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귀자 아카이빙

  

  한 소수 부족의 언어를 쓰던 마지막 한 사람이 죽자 그 언어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는 남미의 깊은 오지, 인류의 탄생 프로세스에 따라 생겨났을 오지인은 지구의 한쪽 문을 닫고 우주로 사라진 것일 테지만 채록된 그의 마지막 언어는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열 살 소녀처럼 작은 키에 조막만 한 얼굴의 백발 할머니가 카메라 프레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소멸하고, 그의 미소는 한 장의 기록 필름 속에 남아 있었지만, 그의 역사를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우연히 그 기록물을 보지 못했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한 사람. 이 세상에 유일했던 한 사람. 누군가는 한 부족의 여인에게 슬픔과 경의를 표했을지도 모르지만 기란으로선 알 수 없는 지구 저편의 일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장귀자를 만나러 가는 날, 기란은 불현듯 그 여인을 떠올렸다. 다시 들을 수 없는 그의 언어는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까. 누구도 똑같을 수는 없지만 인류의 메커니즘은 개별적인 낱낱의 모든 것들을 무화시키면서 진화하고, 마침내는 한꺼번에 소멸하는 게 아닐까.

  집을 나설 때부터 날은 잔뜩 흐려 있었다. 밤늦게 눈이 올 확률이 높다는 예보를 들었지만, 낮부터 하늘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섬으로 이어진 대교 아래로 밀물이 누렇게 밀려들고 있었다. 기란은 긴 다리를 건너며 다리 없던 시절의 섬을 생각했다. 차와 동물과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배, 그 배에 의지해 섬과 뭍을 오가던 삶들을 떠올리자 아득해졌다.
  기란은 오래된 아카이브 영상물 보는 걸 좋아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산물이라면 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낡은 흑백 필름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과 펄럭이는 깃발, 지금과는 다른 억양과 목소리에 담긴 시간의 단절성을 느낄 때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시간의 어딘가엔 기란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찍 돌아가신 양친 역시 그 시간 속에 잠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 죽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시간이 올 것이다.
  해안 길을 벗어나 숲길을 따라 달렸다. 구부러진 길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며 이어졌다. 화살표 모양 이정표가 가리키는 절 입구를 지나고, 산속의 저수지도 지나고, 50년 전통이라는 식당 간판도 지나자 멀리 드문드문 앉은 집들이 들어왔다. 샛길처럼 보이는 갈림길의 막다른 골목에 앉은 집들이었다.
  기란은 낮은 숲 아래쪽에 외따로 떨어진 농가 앞에 차를 세웠다. 낮은 지붕과 처마, 본채와 곁채가 연결된 미음 자 형의 오래돼 보이는 전통 가옥이었다. 기란이 차에서 내리자 덩치 큰 개가 달려 나왔다. 녀석은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았다. 뿐인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가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기란을 앞질렀다.
  이 녀석 참 웃기네. 나를 언제 봤다고.
  녀석은 안채 유리문 앞으로 다가가 컹, 부드러운 소리로 짖었다. 마침 본채의 미닫이 유리문이 열리고 중키의 할머니가 마루를 내려섰다. 기란은 그녀가 직감적으로 장귀자라는 걸 알았다. 끈 달린 알록달록한 뜨개 모자를 뒤집어쓰고, 도드라지게 눈썹과 입술 화장만 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분 화장으로 얼굴을 특화한 캐릭터 인형의 모습이랄까. 아무나 하기 힘든 화장법이었다.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로 그려본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시 지원금으로 선정된 아카이브 작업은 우리 고장 어르신들의 생애를 담는 기획물이었다. 유명 인사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기조로 삼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장귀자는 기획팀에서 발굴한 인물이었다. 이 작업도 기란이 몇 년 전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프로젝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실내는 겉보기와는 달리 작고 오밀조밀한 공간을 확장해 품이 넓고 정갈했다. 거실 가운데 따뜻한 색감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장귀자가 카펫 위에 놓인 기다란 원목 테이블에 뜨거운 김이 오르는 대추차 두 잔을 내왔다. 차를 마시며 기란은 이 자리에 오게 된 목적을 다시 한번 얘기하고 딱히 절차랄 것도 없이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장귀자는 질문을 내놓기 무색하게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래, 그녀 안에 고여 있던 말들이었다.

