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실격

  

1

    이 글은 페미니즘운동과 문학의 오랜 관계를 돌아보는 자리에 위치된다. 글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도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 특수한 위치 때문이다.
    글쓰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이번 특집 기획이 의식했을 시대적 풍경, 즉 페미니즘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재부상한 2010년대 중반의 열기와 잇따른 ‘문학’의 변화에 대해 다시금 차분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강하게 실감하게 된 것은 그 모든 키워드가 나라는 사람 개인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2010년대야말로, 페미니즘운동과 문학을 기반으로 하여 읽는 자로서, 또한 쓰는 자로서의 내 자리를 감각하게 된 때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2010년대는 1990년생인 내가 성인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 한국문학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했으며, 또한 한국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한 시기 전반을 의미한다. 이 시기 동안 나는 대학 제도와는 다소간 구별되는, ‘문학장’이라고 하는 특별한 ‘장’으로의 입장권 확보를 무/의식적으로 염두에 두면서 기존의 문학 언어를 답습하고, ‘문학인’으로서의 자의식 생성과 선후관계가 뒤섞인 특정한 ‘앎’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2010년대는 성인으로서의 내 삶을 (예비) 문학비평가와 (예비) 문학연구자로서의 자기 인식에 동일시하며, 관련된 모든 관습과 체제들을 성실히 내면화함으로써 자기를 ‘계발’한 시기이다.
    동시에 이 시기의 절반은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동년배들의 대중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받아 그간 내게 내면화된 특정한 언어와 앎들에 거리를 두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게일 루빈은 앞선 세대의 여느 페미니스트들처럼, “나는 물결을 타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의 물결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1968년 미시간주에서 싹텄던 여성해방운동을 회고한다. “자신의 궤도가 그런 운동에 의해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1는 페미니스트들의 사후 고백은 페미니즘운동이란 촉발된 당시에 역사적 중요성을 곧바로 획득하기가 유난히 어려운 운동이라는 잘 알려진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에 따라 ‘페미니스트’라는 개인의 정체화 역시 언제나 한발 늦은 감각으로 당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물결을 타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에 의해 나 자신의 궤도가 형성되고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물결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는 한 동년배 페미니스트 연구자의 말마따나, 우리가 “목격한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거대한 페미니즘의 흐름은 곧” 우리 자신의 “‘페미니스트-되기’의 흐름”2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 나를 정확히 어떻게 형성하고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답하기가 어려웠는데, 당시의 곤란함은 지금의 나에게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골치 아픈 질문을 생성하곤 한다.
    2010년대를 반으로 접는 그 시기에 내 불투명한 사회·문화적인 위치에서 ‘여성’이라는 문제가 두드러지게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이전의 내 모든 경험은 너무도 빠르게 젠더 억압의 결과이자 오류로서, 불완전한 과거로서 폐기되었다. 그 뒤로 끝없이 이어진 것은 나 자신이 생성하고 처분한 그와 같은 자기 서사에 대한 확신과 불안,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의 오랜 주저와 서성거림이다. 분열된 방식으로 펼쳐진 파편들은 지금의 나에게도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있기에, 피부로는 감각할 수 있으나 말끔한 언어로 전환해내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2010년대와의 역동적인 관계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 대상, 즉 나의 ‘현재’가 될 수 있다. 내게 그 관계를 ‘현재’로 만들어주는 느슨한 연결 고리는 ‘문학’이다.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앎 자체가 특정한 사회 문화의 가치 체계에 따라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기존의 앎을 해체하고 새로운 앎을 발명해낼 페미니즘적 방법론을 적용하고 실험해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문학’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던 것 또한 ‘문학장’이라는 또 다른 앎의 체계였다. 이 지면이 일종의 문학사 작업으로서, 얼마간의 객관성을 담보한 관점을 요청받는 자리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위와 같은 연유로 ‘2010년대와 페미니즘, 그리고 문학’이라는 앞으로 전개될 이 글의 주제는 나라는 개인이 스스로를 이론화하는 문제, 스스로를 문제화하는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한다.
  

