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반복(될) 운명

조영한,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걷는사람, 2022.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는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조영한의 첫 소설집이다.1 출간일이 2022년 8월 31일이니 거의 10년에 육박하는 기간 동안 쓴 작품 8편을 담고 있다. 작품이 실린 순서는 발표 순서와 다른데, 2016년부터 현재까지 쓴 작품을 앞부분에 3편, 맨 뒤에 1편을 넣어 최근의 작품들로 등단 초기 작품들을 둘러싸도록 구성하였다. 이 의도적인 순서가 착취의 폐쇄회로에 갇혀 노동하는 젊은 세대의 환멸幻滅을 돋을새김한다. 고시원에 사는 젊은 일용직 노동자 ‘나’의 하루를 그린 「오늘」과, 고시원에 살았다가 사우나로 옮긴 ‘고졸’의 남도행 결심을 그린 「묻혀 있는 것들」이 노동하는 젊은 세대의 고통스러운 일상을 그렸다면, 마지막에 실린 「그들의 가나안」은 젊은 세대가 지닌 환상을 TV에 나오는 뉴스 화면으로 전환하면서 환상이 소멸된 실재로 달음질치는 것이다.
  조영한의 소설에 도저한 멜랑콜리mélancholie는 이 환멸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작품의 전체적인 정서를 이루는 환멸을 “죄도 없고 구원도 없으며 그저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86, 97쪽)이라고 읊조리는 중장년 남편의 반복 문구(「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에서 두드러지는 환멸과 구별해야 한다. 그건 ‘죄’를 저질러야만 살 수 있는 이들을 위안하는 만트라와 같은 위상을 차지한다. 그것은 환멸의 겉모습을 취하고 있다. ‘죄’와 ‘구원’이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 문구는 ‘영혼을 억압한 환멸’임을 제시하며 총체적인 환멸을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한 억압을 지속시키는 환멸의 흉내로 인해 그들은 (육식을 즐기고 손길로 서로를 위로하는) 즐거움이 금지된 상태에 처한다. 원인Cause 없는 결과 앞에서 스스로를 처벌한다. 진정한 환멸은 그들이 눈을 감을 때 그들의 외부에서 작동한다.
  
  

유동적 상징질서 속의 프레카리아트

  

  조영한의 초기작들(편의상 2013년~2014년의 작품을 지칭한다)은 서술자의 시야가 좁다는 점에서 경험적이며, 그 좁음이 시간과 공간에 이어진다는 점에서 거칠게 보아 고전주의적 엄격함을 겸하고 있다. 그리스비극이나 라신의 극에서처럼 무대에서의 시간이 관객의 시간과 일치할 정도까지는 아니고 과거 회상이 곁들여 있기는 하지만, 답답할 정도로 촘촘하다. 작가는 이 현행적 시간과 (그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불운한 과거 회상으로 독자의 불안을 가중시키다가 폭발적인 결말을 제시한다.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던 기울어진 식탁의 붕괴(「식탁 위의 사람들」), 불행한 아이의 응시를 회상하다가 토한 끝에 마주 보게 된 검은 쥐의 시체(「검은 쥐」), 불법마사지 업소에서 폭행당한 여성의 복수를 위해 폭행자를 찾다가 자신의 손에 긋는 업소 직원(「매직」), 학과의 통폐합 반대 시위와 조교의 권리를 찾는 시위의 갈등 가운데에서 울부짖는 머리털 없는 남자(「S대」). 이러한 패턴이 독자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작가가 이 결말을 위해 쌓아나가는 간결한 문장 안에 의미를 부여하는 솜씨는 눈여겨 볼 만하다.
  시간강사, PX 판매병, 불법마사지업소의 직원, 조교 등, 조영한의 초기작에 나오는 다양한 서술자는 느슨한 의미에서의 프레카리아트이다.2 비록 이들이 신자유주의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직업군은 아니지만 임시직이거나 계약직이어서 불안정한 삶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불법 마사지업소의 직원이 상대적인 예외에 속하는데, 때문에 그는 손바닥을 그어야만 악업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른 인물들은 조직 구성원이지만 선거권이라는 정치적 몫이 없거나(시간강사, 조교), 성과의 분배에서 배제되어 있다(판매병). 「S대」에서 지방대학의 조교들은 정치적 결사체를 구성하여 권한을 쟁취하는데, 정치적 결사체에 소속된 조교들에게는 별명으로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결사체에 참여하지 않은 서술자만 ‘조교’라고 지칭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고정된 상징질서의 공백이다. 수요와 공급이 경제활동의 상징질서라면, 이들은 공급의 최전선에 있는 유령들이다. 언제든 그 공백들이 다른 인물들로 메워질 수 있는, 동일시할 장소를 빼앗긴 존재들인 것이다.
  이후 조영한의 소설은 미묘하게 변한다. 3인칭을 유지했던 시점이 몇몇 작품(「오늘」, 「그들의 가나안」)에서 1인칭으로 바뀌기도 하고, 인물의 프레카리아트적 성격은 더 강해진다. 일용직 노동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거나 아르바이트, 감염 동물 살처분 작업, 정육점 고기 분할 등의 노동을 한다. 계약은 하루나 이틀로 끝나지만, 오늘과 내일의 차이는 (더 위험하고 덜 위험한 차이가 있을 뿐) 크지 않다. 일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그들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인물들은 자기 처벌의 환상에 빠지거나(「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도 한다(「묻혀 있는 것들」, 「그들의 가나안」)는 점에서 폭발 없는 결말을 맞는다. 공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이 인물들 앞에서 도리어 요동치는 것은 그들을 고용하던 사회구조다. 공장이 문을 닫고, 살처분업체의 사장은 다음 계약을 위해 머리를 조아린다. 어쩌면 조영한의 소설은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하위주체에게 몰려들었던 사회의 하중이, 일정 기간을 지나 사회구조의 붕괴로 전이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작 형식과 반복(될) 운명

