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을’의 사랑법

이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아실, 2023.

    5년 전쯤 그의 두 번째 시집 해설을 썼던 나로서는 이번 시집을 만났을 때 무척 설렜다. 그가 이전 시집까지 일관되게 견지했던 산책자의 시선과 거리의 풍경, 시든 일상에 관한 연민의 정서가 한결같은지 여부와, 새롭게 천착하게 된 시적 모티브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등등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산문적 호흡의 긴 시편들이 많아진 것을1 제외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듯한 시선은 이번 시집에서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사랑, 중년의 욕망, (자신은 물론 타인을 향한) 연민, 모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시적 화두도 여전했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왜 이리 멀까?

    시인은 늘 사랑을 갈망하며, ‘그대’에게 닿기를 소망하지만, 시인에게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종종 “나를 복구시키는 것은 언제나 당신 몫이다”(「징검다리」)나 “나는 버려진 애인이 되어/ 그 해변을 떠나왔고 그녀에게 수집되었다”(「오리무중」)에서처럼 수동적 혹은 피동적인 모습으로 시 속에 등장한다. 사랑에 관한 한 그는 늘 ‘을’인 것이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그가 수동적, 피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다. “온몸을 펼쳐 든 채 한낮의 독재와 맞서고 있다”(「하늘 높이 오른 죄밖에」)나 “단단히 맞서고 있는 고추나무”(「맞짱을 뜨다」)에서처럼 주체적 의지를 지니고 현실에 ‘맞서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대’와의 사랑에 있어서는 늘 ‘을’의 입장이 되곤 하는 것이다.
    다만 그는 지치거나 포기하지는 않는다. 시 「나머지 공부」 역시 ‘을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지만, 시적 화자는 연정의 대상에게 이해를 구하며 끊임없이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또 “자전거 체인에 감긴 길을 풀어/ 너에게로 가는 길을 이어놓는다”(「자전거를 타다」)와 같이 ‘너’에게 닿으려는 의지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건 매우 의미 있는 성실성이다. 어쩌면 시인은 ‘나머지 공부’를 해야 하는 문제아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한 성실한 모범생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우직함으로 인해 독자들은 시적 화자가 언젠가는 분명 상대에게 닿게 될 거라 기대하게 되는데, 사실 이러한 기대는 대개 판타지로 끝난다. 그의 많은 시에서 비애감과 애조가 조성되는 이유다.
    하긴 쉬운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랑을 성취하고 연정의 대상과 당당하게 소통하기란 시인에게만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세상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늘 을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다음과 같은 따듯한 시선은 얼마나 아름답고 미쁜 것인지, 독자들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게 하는 시 「유모차」에는 “늦은 봄 오후 유모차가 할머니 손을/ 잡고 건넛마을로 마실을 가고 있다”(「유모차」)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람(할머니)과 사물(유모차)의 관계가 전도된 이런 관계, 애잔하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혹은 아름다우면서도 짠한, 이 양가감정은 신산한 세월을 살아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잔잔한 유머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소망(욕망)한다. 세상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에서만 가능한 일탈, 즉 최후로 거품 같더라도 연정戀情의 주체가 되고 싶은, 말 그대로 ‘갑’이 되고 싶은 마음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나의 또 다른 생을 연출해줄 당신을 오늘 밤 나의 침실로 초대한다”(「개꿈을 꾸다」)라고. 장년의 정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신비한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가서 의지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기도 하는데(「그에게 가고 싶다」), 이처럼 현실에서 쉽게 이룰 수 없을 뿐이지 시인이 사랑과 그 성취에 관한 욕망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욕망과 현실의 이러한 틈은 종종 그에게 시작과 끝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시작과 끝의 경계를 허문 뫼비우스의 시간

    시 「내가 끌고 온 길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에서는 썰물과 밀물, 떠나고 돌아오는 것에 따라 시작도 되고 끝도 되는 공간 거잠포가 등장한다. “내가 끌고 온 길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라는 표현은 결국 내가 걸어와 도달한 길의 끝, 포구가 물에 잠기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일 테지만, 그것은 시작과 끝, 만남과 헤어짐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라는 시인의 관점이 드러난 부분이기도 하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인 ‘뫼비우스의 시간’은 시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밤새 달려온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는 순간 어제가 오늘이 되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짐승의 시간」)와 같은 표현 역시 어제와 오늘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시작이 끝이고 끝은 또 새로운 시작이라는 변증법적 시간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의 경계를 허문 것은 아니지만 시 「바지랑대를 들고 하늘을 털러 가자」 역시 영과 속, 지상과 하늘,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희미하다는 것을 동시적童詩的 상상으로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연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경계를 허문 지점에서 연민은 싹트는 법이다. 비루한 삶이지만 ‘그러함에도’ 삶은 이어지는 것, 주인공이 아니어도 사랑은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때때로 ‘상상임신’ 같은 것, 신기루 같은 행복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무녀일 게 분명한 ‘처녀보살’에게 물어봐야 하는 삶이지만, 그러나 한결같이 치열하다. 그 치열함의 뒤편에서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이 있다(「오래된 골목」).
    시 「꽃구경」은 꽃구경 다녀오다 휴게소 화장실에 들른 할머니들의 애잔한 삶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할머니 허리춤에 고장 난 해시계를 달아주고 싶”은 건, 할머니들이 더 이상 나이 들거나 늙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서로 보듬어 안고 사는 삶을 노래한 「사람을 사람 밖으로 함부로 버리지 말자」라든가, 싫든 좋든 생명 있는 것들끼리 모여 살 수밖에 없다는, 공동운명체 인식을 드러낸 「끼리끼리 모여 산다」와 같은 작품들도 대상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시인은 도시의 변두리 삶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연대와 상호 연민에도 시선을 둔다. 즉 서로 무관심한 도시적 삶과는 달리 자연에서의 삶이란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관심 두는 삶이다. 시 「변두리에 변두리만 모여 산다」에서는 꽃뱀의 죽음에 산국화가 조등을 걸고, 도꼬마리와 까마중이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며 익어간다. 얼마나 아름다운 상생의 연대인가? 아마도 시인이 바라는 세상은 사물과 인간 모두가 상호 연민하는 그런 세상이 아닐까?
    

