신음하는 침입자를 실어 갔다. 경찰이 스키마스크를 벗겼는데 그녀와 남편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젊은 경찰이 졸린 눈을 비비며 해가 뜰 때까지 마당에 있어주었다. 절도 사건이 부쩍 많아졌어요,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니 남편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하긴 마당의 잡초나 뽑던 무딘 호미로 누굴 죽일 수 있을까. 훈은 새벽에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며 그녀 곁에서 일어났다. 아침에는 혜린이 마당에 나와 같이 식사를 하자고 불렀다.
  현은 경찰서에 남편을 만나러 갔다가는 공황 발작이 올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연락해 도움을 청할 친구도 친척도 없었다. 일단 그들 부부가 친척이든 친구든 챙겨주며 살지 않았다. 아무튼 어느 경찰서에 있는지는 알고 있으니 용기가 나면 가겠지.
  머리 위에서 후드득 소리가 났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파라솔 밖으로 나갔다. 현기증이 났다. 다리에 힘이 새어나가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마당에 비가 거꾸로 내리고 있었다. 11월 마지막 주의 비가 말라 죽어가는 마당 바닥에서 우중충한 하늘로 거꾸로 내리고 있었다. 흐릿하고 생기 없는 빗줄기가 그녀의 세상을 거꾸로 적시고 있었다. 다음 주가 12월인데도 대기는 후텁지근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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