  

  소설집의 앞에 실린 세 작품의 연작 형식은 다른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에서처럼 이 연작은 한 작품에서 나왔던 인물 중 하나, 또는 사건 중 하나를 택하여 다른 작품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나’는 ‘고졸’과의 대화를 회상하고, 「묻혀 있는 것들」에서는 그 ‘고졸’이 서술자가 된다. 「묻혀 있는 것들」의 ‘고졸’은 한때 오리 살처분 작업을 했는데,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에서는 그때 만났던 남자와 그의 부인이 서술자가 된다. 그러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서사의 자연스러운 시간순을 택했다면, 조영한은 작품을 역순으로 고정시켜 낯설게 한다. 「오늘」이 가장 최근이며, 「묻혀 있는 것들」이 그 이전,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는 그보다 전의 사건이다. 또한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의 인물이 가장 나이 든 중장년 부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연작 끝에 독자가 도달하는 자리는 역설적으로 「오늘」과 「묻혀 있는 것들」의 청년 서술자에게 닥칠 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미래에는 육식도 하지 못하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단단한 실존이 놓여 있다.
따라서 과거는 기원이 아니라 미래이며, 이 연작은 ‘전미래’의 시간 구성을 제시한다. 젊은 프레카리아트에게는 내일 나갈 직장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만, 또한 그들이 계속 고시원에서 살 수도 있고 사우나에서 살던 끝에 다른 지방으로 가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결국 내면적인 금지 속에서 자기 처벌을 하는 미래의 문 앞에 당도한다. 환경단체의 반대시위 앞에서 감염된 동물을 살처분하고, 아내에게 낙태를 종용해야 생존할 수 있는 남(자들)편에게 제공되는 달걀과 닭고기가 들어간 도시락 앞에서 죄의식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면 말이다. 그들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하혈하는 배를 움켜쥐고 정육점 주인 대신 고기를 분할하고 정육점 주인 남편의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대신 만들어야 한다. 조심스럽지 못한 남편의 다정한 대응을 경계해야 하고 죽은 이의 죄를 묻고 사과를 받으러 정육점에 오는 사진사를 냉대해야만 살 수 있다. 그들의 뒤에서 살처분업체 사장은 공무원을 접대하고 정육점 주인은 아이를 보살필 시간을 갖는다. 그들의 집에서 바라보이는 학교의 은행나무는 이사장의 천식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고 학교의 방호원이 키우는 닭은 이사장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아내는 그 닭조차 부럽다.
  

  아내는 식사를 마치고 냉장고에 있는 보허제를 꺼내려다가 발길을 방으로 돌렸다. 전등을 켜고 창문을 열었는데 암탉은 보이지 않았고 건물 아래쪽 창문에 켜져 있는 불빛만 눈에 들어왔다. (중략) 주차장 쪽 농구장에 있는 가로등에서 불빛이 차올랐고 암탉은 아장걸음을 옮기면서 소리를 높였다. 끽뀨우, 끾규우, 끾규우라고. 밤하늘 아래에서 암탉 몸에 인공광이 내리는 광경은 신비스러웠다. 한 번도 애정을 받은 적이 없었던 어느 생명체의 몸에 잠시나마 세상의 관심이 모아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139~140쪽)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증오하게 될 내일을 예감한다.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를 닭을 구해오라는 아내의 부탁은 무의미해진 그들의 생명과 이렇게 살게 된 이유를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부정적 공격성 속에서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암탉의 생명은, 그러므로 삶의 이유를 생존 이상으로, 다른 생물의 죽음을 요구하는 생존 이상으로 상승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다.
  
