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개념정원 〈13회〉 : 욕망의 그래프 1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수식과 도표를 이용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면, 단연 〈욕망의 그래프〉가 지목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라캉 이론의 핵심을 품고 있다는 점, 좀 더 나아간다면, 인간을 바라보는 라캉의 관점을 포괄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욕망의 그래프〉에는 라캉의 이론적 공적으로 평가되는 개념들─구성된 것으로서의 주체와 욕망의 작동 기제, 그리고 그 너머에서 움직이는 충동의 모습들─이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있다. 각각의 작동 기제만이 아니라 요소들 간의 상호 관계가 구현되어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그래프라는 표현 형식이 있어,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라캉 이론의 지도가 그려진다고나 할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그래프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프 전체의 의미와 작동을 아는 것은 라캉의 체계 전체를 이해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것이 라캉의 이론인데, 그 체계 전체를 단숨에 이해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쉬울 수가 없다.
  게다가 그래프라는 표현 형식 자체가 독립 변수로 작동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까다로움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특히, 〈욕망의 그래프〉는 수치나 데이터를 그림으로 단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체계의 전체상을 압축적으로 제공하는 형태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그래프는, 라캉 이론에 관한 다른 수학적 표현들이 그렇듯이, 그래프라는 표현 형식 자체의 고유성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만들어내곤 해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프 자체의 해석적 일관성과 라캉의 이론체계가 들어맞지 않는 점들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의 일이고 우선은 그래프 자체를 이해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래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내용을 간명하게 도해하여 쉬운 이해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욕망의 그래프〉 역시 이런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그래프의 형식을 보면 사정이 조금 다를 수 있다.
  〈욕망의 그래프〉는 4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욕망의 그래프〉 완성태

  위의 최종 그래프를 보면서, 왜 우리가 이런 그림을 이해해야 할까, 이해하려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와 같은 질문이 생겨난다면, 현재 인문학 이론의 판도에서 라캉이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비중을 떠올려보는 것이 동기 유발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래프가 처음엔 조금 복잡해 보이지만, 한 발짝만 안으로 들어가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는 점도 덧붙여 두자.
  단순화시켜 보면, 이 그래프는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진 화살표가, 위아래로 놓인 두 개의 수평선을 두 번 관통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아랫단의 수평선은 언어, 윗단의 수평선은 신체에 해당한다.
  이 둘은 각각 〈욕망의 그래프〉가 담고 있는 두 개의 질문에 상응한다. 이는 라캉의 이론체계 전체가 제기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첫째, 나는 무엇인가. 둘째, 내 몸은 무엇을 원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아랫단에, 두 번째 질문은 윗단에 담겨 있다. 이 둘은 각각 의식과 행위, 생각과 몸, 욕망과 충동, 언어와 향락 등의 화두로 구분될 수 있다.
  이번 회에는 먼저 아랫단에 관해 살펴본다.

  

그래프1, 주체의 탄생

  아랫단 그래프는 구현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의 지도이다. 공동생활을 함에 있어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은 상호 소통의 매체, 곧 언어이다. 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사회가 자기에게 부여한 역할과 정체를 아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대답하는 과정은 이를 위해 필수적이다. 라캉은 그 과정을 다음 두 단계로 나누어 보여준다.

