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사이

  

  5학년 2반 앞이 시끄럽다. 교실 앞 복도에서 2명의 아이가 대치하고 있고 꽤 많은 아이들이 그 주위를 빙 둘러 있다. 말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지혜와 말수가 없는 무진이의 대결이었다. 불구경만큼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을 하느라 구경꾼들은 점심도 포기하고 모였다.
  “쟤들 왜 그래?”
  뒤늦게 온 아이들이 원래부터 서 있던 다른 아이에게 물었다.
  “몰라. 나도 방금 왔어.”
  “근데 쟤들 싸우는 거 맞아?”
  지혜는 팔짱을 낀 채 씩씩거리며 무진을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무진은 자기가 왜 여기 이렇게 서서 저 무시무시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렇게 몇 분이 더디게 흘렀다. 흥미진진한 싸움을 기대했던 구경꾼들은 지루해졌다. 급기야 몇몇은 급식실을 향해 자리를 떴다. 그리고 또 몇 분. 이제 남은 아이는 없다.
  “나 배고픈데.”
  지혜 눈치를 보던 무진이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서?”
  “밥 먹으러 가고 싶다고.”
  지혜는 “하아.” 하고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지금 밥이 생각나니? 정말 어이없다.”
  지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진이의 반응이 황당하기만 했다.
  방금 전 지혜는 무진이에게 고백을 했다. 원래는 무진이에게 받아야 할 고백이었다. 고백은 먼저 좋아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지혜는 확실한 게 좋다. 정답이 분명한 게 좋아서 과목 중에 수학을 제일 좋아할 정도다. 무진이가 고백할 때까지 기다리려던 지혜는 결국 먼저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무진이니까 고백까지 한참이 더 걸릴지 몰랐다. 아니 고백이란 걸 아예 안 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지혜가 먼저 사귀자고 말하면 기다렸다는 듯 알았다고 대답할 거였다.
  “미안해.”
  “그래. 그럼 오늘부터 1일……. 아니, 뭐라고?”
  고백했는데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 먼저 사귀자고 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말인가? 짧은 몇 초 동안 지혜는 온갖 생각을 다 했다. 하지만 정답이 구해지지 않았다. 애초에 답을 구할 수 없는 잘못된 문제를 받은 것 같았다.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똑 부러지는 지혜가 말을 더듬거렸다.
  “난 누굴 좋아해본 적이 없는데? 아직은 그런 거 이상해. 징그럽고.”
  징그럽다는 무진의 말에 지혜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신이 한순간 벌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니, 네가 징그럽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남자랑 여자랑…….”
  무진이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지만 더 이상 지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날짜를 기억하는 건 새로 옮긴 학원에 간 첫날이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서 엄마는 마음대로 학원을 옮겼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학원을 옮긴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다. 같이 학원을 다녔던 친구들과의 관계가 싹둑 잘리는 거였다. 학원 친구가 학교 친구로 이어진다는 걸 엄마는 모른다. 알아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런데 그 학원에 무진이가 있었다. 평소에 말도 한번 안 해본 사이였지만 지혜는 반가웠다. 학급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는 무진과 달리 지혜는 친구도 많고 공부를 잘해 선생님에게도 예쁨을 받았다. 그러니 무진이가 먼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진이는 한번 쓱 쳐다볼 뿐 알은척도 하지 않았다. 무진 말고는 아는 친구 하나 없었다. 더욱이 전에 다니던 학원과 달리 지혜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어디에 가든지 지혜는 늘 중심에 있었다. 지혜는 이 상황이 낯설고 싫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학원을 나섰다. 그러다 툭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발이 걸려 꽈당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겨울이라 땅이 차갑고 딱딱했다.
  ‘아, 정말 되는 일 하나 없어’
  몇 시간 동안 버틴 힘이 무너져버렸다. 그때 누군가 무덤덤한 말투로 지혜를 부르지 않았다면 처량하게 눈물을 뚝뚝 흘릴 뻔했다.
  “안 다쳤어?”
  돌아보니 무진이었다.
  “어. 괜찮아.”
  그래도 같은 반 친구라고 넘어진 게 안쓰러웠나 보다고 지혜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처음엔 왜 아는 척을 안 했을까 궁금했다.
  ‘뭐, 무진이 성격이라면 그럴 수 있지.’
  더군다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은 섞여지기 어려웠다. 둘이 사귀면 모를까.
  “너 배고파?”
  갑자기 무진이가 물었다.