2

    2010년대와 문학장 전반을 두루 아우르는 사안이자, 나의 현재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문제는 바로 ‘독자’라는 위상이다. 먼저 개인의 차원에서, 독자는 나의 다층적인 자기의식과 정체성 전반을 결정 짓는 중요한 위치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문학의 독자였고 또한 독자가 아니기도 했는데, 문학과 관계할 때마다 맺는 불편한 관계, 즉 독자 실격이라는 이 근본적인 불일치와 딜레마는 내가 문학과 문학 비평을 읽고 쓰는 일, 문학사를 검토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왔다. 둘째로 대문자 ‘독자’는 여성문학사라는 대안 역사이자 대항 담론을 가능케 한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저자’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해당 시기가 언제이건 간에, 여성문학에 관한 여러 담론은 ‘여성 독자’를 새로운 문학 호출의 합리적인 계기이자 조건으로 서술함으로써 형성된다. 셋째로, 페미니즘운동사 자체에 있어서도 ‘독자’ 혹은 ‘수용자’로서의 여성 주체는 새로운 미적 경향의 증거, 사회적 지위 향상의 표지, 나아가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는 정치적 지도이자 이상으로 상상된다. 운동의 발화 대상인 여성(독자)들은 운동의 수신자일 뿐만 아니라 운동을 이끌고 사회를 변혁할, 그리하여 매번 새롭게 갱신될 주체화 모델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2016년 ‘강남역 사건’과 ‘○○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페미니즘 대중화가 시작된 것으로 인지된다. 이는 같은 시기에 발생했던 전 세계적 흐름과 운동의 기술·매체적 토대는 물론, 개별 사안의 유사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크게 제4물결 페미니즘으로 지칭되기도 한다.3 2010년대 후반을 뒤흔들었던 페미니즘 대중화는 우리 사회를 촘촘하게 지배하는 성적 계층화를 (재)심문하고자 하는 다양한 학계 및 활동가들의 움직임을 추동했다. 잔존해 있던 한국 페미니즘 물결의 흐름이 다시금 활기를 얻어 성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역사철학적 접근법을 재개발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여성 억압’의 실재를 강력히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비평/장은 바로 이와 같은 흐름에 기반을 두고, 소수자 담론과 재현의 정치 문제를 새로이 재편해나갔다. 당시는 이미 한국문학의 대표 작가였던 신경숙의 표절 사태와 더불어 문학의 탈신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4. 표절 사태와 연루된 문학권력을 향한 심문은 물론, 이 권력의 젠더화가 현실적 층위의 성폭력을 추동하고 허용한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이후 낡은 관행과 제도에 대한 이 모든 뒤집기와 변화를 가능케 한 이들, 나아가 문학성의 해체를 견인한 것이 ‘젊은 여성 독자’라는 분석에 점차 힘이 실리게 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문학’이란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2010년대 전반에 걸쳐 지속되어온 문학적 고민에 대한 해법 모색의 일환으로서 의미를 갖는다”5는 소영현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듯, 근래의 문학비평/장은 페미니즘 및 퀴어 텍스트를 읽어낼 시대 정합적인 독법을 발명해내는 것에 더해,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에 기초한 여러 주목할 만한 비평사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축적된 페미니즘 역사화는 ‘리부트’로 회고되는 문학/비평장의 논의가 가까이는 2000년대의 ‘문학의 정치, 문학과 정치’ 논의의 단절된 계승이라는 점, 그 단절에 영향을 준 것 중에 하나가 당대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을 가시화했다. 이는 대다수 페미니스트 비평가/연구자들의 관심이 ‘포스트’를 가능케 했던 1990년대 페미니즘 문학으로 향해 가는 현 상황을 설명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 비평의 주된 독법인 ‘다시 읽기’와 ‘거슬러 읽기’는 가까운 과거에 우리 스스로가 흩뿌려놓았던 흔적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재전유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근대문학의 형성은 물론이며 문학비평의 형성, 다시 말해 ‘문학의 역할’과 관련한 논쟁을 둘러싼 문학 담론의 재생산을 가능케 했던 것이 “문학의 하위 범주로서 시민, 민족, 민중, 대중으로 호명된 문학적 대표 주체에 대한 재현” 문제였다는 점, 따라서 “농민, 빈민, 노동자, 여성에서 타자, 소수자, 이방인, 하위 주체, 성 소수자”6로 이어진 한국문학의 관심사는 비평 담론의 갱신과 재생산에 기여하며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다. ‘누가’ 지금의 문학에 등장할 것인가, 이들은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비평 텍스트가 제기할 때, 텍스트 안팎에서 ‘문학’을 해체 및 재구성하는 문학의 주체─하위 범주─는 동시에 그것으로 상상된 ‘(소외된) 독자’라는 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페미니즘-퀴어 담론이 리부트 이후 비평 담론의 차이점을 부각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로 언급했던 것 역시 다름 아닌 새로운 ‘대중’과 ‘페미니스트 독자’였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의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독자’입니다. 독자에 관한 논의는 문학 담론에서 항상 있어왔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문단에서 독자가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맥락은 더 특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2015년 이른바 ‘표절 사태’ 이후 한국 문단 및 출판 시스템의 기능과 역할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한국문학의 주요 독자층으로 젊은 여성 독자들이 부각되었죠. 더불어 SNS를 통한 독자층의 가시화, 온라인 서점의 활성화 등 출판 시장의 변화가 이어지면서 독자에 대한 물음이 가지는 무게가 달라져왔습니다. 독자를 중심 콘셉트로 삼는 문학잡지가 창간되고, 독자들의 생생한 반응을 직접 잡지에 담는 기획이 시도되는 등 여러 문예지의 기획에도 실질적인 영향을 주고 있고요.7

