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협 어머니들 이야기

  

    〈필자 주〉
2021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지원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어머니들과 활동가들 구술 이야기다. 독자들은 가독성이 떨어지겠지만 오롯이 어머니들의 민가협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 어머니로 호명했다. 자식 낳고 이름 쓸 일이 없었는데 경찰서에서 조서를 쓸 때 처음으로 당신 이름을 써봤다는 어머니 말씀이 두고두고 생각나서다.

  

민가협에는 현대사의 나이테가 선명하다

〈사진1〉 김성한 어머니 (출처: 2021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하 민가협 어머니들 사진 출처 동일)

    유난히 더웠던 2021년 7월, 김성한 어머니를 찾았다. “아유, 더운데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팔순이 넘으셨다. “정정하셔서 보기 좋습니다” “허리가 꼬부라졌는데 뭐 정정해요.” 거리의 투사이셨던 어머니가 수줍게 웃으신다. 어머니는 1970년대 초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산골 마을 봉화 출신이다.

〈사진2〉 김정숙 어머니

    김정숙 어머니는 여자는 이름자만 쓸 줄 알면 된다고 해서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자인 것이 너무 서러워서 “절대 아들 안 낳고 딸을 낳아서 내가 못한 놈 다 해줄 거이라고” 다짐을 하셨단다. 그런데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았다. “나는 이제 그만이여. 그렇게 깨끗하니 마음을 다 정리해불고 인자 그라고 사는디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내가 딸 때문에 이런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진 아이가 또 아들이었다.

〈사진3〉 고 정순녀 어머니

    정순녀 어머니는 구술 직후 약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구술 중간에 집에 온 며느리가 잘 아는 시민사회 활동가였다. 구술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며느리로부터 어머니 장례 소식이 전해졌다. 구술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상이지만 부랴부랴 일부 편집본을 전달했고, 입담 있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어머니 마지막 가시던 길의 한켠을 채웠다.

〈사진4〉 이소남 어머니

    이소남 어머니는 1934년 9월 29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충리 출생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애국가〉하고 〈해방의 노래〉가 너무 좋아서 입에 달고 사셨단다. 아직 기억하시냐고 여쭙자마자 거침없이 〈해방의 노래〉를 부르셨다.

    [1절]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고 바다 건너 태평양 건너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2절] 한숨아 너 가거라. 현해탄 건너. 설움아 눈물아 너희도 함께. 동포야 두 손 들어 만세 부르자. 광야한 시베리아 벌판을 넘어 아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린다.

    노래를 듣던 구술 팀이 박수를 치자 “3절까지 해?” 하시더니 87세 어머니가 쉬지 않고 3절까지 마무리하셨다. 남편은 6·25전쟁이 막 휴전에 접어든 1953년 8월 23일에 임관한 장교였다. 2군단에 속한 양구, 화천, 금화에서 신혼을 보냈다. 이 5년 6개월이 남편과 함께한 시간의 전부다. 남편은 57년, 58년, 60년생 어린 자식들을 두고 1961년 부대 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가슴에 묻고, 세 형제를 보듬고 살아낸 세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어린 꽃이 셋을 품에 안고 하늘과 땅을 원망하며 땀과 눈물로 몸부림치며 보살펴 가꾸다 보니 세월은 어느덧 반세기가 되었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 꽃들을 버리지 않고 잘 가꾸어 키워주셨기에 지금은 향기로운 세 송이의 꽃. 내 마음에 가득한 꽃밭이 되었네.

    “진짜 이것 보면 내가 써놓고도 보면 눈물이 나와요.” 목이 메어 잠시 질문이 중단되었다. 마음속 한가득 꽃밭을 만든 어머니께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민가협을 지킨 이가 남규선 총무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인물을 묻자 손민아라는 이름을 꺼냈다. 손 간사의 아버지는 4·19혁명 때도 열심히 투쟁하신 손병선 선생이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선실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고, 언니 손민영도 구속되었다. 어머니는 수배 중에 돌아가셨다. 콘크리트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아빠, 언니와 생이별을 하고, 어머니마저 잃은 손민아가 민가협 간사로 일했다. 공안 당국과 산전수전 다 겪으며 싸워온 여걸도 손민아 간사의 이야기를 꺼내놓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민가협 어머니 되기

    인재근(당시 노동운동가. 노동운동가 김근태의 부인)은 검찰청에서 고문으로 부서진 남편의 처참한 모습을 마주하고 목요기도회가 열리는 기독교회관으로 내달렸다. 마이크를 빼앗다시피 연단에 올라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활동가들이 밤새 성명서와 호소문, 머리띠를 만들고, 다음 날부터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소식을 듣고 장기수 가족들을 비롯해, 학생과 노동자 어머니, 유가족들이 모여들었다. 1985년 9월에 시작된 이 기독교회관 농성으로 고문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85년 12월 12일 민가협이 창립되었다. ‘권인숙 성고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이 연이어 터졌고 어머니들은 숨돌릴 틈 없이 거리로 나섰다.

