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여성을 꿈꾼다: 『채식주의자』와 『82년생 김지영』을 나란히 읽기

 

1. 총을 든 인간, 책을 든 여자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와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1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두 작품은 2010년대 누적 판매 종합 10위와 8위를 기록, 밀리언셀러 반열에 올랐다. 참고로 2010년대 누적 종합 20위에 오른 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아래 목록에 따르면 두 작품은 2010년대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2편의 한국문학 작품이다.

* 《아시아경제》 2019. 12. 26. 2

    우리는 베스트셀러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순환담처럼 서로를 물고 돈다. 많이 팔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다. 책의 가치와 시장의 반응은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 수치화된 판매 부수가 곧바로 독자의 공감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하지만 독자가 어떤 책을 많이 찾았다는 것은 그 책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한 특별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욕망과 책의 욕망이 만날 때 베스트셀러 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그 책이 시대적 요구를 반영했다는 의미다.3 이러한 두 입장 사이의 논쟁은 그것이 문학작품일 경우 더욱 첨예해진다.4
    베스트셀러가 성립하는 데에는 세 가지 갈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갈래를 그레이엄 하먼의 용어를 빌려 상부채굴과 하부채굴이라 부르자. 하먼은 서양의 철학이 객체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이 용어로 정식화했다. 객체를 다른 사물에 대한 효과나 마음속 이미지로 생각하는 견해(경험주의, 관념론, 관계주의)가 객체를 상부채굴over-mining하는 것이라면, 객체를 원자나 일자, 흐름이나 잠재성이라는 더 작은 조각 혹은 성질로 간주하는 견해(자연철학, 베르그손과 들뢰즈, 시몽동의 철학)는 객체를 하부채굴under-mining하는 것이다.5 두 태도 모두 객체를 객체 자체로 보지 못하고, 더 상위의 어떤 것이나 더 하위의 어떤 것으로 환원한다.
    ‘베스트셀러 현상’에서 책을 저자의 기획이나 마음속 이미지로 여기는 것은 책을 상부채굴하는 것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저자의 모든 문장은 고유한 것이며 독자는 저자의 통찰에 감응해야 한다. 이 감응이 베스트셀러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가운데에는 스스로를 독보적인 전문가나 현자로 자처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책을 많이 팔았다는 사실이 저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증한다고 여긴다. 상부채굴의 약점은 독자의 개입을 차단한다는 데 있다. 독자는 다만 저자의 언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요자에 머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독자는 판매하는 책의 권수와 동일시된다. 깨달음을 표방하고 독자에게 그것을 주입하려는 에세이, 독자의 생활 습관을 평가하고 삶의 태도를 훈계하는 엘리트주의적 자기계발서 등이 대체로 이 범주에 든다.
    반면에 저자의 몫은 극히 적으며 독자의 특별한 수요가 베스트셀러 현상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어왔고 있으며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 독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어떤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필요는 대개 저자와 무관하다. 이런 태도를 하부채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부채굴의 약점은 저자의 몫이 극단적으로 줄어든다는 데 있다. 저자는 상품의 라벨과도 비슷하다. 작가의 생산성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최근 양산되고 있는 재테크 도서와 같은 실용서나 학습서들이 대체로 이 범주에 들며, 책의 내재적 가치와 무관한 특별한 이유가 구입의 강력한 동기가 된 경우도 하부채굴에 해당한다.
    상부채굴과 하부채굴, 베스트셀러 현상을 설명하는 이 두 가지 태도는 수직적이며 권위적이다. 상부채굴의 경우 저자는 독자를 계량적인 수치로 환산함으로써 사물화하고, 하부채굴의 경우 독자는 저자를 구매용 라벨로 취급함으로써 기호화한다.
    여기에 세 번째 태도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네트워크 짓기’라 부르자. 이것은 저자와 텍스트와 독자를 네트워크로 연결함으로써 수평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을 갖는다. 네트워크 내에서 저자는 작품의 생산자로서 각각의 텍스트를 기획하고 구성하고 완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 역사, 문화, 제도, 유통, 타인, 이데올로기, 언어, 미학, 관습 등의 여러 요소들로부터 끊임없는 틈입을 받는다. 작가는 작품을 발표하는 순간 자신의 작품이 자신에게서 독립된다는 사실을, 자신이 작품에서 소외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의 논리적 메커니즘은 순서상 그와 정반대다.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는 순간 네트워크의 각 요소는 행위성을 부여받는다. 즉 실체로서의 작가와 실체로서의 독자와 만나 연결 고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가-책-플랫폼-⋯⋯-독자가 네트워크에 참여할 때 그 순간 행위성이 스스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로써 네트워크 내에서 작품은 작가와의 수직적 관계─창조자/피조물, 생산자/생산물이라는─를 끊고 그 자체로 독립적인 구성물이 된다. 구성이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내용이 배열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구성은 텍스트가 자신의 바깥과 주고받은 흔적을 자체 내에 기입하는 일이다. 이로써 구성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텍스트가 스스로 존립의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된다. 구성은 텍스트가 자율적인 객체가 되는 과정이며, 텍스트 자신을 텍스트의 저변을 이루는 물질성에서 해방하는 과정이다. 독자 역시 텍스트와 네트워크를 이룬다. 독자는 텍스트의 대상으로서 텍스트에 참여한다. 독자는 텍스트를 구매하거나 구매하지 않음으로써 텍스트의 생활사를 완성한다(이런 의미에서 도서관은 텍스트의 병원이다. 독자에게서 선택받지 못한 텍스트가 재활을 꿈꾸며 그곳에 누워 있다). 독자는 텍스트를 선택하고 생산하고 완성하는 주요 구성 요소다. 베스트셀러를 설명하는 이 세 번째 모델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지점은 텍스트와 독자를 연결하는 그물망이다.