    따라서 2010년대 중반 이후의 ‘독자’를 “더 특수한” 맥락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긴 당시의 판단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일이라거나, 심지어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독자’가 (여느 때처럼) 분명하게 ‘특수한’ 장면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 여성-작가/비평가의 시민권 획득을 넘어 다양한 페미니즘 서사의 출현과 확장을 담보해주었던 것이 온라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젊은 여성 독자들의 적극적인 상호수용성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학비평에서 ‘가능성의 공동체’, ‘수용의 재맥락화’ 등의 어휘로 호출되었던 독자가 페미니즘 독법의 시의성을 정당화하는 기제이자, 동시에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으로 한정되어 상상된 데서 비롯한다.

    비평은 원래 대화로서 기능하는 것이겠지만, ‘요즘 비평’은 특히 독자의 감성구조와 면밀히 대화해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청년 여성 독자들과의 공동감 속에서 비평의 입지를 길어왔던 맥락이 (물론 여전히)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중략) 이는 ‘텍스트↔︎독서(독자)↔︎현실’의 틀을 중심으로 ‘문학(성)’을 재명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비평을 고립되고 정체된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으려는 절박하고 절실한 담론적 수행이었습니다.8

    김건형은 독자 담론이 문학비평의 재구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재부상한 (여성) 독자란 실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집단이라기보다 지금껏 자율성의 신화 속에서 고립되어온 ‘문학(성)’을 재명명하는 작업이자, ‘텍스트–독서(독자)-현실’ 간의 매개에 대한 고민의 와중에 생산된 “절박하고 절실한 담론적 수행”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기존의 문학사가 제시해온 바와는 다른 맥락에서 독자를 사유할 것을 요청하는 가운데, 동시대의 독자 역시 다름 아닌 문학/비평의 죽음을 지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는 점, 이를 위해 한국문학장이 서술 주체가 되어 발생시켰던 일종의 한정적인 집단 양식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발언이다. 하지만 ‘상상된 공동체’인 독자의 구성요소―젠더, 계급, 인종, 연령 등―는 그 자체로 집요한 분석의 대상이 되기보다, 담론적 수행의 ‘절박함’ 속에서 현실의 호응과 다소 혼란스럽게 교차되어 논의된다. 이에 따라 예의 그 “당위로서의 독자”9에 머무르게 된 ‘독자’는 새로운 문학의 낙관적 전망을 담보하는 필수 보충물로 고정되었다.
    독자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란 이들 반응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말 그대로 텍스트를 향한 적극적인 반응 자체, 즉 텍스트가 독자 집단과 맺는 관계 자체를 한국문학과 한국문학장을 향해/위해 발화되는 일종의 ‘건전한’ 피드백으로 배치하려는 신념을 의미한다. 이때 독자로 가정된 이들의 읽기는 비평가/작가에 의해 예상된 반응을 직접적으로 예비하는 집단이거나, 스스로의 요청을 현상화함으로써, 이를 독해할 비평계와 문학 산업이 문학 읽기의 ‘보편’을 조정하도록 이끄는 집단, 이를테면 문학의 주요 구성 인자로서 상상된다.
    요컨대 이들은 페미니즘적 인식론을 넓게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단일한 목적과 방향성을 지닌, 나아가 문학장의 ‘앎’과 ‘감각’을 재구성할 특정한 정체성이자 지식의 원천으로 상상되는 것이다. 이들 ‘원천’을 근거로 삼음으로써 ‘페미니스트 독자’라는 대항 담론을 서술하는 서술 주체의 (젠더·계급적) 위치는 자주 논외로 치부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거론하고 싶지만, 그보다 먼저 지적할 문제가 있다. 독자라는 ‘원천’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텍스트를 향한 호응과 반응의 ‘정치적’ 가치를 위계적으로 구분하면서 독자/반독자의 구도를 형성한다. 예컨대, 이와 같은 구도 속에서라면, 페미니즘 및 퀴어 텍스트를 향한 독자들의 실격된 반응은 안티페미니즘의 백래시이거나, ‘잘못된’ 페미니즘의 한 형태라는 양극화된 분리 속에서 쉽게 간과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10 바로 이것이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여성 서사’ 현상을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이자 결과로 보는 것으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좋을”11지에 대한 의문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주된 이유이다.