*

  내 이름은 천금같이 귀한 자식이라고 어머니가 귀자貴子라고 지었다. 1949년 음력 9월 그믐께에 해주에서 태어났다. 첫돌 지나 피난을 나왔으니 해주에서의 기억은 없다. 호적에는 2년 늦잡아 11월생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엔 엉망인 호적들이 많았다. 어머니도 네 살이나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가호적을 가지고 살던 피난민들은 호적이 뒤죽박죽인 일들이 많았다. 언니와 여동생이 뒤바뀌는 일도 흔했으니 장귀자라는 이름이 제대로 적힌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했다. 호적대로 1951년에 해주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을 수가 없다. 1·4후퇴 때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피난을 나왔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본 적이 없으니 모를 수밖에. 아버지는 유령처럼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나 떠도는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먼저 남쪽으로 내려갔다.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남자들은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동네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던 날은 새벽 서리가 내리고 달빛도 없이 캄캄했다. 밤새 혼자서 산통을 겪는 어머니를 뒷집에 사는 어버버 할마이가 와서 들여다봤다.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어버버라는 말밖에 없는 농인이었는데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초상난 집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동네 초상이라도 있었으면 누가 애를 받아주나 어머니는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어버버 할마이가 한 끼 끓여준 해산 국을 겨우 얻어먹은 어머니가 이튿날 아침에 배가 고파서 방문을 열었더니 짚단을 덮어놓은 텃밭에 하얗게 서리가 앉아 있었다. 내 위로 오빠가 하나 있었다는데, 돌도 안 돼 갑자기 죽고, 그 뒤로 자식이 생기지 않아 어머니가 삼신할미에게 치성을 드려 6년 만에 낳은 자식이 나였다.
  아버지는 평양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계모의 구박과 눈칫밥을 먹다가 열네 살에 집을 나와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본가를 찾은 적이 없다고 하니 고아나 마찬가지로 산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해주에 정착한 후에는 진남포를 오가며 상선에서 허드렛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를 오가는 배였다. 한번 나가면 서너 달씩 집을 비웠다. 큰 상선에선 담비 털이니, 호랑이 가죽, 호사가들이 쓰는 고급 궤나 진귀한 보석들을 거래했고, 작은 상선에선 자잘한 생필품을 거래했다. 아버지의 꿈은 상선을 운영하는 거였다. 머리가 비상하고 말재간이 좋아서 천생 장사꾼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해방된 후 어머니는 날마다 혁명사업단에 불려 나갔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에 문맹퇴치운동이니, 마을 재건사업에 동원되었다. 어머니는 혼인하기 전만 하더라도 동네잔치나, 절기 때마다 들어오던 놀이패를 흉내 내어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문화선전단에서 노래하고 글을 배우고, 밥을 나누어 먹는 생활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당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부르주아들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혼이 나가 아버지가 사라진 뒤에는 몸을 사렸다고 한다.
  “커다란 철가방을 끌고 남쪽으로 갔단다.”
  “그 속에 뭐가 들었는데?”
  “부잣집 마나님들이 좋아하는 호박 팔찌도 있고, 사슴 향수, 사람 목숨을 구하는 신비한 약도 있지.”
  “아버지가 부자였어?”
  “장사 밑천을 뺏기지 않으려고 미리 도망을 간 거지.”
  나는 총살당하지 않고 남쪽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부두에 정박한 큰 배에 돛을 올리고, 뿌웅― 뱃고동 소리를 내며 바다를 떠가는 배. 고작해야 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것뿐이었다.
  해주 산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손수 수놓은 횃댓보와 요강 하나만 달랑 들고 시집왔다고 했다. 어머니의 친정은 가난해서 딸자식 혼수로 줄 게 없었다. 피난을 나올 때도 어머니는 혼수품으로 해온 횃댓보를 보물처럼 챙겼다.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문양들이 새겨진 뽀얀 횃댓보는 누렇게 색이 변한 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안방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먼저 남쪽으로 내려간 아버지를 찾아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어머니는 피난 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어디서 아버지를 보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어린 나를 들쳐업고, 비바람 피할 데 없는 타지를 헤매고 다녔다. 내가 어머니의 등을 벗어난 뒤에도 어머니의 들뜬 마음은 잡히지 않았는데 어디를 헤매다 돌아오는지, 나갈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사람이 무언가에 미치면 그것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어머니를 사로잡고 있던 것이 아버지였는지, 그것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언제 와?”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어머니에게 묻곤 했다.
  “도깨비가 데려갔나보다야.”