    네트워크라는 아이디어는 브뤼노 라투르의 것이다. 라투르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을 제기하면서 ‘총을 든 사람’의 사례를 든 바 있다. 총을 든 사람은 총과 사람의 산술적 합을 초과하는 창발적 속성을 갖는다.6 ‘창발’이란 부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 부분들의 합에서는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총을 든 사람’은 총을 들지 않은 그 사람 즉 돈이 필요한 사람, 화가 난 사람, 장난치는 사람과는 다르며, 총을 든 사람은 강도나 살인자가 될 수 있으며, 정당방위를 행사할 수도 있다. ‘사람의 손에 쥐어진 총’은 따로 놓여 있는 총과 다르다. 그것은 사물에서 살상력을 가진 공격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총을 쥐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주체이며, 총은 그것이 당신과의 관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또 다른 객체다.”7 저자, 텍스트, 독자의 연결도 그런 성격을 갖는다. 특히 베스트셀러의 경우에는 텍스트와 독자의 연결이 중요시될 것이다.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없이는 베스트셀러 현상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하는 것, 행동하는 것, 글을 쓰는 것, 사랑하는 것, 소득을 벌어들이는 것 등 우리가 주로 인간에게 부여하는 특성들은 인간 신체를 넘어 네트워크를 통해 생성되는 것들이다.”8
    이 글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다시 읽음으로써 이 작품의 구성적 요소와 독자의 독서 행위가 교차하는 양상을 짚어보려 한다. ‘이 작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 작품이 ‘독자의 삶의 지평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살피는 일이며, 문학적 ‘재현’의 문제를 새롭게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9『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작품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가 독자의 호응을 받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으며,10 『채식주의자』의 경우 작품성은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도에 맨부커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수상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1는 세간의 평가가 있다. 이러한 비대칭적 프레임을 넘어서서, 두 작품의 구성적 요인을 평행하게 살펴봄으로써 독자와의 연결이 텍스트와 접속하는 지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여기서 집중할 점은 재래의 재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시화된 실재가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부인(‘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딜레마12에 빠지지 않고, 작품을 수평적으로 다른 작품과 ‘연결’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강의 작품과 조남주의 작품13은 2010년대에 페미니즘적 아젠다를 끌어낸 독자들에 의해 상호 링크되었다. 한강의 연작소설은 2004년대에 발표되었고 『채식주의자』는 2007년에 출간되었는데,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2016년 상반기부터 기입되었다.14 이 시기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활발하게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두 작품은 2010년대에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독해되어왔으며, 독자 역시 여성이 압도적이다.15 따라서 두 작품은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와 사회적 실천이라는 중요한 시대적 특성과 공명한다.16 ‘김지영 현상’이라 명명된 폭발적인 공감과 동일시를 끌어낸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책읽기를 통해서 페미니즘을 학습하며, 책읽기 모임을 통해서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자신의 고유한 경험에 의거해서 세계를 해석”하는 ‘여성 독자’17의 정치적, 해방적 잠재성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미투운동 등을 목격하면서, SNS의 해시태그를 통해 연결된 여성들에게서 “우리 모두는 김지영이다”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18 무기 대신 책을 든 여자19라는 이미지가 이때 부상한다. 총 대신 책을 든 여자라는 이미지는 라투르가 들뢰즈를 경유해 언급한 총을 든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총을 든 사람’을 예로 들었을 때 그 사람(man)은 남자(man)이기도 했다. 언어의 무의식에서는 인간을 남자가 대표해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두 소설은 여성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와 실천을 불러왔다. 따라서 두 소설의 독자를 ‘책을 든 여자’20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창발성이 이렇게 추출(abstract)된 형상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2. 미등록소未登錄素