    단순히 ‘독자’ 혹은 ‘소비자’로 위치시킬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그렇게 이해되는 일군의 여성들과 그들의 움직임은 “페미니즘 도서를 ‘구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구매자의 위치에서 여성 서사를 요청”12하는 것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중이다. 서사에 대한 이 특정한 요청들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 혹은 민주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위로 단순화되기 어렵다. 온라인에서 분산되고 또 확산되었던 여러 여성 서사 운동과, 이와 선순환적인 관계 속에 있다고 평가되었던 문학장의 변화는 실상 “독자만의 성취도, 작품만의 성취도 아닌 요청과 응답의 과정이 이룬 성취”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문학장의 독자적인 성취가 아니기 때문에”13 문학의 ‘이상적 독자’와 같은 접근법으로는 여러 가지 남는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3

    공감은 동시대적 감각을 생성하는 추동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맥락을 제공하는데, 여기에서 공감은 자신과 직접 맞닿아 있는 일상의 경험 또는 실제의 삶과 일치하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즉,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이야기’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내 이야기’는 여성이라는 섹스의 기호로부터 힘을 발휘하기보다, 발화와 공유 자체가 오랜 관행에 대한 축적된 요청에의 응답을 이끌어냈다는 공동체적 성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요구가 투영된 공통서사 만들기는 여성들이 오랫동안 경험해 온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재조합하며 새로운 동시대적 감각으로 형성된다.14

    허주영은 여성 독자들이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보여준 공감이 ‘내 이야기’라는 즉각적인 동일시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넘어, 그것이 (그 흐름에 동참했다고 느끼는) 개인들에게 ‘발화와 공유’라는 ‘공동체적 성과’로 여겨지는 것, 나아가 이러한 경험이 “새로운 동시대적 감각으로 형성”되는 장면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 작품이 진정 독자와의 상호수용성으로 인해 서사의 기준은 물론, ‘문학’ 자체의 경계와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비판적) 개입과 분석은 바로 이 장면의 의미를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관련 문학비평들은 페미니즘 문학이 ‘작품과 독자의 관계 안’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주장을 거스르면서 비평 자체가 여성문학에 대한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을 형성했다. 요컨대 허주영의 논의는 ‘독자’ 담론이 작품의 내적 반/정당화의 논리, 페미니즘 독법의 존재 근거, 나아가 한국 문학/비평의 존속 가능성으로 수렴되거나 단순히 재서술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시대적 감각의 형성’ 속에서,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 ‘여성 서사’ 전반이 소환되고 폐기되며 또한 재조합되는 양상에 대한 분석과 논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다름 아닌 ‘독자라는 담론’의 생산적인 성격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할 때,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과연 ‘작품과 독자의 관계 안’에서 작용하는 요인으로서의 ‘독자’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관련한 문제들은 내게 연구방법론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존재론적인 질문을 동반한다. ‘여성 독자’의 출현이 표출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맥락을 놓치지 않으면서, 여전히 그것을 느슨하고도 거시적인 틀로 삼아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전개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할 때, 나는 언제나 ‘독자 실격’의 문제와 마주치곤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장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1990년대 여성문학사 연구 흐름에 나 역시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집중하고 있는 주제 또한 ‘여성 독자’이다. 90년대에 부상한 ‘여성-대중 독자’를 의식화와 개발의 대상으로 상정되었던 198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여성-민중 독자’와 구별해보거나15, 90년대의 여성-대중 독자가 여성-대중 문학과 맺었던 불화의 관계를 살피는 작업16을 통해 개인적인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이러한 작업은 어떤 성취감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독’으로 쉽게 연결되곤 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수많은 페미니스트 문인과 미술가가 등장했지만, 그들이 함께 미적 원리를 기반으로 우정을 맺는 이야기를 글로 접하기란 여전히 흔치 않은 일이다. 문학사와 미술사를 깊이 파면 팔수록 나는 더욱더 고독해졌다. 하지만 삶에서는 혼자가 아니었다.17

