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형제 여덟의 죽음, 한라산 피신 5개월: “진짜 ‘폭도’는 누굽니까!”

  

* 제주4·3평화재단 기관지 『4·3과 평화』 2021년 겨울호(45호) 「4·3의 증언」에 실렸던 글을 재수록하였음.

  

〈필자 주〉
  

그림1) 2021년 11월 제주4·3트라우마센터가 개최한 〈4·3기억 그림전─청산이도의 기억〉 전시장을 찾은 현상지 어르신(사진: 양동규) ⓒ 제주4·3평화재단
2016년 4월 노형해원상생굿 현장 증언자로 처음 나선 현상지(1930년생, 제주 노형) 어르신. 험한 세월만큼이나 모진 기억이 앞섰던 그날. 이름 없는 민초民草로 살아온 삶일 뿐이라며 말을 아끼던 어르신은 일가족 여덟의 죽음과 눈 덮인 한라산에서의 참혹했던 피난 생활의 기억을 너무도 생생히 풀어냈다.
  
“우린 어디 가믄(가면) 삽니까?”
  
강제로 집을 불태우는 군경에게 살 방도를 묻던 아버지. 오로지 살기 위해 끊임없이 뛰어야 했고 숨어야 했고 쫓겨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소개민, 도피자, 입산자, 빨갱이, 폭도, 귀순자 꼬리표들. 지난 2021년 11월 제주4․3트라우마센터에서 자신의 경험을 직접 손으로 그린 〈4·3기억 그림전─청산이도의 기억〉 전시회를 열고 있는 어르신을 다시 만났다. 어느덧 구순을 넘긴 그가 여전히 묻는다.
  
“진짜 ‘폭도’는 누굽니까!”

  

그림2) 1948년 11월 노형마을 소개 이후 살아남기 위해 피신했던 현상지의 피난지도(그림: 현상지, 지도: 박경훈) ⓒ 제주4·3평화재단

4·3이 뭐우꽈

    4·3을 겪지 않은 젊은이들은 4·3을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정확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왜놈 공출에 시달리다 해방이 되니까, ‘아이고, 이젠 별천지 될 세상인가?’ 기대를 했거든요. 당시 내가 열다섯 살이었으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청년들은 ‘아! 기쁘다. 일본 징용도 안 가도 되고, 걸궁도 할 수 있고 이제 우리는 살았다!’ 그랬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겁니다.

    “해방이 됐는데 또 공출허쿠과(공출하겠습니까)? 또 굶주리쿠과(굶주리겠습니까)?”

    귀가 우짝할(솔깃할) 말이거든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굶주리지 않는 것! 사람답게 사는 것! 그게 4·3의 핵심입니다.
  

“우린 어디 가믄 삽니까?”

    노형에 방일이 동산이라고 유명한 동산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때는 나팔동산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방일동산 남쪽으로 500미터 아래에 있는 마을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개진이, 원산동(그림2: ①)입니다. 1948년 여름, 방일동산에서 난데없이 총소리가 팡! 팡! 팡! 들려왔습니다. 교전이 붙어서 노형 청년 하나가 죽었다는데, 그 이후부터 방일동산 꼭대기에 깃대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흰 깃발이 꽂혀 있으면 ‘아직은 평화다’라는 뜻이고, 깃발이 내려지면 ‘경찰이 올라오고 있으니 알아서 피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아들 어디 갔냐!”
    “모르쿠다(모르겠습니다).”

    집으로 쳐들어온 경찰들은 다짜고짜 아버지 가슴에 총을 탁! 들이댔습니다. 마당에서 아버지와 같이 보리 장만을 하던 셋형님(둘째 형님)은 방일동산 꼭대기에 깃발이 내려지는 걸 보고 이미 쉐막(소 외양간)에 파놓은 작은 굴속으로 몸을 숨긴 뒤였습니다. 집 안을 다 뒤져도 셋형님을 찾지 못한 경찰은 분이 안 풀렸는지 애꿎은 나를 끌고 가더군요. 나는 배냇동산 소나무에 꽁꽁 묶였습니다.

    “너네 형 어디 갔냐!”
    “모르쿠다.”
    “바른말 안 하면 죽는다!”
    “모르쿠다.”