    두 작품은 젠더 데이터의 공백을 채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젠더 데이터 공백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은 악의적이거나 고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중 무념의 결과다.21 두 작품은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 혹은 우리의 지식체계에 등록되지 않은 것(the unregistered)을 주요한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채식주의자』22에서 그것은 제목과 주인공의 불일치로 나타난다. 주인공(김영혜)은 육식을 거부하긴 하지만 사실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꿈 때문이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졌어.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 중이었어.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 소리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쟁쟁했어.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채식주의자』, 18~19쪽.)23

    채식주의는 과일, 채소, 곡물 등 식물성 식품을 섭취하는 식습관을 지향하는 생활 양식이며, 동물성 식품의 제한 범위를 어디까지 넓히느냐에 따라 플랙시테리언flexitarian에서 프루테리언fruitarian까지 여러 단계로 나뉜다. 영혜는 이 가운데 비건vegan에서 프루테리언으로 이행했으며, 나중에는 모든 ‘먹기’를 거부하는 데로 나아간다. 사람이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것에는 종교적인 이유, 윤리적인 이유, 환경적인 이유, 트라우마(PTSD), (알레르기와 같은) 신체적 이유 등의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주인공 ‘김영혜’는 육식을 하는 꿈을 꾸고는 고기를 입에 대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트라우마와 연관된 채식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동물의 도살이나 외상적인 폭력을 겪은 것은 아니다(잠시 뒤에 논의하겠지만, 폭력을 겪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녀가 처음 꾼 꿈은 피를 떨구는 고깃덩어리, 피크닉을 나온 가족들이 고기를 굽는 풍경, 고기를 먹었을 때의 날고기의 감촉으로 이루어진다. 처음 두 장면은 시각적인 대상으로 주어져 있으며, 그 자체로 트라우마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세 번째 장면에서다. 그녀는 “날고기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고기를 씹는 자신의 얼굴이 피웅덩이에 비치는 것을 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것은 시각적인 체험에 그치지 않고 촉각, 근육감각, 미각 등을 수반했다. 따라서 이것은 무엇보다도 영혜의 육체에 스며든 이미지다. 이미지는 물질과의 직접적인 대면의 결과로 발생하지만, 반드시 사회적으로 의미화된다. 영혜에게 고기는 어떻게 의미화되는가?
    영혜의 남편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아내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내의 채식을 아내의 가족들에게 폭로하고, 이 때문에 가족 간에 큰 갈등이 빚어진다. 그런데 영혜가 ‘채식주의자’라 자처한 것은 아니다. 영혜는 다만 고기를 먹지 않을 뿐이다. 이 행동이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행동인 것도 아니다. 영혜에게는 그와 관련된 외상적 체험이 없다(적어도 그것은 영혜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을 뿐, 현현되지 않았다). 이것이 『채식주의자』를 둘러싼 미등록소다.24 육식을 남성에, 채식을 여성에 할당하면, 남성은 능동적 행위자이고 여성은 수동적 피행위자라는 통상적인 이미지를 정당화하게 된다.25 그것이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관계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투영한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될 뿐이다.26
    반면, 영혜는 거듭해서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육식이 남성적 폭력의 표현임을 영혜가 알고 있으나, 초식 혹은 채식이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가정을 영혜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27 소설이 전개되면서 그녀가 모든 ‘먹기’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육식이 가부장제 아래서 남성 권력의 표현임은 다음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아내의 입술에 장인은 탕수육을 짓이겼다. 억센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열었으나, 악물린 이빨을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인이 한번 더 아내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
    처형이 달려들어 장인의 허리를 안았으나,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넣었다. 처남이 그 서슬에 팔의 힘을 빼자, 으르렁거리며 아내가 탕수육을 뱉어냈다. 짐승 같은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비켜!”
    아내는 몸을 웅크려 현관 쪽으로 달아나는가 싶더니, 뒤돌아서서 교자상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들었다.
    “여, 영혜야.”
    장모의 끊어질 듯한 음성이 살벌한 정적 위에 떨리는 금을 그었다. 아이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를 악문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씩 응시하다가, 아내는 칼을 치켜들었다.
    “말려⋯⋯”
    “피해!”
    아내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흰 접시 위로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채식주의자』, 50~51쪽.)