    내 방법론적 고민이 존재론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 스스로가 바로 그 새로운 ‘독자’이며, 또한 그 새로운 ‘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부트 이후의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동시대적 감각’의 변화를 매 순간 실감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함께한 미적 원리를 기반으로 우정을 맺는 이야기를 글로 접하기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독자와의 상호 소통에 대한 강조는 기본적으로 망각되고, 누락된 소수자들의 삶에 대한 복원 요청에서 비롯된다. 무엇이 소수자의 삶인가에 관한 ‘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에 초점을 맞출 때, 동시대 텍스트를 읽는 나의 위치는 ‘독자’라는 고정된 범주에서 끈질기게 이탈한다. 반면 문학사와 문학에 대해 쓰는 자일 때의 나는 해당 범주와 본질적으로 엮여 있으며, 그 범주에는 외면하기 어려운 공통성이 존재한다고 믿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은 소수자성을 근본에서부터 증언하고, 결정 짓는다고 여겨지는 ‘경험’이 그 자체로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는 경험의 가시화(재현) 문제에 개입하기 이전에, 나의 경험이 소수자성과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연루되고 있는지, 그것이 내가 텍스트로부터 추출하는 지식, 생산해내는 지식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 말하자면 나 자신을 이론화하는 것으로의 읽기-쓰기와 나의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된 경험 사이에 어떤 문제를 설정할 수 있는지에 관해 늘 곤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자’가 상시적으로 겪는 이 곤란이야말로 ‘동시대적 감각 형성’에 핵심을 이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져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가 규범적 실천들에 대한 비판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비판의 범위 및 정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서로 다른 집단의 경험을 가시화하는 일은 억압적인 메커니즘의 존재를 폭로하지만, 그러한 메커니즘들의 내적 작동이나 논리는 드러내 주지 못한다; 우리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상관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담론을 통해 주체를 위치 짓고 그들의 경험을 생산해 내는 역사적 과정들에 주목해야 한다.18

    조앤 스콧은 소수자 경험의 복원과 가시화 작업에 대하여 경험의 권위 문제를 지적한다. 설명적 기원으로서 타당성을 부여받는 ‘경험’에는 소수자들의 경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자신의 텍스트에 복원하고 조명하는 법을 익히는 이들, 즉 담론의 서술 주체 또한 그들의 경험에 권위를 부여받는다.19 이처럼 권위가 부여된 경험을 그저 가시화하는 읽기-쓰기는 그 경험을 애초에 배제하는 것으로서 구성되어온 체제의 작동 방식은 물론 그것의 역사성에 대한 분석을 불가능하게 하고, 심지어 기존의 체제를 적극 재생산한다.
    스콧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구성된 주체들”(강조는 인용자)이다. 이때의 ‘경험’은 우리의 설명적 기원이나 근거가 되는 권위 있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설명해야 하는 무엇, 즉 그에 대한 지식이 끊임없이 만들어져야 하는 무엇이다. 경험에 이와 같이 접근하려면, 우선 경험이라는 증거 설정에서 배제된 질문들―무엇이 경험으로 간주되는가, 누가 그것을 결정짓는가와 같은 질문뿐만 아니라, 담론과 차이, 그리고 주체성에 관한 질문들 또한 포함된다―을 길어내고, 그것을 지속해야 한다.20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정체성’ 자체를 담론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과정과도 연계된다. 새로운 정체성이란 “언제까지고 특정한 정치적 운동이나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주어졌던 바로 그 형태로 존재할 어떤 것이 아니”21기 때문이다. ‘독자’라는 범주는 물론이고, 그것을 구성한다고 믿어지는 우리의 ‘정체성’을 담론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것은 쓰는 자로서도, 읽는 자로서도 ‘독자’라는 자격이 아닌 그것에의 ‘실격’이라는 위상을 끈질기게 의식할 때 비로소 전개될 수 있다. 이 불안하고 초조한 불일치의 감각과 그 사실에 대한 자체로의 긍정이 바로 2010년대 ‘페미니즘운동’과 ‘문학’이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남긴 자산이 아닐까 한다.