    열여덟 살이라고 해도 그땐 지금과 달리 너무 왜소했습니다. 키도 작고 살도 안 찌고 뼈만 붙어 있어서 열서너 살 정도로밖에는 안 보였을 겁니다. 몰명해서(야무지지 못해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지, 요망진(야무진) 아이였으면 그때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방일동산에 깃발이 내려지는 날이 계속되더니 초가을 어느 날 노형리 전체가 불탔습니다.

    “우리는 어디 가믄 삽니까?”
    “바닷가로 내려가라!”

    안팎거리 두 채의 집, 쉐막, 통시집(변소)까지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밤중에 불에 끄슬린(그슬린) 통시 돼지를 삶아 먹고 불에 타다만 곡식을 우영팟(텃밭)에 땅을 파 비장해(묻어) 두고, 뒷날 아침 노형에서 제일 가까운 이호리 오도롱(그림2: ②)으로 내려갔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데로 가야 식량이라도 가져다 먹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여든둘의 할아버지, 쉰다섯의 아버지, 스물일곱 큰형, 스물둘 셋형, 열여덟의 나, 어머니와 형수님. 열두 살 동생과 두 살, 네 살 조카까지. 10명 대식구가 모두 오도롱에 방 한 칸을 겨우 빌려 담아졌습니다.

    “소개민 청년들은 전봇대를 세우러 호병밧(밭)으로 나오라!”

    큰형님과 셋형님 두 분이 나간 뒤 탕! 탕! 탕! 총소리가 울려도 우리는 영문을 몰랐습니다. 분명 바닷가로 내려가면 산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형님들이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너네 큰아덜(큰아들)은 밧줄에 묶영 죽어서라.”

    그리고 다음 날, “소개민들은 바닷가로 더 내려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큰형님은 죽고, 셋형님은 간 곳을 모른 채 남은 가족들은 다시 이호리 큰가름으로 내려갔습니다. 날은 점점 추워져 어느새 초겨울이 됐습니다.

    “소개민은 판매소 운동장에 모여라!”

    노형 사람, 이호 사람 할 것 없이 집이 불탄 주민들은 모두 집결해야 했습니다. 남자, 여자, 노인, 청년,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와글와글 모였습니다.

    “눈 감으라!”

    한참 뒤 눈을 떠보니, 판매소(그림2: ③)에서 한 50미터 떨어진 밭에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사람들을 묶어놓았더군요.

    “탕!”

    총성이 울렸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 총살이었습니다.
  

가혹한 죽음, 참혹했던 피난 생활

    날은 점점 더 추워지고, 식량은 떨어지고, 가족 중에 도피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몰살시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불칸 터에 강 일주일만 고생햄십서. 일주일만 살암시민 살 도리가 이실 거우다(불탄 터에 가서 일주일만 고생하고 지내고 있으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이호리 사람들이 소개민 식량을 대줄 리가 만무하고, 셋형님이 간 곳을 모르니 우리는 이미 도피자 가족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날 밤, 여덟 식구 모두 불칸 터로(그림2: ④) 올라갔습니다. 비장해둔 곡식을 꺼내 자루에 담고 집에서 약 2킬로 떨어진 가매통(그림2: ⑤)으로 갔습니다. 냇가 소낭밭에 나뭇가지를 엮어 한 평쯤 되는 임시 움막을 만들고 그 속에서 이틀 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바락! 바락!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너희들은 포위됐으니 꼼짝 말고 나와라!”

    그냥 손들고 나가는 게 나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살지 못할 거⋯⋯. 하지만 그 말을 곧이들을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이고 뭐고 뿔뿔이 흩어져 뛰었습니다. 한참을 뛰다 보니 기동력이 좋았던 나는 종새동산(그림2: ⑥)까지 올라갔더군요. 총소리가 아득아득하더니 어느새 고요해졌습니다. 가족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베염나리(그림2: ⑦)에 도착했더니, 냇바닥(내창 바닥)에 사람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습니다. 지팡이 없인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들이니 도망치다 잡히거나, 바위틈에 숨었다 잡힌 겁니다. 토벌대는 붙잡은 노인들을 발로 차서 베염나리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렸습니다. 5~6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니 즉사할 수밖에⋯⋯.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시신도 베염나리 냇바닥에서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디 숨어 납디가(숨어 있었습니까)?”