  그때마다 어머니는 도깨비 타령이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집은 고적했다. 웃을 일도 소리 내어 싸울 일도 없었다. 먹고사는 일로도 하루하루가 벅차다는 걸 나는 어린 나이에 깨우쳤다. 그래도 어머니는 읍내에 연극 공연단이 들어오면 내 손을 잡고 구경을 갔다. 머리도 곱게 빗고, 고무신도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닦아 신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어머니는 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배우들은 허접한 분장을 하고 온갖 약을 팔던 약장수들과는 격이 달랐다. 가설무대엔 진짜 같은 집을 그려놓은 무대배경도 있고, 그들이 사용하는 평상도, 술상도 진짜였다. 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꿈속에서 벌이는 일만 같아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문득 공연에 넋을 팔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 무슨 돈이 있어 표를 샀을까, 걱정이 되긴 했다. 옆집에서 보리쌀을 꾸어오는 심부름도 종종 했었으니까.
  “네 아바이는 동네 조무래기들을 홀리던 풍각쟁이를 닮았드랬지. 큰 눈은 옆으로 째지고 눈썹은 짙어서리⋯⋯.”
  멍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나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등장하는 남자를 보며 무거운 철가방을 끌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상상했다. 도깨비가 데려갔다는 어머니의 말을 그렇게 믿어버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내가 열넷인가 열다섯 살인가에 돌아가셨다. 내가 고무줄 나이라 헷갈리기도 하는데 이제는 숫자나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게 힘들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도 입 밖으로 내자고 하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처럼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학교도 멀었는데, 앓는 어머니를 두고 학교에 갈 정신이 없었다. 교통편도 없어서 10여 리를 걸어서 다녔다. 어머니와 살던 집도 남의 것을 빌린 단칸 초옥이었다. 그때까지 라디오도 구경을 못해봤고,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을 놓고 살았다.
  불꽃이 흔들리던 호롱 불빛에 파리하게 굳어가는 어머니 얼굴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가 있다. 그즈음 어머니가 다른 때 같지 않게 음식을 잘 못 넘겨서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밤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자다가 깨어보면 방문 앞에 다가앉아선 문고리를 잡고 어두운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쉿,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발소리가 들린다야, 하고. 그러면 나는 잠긴 목소리로 바람 소리야. 아무도 없어, 하고 말했다. 어머니의 중얼거림은 밤이면 더 잦아졌다. 잠도 자지 않고 날이 샐 때까지 꼬박 앉아서 보내는 날도 있었다. 누렇게 변한 횃댓보를 꼬깃꼬깃 구겨 쥐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기도 했다.
  어쩌다 어머니가 그 지경까지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요즘 같았으면 병원에서 치료받고 약도 먹고 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일로 병원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디에 용한 무당이 있으니 찾아가보라느니, 무슨 무슨 약초를 달여 먹으라느니 온갖 약방문을 내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피난을 나올 때부터 마음이 허공에 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왜 내 어머니는 남들처럼 강하지 못할까, 왜 자식은 눈에 안 보이고 아버지 생각만 할까. 세상 모든 어머니가 다 같을 수 없다는 걸 그땐 몰랐다. 뭔가를 온전히 잃어버린 사람만이 치러야 했을 상실감이 어떤 건지 어린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내 배고픈 것만 원망스러웠고 서러웠을 뿐.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평범하지 않았다. 몇 달 앓기는 했지만, 자던 밤에 자리에 앉은 채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숨쉬기가 힘들다면서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서 잠이 들었고, 새벽녘에 깨어보니 움직이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어머니의 무릎을 펴려고 방바닥에 눕힐 때 닿던 서늘함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 바로 어제 겪은 일은 깜빡깜빡해도 수십 년 전의 어떤 일들은 오늘 겪은 것처럼 이렇게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은 강화 읍내에 사는 해주 아주머니 집에 얹혀 있었다. 어머니가 고향 동생이라며 왕래하던 아주머니였는데 오른쪽 턱 밑에 주먹만 한 혹이 달려 있었다. 선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혹부리 이모네도 식구는 많고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군식구를 둘 형편이 아니었다. 혹부리 이모가 용현동 집을 소개해줬다.