    영혜의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화신이다. 그는 사위에게서도 “가부장적인 장인”이라 불리며,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 인물이다. 딸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그는 딸을 때리고 억지로 고기를 떠먹이려고 든다. 육식이 가부장적인 폭력의 행사임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혜는 고기를 뱉고는 칼을 들고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이것은 폭력에 대한 대응폭력이 아니다. 영혜는 자신의 몸에서 피를 뿌림으로써, 자신 역시 아버지가 입 안에 쑤셔 넣었던 고기와 같은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육식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최초의 꿈이 실제로 실현되는 순간이다. 육식=남성, 채식=여성이라는 도식은 남성, 여성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드는 도식이다. 영혜는 전자를 인정하고, 후자를 공란(등록되지 않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 도식에 균열을 낸다. 그러고는 후자를 부정하는 길(채식마저 거부하기)로 나아간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등록되지 않은 사실들은 소설 속 본문에 삽입된 수많은 각주로 표현된다. 사회학 논문이나 사회면 기사에서 발췌한 그 자료들은, 문학이 간접화하거나 개별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자료화해서 보여준다. 이 때문에 김지영의 삶은 보도문의 실례처럼 읽히게 된다. 게다가 소설은 어린 시절의 그녀에게도 꼬박꼬박 “김지영 씨”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마치 방송에서 어떤 사회 현상을 보도하면서 “서울에 사는 김지영 씨(82년생, 30세)는”이라는 예화를 적시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매번 접하는 무수한 사회적 증언의 일부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의 말미에 이런 형식이 담당 의사의 병례보고서의 형식 즉 남성 의사에 의해 매개된 서술이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완성된다.
    구성적으로 보았을 때 『82년생 김지영』에서 등록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녀의 ‘발병’ 원인이다. 소설은 여성의 삶에 만연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을 김지영의 일생을 짚어가며 하나하나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수난담의 주인공처럼 고난과 재해와 폭력으로만 점철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그녀와 언니를 남동생에 비교하며 차별하는 할머니가 있었지만 그 할머니의 차별에 대항하는 언니(김은영 씨)가 있었고,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있었지만 거기에 격하게 항의하는 어머니가 있었다(게다가 경제적으로 볼 때 아버지는 무능력했고 어머니는 유능했다). 또한 그녀를 “된장녀”라고 부르는 직장 상사들이 있었지만 여성 직원의 권리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김은실 팀장이 있었다. 드러난 내용을 요약할 때, 김지영 씨의 일생은 설상가상의 수난담이 아니라 새옹지마의 변천담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발병한 것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전체로서 여성의 삶을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가라앉게 만드는 하강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곡절마다 위기를 겪고 그때마다 그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꿔주는 조력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끝내 가라앉고 있다. 예컨대 이런 장면에서 남편은 선의로 말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악의적이다.

    “하고 싶은 일이야?”
    정대현 씨가 다시 물었고, 김지영 씨는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물론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순 없지. 그런데 지영아,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나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너 하고 싶은 일 못 하게 만든 걸로도 모자라, 하고 싶지 않은 일 하라고는 못하겠다. 아무튼 지금 내 생각은 그래.” (『82년생 김지영』, 163~164쪽.)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그녀는 남편의 월급만으로 생활이 빠듯해지자,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까 고민한다. 최저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일이고, 장래성도 없는 일이지만 “평범한 월급쟁이 가정에 70만 원 가까운 월수입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데 너도 그러면 좋겠다고. 겉보기에는 아내를 위하는 말이지만 남편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이미 아내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렸으며, 그것은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대가이다. 그녀의 발병은 이런 무의미한 권유, 즉 선택지가 사라진 강요된 선택을 자유의지로 포장한 권유와도 관련이 있다.
 

