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위로 눈길 외 1편

 
 
  눈길 위로 눈길
 

  너와 다투고 나서
  나쁜 말 못된 말을 일기장에 쓴 적이 있다
  지우지도 못하게 굵은 볼펜으로 꾹꾹

  싫어했던 마음은 볼펜과는 달리 언제라도 지울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네임펜으로 동글동글 덮었다, 일기장 한가득

  ●●● ●●● ●●
    ●●●●●● ●●●
  ●● ● ●●●●

  누가 보면 검은콩을 재배하는 줄 알겠다
  눈물 몇 방울이 검은콩을 툭툭
  건드렸다, 검은콩이 품고 있는 속마음이
  검은콩을 썩어가게 할 것 같았다
  수업을 듣다가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수정테이프로 검은콩을 덮었다, 눈길처럼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길처럼
  어린 길고양이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길처럼

  펜을 살며시 들고 다시 찍은 내 첫 발자국은
  미안해, 미안해
  너를 바라보는 내 눈길에 담고 싶은 마음이었다
 
 
  천국은 예술
 

  홍시! 홍시! 홍시 먹고 싶어 홍시하고 홍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아이 내복이 홍시 천국이 되었다

  입가에 손가락에 볼에 무릎에 그릇에 식탁에 벽에 물티슈에 장난감에 여기에 저기에 거기에 어디에서나 홍시

  감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단단했던 속이 말랑말랑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펑펑 폭죽처럼 터져나올 때까지
  펑펑 감동의 울음을 멈출 수가 없을 때까지

  아이 손으로는 천국 하나 만드는 게 순식간이다

  착한 일 안 해도 좋아 마음대로 놀아도 좋아
  좋아서 좋아
  
  

김준현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2015년 창비어린이신인문학상 동시, 2020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토마토 기준』 『나는 법』, 청소년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2023년 제24회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 등이 있음.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