  용현동 아주머니네도 1·4 후퇴 때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용현동 집은 시장통에서 싸전을 했다. 철도 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몇 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넷에다 골골거리며 앓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나는 집안 살림에 할아버지 수발까지 해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할아버지 요강을 비우는 일이 가장 고역이었다. 어머니와 쓰던 요강은 더럽지 않았는데 똥 덩어리가 떠다니는 누런 오줌통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걸 보면 저절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거름 더미에 요강단지를 부을 때마다 코를 틀어막았다. 집 뒤란 철길로 지나다니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토악질을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2년인가 있다가 돌아가셨다. 학교도 보내줄 거라더니 그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때리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았지만 온갖 집안일을 시키고도 돈 한 푼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딸이 할아버지 방을 차지하고, 둘째 딸, 셋째 딸과 한방을 썼다. 막내인 아들은 안방에서 지냈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둘째 딸과 두 살 어린 셋째 딸 모두 보통 것들이 아니었다. 큰딸은 한창 멋 부리면서 밖으로 나도느라 집안일엔 관심조차 없었고, 둘째와 셋째 사이에 끼여 나만 곤혹스러웠다. 두 자매가 어찌나 서로를 물어뜯으며 싸워대는지 나는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소위 말해 나는 그들의 밥이었고, 동네북이었다.
  얘들은 왜 싸우기만 하나. 내가 빨래도 해주고, 도시락도 싸주고 방도 닦아주는데 왜 공부를 안 할까. 뭐가 부족해서 이럴까.
  나는 그들이 부러운 게 아니라 벌레처럼 징그러웠다.
  용현동 집에는 드나드는 손님이 많았다. 아주머니가 계주여서 한 달에 한 번씩 계 모임도 하고 계절마다 순번제로 하는 고향 친목계도 있었다. 친목계 때는 마당에 포장을 치고 돗자리를 깔았다. 그릇은 잔치 그릇을 빌려주는 점포에서 빌려왔다. 밥그릇과 국그릇, 냄비와 들통, 접시와 수저까지 빌려온 것들은 젓가락 개수까지 딱 떨어지게 맞춰서 돌려줘야 했다. 숫자가 모자라면 모자라는 만큼 물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친목계 모임이 있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아주머니와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찹쌀을 쪄서 찧고 팥소를 삶아 계핏가루와 설탕을 넣고 졸인 뒤 앙금을 넣은 인절미를 만들고, 돼지비계와 김치를 썰어 넣은 이북식 만두도 큼지막하게 빚고, 불린 녹두를 맷돌에 갈아 고사리, 씻은 김치를 넣고 빈대떡을 부쳤다. 친목 곗날은 수십 명이 점심때부터 밤늦게까지 드나들면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떠들었다. 나는 종일 설거지통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명절이나 잔칫날은 나에겐 제일 괴로운 날이었다.
  용현동 집에서 배는 곯지 않았다. 하지만 배부르게 먹는 게 행복한 건 아니었다. 어떡하면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을까, 도망갈 생각만 했다. 하지만 번번이 마음을 접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었고 갈 만한 데도 없었다. 어느 날인가 아주머니에게 일한 값을 셈해 달라고 했다. 그때 아주머니의 낯빛이 딴사람처럼 변하던 것을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한다.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게 아니라는 옛말 하나 그르지 않다고 낮게 뇌까리던 말도. 가장 외롭고 힘들 땐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세상천지에 나 하나뿐인 고아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마음이 떠나니 하루도 더 그 집에 붙어 있고 싶지 않았다. 머리 검은 짐승으로 사느니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어디 가면 이만큼 못 살까.
  힘내라 장귀자!
  아무도 없을 때 거울 앞에서 주술을 외듯 나한테 말했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라도 나한테 힘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그때마다 거울 속에서 다른 내가 보였다. 귀자야, 귀자야, 이 사람 저 사람 똥개처럼 불러대던 조막만 한 에미나이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나는 내 힘으로 살아내야 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눈 딱 감고, 부엌 시렁에 감춰둔 아주머니의 전대에 손을 댔다. 누렇게 손때 묻은 전대의 둘둘 말린 끈을 풀어 헤치는 손이 수전증을 앓던 할아버지의 손처럼 덜덜 떨렸다. 숟가락을 쥐여주면 반은 흘리고 입속으로 반만 들어가는 할아버지 밥 수발을 하면서도 그 밥이 내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라 생각하고 일했지만, 내 입에 거저 들어오는 밥은 없었다.
  밤을 꼴딱 새우고 모두가 잠든 새벽에 집을 나섰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훗날 내가 용현동 아주머니와 연락하지 않고 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머리 검은 짐승을 거둬줬더니 도둑년을 키웠다는 말이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돈만 보면 벌벌 떨었다.
  용현동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간 뒤부터 쭉 동대문시장에서 살았다. 그곳이 근 30년간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들었던 내 삶터였다. 옷 장사를 하는 천 사장 가게로 들어가기까지는 기억하기도 싫다. 그땐 누가 나를 어디에 팔아먹을까 싶어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다. 서너 달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나를 눈여겨본 손님의 소개로 천 사장네로 가게 되었다.