3. 광기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광인’으로 분류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혜’는 “신경성 거식증”(『채식주의자』, 171쪽.)의 극단에서 모든 음식을 거부하며 죽어가고 있고, ‘김지영’은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인 사례”(『82년생 김지영』, 169쪽.)에 속한다(다만 후자의 경우, 의사는 자신의 진단이 틀린 것은 아니나, 그렇게 진단한 것이 “조금 성급했다”(170쪽.)고 쓴다). 두 진단은 당연히 사실에 적중하지 못했다. 영혜를 거식증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녀의 꿈이 가진 사회적 이미지(그 꿈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통해 실현되었다)를 망각하는 것이며, 김지영을 우울증으로 진단하는 것은 그녀의 증상이 가진 사회적 집단성(그녀가 퇴사한 후에 다녔던 회사의 여성 직원 전체가 상담치료를 받게 된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영혜는 1부(「채식주의자」)에서 일련의 꿈을 꾼 후 ‘고기’를 먹지 않게 되고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폭력을 겪은 후에 정신병원에 수감 된다. 2부(「몽고반점」)에서 그녀는 비디오아티스트인 형부의 제안을 받아 보디페인팅 모델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형부의 성욕의 대상이 되어 섹스를 나누고, 이 현장을 언니에게 들켜 정신병원에 다시 수감된다. 3부(「나무 불꽃」)에서 영혜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으며 물 말고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중증 거식증 환자다. 영혜는 더욱 폭력적이고 강제적으로 음식을 주입하는 상급 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이다.
    이렇게 요약한다면, 영혜의 이야기는 삭제와 감산과 공제의 이야기다. 영혜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잃고 소거되어가고 있으며, 먹는 음식을 하나씩 줄여가고 있으며(처음에는 고기를, 그다음에는 채소를 포함한 모든 먹을 것을), 몸무게를 잃고 마침내 무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에서, 수동성과 불행, 폭력의 희생자가 아닌 다른 모습의 영혜를 만나게 된다.

    ①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중략)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나무 불꽃」, 『채식주의자』, 180쪽. 이하 괄호 안 쪽수 표기는 『채식주의자』)

    ②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나무 불꽃」, 186~187쪽.)

    ①은 정신병원으로 영혜를 찾아온 언니 인혜에게 그녀가 한 말이다. 영혜는 물구나무서 있다가 언니를 맞았다. 영혜는 자신이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라고 묘사하는 부분은, 사실은 형부와의 섹스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비디오아티스트였던 형부는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아직도 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는, 그 반점의 이미지를 뇌리에서 떨쳐버리지 못한다. 마침내 영혜에게서 모델 역할을 수락받은 그는 영혜의 온몸에 꽃을 그렸다. 그림에서 몽고반점은 “연한 꽃잎 그림자 같은 반점”(132쪽.)으로 남았다. 영혜는 자기 몸에 그려진 꽃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 영혜가 형부와의 섹스를 받아들인 것은 성욕 때문이 아니라, 몸에 그려진 꽃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꽃꽂이, 접붙은 개화開花였던 것이다. ②에서 영혜는 자신이 나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나무가 어떻게 말을 하고 생각을 하냐는 언니의 반문에 영혜는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1부(「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고기를 먹는 이미지에 숨은 가부장적인 폭력(이것은 남편을 따라간 회사의 회식 자리에서 사회적 폭력으로 확장된다)에 진저리를 쳤으나, 2부(「몽고반점」)에서는 제 몸에 난 반점이 꽃 그림자라는 사실을, 자신의 온몸이 일종의 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3부(「나무 불꽃」)에서는 마침내 나무가 되려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를 구급차에 태워 보낸 후에, 그녀의 언니는 길가의 나무들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본다.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221쪽.)이다.
    그렇다면 고기를 거부하는 육체에서 꽃을 피운 몸으로, 다시 불꽃을 품은 나무로 변해가는 영혜의 몸은 비극적인 희생자의 몸인가? 가부장제의 제단에 던져진 희생제의의 몸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적극적인 화신化身에의 욕망이 있으며, 능동적인 변신에의 의지가 있다. 영혜는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으로 나무가, 불꽃이 깃든 나무가 되고자 한다. 다른 몸이 되거나, 다른 몸과 접속하는 것은 분열증자의 주된 상상이다. 들뢰즈는 분열증이 ‘생산하는 자연’과 연관된다고 지적하면서 분열증자를 “호모 나투라Homo Natura”라고 명명한다. “분열증도 사랑과 마찬가지이다. 분열증적 특유성도 분열증적 임상 존재도 없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행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요,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현실〉로서의 1차적인 보편적[우주적] 생산이다.”28 욕망과 생산이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분열증자에게는 모든 것이 생산이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욕망과 통합한다. 분열증은 욕망하는 기계들(인간, 비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들)이 구성한 세계이며, 그들이 이루어낸 모든 생산을 이르는 이름이다. 영혜는 희생자(로 내던져진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욕망, 생산하는 기계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영혜를 희생물로 여기는 시선이야말로 오이디푸스의 시선일 것이다. 가부장제의 적자인 그 오이디푸스 말이다.
    김지영의 경우는 어떤가. 의사는 그녀에게 우울증 진단을 내렸지만, 사실 그녀는 우울증자가 아니다. “김지영 씨는 당장의 고통과 부당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계속 되새기지도 않는 편이다. 먼저 쉽게 입을 열지는 않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면 깊은 곳의 이야기까지 스스로 끄집어내서 담담하고 조리 있게 잘 말한다.”(『82년생 김지영』, 170쪽. 이하 괄호 안 쪽수 표기는 『82년생 김지영』) 김지영이 겪는 어려움을 우울증이라는 포괄적 진단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29 그런데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의 행동 패턴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의 증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①
    “요 며칠 아침 바람이 쎄하다 싶더니 오늘이 백로였네. 누우런 논에 하아얗게 이슬이 맺혔겠네.”
    정대현 씨는 아내의 말투가 왠지 젊은 사람 같지 않아 웃었다.
    “당신 뭐야. 꼭 장모님 같아.”
    “이제 홑잠바 하나씩 들고 다녀, 정 서바앙. 아침저녁으로 쌀쌀해.” (10쪽.)

