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귀를 열며

  

    여름 동안 저녁 시간을 틈타 『수호지』를 읽었다. 도심에 경찰 장갑차가 등장한 오늘의 현실이 복마전에서 풀려난 108 악령의 세계 같기도 했고, 최근의 『수호지』는 120회 본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송 황실의 무능과 태수가 된 건달 고구의 악정으로 양산박 도적들이 생겨나는 이야기의 끝에 휘종 황제를 만난다는 말을 들었다. 궁금해서 『수호지』와 관련한 역사적 사적을 다룬 『중국사의 대가,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미야자키 이치사다宮岐市定, 차혜원 옮김, 푸른역사, 2006)도 빌려 읽었다.
    올가을은 이 긴 이야기를 무덥게 읽는 가운데 장마와 태풍과 더위 끝에 놓인 해독제처럼 갑자기 다가왔다.
  

서울국제도서전과 매끈한 사회

    가을호의 〈특집〉으로 서울국제도서전을 다루었다. 1954년 서울도서전으로 시작하여 1995년에 서울국제도서전으로 확장된 이 ‘책의 축제’는 올해 작지 않은 사건을 만났다. 일명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된 이 사건의 소이연所以然과 축제를 준비하고 즐기러 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송경동 시인이 상세한 정황을 보고하고 이 일의 해법이 될 제안까지 소개하여주었다. 이원석과 김택수는 각각 축제를 기대했던 독자와 축제를 준비했던 독립 출판사 대표로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을 다루었다.
    〈비평〉에서 박인성은 적에 대한 상상력이 사라진 시대의 빈곤함을 다루었다. 사회적 원자화가 이루어진 시대에 진영 논리와 혐오의 목소리 사이에서 사라진 적에 대한 상상력은 드라마, 영화,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 해석을 제시하는 동안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의 얼굴’을 직시한다. 류수연은 니트족으로 대변되는 청년들의 정규직 노동 현장을 찾는다.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와 김유담의 『커튼콜은 사양할게요』를 통해 살펴본 노동 현장은 젠더와 노동 가치의 문제로 만들어진 악순환의 고리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성공 신화와 노력, 그리고 능력주의 사회의 실상을 ‘불행의 평등주의’로 적시한 글을 보고 싶다면 서영채의 〈기획연재〉에 실은 「능력주의와 성공 서사」를 이어서 보면 좋겠다.
  

강화 작가 유지영, 전장연, 민가협 어머니들

    〈우현재〉에는 지난여름에 이어 강화 작가 유지영의 발굴작을 소개했다. 창작 동화와 시가에 숨은 상세한 계보도를 해설한 윤진현의 글을 읽고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르포〉에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에서 활동한 서재현의 글을 올렸다. 2022년에 부각되었던 전장연의 투쟁은 시민들의 불편과 폭력성을 강조하는 말들로 도배되어 있다. 소수자를 억압하는 권력의 힘은 언제든 강대해질 수 있고, 그 힘이 강대해질수록 국민 모두는 잠재적 소수자가 된다. 소수자의 요구가 들리지 않는 사회는 언제든 우리의 요구도 무시할 수 있다.
    〈민중구술〉의 이영재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의 어머니들을 찾았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몸담은 가족들을 위해 흉흉한 독재 권력과 싸웠던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담뿍 담겼다. 저 아득하고 먼 옛 그리스에서부터 죽은 오빠의 시체를 안고 울부짖던 안티고네의 노래처럼 이 어머니들은 국가와 마주 서서 정의를 외쳤다.

    시, 소설, 동시, 동화, 청소년소설, 아동청소년문학비평으로 이어지는 ‘창작’란은 독자의 감상을 위해 차려진 잔칫상이다. 나희덕 허완 천금순 김개미 자하 전문영 서요나 이성필 성다영 김동균의 시는 서로 다른 목소리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입맛을 맞춰준다. 안종수 도재경 주영하의 소설 역시 완연히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아동청소년문학의 ‘창작’란에서는 동시에 유강희 이정록이, 동화에 이퐁, 청소년소설에 김해원, 아동청소년문학비평에는 김윤이 톡특한 시선으로 지면을 채워주었다.
    최근 웹진 하단에 마련한 회원 출간작 소개 자리가 속속 새로운 책으로 채워질 정도로 인천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의 출간작이 넘쳐난다. 가을호 서평에서는 김림의 시집과 안종수의 소설집을 정민나와 이재용이 각각 소개했다. AI를 다루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박태웅의 AI 강의』의 안내도는 류인태가 그려주었다.

    이치사다에 의하면 휘종은 한량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새와 짐승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한 신하가 이를 반대하자, 그는 한 마리만 빼놓고 모두 풀어주겠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한 마리도 풀어주지 않았다. 점차 왕 주위에는 간신만 들끓었다. 휘종은 사치했고 도교 제사에 방대한 국고를 낭비했다. 밤에는 몰래 궁을 빠져나가 옛 습관대로 저잣거리의 밀실에서 술을 마셨다. 휘종이 있는 도성의 사치는 지방의 빈곤을 불러왔다. 지방의 도적 떼가 크게 일어나더니 이어 금나라가 쳐들어왔다. 송은 전쟁에 패하고 남송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옛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어설픈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있고 예전에는 없었던 무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목소리. 억압을 당할수록 모이고 핍박당할수록 커지는 시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작가들』은 이 가을의 푸른 하늘 아래 마음을 담은 귀를 더 활짝 열어본다.
  
  

이재용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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