  월급이라곤 몇 푼 되지도 않았지만, 돈이 생길 때마다 무조건 모으기 시작했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쥐도 갉아먹지 못하게 단속했다. 가게 주인집 골방에서 지내며 허튼 사치도 부리지 않았다. 잘 먹고 편히 쉰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한번은 파마가 하고 싶어서 미장원을 찾았다가 파마 값을 보고 놀라서 아예 긴 머리를 내 손으로 싹둑 잘라버렸다. 젊은 시절 내내 나는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다녔다. 통바지나 멜빵바지에 남방셔츠나 스웨터 차림. 남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았고, 옷 가게에서 일하면서 옷 한 벌 사 입지 않았다.
  주머니를 조여 맸는데도 남 밑에서 일해서 받는 월급만으로는 손바닥만 한 가게 하나도 얻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밑천을 만들어야 했다. 이곳저곳 자리도 옮기지 않고 천 사장네 가게에서 7년을 보냈다. 손님들은 내가 종업원이 아니라 가게 주인인 줄 알고 있을 정도였다. 단골 도매상인 하나가 마침 B동 지하상가에 자투리 가게가 하나 나왔다고 하길래,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더럭 계약부터 했다. 첨엔 커피를 팔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큰 밑천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다.
  B동 지하상가는 원사 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주로 대구나 부산 지역 방적 공장에서 만든 원사들이 많이 올라왔다. 통로마다 베니어합판으로 칸을 치고 호수를 먹인 작은 점포들이 열을 맞춰 수십 호씩 붙어 있었지만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소매 장사도 했지만 대개 손 큰 도매상들이었다. 원사를 사들인 장사치들은 별도의 창고에 원사를 보관해두고, 염색 공장을 잡아 갖가지 색깔로 염색한 실을 봉제 공장에 납품했다. 덩치 큰 원사 가게 종업원들이 카트에 산더미같이 짐을 실어 날랐다.
  어어, 어어어.
  좁은 통로를 지나가는 짐꾼들은 애어른 가리지 않고 반말로 소리를 질러댔다. 호루라기도 시도 때도 없이 삑삑 울렸다. 등짐을 지고 배달을 가는 청년의 작업복은 땀이 배어 추운 날에도 등짝이 축축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장통에선 종일 켜져 있는 백열등도 날파리 떼처럼 떨리는 소리를 낸다. 불이 꺼져야 조용해지는 그 바닥에서 매일 새벽 4시에 가게 불을 켜고 새벽 장사꾼들을 맞았다.

  사람들은 나를 ‘커피 이모’라고 불렀다. 서른도 안 된 처녀를 오륙십 대 사장님들이 커피 이모, 커피 이모하고 불러댔다. 구멍가게 같은 점포였으니 다방이라는 간판조차 없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참 바로 아래 손바닥만 한 자리를 사는 데 7년 동안 모은 돈이 다 들어갔다. 싱크대 설비와 불판, 찬장, 냉장고를 놓고 나자 겨우 쉴 만한 의자 하나 놓을 자리가 생겼다. 처마 아래 전화번호를 적은 기다란 팻말을 붙여놓은 게 다였어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단골 점포마다 일수 찍듯이 내 커피 외상 장부 없는 곳이 없었다. 나는 외상값 하나는 끈질기게 받아냈다. 밑천을 다 털어 넣었으니 악착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인건비가 무서워 아가씨는 쓰지 않았다. 의자도 없는 가게에 아가씨가 웬 말인가. 엉덩이가 질기면 어차피 잔 팔이를 하는 장사는 망한다. 찻쟁반 들고 토끼처럼 뛰어다녔다. 가장 바쁜 시간에만 주문 전화를 받을 아르바이트를 하나 앉혀놓았는데, 그것마저 내 마음처럼 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 때문에 속을 많이 끓였다.
  새벽 4시에 들어오는 화물차 기사들이 첫 손님이었다. 수십 대의 화물차가 매일 들어오고 나갔다. 주차장 컨테이너에서 화투판이나 포커판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들은 판을 깔고 나면 커피나 쌍화차부터 시켰다. 지하상가 내 수백 개의 점포 역시 거래처 손님을 맞을 땐 커피를 시켜 먹었다. 자판기가 설치되기 전에는 노다지였다. 그땐 돈이 모이는 게 눈에 보였다. 내 몸뚱이는 하나였지만 아가씨 서너 몫은 하고 살았다.