    ②
    그날 밤 정대현 씨가 퇴근했을 때, 김지영 씨는 딸과 나란히 누워 자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엄지를 빨고 있었다. (11쪽.)

    ③
    며칠 후 김지영 씨는 자신이 작년에 죽은 동아리 선배 차승연이라고 말했다. (중략)
    “대현아, 요즘 지현이 많이 힘들 거야. 저 때가 몸은 조금씩 편해지는데 마음이 많이 조급해지는 때거든. 잘한다, 고생한다, 고맙다, 자주 말해 줘.”
    “이건 또 무슨 유체 이탈 화법이야? 아이고 그래, 잘하고 있다, 김지영. 고생한다, 고맙다, 사랑한다.” (중략)
    “너, 아직도 내가 한여름에 덜덜 떨면서 고백하던 스무 살 차승연으로 보이는 거야?” (중략)
    “그래, 너 좋은 남편인 거 다 아니까 지영이 이름 좀 그만 불러라. 에휴, 짜식.” (11~13쪽.)

    ④
    “아이고 사부인, 사실 우리 지영이 명절마다 몸살이에요.” (중략)
    “정 서바앙! 자네도 그래. 매번 명절 연휴 내내 부산에만 있다가 처가에는 엉덩이 한 번 붙였다 그냥 가고. 이번에는 좀 일찍 와.” (17쪽.)