  “왜?”
  무진이는 턱짓으로 길 건너편에 있는 분식집을 가리켰다.
  “저기 떡볶이 맛있거든? 즉석떡볶이. 같이 먹을래?”
  사실 지혜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기분이 별로면 밥을 안 먹고 넘어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진이를 뒤따라 분식집에 들어갔다.
  낯선 학원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만나서일까. 이상하게 말도 한번 해본 적 없는 무진이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무뚝뚝할 거라 생각했는데, 학교 밖에서 따로 본 무진이는 꽤 다정했다. 먹는 내내 학원 선생님이나 아이들 특징을 설명해주면서 지혜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하는 눈치였다. 덕분에 지혜는 몇 번이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처음 먹어본 즉석떡볶이는 평소에 먹던 보통 떡볶이와 달랐다. 납작한 냄비에 떡볶이와 쫄면을 끓여 건져먹어야 했다. 둘은 남은 국물에 김가루를 잔뜩 넣은 밥까지 볶아 먹었다. 특별한 맛이라고 지혜는 생각했다.

  “그날 왜 나한테 즉석떡볶이 같이 먹자고 했어?”
  지혜가 따져 물었다. 무언가를 같이 먹으러 가자는 건, 말하자면 ‘데이트 신청’이 아닌가 싶었다.
  “즉석떡볶이는 혼자 시켜 먹기가 좀 그래. 2인분부터 주문받아.”
  “그럼 다른 애랑 먹으면 되는데 왜 하필 나랑 먹었냐고!”
  “나도 너처럼 학원 옮긴 지 얼마 안 되서 같이 먹을 친구가 없었어. 가뜩이나 거긴 우리 학교 애가 없잖아.”
  지혜는 입을 턱 벌리고 무진이를 쳐다봤다. 학교에서도 딱히 친한 친구가 없는 무진이었다. 왜 학원에서는 다를 거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지혜가 그동안 무진에게 너무 관심을 두지 않아 깊게 생각 못한 탓이었다.
  “그럼 우유는 왜 줬어?”
  둘 다 매워서 헥헥거리고 있을 때였다. 무진이는 서비스로 나온 우유를 지혜에게 건넸다. 지혜는 절반을 무진의 컵에 덜어주려 했다. 무진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끝끝내 지혜에게 양보했다. 우유를 꿀꺽꿀꺽 마시면서 지혜는 조금 감동받았다.
  좋아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을까? 지혜는 다시 한 번 무진이의 마음을 확신했다.
  “난 우유 못 먹어. 먹으면 계속 화장실 들락거려서.”
  무진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제껏 황당해하던 지혜는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혜의 머릿속에 무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게끔 했던 또 하나의 단서가 떠올랐다.
  즉석떡볶이를 먹고 3일쯤 지났을 때였다. 지혜네 반은 조별과제를 준비하느라 수업이 끝나고도 학교에 남았다. 아이들 몰래 무진이가 쪽지를 건넸다. 무진이가 남몰래 주니까 지혜도 어쩐지 혼자만 살짝 읽어야 할 것 같았다. 티 내지 않고 은근슬쩍 화장실에 가서 쪽지를 펼쳤다.
  ─이따 학원 같이 갈래?
  지혜는 무진이 글씨체를 처음 봤다. 남자애 같지 않게 반듯했다. 더군다나 분홍색 펜으로 적혀 있었다. 지혜는 분홍색 글씨를 손으로 살짝 훑었다.
  ‘왜 하필 분홍색으로 썼을까?’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렸다. 거울에 비친 지혜의 얼굴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교실로 다시 돌아온 지혜는 무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너 그날 왜 학원에 같이 가자고 했어?”
  무진이가 머뭇거렸다.
  ‘쳇, 그것 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무진이를 보면서 자기 혼자만 좋아할 리도, 무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혼자 착각했을 리도 없다고 지혜는 확신했다.
  “사실 나…… 학교에서 학원으로는 처음 가 봐. 길치거든.”
  “그럼 다른 애랑 같이 가면…….”
  “우리 학교 애는 너 말고 없잖아.”
  대화가 쳇바퀴처럼 빙빙 돌았다. 지혜의 머리도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분홍색 펜에 대해서도 물어볼까 했지만 참았다. 그냥 손에 잡힌 게 그 펜이었다는 싱거운 대답을 들을 게 뻔했다.
  “이제 밥 먹으러 가도 되지?”