  돈이란 운때가 맞아야 한다. 88올림픽 전후해서 부동산이 한창 주가를 올릴 때 나도 돈 되는 물건들을 살폈다. 언제까지 장바닥에서 잔돈푼만 끌어모을 수는 없었다. 그때 재개발지의 상가와 서울 외곽에 사둔 집이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천정부지로 뛰었다. 돈이 돈을 벌었다. 그때부터 돈이 겁나기 시작했다.
  결혼은 때를 놓쳐 하지 못했다. 아니, 돈이 무서워서 결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에 돈이 들어오는 게 보이는데 딴 데 정신 팔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연애도 못해본 맹추는 아니다. 애만 생겼어도 아마 남자한테 엎어졌을 건데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애가 안 생겼다. 삼신할미한테 비는 것까진 안 해봤으니 정성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 대신 돈을 믿었다. 꼬박 20년을 지하에서 커피 장사를 하고 나니 길거리 다방이 사라지고 카페가 생겨나고 있었다.

  말 고삐를 잡으면 달리고 싶어진다는 말도 있듯이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춥고 배고플 땐 먹고살 걱정만 했지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외로움이 뭔지도 몰랐다. 짧았던 사랑도 사실 소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 마음을 몰라주었고, 나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자식만 하나 있다면, 의지가지가 될 텐데 생각했다.
  순전히 그런 마음에서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내가 자식을 낳았으면 지금 저 나이쯤 됐겠지 싶은 아이들.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장학금 명목으로 용돈을 보내주기 시작하면서 한두 명씩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그땐 눈에 뭐가 쓰였는지, 옆에서 하는 말이 귀를 간지럽혔다. 기왕이면 제대로 형식을 갖춰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옆에서 자꾸 쑤셨다.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 나도 내가 정말 잘하는 줄 알았다. 마침 그쪽 방면에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 부부에게 모든 걸 믿고 맡겼다. 학원을 운영하던 김 박사 부부(나는 그들을 박사 부부로 알고 있었다)는 부동산 거래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었는데, 몇 년 동안 관계하면서 그들이 찡그리는 얼굴을 못 봤다. 사람을 대할 때 한결같이 밝은 얼굴로 기분 좋게 환대할 줄 알고 남을 험담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김 박사 부부는 장학사업에 관해서 모르는 게 없었고 사려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내게 한 말들이 입속의 혀처럼 달콤한 꼬임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내 소유의 조그만 상가 건물 3층에 작은 사무실도 하나 만들었다. 사무실이라고 해봐야 책상 몇 개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들이 무슨 일을 했던 건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재단 소유로 넘긴 건물 월세와 예치금을 불려서 운영하면 된다는 그들의 말을 믿었고, 이사장님은(그들은 나를 깍듯이 그렇게 불렀다)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들이 그 돈을 함부로 꺼내서 주식을 하고 장학금은커녕 비싼 골프에 유흥비로 쓰고 다닌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나를 만날 때 보여주었던 밝은 미소와 친절함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걸 그들 부부가 외국으로 튀어버린 후에야 알았다. 덩치 큰 상가 건물 한 채가 보람도 없이, 꿈도 없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내 깜냥껏 살아야 한다는 걸 그때 비싼 돈 주고 배운 셈이었다.

  그 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무너졌다. 사람이 돈보다 무섭다는 걸 왜 몰랐을까. 앞만 보고 사느라 내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산 게 끔찍했다. 한 10년은 당겨 산 듯 몸도 마음도 옴팍 늙어버렸다. 마음 둘 데가 없었다.
  그즈음 이곳으로 들어왔다. 거의 40여 년 만에 어머니와 살던 동네를 찾아갔다. 어머니 품에 안긴 채 미군 함대에 실려 짐짝처럼 부려졌던 섬.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헐거운 초가들이 올망졸망 들어앉았던 집터 자리에는 과수원과 묘목밭, 우람한 뾰족지붕을 가진 교회며 관광객을 맞는 대형 식당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대교가 놓여 두어 시간이면 다녀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동안 내겐 너무나 멀고 깊은 곳이기도 했다.
  남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내 한 몸 의탁할 작은 집 한 채를 장만했다. 거의 무너져가는 이 집을 손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지은 지 70년쯤 된 집이라니, 내가 살았던 초옥을 생각하면 그때도 이 집은 살 만한 집이었구나 싶었다. 지붕과 벽체는 자손들이 살면서 손봐둬서 그럴듯해 보였지만 몇 년 동안 비어 있던 집이라 손볼 게 많았다. 칡넝쿨로 뒤덮인 지붕을 새로 씌우고 무너진 벽을 보수하고 천장을 뜯어내서 뼈대를 손보는 일은 건축업자에게 맡겼지만, 소소한 것들은 하나하나 손수 공을 들였다. 바깥채의 툇마루를 살린 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였다. 널빤지가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툇마루에 올라앉아 두 발을 까딱이며 어린 나는 도깨비가 데려간 아버지, 도깨비를 잡으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기도 했다. 우리 집은 유난히 사람이 들지 않는 집이었다. 해가 지는 서쪽에 앉아 있어서인지 저녁이면 툇마루가 노랗게 반짝거렸다.
