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권력

  
  

  대학원 석사과정생이었던 1990년대 후반에,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이후, 1999)를 읽었다. 당시 개념으로는 이해가 갔지만 소화할 수 없었던 명제가 있었다. 권력과 폭력은 다르며, 권력은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74쪽)는 말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내게 권력과 폭력을 떼어내어 별도로 생각하는 일은 오래도록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은 환상이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난 요즈음에 와서야 폭력과 결부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의 상이, 미흡하나마 조금씩 그려지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문학 경험의 현재적 변화

  

  2022년 겨울, 『작가들』은 문학 경험의 범위를 넓혀 책을 쓰고 읽는 관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다루었다. 소설가이자 1인 독립출판사 ‘빈종이’ 대표인 임발은 문학 생산 현장에서 일어난 변화들, 즉 크라우드펀딩, 독립출판, 북페어, 구독 서비스, 독립서점 등을 폭넓으면서도 꼼꼼하게 다루어주었다. 전승민은 북클럽과 SNS 라이브 방송, 유튜브 등에서의 활동을 비평적 언어로 조명하였다. ‘소통 불능의 오브제’가 될 수도 있는 텍스트의 잠재성을 일깨워 소통의 장을 최대한 열어야 한다는 전언이 정성 들인 글 속에서 반짝인다. 팟캐스트, 구독 글쓰기, 동네 책방 연계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시인 김은지는 책방 지구불시착에서의 경험과 팟캐스트 〈도심시〉의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다.
  김인경의 비평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변화의 하나로 웹진을 살펴보았다. 출판사 문학동네와 민음사에서 시작하여, 〈문장 웹진〉과 〈비유〉, 〈문화 다〉까지 소개하였다. 웹진의 구성과 그를 기반으로 한 활동을 두루 살폈다. 한편, 서영채의 「인문학 개념정원」은 자연사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 인간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역사를 관통하는 시점들

  

  〈우현재〉는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 즉 인노회의 활동 내역을 담았다. 활동 당시 인노회 대의원대회 의장이자 교육선전반원이었던 신정길은 인노회의 대중적인 활동과 현재의 재판 경과를 보고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르포〉의 시선은 오늘날 직업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MZ세대의 목소리로 향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품는 일이기도 하다. 〈민중구술〉에서 김경은은 바위그림 전문가 장석호를 찾아 울주 대곡리 암각화 채록 연구와 관련된 광범위한 이야기를 꼼꼼히 담았다.
  최열은 〈시선〉에서 인천시의 재개발로 사라지는 숭의동과 송림동을 사진으로 담았다. 1957년 이 지역의 랜드마크처럼 여겨졌던 숭의동 ‘전도관’의 마지막 모습도 보인다. 겨울의 창작밭에도 작가들의 노력이 영글어 있다. 정세훈, 이민하, 정서영, 강성남, 박세미, 이권, 서호준, 주민현의 시와 박정윤, 박인의 소설, 이안, 우미옥의 동시와 오시은의 동화가 황량한 시대의 추위 속에서도 성성하다. 〈서평〉에서는 희음, 이재용, 양재훈이 각각 이용훈의 『근무일지』(창비, 2022), 조영한의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걷는사람, 2022), 강경석의 『리얼리티 재장전』(창비, 2022)을 다루었다.
  
  10·29 이태원참사 다음 날인 일요일, 행정안전부와 용산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다. 홈페이지는 고요했다. 긴급하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별도의 연락처는 없었다. 전해진 유족들의 말에 의하면, 정부는 참사 사망자를 여러 병원으로 흩어놓았고 해당 부서는 유족들이 모이는 길을 열지 않았다. 보도에 의하면,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가 급하게 차려졌고, 시간이 좀 지나자 ‘참사’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유족들과 거리를 둔 채, ‘내부’의 결론만이 하달되었다. 폭력은 목소리들을 삭제하고 홀로 목소리를 드높인다. 다시 아렌트의 말을 빌자면, “순전히 폭력만을 통한 지배는 권력이 상실되고 있는 곳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86쪽). 권력은 시민의 의지가 모이는 곳에 있다. 권력은 여러 목소리가 마음껏 흘러 모일 수 있는 곳에 있다. 권력은 폭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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