    식구들 먹이려고 새벽부터 밥을 짓던 어머니. 자신 목숨보다 자식들 먹일 한 끼 밥이 더 귀했던 걸까요? 짓던 밥을 챙기느라 미처 도망치지 못한 어머니는 토벌대가 들이닥치자 엉겁결에 베염나리 냇바닥에 있던 큰 돌 아래 쭈그려 앉았다고 합니다. 토벌대가 돌 위에 올라서서 지휘를 하면서도, 그 아래 우리 어머니가 숨은 건 몰랐던 겁니다. ‘살젠 허난⋯⋯.’ 어머니는 살아날 운명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이었습니다. 당신이 숨어 있던 바위 옆으로 며느리와 막내아들이 어린 손주를 하나씩 업은 채 토벌대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 차마 같이 죽겠다고 따라나서지도, 살려달라 붙잡지도 못한 채 숨죽여야 했던 어머니는 그날이 평생의 한이 되었습니다.

    눈오름(그림2: ⑧)에서 찾은 동생과 조카들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습니다. 어린 조카들은 철창에 찔려 죽은 뒤였고, 동생은 배설(내장)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동생을 업고 불칸 터로 내려왔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눈물로 동생을 보내고 형수님은 간 곳을 모른 채, 어머니와 저, 둘만 남았습니다.

  

그땐 한라산이 왜 그렇게 작았는지⋯⋯.

    이젠 토벌대에 쫓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가매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안 목장 부근 구분동산(굽은동산)(그림2: ⑨)으로 피신했습니다. 구분동산이 발각되자 걸시오름(그림2: ⑩)으로, 다시 걸시오름 남쪽 쳇망궤(그림2: ⑪)로, 또다시 큰두레왓 밑 영덕궤(그림2: ⑫)로, 그리고 작은두레왓 남쪽 청산이도(그림2: ⑬)까지 쫓겨 갔습니다. 나는 작은두레왓 꼭대기에서 보초를 섰습니다.
    하루는 지금의 어리목 매표소 근처로 토벌대들이 우짝우짝 올라오는 게 보였습니다. 머리 위로 미군 정찰기가 날면서 따르륵! 따르륵! 퍼부어대는 기관총 세례에, 승패왓에서 토벌대들이 쏘아대는 박격포(곡사포)까지. 아이고! 이건 뭐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따로 없었습니다. 보초를 서던 나는 또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간 곳을 몰랐습니다.
    마지막 피신처는 한라산 Y 계곡 근처 안먹돌궤(그림2: ⑭). 피난민들이 모두 다 궤에 들어갈 수 없어 궤 바깥에 임시 움막을 만들었습니다. 청년들이 서평밭에서 야마野馬를 잡아다 피난민들에게 배급을 해주었지만, 배고픔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내려오면 이유 불문하고 모두 다 살려준다!”

    정찰기가 전단을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땐 한라산이 왜 그렇게 작았는지⋯⋯. 더 이상 먹을 것도, 숨을 곳도 없었습니다. 피난민들을 보호해주는 청년들도 사라지고, 이젠 각자가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나는 삼촌을 따라 어승생 꼭대기(그림2: ⑮)에서 얼마간 버티다 결국 백기를 만들었습니다. 삼촌이 주동이 되어 동네 사람 네댓 명과 함께 백기를 하나씩 들고 중장내까지 내려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바르륵! 났습니다.

    “너희들은 포위됐으니 꼼짝 말아라!”

    경찰에 붙잡혀 도착한 곳은 오라지서(그림2: ⑯).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동문통 헌병대 사무실(그림2: ⑰)로 인계되었습니다. 철모를 쓴 경비대가 젊어 보이는 청년들만 뽑아내더니, 나머지는 모두 주정 공장 창고(그림2: ⑱)로 보내더군요.

    “몇 살이냐?”
    “열여섯이우다(열여섯 살입니다).”