〈사진5〉 1988년 7월 12일 양심수 전원 석방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민가협 회원들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민가협 어머니들도 여느 어머니들과 다르지 않았다.

    1982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딸이 점차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자 어머니는 딸을 찾아 학교로 쫓아다니기도 하고, 딸의 학생운동을 말리기 위해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 굿을 하기도 했다. “굿도 몇 번 했어요! (모두 웃음) 나 굿 하다가 돈 다 내비렸어. 이제 굿이라는 건 내 쳐다도 안 봐. 그때 배웠어.” (고 정순녀 어머니)

    1980년대 말 서울 시내에 최루가스가 빠질 틈이 없던 시절, 김성한 어머니는 아들을 말리러 아예 서울로 이사했다. 어머니 바람과 반대로 아들이 집에서 사복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연행되었다. 아들 행방을 찾으러 서울의 경찰서란 경찰서는 다 뒤졌다. 망연자실해 있는데 큰아들이 어머니들이 모여서 항의하는 곳이 있다고 알려주자 무작정 수소문해서 간 곳이 남산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앞이었다. 목청 큰 임기란 어머니가 “저 새끼들 잡아! 잡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안기부 직원이 붙들렸다. 건장한 안기부 직원이라고 해도 어머니들의 아귀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셔츠 단추가 다 떨어졌다. 어머니는 자그마치 40일을 남산으로 출근했다. “이제 여 없으니 오지 마세요.” 안기부 직원이 말했다. “여 없으면 어데로 갔노?” “몰라요, 우리도 몰라요.” “당신들이 데리고 있던 사람 어디 간 걸 어이 모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내 막 대들어 싸웠다.” 김성한 어머니는 그렇게 민가협 어머니가 되었다.

    1989년 1월 13일 아들이 수배되었다. 안기부 대공분실 직원들이 집 앞에 진을 치자 김정숙 어머니는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들이 일러준 대로 직접 민가협을 찾았다. “거기 가니까 좋더라고요 막. 서로 똑같은 말하고.”

〈사진6〉 이영 어머니

    이영 어머니는 아들이 조사받고 있다는 장안동 대공분실 앞에서 민가협 어머니들과 처음 만났다. “김종태 열사 어머니하고 그 송광영 열사 어머니하고는 완전히 내가 놀랬다니까요. 막 문 열으라면서 신발을 벗어갖고 그 철문을 막 뚜드리고 응 인승이 어따 잡아서 죽여놨냐고 막 그래. 내가 가만히 서 있으니께 뭔 엄마가 저러냐고⋯⋯ 어머니들이 진짜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됐는가 몰라요, 진짜.”

〈사진7〉 조순덕 어머니

    조순덕 어머니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의 후배 격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엄마다. 수배 중인 아들이 쪽지를 보내 ‘목요일마다 탑골공원 가면 민가협에서 집회를 하는데 남규선(당시 민가협 총무)을 찾아가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탑골공원 목요집회에서 민가협 회원이 되었다.
  

공안 당국은 결코 어머니들을 꺾을 수 없었다

    경찰서 유치장 감금도 소용없었다. “엄마들이 밤새 잠을 안 자고 〈투사의 노래〉를 불렀어요.” (이소남 어머니) 민가협 어머니들은 밤새 유치장이 떠나가라 구호도 외쳤다. 감금으로 안 되자 공안 당국은 어머니들을 ‘닭장차’에 태워 난지도 쓰레기장에 버려두기 시작했다. 경찰이 “둘썩둘썩 들어서 훅 떠밀어 던져뿔고 가. 갑석이 엄마가 같이 갔다 내려오는데 차에서 던질 때 신발이 하나 벗어졌나봐. 이것들이 신발도 안 주고 그냥 던져버려서 (웃음) 세상에 한쪽 신발을 신고 한쪽은 맨발로 걸어왔어.” (김성한 어머니)