그래프 1

그래프 2

  그래프1은 단순한 형태이다. 여기 등장하는 기호들의 뜻은 다음과 같다. /S 는 주체, S는 기표signifiant, △는 원초적 의도(혹은 욕구)이다.
  이 기호들의 뜻을 새기면, 그래프1은 언어를 통한 주체의 탄생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임이 드러난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힘(△, 원초적 의도 혹은 욕구)이 언어의 선(S→S’는 흔히 기표의 포열 혹은 포대라고 번역되곤 한다. 대포가 줄지어 있다는 말인데, 이는 battery를 직역한 것이다. 여기에서 대포라는 말은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가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는 뜻이다. 배터리라는 단어는 수많은 기표 즉 단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S에서 S’로 이어지는 기표의 대열은 곧 일렬로 늘어서 있는 언어의 선을 뜻한다)을 만나서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수평선 밑에 있어 알 수 없던 어떤 힘이 언어의 수평선 위로 고개를 드는 모습과도 같다. 물고기 한 마리가 수평선 위로 펄쩍 뛰어 올랐다가 다시 바닷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해도 좋겠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화살표 끝에 매달려 있는 것, 주체(/S )가 곧 그것이다.
  주체를 /S (빗금친 에스)라는 기호로 표시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라는 선을 통과하는 순간 주체가 분열된다는 것을 뜻하기 위함이다. 주체 안에서 행해지는,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의 분열은, 불행한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주체의 탄생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언어라는 수평선을 뚫고 도약하지 않는 한 (즉, 공동생활을 하면서 공동의 소통 매체인 언어를 습득하지 않는 한) 어떤 개인도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늑대의 무리 속에서 살아온 늑대 소년은 인간일 수는 있어도 주체일 수는 없다. 한 사회의 소통 방식을 익히지 못하는 한 그 어떤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주체 대접을 받거나 주체로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프1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측면은, 언어라는 경계선을 두 번 통과함으로써 생겨나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무의식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한 사람 안에 있는 원초적 힘(△)은 언어의 선을 통과하면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을 남긴다. △가 몸과 마음 사이에서 발생하는 욕구이자 의식 이전이라면, 언어와의 만남 이후에 남겨지는 것은 요구이자 의식이다. 이 말은 그러니까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수 없는 것들은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이 곧 무의식의 개념이며, 따라서 의식의 주체는 언제나 동시에 무의식의 주체이기도 한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주체란 기본적으로, 한 집단의 상징체계에 포획되고 길들여진 존재를 뜻한다. 그 상징체계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존재, 그러니까 의식과 무의식으로 갈라져 있는 존재가 곧 주체인 셈이다. 주체가 되는 순간 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니, 뒤집어 말하면 무의식 없이는 주체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프2,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래프2는 주체 형성의 기제를 좀 더 정교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추가된 기호들의 뜻은 다음과 같다. m은 상상적 자아(라캉의 기호 체계에서 대문자는 상징계, 소문자는 상상계에 속한다), I(A)는 상징적 동일시(혹은 자아 이상), i(a)는 상상적 동일시(혹은 관념적 자아), A는 큰타자(혹은 대타자, 프랑스어 autre의 머릿글자이고 항상 대문자로 쓴다. 영어로 번역하는 경우는 대문자O로 쓴다. other의 머릿글자이다. 라캉의 용어법에서 타자라고 말하면 보통은 큰타자를 뜻한다), s(A)는 기의signifié이다.
  전체적인 움직임은 주체(/S )에서 시작하여, 언어의 선에 있는 큰타자와 의미를 거쳐 상징적 동일시(혹은 자아 이상)에 이르는 과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에서 동일시identification란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을 획득하는 것,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두 개의 동일시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루겠다.
  이 기본 흐름에, 언어의 선을 만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는 물밑의 흐름이 추가되어 있다. /S 가 i(a)m을 거쳐 I(A)로 나오는 흐름, 즉 대문자 기호들(대문자 기호는 상징계에 속한다)의 선으로 솟구치지 못한 채 소문자 기호(소문자 기호는 상상계에 속한다)를 따라 이어지는 흐름이 그것이다. 이 흐름은 언어의 선을 만나지 않으므로, 여기에는 큰타자도 기의=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S  → A → s(A) → I(A)의 기본 흐름이 구현하고 있는 것은 주체가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주체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큰타자는 그 사회의 언어로 대표되는 것, 즉 사회의 질서와 규율의 존재를 뜻한다. 부모와 교사, 좀 더 크게는 국가 등이 대표적인 큰타자이다. 라캉은 이를 ‘아버지의 이름(아버지의 금지 명령이라는 뜻이기도 하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체는 큰타자의 인도를 받아 언어 질서를 만나게 된다. 주체와 언어의 만남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처음 만나는 것은 기표, 즉 언어가 지닌 소리의 측면이고, 그리고 그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기의, 즉 언어가 지닌 의미의 측면이다.
  라캉은 기의를 s(A)라는 기호로 표현한다. 말뜻은 큰타자가 가르쳐주는 것이기 때문에 A가 괄호 안에 있고, 또한 상상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소문자 s로 표현된다. 상상계는 기본적으로 주관성의 세계이자 착각의 왕국이다. 상징계의 산물인 기표가 한 사회에서 공통으로 통용되는 객관적인 것이고, 상상계에 있는 기의는 기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구사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상상계의 힘, 곧 기의를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착각들이 그 안에서 부딪히고 있기 때문이다. 기의가 s(A)와 같이 상상계 소속의 소문자로 표현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한 존재가 말을 배우고 그 뜻을 익히면 주체의 탄생이 일차적으로 완료된다. 자기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숙지하게 됨으로써 주체가 생겨난다. 그것이 곧 상징적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S 가 I(A)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두 항목, 곧 큰타자와 기의를 라캉은 고정점point de capiton(누빔점, 정박점 등으로 번역된다)이라고 부른다. 의자에 방석을 고정할 때 단추를 박아넣는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두 개의 고정점이 있어야 주체의 의식이 흩어지지 않은 채로 유지된다는 뜻에서이다.