엄마, 그리운 내 마음의 정처

    모성 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시 세계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단단한 축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모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 시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김포에서 박촌 가는 길」이나, 엄마 산소 가는 길에 만난 검은 새가 알고 보니 비닐봉지였고, 그 비닐봉지를 날려주며 미망에서 벗어난다는 내용의 「까마귀 날다」, 새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드러낸 「후살이」 등은 내용의 편차는 다소 있지만 모두 엄마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을 드러낸 시들이라 할 수 있다.
    엄마를 향한 이러한 그리움은 종종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병치되거나 혼융되어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그에게 고향은 곧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곧 고향인 셈이다. 짧고 명료한 시 「까치내1」, 「까치내2」, 「강마을」 등도 모두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하고 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갈 수 없는 고향, 만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변두리 연대’의 힘으로 작용한다.
    

연대는 나의 힘, 변두리에도 꽃은 핀다

    그렇다. 을의 사랑꾼인 그에게는 연대가 힘이다.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는 삶의 취향과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공감과 연대를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손을 잡는 일’은 바로 공감과 연대를 확인하는 엄숙한 행위다. 종교, 사상, 정치색도 다르고, 음식 취향, 계절 취향 모두가 달라도 손과 손을 맞잡았을 때의 연대감, 살아 있는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소통의 힘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건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뽕짝이 있는 풍경」에서도 상호 연민과 연대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변두리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형상화했다. 비록 촌스럽고 가난해도 흥이 흘러넘치는 변두리의 삶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아무리 힘들더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시인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두리(을의 공간)에도 꽃(사랑)이 핀다면 사랑에 있어 을인 나에게도 언젠가는 ‘그대’의 사랑을 얻게 될 날이 도래할 거라는 희망은 있다. 그것은 오랜 믿음이고 기쁨과 비애 모두의 자양이다. 삶이 매번 특별할 순 없지만, 시인은 오늘도 사랑받길 원한다. 아니 버림받지 않기 위한 안간힘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과 연민이 버무려진 시 「딱 한 번이라는 말」과 ‘당신’을 향한 애틋한 연시 「오늘 하루가 또 지나갔습니다」는 그대(아내)를 향한 절절한 사랑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마법이 필요한 시간, 나는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하지만 그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면 기꺼이 자신의 사랑을 휴업하겠다고 선언한다(「당분간 나를 휴업할까 합니다」). 사실 내면에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하여 그야말로 반어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 이 시에서 사랑의 연결과 단절의 주체는 ‘나’라는 점이다. 그가 늘 사랑에 관해서는 약자였고, 을의 처지였다는 걸 고려한다면, 이 시에서의 태도와 발언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사랑에 매몰되지 않고 사랑의 주체가 되겠단 발언의 시를 시집의 맨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제발 휴업하지 말라고 시인을 말리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은 휴업할 때가 아니라 ‘마술이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마술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 마술이 되게 해달라고 또 다른 마술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권 시인의 이번 시편들은 자주 지리멸렬한 일상을 살거나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지치곤 했던 나에게는 위로 같은 시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친한 형님이 지친 어깨를 도닥거려주거나 자신의 내밀한 속내까지 내게 드러내며 이야기를 건네오는 듯한 따듯한 느낌이었다. 하여, 아무리 고달프고 별 볼 일 없는 삶일지라도 언젠가 한 번쯤은 반드시 화양연화의 시절은 있을 거라는, 그런 기분 좋은 희망을 품고 사는 시인의 ‘마술의 시간’ 안에 나도 오래도록 함께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석〉

  1. 다른 시들과는 달리 산문시에서는 시적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긴장감이 느슨한 작품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던 게 사실이지만, 이 짧은 서평 안에서 그 이유를 분석하진 않겠다. 다만 시가 길어진다는 것은 뭔가를 설명하려는 욕망이 크기 때문이고 그것은 세상을 추상적으로 보기보다는 구체적으로 보려는 시인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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