    김지영의 증상이 나타난 것은 네 번이다. ①과 ④에서 그녀는 엄마가 되어서, 사위와 사돈에게 말을 건넸다. ②에서 그녀는 어린 딸이 되어 아기와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면서 같은 자세로 손가락을 빨았다. ③에서 그녀는 동아리 선배 “차승연”이 되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차승연은 젊은 시절에 김지영의 남편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깨끗이 단념한 적이 있다. 남편은 그 일화를 알 리 없는 아내가 차승연의 말투로 말을 하자 “머리카락이 다 삐쭉 서는 것처럼 두피가 찌릿찌릿했다.”(13쪽.) 이 장면에서 소설은 괴담의 형식을 취한다. 이것은 광인이 선사하는 공포인가? 그럴 리 없다. 이것은 괴담의 형식을 띤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김지영은 엄마가, 딸이, 그리고 (남편이 마음을 받아주었다면 지금 자신의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선배가 정말로 되었던 것이다. 일종의 ‘빙의’인 셈이다.
    광인은 이 세상의 질서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앎을 지시한다.30 광인은 천진함 내지 어리석음으로 사람들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발설한다. 예컨대 김지영은 엄마가 되어 사위의 건강을 걱정하고, 명절에 처갓집 식구들의 사정을 시댁 식구들에게 전하며, 남편의 친구가 되어 아내에 대해 충고한다. 김지영은 광기에 희생된 것이 아니라 광기라는 형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 역시 생산하는 기계로서의 분열증자의 역량이다. 이 변신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는 남성으로는 빙의하지 않는다. 가부장제가 존속하는 억압 사회에서, 주류 남성의 자리가 수혜자 혹은 억압자의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설하는 지혜의 언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의 광기는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사회적 보편성의 표식이다.
    여기서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개별화, 개체화의 공리는 보편성의 공리와 충돌한다.31 이 작품에서 인물의 비체화非體化 즉 비개체화는 익명의 공통성을 통해 무수한 김지영‘들’을 보여주려는 전략에 가깝다. 앞에서 말했듯 김지영의 삶에서 발병의 원인을 짚어낼 만한 돌출적인 사건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런 사건은 오히려 김지영이 퇴사한 이후에 발생했다. 여성 직장 동료들이 겪었던 화장실 몰카 사건이다. 한 보안 요원이 여자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해서 찍은 사진들을 성인 사이트에 올렸고, 그 사이트의 회원이던 회사의 남자 직원이 그것을 보고 남자 동료들에게 알렸다. 이들은 경찰에 신고하거나 여자 동료에게 알리지 않고 오랫동안 희생자들의 사진을 돌려보며 즐겼다. “여직원들 대부분 약 먹고, 상담받고, 그러고 있어. 정은이는 수면제 먹어서 응급실 갔었어. 총무팀 두 명이랑 최혜지 대리, 박선영 대리는 퇴사했고.”(154~155쪽.) 우리는 김지영이 이들의 고통을 대표하는 제유적인 이름이라고, 따라서 이들 모두가 김지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여성들과 구별되지 않는 여럿 가운데 하나이기에, 김지영에게는 개체화의 특성보다는 비체화의 특성이 부과된 것이다.
 

4. 비선형적 시간들

    마지막으로 두 작품에서 연상의 흐름(flux)을 간추려보자. 『채식주의자』에서 사건은 선형적으로 전개되지만 그 연상은 다른 흐름을 보인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α는 원장면을 뜻하며, α′는 원장면의 변주를 뜻한다. A부터 F까지의 알파벳은 영혜가 겪은 주요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α : 그녀는 숲에 서 있다. 방황하다가 들어간 건물 안에는 고깃덩이가 널려 있고, 그녀는 그 고기를 먹은 꿈을 꾸었다.
    α′ : 그녀는 냉장고 앞에 몽유병자처럼 서 있었다.
    B :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C=A : 두 번의 만찬(회사의 회식, 가족의 회합)에서 그녀는 힐난의 대상이 되고, 아버지는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녀는 칼을 들고 손목을 긋는다.
    D : 병원에 엄마가 찾아와 그녀를 속이고 흑염소 즙을 먹인다. 그녀는 토한다.
    E : 그녀는 형부의 보디페인팅 작업의 대상이 되고, 그녀=꽃으로 변신한다. 형부는 그녀와 한 몸이 되었다가 떨어져 나간다.
    F=D. 그녀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토하고), 나무가 되어간다.
    α″.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나무들이 서 있다.