  

주체의 역전retroversion 효과

  그래프2는 그래프1을 정교하게 만든 것인데, 그래프2로 변환되면서 두 가지 바뀐 요소가 있다. 언어의 선을 뜻하던 S→S’가 S→목소리로 바뀌었고, △가 있던 자리에 /S 가 들어섰다. 이 이후의 그래프들에서는, △와 S’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는 그래프가 시작하는 원동력이었으나 그래프2 이후로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S 가 들어서 있다. 당연하게도 /S 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가 언어의 선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주체는 거기가 제 자리인 양 의기양양한 출발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역전 효과라는 말은 바로 이런 모습을 지칭한다. 특정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의 흔적이 지워지는 효과, 구성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인 양 보이도록 하는 착시나 환영의 효과가, 주체의 형성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착시 효과는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자주 보이는 것이다. 한 번 하고 두 번 하면,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일은 일상에서 쉽게 확인된다. 한 사람에게 건넨 호의가 두 번 되풀이되면 세 번째부터는 당연한 것이 되기도 하고, 법정에서도 동호회에서도 한번 결정되고 재차 반복되면 관례가 되고 전통이 되기도 한다. 현실적 판단의 지침으로서 유용성을 갖는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그런 관례나 전통이라는 것이 이 같은 역전 효과의 산물이며,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자기 기만이나 환영에 입각해 있음 또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래프2에서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 주체는 편할 수가 없다. 그 밑에는 △의 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에게 불안은 상징계의 시민권자들이 치러야 할 세금과도 같아서 주체 형성의 기본항이라 할 만하다. 주체가 감당해야 할 불안의 원천은 물론, 주체와의 자리바꿈으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된 △의 힘에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일 수는 없다. 억눌린 것이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가 사라지는 것은 의미 작용을 통한 고정의 결과, 즉 A와 s(A)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미 작용의 결과이다. 언어적 질서가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되면 그 힘은 언어의 선 너머로 솟아오른다. 다음 회에 다룰 그래프3이 그 양상을 구현한 것이며, 그 힘을 다시 포획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최종 그래프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 회에 살필 것이다.

  

의미의 소급 작용, 목소리

  그래프1과 2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의미의 소급 작용이다. 출발점을 떠난 주체의 화살표가 큰타자를 통과하면서 휘어지는 방향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즉 앞이 아니라 뒤쪽이다. 시간적으로 보자면 전진이 아니라 후진의 지향성을 갖는다. 의미가 언제나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것은 『작가들』 2019년 봄호의 제1회 ‘사후성’에 다뤘다)을 숙지하고 있다면, 의미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표가 과거를 향해 날아가는 이치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겠다.
  주체가 언어의 선과 마주치면서 조우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기표(S)이다. 오른쪽 고정점에 있는 큰타자(A)가 기표의 제공자이다. 주체는 그 기표의 뜻을 어떻게 알게 될까. 주체가 기표의 의미(s)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어휘 목록을 뒤져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깨달아야 한다. 아, 이것이 사랑이었구나, 아, 그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었구나,와 같은 식의 깨우침이 말뜻 찾기의 기본 형식이다. 그것이 곧 의미의 소급 작용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어린 딸이 아빠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예요? 대답하기 위해 아빠는 어린 딸의 어휘 목록을 뒤져야 한다. 응, 좋아하는 거야. 이제는 어른이 되어 연애를 하다가 고민에 빠진 이십 대의 딸이 아빠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예요? 아빠가 답한다. 음, 목숨을 거는 거지. 혹은, 글쎄, 자기 길을 가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느 쪽이건 간에, 낯설게 다가온 기표가 기의를 만나게 되는 것은, 자기가 이미 지니고 있는 어휘 목록을 향해, 즉 뒤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통해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의미 찾기의 소급 작용이 뜻하는 것이다.
  기의를 찾아 왼쪽으로 날아간 화살표 반대편 끝에는 목소리가 놓여 있다.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힘은, 주체로부터 솟구쳐온 화살표를 관통하여 수평으로 나아가는 기표의 화살표이다. 그 끝에 있는 목소리는, 의미를 찾아 기의를 향해 날아간 화살표와 반대되는 지향성을 지닌다. 그러니까 기표에서 의미가 제거되어 버린 결과가 곧 목소리이다.
  목소리는 기표가 주체의 발성 기관을 통해 몸 바깥으로 나와 공기를 진동시킨 결과이다.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 함은 무슨 까닭일까. 그래프2에 등장한 목소리란 데리다가 서양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썼던 이른바 음성중심주의 안에 있는 목소리, 곧 충만한 현존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의미를 제거해버리고 남은 찌꺼기이자 일종의 관성이나 습관의 담지자의 자리에 목소리가 놓여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라캉의 틀에 따르면, 의미를 찾아 떠나는 주체가 남겨둔 목소리는, 그것이 무슨 말이건 간에 모두 다 헛소리이자 빈말이고 내용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진짜는 저 왼쪽으로 날아간 화살표의 궤적 속에서 만들어지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상징적 동일시와 상상적 동일시