    존 키츠에 따르면 시인은 “정체성이 없다―시인은 끊임없이 어떤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모든 주체가 피해 가는 그 중립자, 그 합성물, 그 모호성이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모든 정체성이 실종되는 덫이다.”
    그러나 시집을 내고 시인으로 데뷔하자, 내가 무슨 글을 쓰든지 아시아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을 결코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육체의 개입이 없더라도 저자로서의 내 정체성은 귀신처럼 독자에게 내 목소리가 도달되는 강도와 범위를 제약했다. 내가 독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신이 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순진한가!
    (중략)
    나는 독자가 내 시를 읽고 나서 내 이름을 보면, 그 시와의 연결 퓨즈가 끊어지면서 시가 좋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공감은 안 간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는 어떤 증거가 있단 말인가? 그냥 내가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건지 어찌 알겠는가. 그걸 모른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는 이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늘 내 신체적 정체성이 문제인 줄 알았으나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은 글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여전히 내 정체성에 초연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일종의 절망 상태로 곤두박질쳤다. (밑줄은 인용자)22

    하나의 가능한 사례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길었던 이야기를 마무리해본다. 한국계 미국인 2세인 캐시 박 홍의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는 소수자의 읽기-쓰기-읽기의 얽힘과 자기 이론화의 문제가 분리될 수 없는 사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의 죽음’이라는 신화를 자꾸만 뚫고 나오는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은 실격된 독자로서의 자의식으로 자주 연결된다.
    캐시 박 홍의 글에서는 소수자 개개인의 사례가 아시아 여성 전체, 비백인 인종 전체의 문제로 거침없이 확장되었다가 한순간에 개인의 문제로 초라하게 수축되기도 한다. 그것은 ‘담론’과 ‘인지’ 그리고 ‘현실’ 사이의 관계 및 간극을 철저히 의식하는 저자-독자의 태도에서 비롯되는데, 이를테면 그는 읽기-쓰기 간의 무한한 겹침 사이에서 정체성의 교차적 구성 방식, 스스로에게 내면화된 소수자 혐오와 적대,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경계에 대한 혼란 등을 수없이 대면하며 우리의 ‘경험’에 관한 온갖 난삽하고 불편한 질문들, 누추하고 위험한 질문들을 제시한다. 이 자격 없는 독자들의 읽기-쓰기가 난무할 때, 결코 ‘문학’에 가두어지지는 않지만 분명 문학을 통과해 지속되기도 하는 우리의 ‘고독’은 “지나온 과거와 새롭게 만나고, 다가올 미래에 열려 있는 다시간적인 과정”23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게일 루빈, 『일탈』, 임옥희‧조혜영‧신혜수‧허윤 옮김, 현실문화, 2015, 33쪽.
  2. 김상애, 「페미니스트-되기, 경험과의 대화」, 김은주·이소윤·김상애·김미현·김보영·허주영·강은교, 『출렁이는 시간[들]: 제4물결 페미니즘과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즘』, 에디투스, 2021, 98쪽. 이 책은 소위 ‘메갈 세대’, ‘넷페미니스트’ 등으로 일컬어지는 동시대 동년배 페미니스트들의 ‘페미니스트 모먼트’에 대한 자기 서사가 수록되어 있다.
  3. 프루던스 체임벌린이 ‘정동적 시간성’을 탐구하기 위해 설정한 ‘제4물결 페미니즘’이라는 독법은 이 저서를 번역한 역자들의 또 다른 기획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적 맥락과도 연결된다. 근래의 페미니즘 흐름이 세계적인 ‘물결’로 포섭될 수 있는 이유는 “디지털 기술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행동주의가 페미니즘의 지나간 다른 물결들을 다시 소환하고 지금의 목소리가 과거와 만나며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어찌 보면 불협화음처럼 들리기도 하는 동시대의 시끌벅적한 움직임과 활력을 담아내려” 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하얗게 글로벌화된 ‘세계’의 의미와 경계를 더욱 예민하게 심문하며 ‘동시대’를 감각해야 한다. 인용은 김은주, 「기획의 글: 여성으로 존재하기를 사랑하기 위해」, 위의 책, 9〜10쪽 ; 프루던스 체임벌린, 『제4물결 페미니즘: 정동적 시간성』, 김은주·강은교·김상애·허주영 옮김, 에디투스, 2021 참조.