  평소 택시비가 아까워 택시도 타지 않는 내가 이 집에 공을 들인 건 그나마 마지막 남은 욕심이었다. 누구라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하룻밤 편히 쉬어갈 수 있었으면 했다. 죽은 뒤에 금관 속에 누워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걸 깨닫는 데 그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셈이다.
  욕심을 버리자 남은 삶이 수월해졌다. 사기꾼한테 호되게 털리고도 아이들한테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장학재단이니 뭐니 하는 말에 솔깃해서 그동안 놓쳤던 아이들이 마음에 남았다. 이제는 손녀뻘이 된 아이들을 찾아서 후원금을 주고 있다. 지금은 학교 행정실을 통해서 발전기금을 기탁하는 형식이지만, 예전에는 직접 기부자가 학생을 지정해서 선생님을 통해 전달할 수 있었다. 학비야 얼마 안 되지만, 학교 다니면서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들었다. 박 선생이라고 사회복지사 선생이 나를 도와주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야무지고 일머리도 있고, 인정도 있어서 늘그막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
  용현동 집에서 빈 몸으로 나올 때를 종종 생각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면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교복 입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부러워만 했지 내가 공부할 생각은 못했다. 그때 내 옆에 내 앞일을 걱정해주고 말 한마디 보태주는 사람만 있었어도 다른 삶을 만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내가 살아온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으니까. 후회하고 미워해봤자 남의 인생이 내 인생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박 선생이 추천한 학생 중에 3년 동안 매번 편지를 보내오는 아이가 있었다. 분기별로 한 번씩 학생의 통장으로 직접 후원금을 넣어주는데 돈이 들어가면 편지가 왔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맙다는 형식적인 얘기뿐만이 아니라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시시콜콜한 얘기도 했다. 할머니가 몸이 아파서 돌아가실까 걱정이라는 얘기를 읽었을 땐 아이구야, 이걸 어째야 하나, 싶어 박 선생에게 물어보았다. 박 선생 얘기로는 갓난아기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아인데 엄마 얼굴도 모르는 애라고 했다. 그 애 편지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기울어져서 내 발로 찾아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혹여라도 그 애한테 부담이 될까 싶어 참았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찾아오겠다는 학생들의 편지가 고맙지만 그 약속을 내가 받아야 할 몫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그 아이들 몫이고, 못돼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생색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그저 그만큼이지 큰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게 외롭지 않냐고 묻는데 나도 사람인데 왜 외로움을 모를까. 오랫동안 혼자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이 곁에 있는 게 불편하기도 했지만,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이제 구닥다리 늙은이가 되었구나 생각하면 서글퍼지기도 한다. 유행가에도 있잖나. 벽시계는 고장 나도 이놈의 세월은 고장도 안 난다고. 이 세월이 한꺼번에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밤도 있지. 잠자리에 누우면 어머니가 밤마다 문밖의 발소리,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가슴이 벌벌 떨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창 돈 모으는 데 미쳐 살 때 혹부리 아주머니와 가끔씩 전화 통화는 했다. 사는 게 뭔지 몇 년이 훌쩍 지나갈 때도 있고, 한동안 잊고 살다가 불현듯 생각날 때도 있었다.
  “에미나이야.”
  아주머니의 첫마디는 언제나 그랬다. 내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듣고, 기억해냈다. 에미나이야,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내 어머니와 같은 그 말투와 억양이 좋았다. 누가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내 마음속의 귀는 언제나 그쪽을 향해 있었다.
  “야, 독하다야. 어째 살아서 얼굴 한 번을 안 보여주나그래.”
  “아주머니, 조만간 한번 찾아뵐게요.”
  헛된 약속이었지만 그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땐 조만간이 10년씩 훌쩍 지나가고 가뭇없이 세월이 사라져버릴 줄은 미련해서 몰랐고, 욕심 때문에도 보지 못했다.