    주정 공장에서 처음으로 취조를 받았습니다. 열여덟이 넘은 나이였지만, 순간 잔꾀를 부렸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더 어려져야 했으니까요. 다행히 더 이상의 취조는 없었습니다.
    주정 공장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노형초등학교 자리(정존마을, 그림2: ⑲)에 성 담을 두르고 노형 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한 호당 두세 평씩 칸칸이 함바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6·25 전쟁이 터졌다고 군 징집을 하더군요. 나보고 참전을 하라는 겁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군대에 가야 하나! 나는 누구를 위해 애국하나!”

    ‘빨갱이’라며 죄 없는 우리 가족을 여덟 명이나 죽여놓고 남은 가족이라곤 어머니 한 분뿐인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슬포 훈련소까지 눈물을 흘리며 갔습니다.

    “귀순자는 앞으로 나와라!”

    모슬포 훈련소 운동장. 훈련대장이 귀순자들만 불러냈습니다. 가슴이 철렁! 하더군요. 다른 훈련병들 앞에서 ‘선서’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빨갱이’였습니다.
  

진짜 ‘폭도’는 누굽니까!

    4·3 당시 산에 간 사람들을 ‘폭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폭도의 ‘폭’자는 사나울 폭을 쓰고, ‘도’자는 무리 도 자를 씁니다. 폭도는 ‘사나운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 시절 사나운 무리들이 누구였습니까?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그놈들 아닙니까? 그놈들이 진짜 사나운 무리들이고 진짜 ‘폭도’였습니다. 우리는 산에 간 피난민일 뿐입니다. 우리가 왜 산에 가야 했습니까? 그 사나운 무리들이 강제로 집을 다 불태워버리니까 갈 데가 없었던 겁니다. 그때 우리가 물었던 건 딱 하나였습니다.

    “우린 어디 가믄 삽니까?”

    그래도 4·3을 겪지 않은 젊은이들이 발 벗고 나서주니까,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4·3을 겪은 우리 기성세대들은 겁이 나서 한탄만 해온 게 사실 아닙니까? 옛날엔 이런 말조차도 쉽게 할 수 없었는데 세상이 정말 많이 달라진 거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리고 70년이 넘게 기다려도 아직도 정리가 안 되고 있습니다. 이젠 젊은이들도 지쳐서 4·3을 고리타분하다고 느끼는 것 같고. 우리 유족들은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여전히 끔찔끔찔 하고 있습니다.

    “경허니까(그러니까) 4·3공원도 만들어줘수게(만들어줬습니다).”

    한편으론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4·3공원은 행정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명목을 세우기 위한 것이지, 4·3공원 만들어졌다고 유족들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닙니다.

    “4·3공원에 우리 세금 들어가수게(들어갔습니다).”

    이 말이 우리 유족들 가슴을 철렁철렁하게 한다는 걸, 저 높은 데 앉아 있는 위정자들이 모를 리가 없겠지요. 이제 그만큼 질질 끌었으면, 유족들 그만 울리고 똑바로! 제대로! 정리를 해줘야 합니다.
  

일가족 여덟의 죽음, 나의 용서는?

    솔직히 말해볼까요? 나는 ‘보상’이란 단어 자체가 틀려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보상이 아니거든요. 보상은 군인 가서 나라를 지키다가 죽으면 나라에서 돌봐주는 것,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는 의미뿐입니다. 하지만 ‘배상’은 틀립니다. 배상은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벌금을 내라는 겁니다. 4·3 당시 국가가 제주도민을 잔인하게 몰살한 죄, 재산을 초토화시킨 죄, 얼마나 큰 죄입니까? 이런 잘못에 대해 벌금을 내라는 겁니다. 명칭부터 당연히 배상이어야 마땅합니다. 이제 와서 슬그머니 보상이라고 말하는 건 비겁한 겁니다. 이건 돈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 선진국 아닙니까? 민주주의가 이만큼 성숙했으면, 이젠 약자인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줘야죠. 유족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화답이 될 때, 비로소 용서도 가능합니다.

그림3) 제주4‧3평화공원에 설치된 4‧3행방불명인 표석(사진: 김기삼) ⓒ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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