    어머니들은 한창 시국이 달아오를 때는 밖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쪽잠을 청했다. “잠옷을 입고 편히 잘 수가 없어요. 언제 나갈지 모르니까.” (김정숙 어머니) 명절도 없었다. 공안 사건이 발표되면 남산 안기부나 서울중부경찰서 앞에서 명절을 보내기 일쑤였다. 고생하는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어머니들에게 아까운 것은 없었다. 1996년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통일투쟁 때의 일이다. “애들을 세상에 굴비 엮듯이 엮어서 줄줄 끌고 나와. 애들을 뭐 어에 때렸던 둥, 하얀 티를 입었는데 어떤 애들은 피투성이가 되고. 아이고 그걸 보이 어떻게 해요. 임기란 어머니가 애들 티 사가지고 여어주라고. 우리가 하얀 티를 몇 장인지도 몰라. 이만큼 사가지고 갈아입으라고 여어주고.” (김성한 어머니) 한총련 엄마인 조순덕 어머니는 수배 중에 연세대학교에 들어가 있던 학생들을 꺼내오느라 남동생의 구두고 양복이고 다 들고 가 입혀 나왔다.

〈사진8〉 1986년 3월 4일 명동수녀교육관 앞에서 양심수 석방 요구 구호를 외치는 민가협 회원들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육신에 새겨진 폭압의 상흔들

    종로서인지, 시경인지 모르겠다. 어머니에게 경찰서는 그냥 다 같은 경찰서였다. 그날도 어머니들은 누군가의 자식을 위해 악을 쓰고 있었다. 경찰들이 갑자기 봉고차를 어머니들 옆에 세우고는 김성한 어머니를 짐짝 부리듯이 봉고차에 던졌다. 하필 봉고차 바닥에 튀어나온 부분에 떨어져서 꼬리뼈가 부서졌다. “앉지도 못하고 세상에 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죽을 지경이래요. 울었어, 내가 막. 그때 길음동에 살았는데 이제 시장 올라가는데 울었어, 눈물이 나. 하도 아파 가지고.” (김성한 어머니)

    1991년 1월 노태우 정권 후반기, 정국이 수서 비리 사건으로 달아올랐다. 어머니가 설명하는 수서 비리 사건은 간명하다. “노태우하고 저것들이 다 해 먹은디 있잖아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탄압이 강고했기 때문에 학생·노동자 들은 가두시위를 성사시키기 위해 전술을 짰는데 흔히 ‘택’(운동권 용어로, ‘전술’을 지칭하는 tactics의 준말)이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거두절미하고 ‘택’이라고 말씀하시니 웃음이 나왔다. ‘택’이 셀까봐 어머니들이 말도 안 하고 누가 언제 어디서 ‘동을 뜬다’는 종이를 돌렸다. “(택에 맞추어) 누가 인자 깃발 탁 들으면 모이라고 해서 탁 모였는데 막 최루탄을 쏘잖아요. 거기서 넘어져가지고 여기가 다 다쳐버렸어요. 눈도 이쪽은 실명되고 이쪽만…… 어떤 학생이 나를 데리고서는 촛불 켜서 이렇게 대주더라고요. 이 눈은 좀 뵈는데 이거는 아주 안 보여요. 수술했어. 이 몸땡이도 거기서 다쳐서 걸음도 못 걸어요.” (고 정순녀 어머니)
  

교도소 투쟁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존재가 민가협 어머니다. 어머니들이 뜬다고 하면 난리가 났다. “민가협이 간다고 그러면 공중전화박스부터 다 떼어서 들어가부니까. 그 면회 접수하는 데가 화장실이 들었잖아요. 화장실 딱 막고 수도도 막아버리고.” 전화, 화장실, 수도가 없어도 어느 교도소를 가든 지역 민가협 어머니들과 학생들이 필요한 물건을 뚝딱 조달해냈다. 한겨울 군산교도소에서의 일화다. 날이 추워서 급히 몇 개의 곤로가 공수되었다. 곤로에 의지해서 밤샘 농성을 견뎌낸 어머니들이 “나는 너 보고 웃고 너는 나 보고 웃고” 배꼽을 잡았다. 긴장해 있던 교도소장도 닦는다고 닦았어도 코 밑에 숯 검댕이 자국이 남은 어머니들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해서 이기고 나오지. 메칠 있어도 이기고 나오지 그냥 안 나오니까.” (김정숙 어머니)