  무진이가 물었다. 지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밥 먹을 기분은 아니어서 지혜는 교실로 들어와 엎드렸다. 급식을 먹은 친구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지혜 주위로 몰려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도대체 여태 말 한번 한 적 없는 애랑 왜 싸운 거야?”
  “말도 안 하고 노려만 보던데? 너 엄청 무서웠어.”
  이제 와서 그동안의 일들을 말하기 싫었다. 어차피 무진이는 지혜를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들도 모르는 비밀이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났다.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던 지혜는 무거운 머리로 가방을 챙겼다.
  “와, 눈 온다.”
  아이들이 창밖을 보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12월이 다 가도록 눈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그동안 눈을 잔뜩 모아두었던 건지 겨울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금세 쌓였다.
  신발을 갈아 신고서 지혜는 바닥에 이불처럼 깔린 눈을 살며시 밟았다. 뽀드득.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깨끗한 눈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지혜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도 밟지 않은, 방금 전 쌓인 눈길만 골라 걸었다. 뽀드득 소리에 맞춰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기분이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자신이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풀렸어?”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아서 지혜는 대꾸하지 않았다. 쳐다도 보지 않았다. 더는 바보처럼 오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야.”
  무진이가 계속 불렀다. 지혜는 그냥 계속 걸었다. 모르는 척 콧노래만 계속 흥얼거렸다. 무진이가 별안간 지혜 앞에 우뚝 섰다.
  “뭐야.”
  지혜 눈앞에 무진이의 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김이 모락 나는 하얀 호빵이 있었다.
  “이거 먹어. 너 점심 안 먹었잖아.”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냐?”
  “뭐…… 나 때문에 안 먹었으니까 미안해서.”
  “너 때문 아니거든? 너나 실컷 먹어라.”
  지혜는 고개를 휙 돌렸다.
  “내 것도 물론 있지. 벌써 배가 다 꺼졌거든.”
  무진이 대답했다. 무진이 나머지 손에도 반쯤 먹다 만 호빵이 있었다.
  지혜는 그동안 무진이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무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였다. 이제야 무진이에 대해 하나 알게 된 사실은 배고픈 걸 못 참는 성격이라는 것뿐이다. 아, 우유도 못 먹고.
  “으악.”
  눈 위만 골라 걷던 지혜가 미끄러운 곳을 밟아 넘어졌다. 자꾸 엎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운동화가 다 닳은 모양이다. 탁탁 털고 일어나려던 지혜 눈앞으로 무진이의 손이 쑥 나타났다. 한 달 전에 넘어졌을 땐 무진이가 지금처럼 손을 내어주지 않았다. 안 다쳤냐고 덤덤하게 물어볼 뿐이었다.
  ‘손은 왜 내미는 거야?’
  다시 피어오르는 질문을 지혜는 애써 막았다. 무진이의 손을 슬쩍 밀었다. 무진이가 쑥스럽다는 듯이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둘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지혜가 입을 쫑긋거리며 괜한 질문을 했다.
  “근데 너 분홍색 펜도 들고 다녀? 보통 남자애들은 안 좋아하던데.”
  “분홍색 펜?”
  무진이가 도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혜는 한숨을 내쉬고 짧게 대답했다.
  “쪽지.”
  “아. 그거?”
  무진이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그냥 지혜 옆에서 걸었다. 지혜도 더 묻지 않고 말없이 걸었다.

  무진이는 그날 지혜에게 쪽지를 쓰려고 필통을 열었다. 뭉툭한 연필 두 자루만 나왔다. 근데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 앉은 친구의 필통을 슬쩍 봤다. 분홍색 펜이 보였다. 지혜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저기…… 그 펜 좀 빌려줘.”
  무진이는 그날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지혜가 좋아하는 색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신기하고, 낯설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평소와 달리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했는지. 지금은 왜 자꾸 혼자 걷는 지혜를 따라 걷는지도.
  하지만 무진이는 지혜처럼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그냥 어수선한 마음을 내버려두고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지혜를 불렀다.
  “야, 나도 분홍색 좋아하거든? 남자는 핑크지.”
  “그래. 많이 좋아해라.”
  톡 쏘는 지혜의 말이 무진이의 귀에는 말랑말랑하게 들려왔다. 누군가 심장을 부드러운 깃털로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진이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지혜를 바짝 따라갔다. 눈길 위로 이어진 지혜 발자국 옆으로 어느덧 무진의 발자국이 나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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