  

고립된 생존과 탈출구-없음

  

  문제는 이 모든 프레카리아트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고립은 그들이 공급의 최전방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수요자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생긴다. 시간강사는 성적 문제로 자신을 협박하는 학생 앞에 있고, PX 판매병은 물품을 많이 공급하고 싶은 공급업자와 관리관 사이에 있다. 불법 마사지업소의 직원은 성 매매로 여성을 착취해야 하는 사장과 폭력적인 성매매 수요자 사이에 있고, 조교는 학과 통합을 반대하는 교수와 조교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시위대 사이에 있다. ‘고졸’은 고층에 매달려 창문을 닦으며 창문 안의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격렬하게 느끼며, ‘나’는 부모와 함께 살 수 없어 고시원의 좁은 방에서 산다.(「오늘」)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의 남편은 아내와 함께 살지만 그들이 나눌 온기는 ‘가위’라는 상징 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남편은 운동장에서 창문을 올려보고 있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알지 못했으나 그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펀드, 가상화폐, 골프장, 개발 붐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세계, 눈을 감으면 단잠은 생각하나 단절과 단종斷種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계, 자신 같은 생명체 목이 바닥에 뒹굴거나 땅속에 묻혀도 무시하거나 외면할 사람들의 세계. (148쪽)
  

  이들의 고립감을 부추기는 것은 불모성不毛性=不母性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대체로 아이를 낙태했거나 아이와 함께 있지 못하는 상태다. 여성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든든하거나 위안이 되는 관계를 맺지 못한다. 가족 안의 헌신적 관계로부터 떨어져나왔지만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생명과 따뜻함보다는 죽음과 상처가 그들에게 훨씬 가깝다. 안정보다는 불안이, 안심보다는 위협이 더 가깝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해지고, 미래는 이미 늙고 시들었다. 좁고 고립된 영역에서 그 바깥은 항상 번성하고 풍요로워보인다. 피 흘리고 상처받는 실존 안에서 그 바깥은 언제나 냉혹하고 잔인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그들의 가나안」은 이질적인 작품이다. 뉴질랜드의 수도 오클랜드의 한적하고 풍요로운 바닷가 마을의 꿈에서 시작한 소설의 서술자는 카페 일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으려는 젊은이다. 바람을 피우다 애인에게 들켜 헤어진 지 얼마 안 됐고, 이웃집 개를 산책시켜주는 일을 한다. (사례금을 받지 않으려 했으나 개주인이 자살하고 남긴 사례금을 받게 된다.) 바람을 피웠던 상대 여성은 같이 일하던 카페 직원이자 카페 주인의 조카이고, 연락하여 가끔 만난다. 오클랜드에 가서 사는 꿈을 꾸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타났던 암울한 프레카리아트들에 비하면 덜 고립되어 있고, 더 꿈꾼다.
  문제는 그의 주위가 전반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그가 사는 방의 지붕은 물이 샌다. 옆집의 개주인은 자살하고, 헤어진 애인은 교통사고의 트라우마로 위로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전화한다. 카페 주인은 사정이 어려운 카페를 운영하다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고 카페 주인이 자주 다니던 꽃집은 문을 닫는다. 세상에 폭풍이 부는데, 무심한 서술자는 바람 피웠던 여성을 만난다. 그 여성에게 뉴질랜드의 행복한 삶에 대해 설파한다. 이 작품의 반전은 요동치는 주위 상황으로 암시되었다가 뉴스 화면으로 완성된다. 인종차별로 인한 뉴질랜드의 총격 사건이 보도되는 동안 그는 잠들어 있다. 그의 환상이 세상으로부터 눈을 감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음이 드러난다.
  
  조영한의 소설은 냉혹하고 우울하다. 간결한 문체 속에 숨겨둔 빛나는 상징들은 비수가 되어 마지막 장면을 예비한다. 숨을 돌릴 수 있는 낭만적 장면이라든지, 실소를 머금게 하는 유머는 그의 몫이 아니다.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삶의 경험들을 길어 정성들여 빚으며 독자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서사가 잊고 있는 냉혹한 실재를 (철학적) 망치처럼 휘두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자본의 세계를 질주하는 모더니티의 전차를 목도하고, 그 잔인함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의 소설은 여전히 실험 중이다. 소설집 속의 작품 해설에서 임정균이 “조영한의 소설 세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354쪽)준다고 적시한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는 연작의 성격을 갖는 미발표작이다.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작인 「그들의 가나안」 역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후를 사는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에 숨겨진 새로움이 전해질 수 있기를, 그의 서사 방식이 오늘의 현실을 더 다채롭게 담으며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를 기대한다.
  
  

주석

  1. 조영한,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걷는사람, 2022. 이하 이 작품에서의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넣어 표기한다.
  2.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를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일곱 계층 중 하나로 본다. 최상층인 엘리트, 안정적인 풀고용 상태인 샐러리아트, (긍정적인 프리랜서 상을 대표하면서) 고기술 전문자유직인 프로피시언, 노동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 실업자, 사회적 부적격자. 프레카리아트는 소득 수준이 낮으며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한 층으로, 최소한의 사회적 보장을 받지 못하며 절박할 때 공동체 원조를 받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가이 스탠딩,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4, 23~3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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