    민가협 어머니들의 기억에 의하면, ‘자연이 엄마’는 중화동에서 시계방을 했다. “그 양반이 팔에 기브스를 해갖고 그라고 나와서 세상에 대전교도소 철문을 이 양반이 한 팔로 넘어가븐거여. 그 대전교도소 철문 엄청 높잖아요. 우덜은 안 다쳤으니까 넘어가도 괜찮아.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받아주고 하니까. 근데 그 양반은 이 팔 하나로 이런 데를 이렇게 기어서 소장실까지 간 거예요.” 이러니까 교도소장들이 어머니들이 내려온다고 하면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들은 내 자식만 챙기는 법이 없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면회를 갔는데 딸이 징벌방에 있어서 못 만났다. “징벌방이 뭐요?” 교도관에게 물었더니 “사고를 쳐서 갖다 묶어놓은 거요.” 그러더란다. 바로 과장실로 쫓아갔다. “막 쫓아가니께 과장이 문도 잠그도 못하고 그냥 저기 하고 있데. 책상 유리를 탁 깨뜨리니까는 이놈이 정신이 번쩍 나나봐. ‘너 죽이고 나 죽어. 뭐 우리 딸을 어따가 묶어놔?’ ‘아뇨, 아뇨. 면회시켜드릴게요.’ 그러더니 손 묶은 걸 그냥 데려왔더라구. ‘동료 7명이 다 징벌방 있다면서 왜 너 혼자 왔어? 7명 다 와야지 내가 가만히 있지.’ 그러고서 소장실로 쫓아가 ‘7명 다 풀어. 우리 딸만 풀라고 내가 왔가디?’ 막 하니까 풀더라구.” 어머니는 기어이 7명 사식을 다 넣어주고서야 돌아 나왔다. 그때 딸 동료들이 어느새 60줄이 다 되었다. “우리 제 아부지 돌아가시고 그럴 때 다 왔데.” (고 정순녀 어머니)
  

장기수 석방운동

    1992년 7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가협 등 24개 재야단체가 모여 ‘국보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를 결성하고 7월 23일부터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해 부산, 대구, 광주 등 5개 도시에서 일제히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초장기수에 대한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호주, 독일 등 국제적으로 같이했어요.” (남규선 당시 민가협 총무) 민가협이 중심이었다. 그 흐름을 이어 하루 감옥 체험을 시작했다. 주변에 구속자가 많았던 민가협이기에 어렵지 않게 0.75평 감옥을 재현해냈다. 1992년 첫 하루 감옥 체험 때 이장호 감독이 참여했고, 점차 김혜수, 송강호 씨 등 유명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장기수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995년 세계 최장기수인 김선명(45년 복역), 안학섭(43년 복역) 선생을 비롯한 3명의 초장기수가 출소했다.

    민가협 활동 중 가장 보람된 기억을 여쭙자 어머니들이 주저 없이 장기수 출소를 들었다. “싸운 보람이 있다. 그 생각이 딱 나더라구요.” 1993년 민가협 어머니들이 대전교도소를 찾았다. “사회에서 면회 오는 게 우리가 처음이라고. 우리 같은 엄마들이 오는 건 처음이라고 그러시면서 선생님이 우시는 거야.” (김성한 어머니) 1995년 가족 한 명 마중 나올 수 없는 장기수가 출소할 때도 어머니들이 달려갔다. 비록 15분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김선명 선생이 45년 만에 모자 상봉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것도 민가협이다. 북으로 송환된 장기수 어르신 가슴 한켠에 민가협 어머니들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남북 관계가 좋아졌을 때 어머니들이 북한을 방문해 정들었던 장기수 어른들을 다시 뵙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93년 9월 23일 민가협을 상징하는 목요집회가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었다. 목표는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였다. 어머니들은 누누이 양심수가 없어지는 날이 민가협이 해산하는 날이라고 강조하신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목요일마다 열린 목요집회는 2014년 10월 16일 1,000회를 맞았고, 코로나19로 중단될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되었다.