  I(A)와 i(a)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상징계와 상상계의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프2에서, i(a)m으로 이어지는 상상적 동일시는, /S  – A – s(A) – I(A)로 가는 기본 흐름에 지름길처럼 부가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름길은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키곤 한다. 언어의 선을 통과하지 않은 채로 자기 인식을 향해 가는 상상적 동일시는 착각이 만들어낸 지름길, 지름길처럼 보이는 함정의 결과이기 때이다. 게다가 주체 밑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의 힘이고 보면, 그 함정은 마치 전기 회로에서 저항을 통과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합선short circuit 사고처럼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낸다. 망상이나 환각 같은 증상들이 곧 그것이다.
  동일시란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자아의 이미지와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심리적 기제이다.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의 차이는 아이와 어른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제 막 축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저학년 선수에게 본받고 싶은 선수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당연히 세계 최고의 공격수의 이름을 댈 것이다. 축구 선수 중에서는 득점에 직접 관여하는 공격수가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중학생 나이가 되어, 자기 팀에서 수비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여전히 호날두나 손흥민 이름을 댈 수 있을까. 십중팔구 그 아이는 자기와 비슷한 포지션 선수의 이름을 댈 것이다. 홍명보나 김남일 같은. 이 경우는 상징적 동일시의 결과인 것이다.
  상상적 동일시가 일방적 선망의 결과라면, 상징적 동일시는 자기 현실에 대한 판단과 고려의 산물이다. 상상적 동일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로지 특정 대상이 지닌 장점과 매력이지만, 상징적 동일시는 다르다. 오히려 결점이나 단점, 오점과 실패 등이 그 대상과의 동일시에 포함될 수도 있다.
  상징계에 거주하는 주체(/S )는 자기 가슴을 절단하고 있는 빗금의 존재를 안다. 그런 주체가 다른 누군가와 동일시를 한다면, 최소한 그 대상이 결점 없는 존재가 아닐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피터팬의 세계와 같은 상상적 동일시와 구분된다.

  

  

후주
  〈욕망의 그래프〉는 라캉의 논문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크리』, 홍준기 외 옮김, 2019)에 수록되어 있다. 라캉의 글은 불친절하다. 해설로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과 핑크의 『에크리 읽기』(김서영 옮김, 도서출판b, 2007) 등이 대표적이다.
  I(A), i(a)를, 지젝은 상징적 동일시와 상상적 동일시라고, 핑크는 자아 이상과 이상적 자아라고 주로 썼다. 논문에서 라캉은 분명하게 특정하지 않은 채로 둘 모두 사용하고 있다. 내용 자체를 보면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큰 뜻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 다만, i를 identification의 약자로 읽는 쪽이 나아 보이고, 라캉이 이 논문에서 쓴 자아 이상의 의미가 프로이트가 사용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나서, 동일시로 읽고 사용하는 쪽이 좀 더 나은 대안으로 보인다.
  목소리를 찌꺼기로 이해하는 방식은 지젝의 책에 현저하다.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와 반대라는 견해 역시 지젝의 책에 나오는 말이다. 합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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