  4. 물론 여전히 ‘순수한 문학’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려는 비평적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학에 권력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던 한 비평가의 텍스트는 당시의 동료 비평가들은 물론 문학장의 언어를 내면화하고 있던 ‘적극적’ 독자들에게도 ‘무지의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눈동자 속의 불안’의 문학권력을 부정하는 근거를 보면서, 참 순진한 근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https://blog.aladin.co.kr/common/popup/printPopup/print_Paper.aspx?PaperId=7769813) 그 자신이 문학의 강력한 탈신비화를 추동한 아이러니가 된다. 권희철, 「눈동자 속의 불안」,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를 읽고 쓴 서점 독자의 글.
  5. 소영현, 「재현을 젠더링!」, 『자음과모음』,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 291쪽.
  6. 소영현, 「비평 시대의 젠더적 기원과 그 불만」, 『문학은 위험하다』, 민음사, 2019, 23쪽.
  7. 강동호·김건형·박혜진·정소연·인아영 좌담, 「독자를 다시 생각하다」, 『문학동네』,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중 인아영의 말.
  8. 김건형, 「소설의 젠더와 그 비평도구들이 지금」, 『문학과사회─하이픈』, 문학과지성사, 2019년 가을호, 25~26쪽.
  9. 소영현, 「재현을 젠더링!」, 앞의 책, 292쪽.
  10. ‘한녀문학’ 플로우에 대한 ‘페미니스트 문학 독자와 反독자 가르기’의 논리, 그것의 바탕이 된 여성 서사 기준 설정의 논리가 문학비평 텍스트에서도 유사하게 전개되는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서 다룬 바 있다. 최가은, 「우리가 여성서사를 말할 때」,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https://fwdfeminist.com/2020/09/30/vol-4-7/)
  11. 소영현, 「재현을 렌더링!」, 같은 책, 290쪽. 나는 2022년 봄에 발표한 한 비평문에서 작금의 문학장이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으로 끝없이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썼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건대, ‘김지영’은 출현한 그 순간부터 언제나 ‘다시’, ‘제대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급박한 요청 속에서 비평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 같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소영현의 지적대로 이는 “여성/문학의 범주야말로 철저하게 ‘문학과 현실’ ‘미학과 정치’의 관계 설정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만드는 문제일 것이며, “『82년생 김지영』의 시대 정합적 읽기를 통한 역사적 계보화의 시도”(소영현, 「재현을 렌더링!」, 같은 책, 293쪽)라는 품이 많이 드는 비판적 작업이 꾸준히 요청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12. 허주영, 「동시대 한국 문학/비평에 요청하는 것들─제4물결 온라인 페미니즘과 여성 서사 운동으로부터」, 김은주·이소윤·김상애·김미현·김보영·허주영·강은교, 앞의 책, 183쪽.
  13. 허주영, 위의 책, 205쪽.
  14. 허주영, 같은 책, 189쪽.
  15. 최가은, 「여성해방문학의 여성 독자 만들기」, 『민족문학사연구』 78호, 민족문학사연구소, 2022. 4.
  16. 최가은, 「90년대 여성문학의 곤란한 ‘대중성─공지영 담론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56, 한국여성문학학회, 2022. 8.
  17.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노시내 옮김, 마티, 2021, 161쪽.
  18. Joan W. Scott, “The Evidence of Experience”, Critical Inquiry Vol. 17, No.4, 1991, p. 779.
  19. Ibid, p. 776.
  20. Ibid, p. 790.
  21. Ibid, p. 792.
  22. 캐시 박 홍, 앞의 책, 67~68쪽.
  23. 김상애, 앞의 글,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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