    어머니들께 목요집회는 움직일 수 있는 한 나가야 하는 평생의 약속 같은 존재였다. “우리 집 양반도 목요집회에 가지 말라고 말을 못해. 하도 지랄하고 다니니까 말릴 수가 없지 뭐.” (고 정순녀 어머니) 목요집회에서 가수 고 김광석 씨가 하모니카를 불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1994년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라는 거를 입증하면 재심 사유가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해보자. 근데 한두 건 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 모아서 해보자. 66명을 모았어요. 손민아(민가협 간사)랑 둘이서 그 66개의 고소장을 우리가 감옥에 면회를 가거나 가족들한테 부탁을 해서 받아왔죠. 그걸로 고소장을 만든 거예요. 마지막 3일을 둘이서 한숨을 못 자고 그걸 했어요.” (1983년 위장 귀순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고문을 받았던) 함주명 선생이 2000년 9월 재심을 청구했고, 기적처럼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자수를 했다. 이근안은 민가협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1988년 이근안을 잡기 위해 상금을 걸고 공개수배를 하기도 했다. 대질심문 과정에서 함주명 선생이 추궁하자 이근안이 엉겁결에 물고문을 시인했다. ‘내가 물고문은 했지만 전기고문은 안 했잖아요.’ 재심에서 승소했고, 그 후 고문으로 조작된 공안 사건들에 대한 재심이 개시되고, 인용되기 시작했다.
  

연대와 배려를 실천한 투사들

    아무리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시국사건으로 누가 구속만 되면 어머니들이 모였다. 석방시키라고 악을 썼다. “96년 한총련이 이적단체가 되고 명동성당에서 한총련 학생들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슬도 묶고 막 단식을 하고 그 난리를 칠 때 진짜 거의 유일하게 지원해주고 내 자식처럼 보듬어준 게 민가협 어머니들이에요.” (남규선 총무)

    어머니들은 성소수자 문제가 인권 차원에서 제기되던 초창기부터 손을 내밀어주고 어깨를 걸어주셨다.

    “명동성당에서 98년 농성을 할 때, 인권법, 국가인권위 때문에 했는데 우리 농성장에 처음으로 성소수자 세 사람이 참여했어요, 그때 어머니들이 성소수자를 처음 본 거예요. 저는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고 그 성소수자들도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어요. 조금 지나니까 임기란 어머니가 말을 붙이기 시작했죠. 그 친구들한테. 그 친구들이 처음엔 말을 잘 안 했어요. 그러다 같이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된 거죠. 동지가 된 거죠.” (남규선 총무) “그 저기 동성애 문제는 처음에 우리는 반대한다고 그랬어요, 근데 뭐 생각해보니까 다 사회의 일원이고 또 사람이 다 성향이 틀리니까⋯⋯ 어머니들이 민가협에 나오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고 또 ‘이건 바꿔야 한다’ 그런 생각도 다 많이들 갖고 계세요. 그니까 점점 변하죠.” (이영 어머니)
  

민가협은 어머니께 어떤 존재입니까?

    “힘이 돼요. 힘이 돼요. 의지가 되고. 뭐 집으로 말하면 기둥이야. 든든하고 그런 게 있더라구. 외롭지 않고.” 봉화 출신의 퉁망스러운 남편에게 쓸데없이 돌아다니면서 팔뚝춤 춘다고 핀잔을 들어도 민가협이 좋았다. (김성한 어머니)

    “‘민가협은 내 삶의 주체다.’ 근데 진짜 활동을 하고 그러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더 느껴지고 절실하고 그러더라구.” (이영 어머니)

    이소남 어머니에게 민가협은 원칙을 지키는 단체였다.

    매년 서울대 축제 때 민가협 주점이 열린다. 한 학생이 ‘할머니 가협이가 누구예요?’ 하고 물었단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어머니들도 가는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작년엔둥 언제 전화를 하니께는 누군 줄 모르시더라구요. 그래서 그 따님이 그래요. ‘어머니가 음⋯⋯ 누군지 빨리빨리 기억을 못 하세요.’” (김성한 어머니) 조순덕 어머니가 이제 고인이 되신 임기란 어머니께서 요양원 계실 때 뵈러 갔더니 “다른 기억은 다 잊어버렸는데 민가협 나와서 활동했던 기억만 머리에 가 있어” 하시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진짜 못헐 말도 진짜 남한테 못헐 말도 요렇게 나누고” 하던 어머니들이 건강하게 잘 계셨으면 좋겠다. 양심수가 없는 세상이 되어서 어머니들 손으로 민가협 해단식을 하는 날을 고대해본다.
  
  

이영재

2002~2009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현재 한양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 민주화운동 관련 구술을 진행해왔다. 그간의 작업으로는 유가협(2010), 70년대 여성 노동자(2011), 인혁당(2011~2016), 6월항쟁(2017), 정화조치·삼청교육대(2018), 70년대 민주노조(2019), 강제징집·녹화사업(2020), 민가협(2021) 구술을 채록했음. 저서 『공장과 신화』 『근대와 민』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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