  10여 년 전 이곳으로 들어올 때 아주머니를 찾아갔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늦어도 너무 늦게 왔다는 후회가 들었는데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사람에게 다정함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늙어갈수록 인상도 괴팍해지고, 말도 곱지 않다.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다. 저 나이 되도록 심술궂고 고약해서 혼자 사는 여자로.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한번은 무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였는데 피디와 작가라고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사람들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숨겨둔 내 재산이 얼마냐고 캐물었다. 그러고는 돈 한 푼 아까워 벌벌 떠는 괴짜 노인네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속셈으로 내 앞에서 알짱대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거절했다. 늙은이라고 귀먹고 눈이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내가 텔레비전에 나가고 싶어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얼굴 내밀고 살 생각이었으면 진작 이렇게는 살지 않았다.
  그날 그들은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며칠 뒤에 작가라는 여자가 다시 찾아왔을 때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꿈 같은 게 인생이라지만 나는 내 인생을 한낱 시중에 떠도는 헛소문 같은 이야깃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

  긴 얘기를 마친 장귀자는 뜨거운 차를 다시 내왔다. 구수한 메밀차였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넓은 거실 창문이 먹빛으로 변해 있었다. 기란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휴대전화의 녹취 버튼을 종료하고 녹음 상태를 확인했다.
  저 녀석 아직도 지키고 앉았네.
  창밖을 바라보던 장귀자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자세히 보니 창문 앞에 바싹 다가앉은 개의 형체가 드러났다. 이 집을 지키는 충복처럼 녀석은 뒷다리를 바닥에 착 붙이고 상체를 든 듯한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저 녀석이 온 게 4년 전이던가, 아마 그럴 거야.
  장귀자의 집 뒤쪽으로 올라가면 언덕바지에 2층짜리 카페가 있다고 했다. 떡판 같은 갯고랑으로 물이 들어오는 걸 보겠다고 어떻게들 알고 찾아오는지 먼 데서 찾아오는 차가 수시로 장귀자의 집 앞을 지나갔다.
  간혹 개를 버리고 가기도 한다는데, 저 녀석은 아마도 거기 손님들 중에 누군가가 버린 것 같아. 그전엔 이 동네에서 한 번도 못 본 녀석이니까.
  어느 날 나타난 개는 장귀자의 집 대문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오가는 차들을 살폈다. 개를 키워본 적 없는 장귀자는 녀석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빵과 물을 놓아주었더니 배가 고팠던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홱 돌리며 도리질을 치던 녀석이 이제는 장귀자만 따른다고 했다.
  내가 그래서 이름을 도리라고 지었어요. 짐승보다 못한 사람도 많은 세상이야.
  당신들의 눈으로 나를 함부로 말할 거면 싫다고, 작가님은 내 얘기를 어떻게 할 거냐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귀자가 물었다.
  말씀해주신 대로 다듬어보겠습니다.
  그래요. 있는 그대로⋯⋯.
  장귀자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장귀자의 사진은 모두 다섯 장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뜨개 모자를 쓴 핼쑥한 볼에 눈과 입술 화장이 도드라진 조막만 한 얼굴. 웃고 있지만 찡그린 듯한 표정도, 자세도 엇비슷했다. 그중에 쓸 만한 것은 두 개 정도였다. 나머지는 형광등 불빛에 그림자가 번져 윤곽이 뭉개진 곳도 있었다.
  그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대문 곁에 밝혀진 동그란 가로등 불빛에 눈의 입자들이 빛났다. 장귀자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기란을 배웅했다. 구부러진 길을 천천히 휘어 돌자 백미러에 잡혔던 도리와 장귀자의 모습이 마술처럼 지워졌다.
  기란은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외길을 따라 달렸다. 간선 도로까지는 5분 거리였다. 뒤따라오거나 마주 오는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도로 바닥에 눈이 깔리기 시작했다. 첫눈인데 기세가 만만찮았다. 와이퍼가 작동하며 그리는 호선을 따라 한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지구의 깊숙한 오지, 자기만의 모태 언어를 쓰던 여인의 얼굴 같기도 했고 장귀자의 얼굴 같기도 했다.
  어떤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돌아가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여정이었지만, 대교를 건너올 때는 알 수 없는 시공간 사이에 끼인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홍명진

2008년 《경인일보》 로 등단. 장편소설 『숨비소리』 『미스 조』 『우주비행』 『타임캡슐 1985』 『앨리스의 소보로빵』, 소설집 『터틀넥 스웨터』 『당신의 비밀』, 『고래를 기다리는 일』, 산문집 『엄마가 먹었던 음식을 내가 먹네』 등이 있음. 전태일문학상, 백신애문학상, 우현예술상, 김용익소설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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