    α는 영혜(‘그녀’)가 꾼 최초의 꿈 장면이다. 꿈속에서 영혜는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고깃덩어리들이 매달려 있는 건물을 만난다. 꿈이기에 이 장면은 무시간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녀의 삶 전체를 압축하는 원장면처럼 기능한다. 영혜가 새벽에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α′)은 이 장면을 반복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았고(B), 두 번의 회식자리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며, 마침내 아버지의 폭력을 겪는다. 영혜는 자기 손목을 그어, 자신이 그런 고깃덩어리의 하나일 뿐임을 보여준다(C). 그렇다면 이 장면은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진정한 원인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B에 선행하게 된다(C=A, 이 장면이 C인 것은 B 다음에 오는 사건이기 때문이며, A이기도 한 것은 B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선형적 시간은 여기서 한 번 비틀린다. 병원을 찾아온 엄마는 그녀에게 흑염소 즙을 한약이라 속여서 먹이고, 그녀는 몇 모금 먹었던 즙을 토한다(D). 이 행동은 후에 영혜가 나무가 되면서 모든 먹을 것을 거부하는 원인이 된다(D=F). 채소에도 고기가 섞일 수 있다. 그 사이에 영혜는 꽃이 되어 다른 꽃을 받아들이고(E), 끝내는 나무가 되고자 한다(F). 영혜가 떠난 후에 숲의 나무들은 푸른 불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α″). 이 마지막 장면은 영혜가 끝내 그 나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그리고 양혜 자신이, 최초의 꿈에서 만난 그 숲에 들었음을), 영혜의 소망이 저 나무의 푸른 불꽃처럼 꺼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인과성의 비선형적 얽힘은 이 소설의 변신이 ‘나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수렴한다는 인상을 흩어버린다. 영혜는 나무 사이에서 서 있다가(α) 고기들이 가득한 차가운 인간의 건물에 들어선다. 영혜는 자신의 삶이 동일한 국면―고기들이 저장되어 있던 차가운 냉장고 앞―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α′), 그 나무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α″). 따라서 나무는 영혜의 말라가는 몸과 수동적인 삶을 요약하는 식물적 상징으로 환원될 수 없다. 『채식주의자』가 겨누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욕망하는 생산 혹은 생산하는 욕망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녀의 꿈은 훨씬 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보다 간명한 편이다. 그 이유는 이 소설이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는 데다가, 그 순서마저 담당 의사의 병례보고서라는 형식으로 정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지영의 삶이 다른 여성들의 삶과 병렬되는 순간들이다. 김지영이 만난 여성들, 조력자들, 혹은 김지영과 같은 위상의 여성들에게 기호를 붙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5년 가을. 김지영이 자신의 엄마와 딸, 남편의 옛날 친구로 빙의해 발언을 하였다. 이 일로 김지영은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A=엄마, B=딸, C=친구)
    1982년~1994년. 언니가 할머니의 차별에, 엄마가 아버지의 차별에 반대하며 김지영의 편을 들었다. (A=엄마, D=언니)
    1995년~2000년. 학원에 다니던 중 그녀를 쫓아온 남학생에게 협박을 받았다. 버스에 동승했던 한 여성이 김지영을 구해주었다. (E=버스에서 동승한 한 여성)
    2001년~2011년. 차별과 희롱이 만연한 세상을 겪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 적지 않았는데 김은실 팀장이 앞장서서 차별을 없애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F=김은실)
    2012년~2015년.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옛 직장 동료들(Gs=동료들)이 몰카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해 가을 발병했다. (Gs=동료들)
    2016년. 김지영의 기록을 정신과 전문의가 정리했다. 의사에게도 김지영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 아내가 있고(H), 아내와 유사한 사유로 병원을 그만둔 이 선생이 있다. (H=의사의 아내, I=이 선생)

    한 개인의 일생을 다루는 연대기적 서술은 사건을 다루는 드라마적 구성과 같지 않다. 후자가 삶의 절정(비극이든 희극이든 인물의 삶을 요약하는 한 극점)을 꼭짓점으로 삼은 산 혹은 몇몇 산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전자는 시작(생년)과 끝(현재 혹은 몰년)에 의해 기계적으로 재단되는 무작위적인 파동의 모습을 띤다. 바로 이 점이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를 평면적이라고 느끼게 만든 원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김지영 개인의 연대기에만 주목하지 말고, 각각의 에피소드에 우정 출현하는 다른 김지영들(A에서 I까지, 그리고 수많은 G들까지)의 삶을 포괄한다면, 이 이야기는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진 복합적인 파문의 형상을 띠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매번 겪는 에피소드에서 그 자신의 체험담을 끼워 넣고 싶어질 것이다. 독자는 기꺼이 J가 되고자 한다. 따라서 『82년생 김지영』은 수평적이며 개방된 텍스트다.32 독자들이 이 텍스트와 무수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행위자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령 소설의 마지막을 이루는 의사의 혼잣말이 그렇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82년생 김지영』, 175쪽.)

    이런 결말은 이 소설을 닫힌 구조처럼, 비극적인 전망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이 결말에 수긍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만일 내가 결말을 쓴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뒤에 붙일 것이며, 따라서 또 다른 텍스트가 (후기의 형식으로) 더해질 것이다. 추신의 형식으로 계속되는 글쓰기, 이것이 『82년생 김지영』이 이루어낸 네트워크 짓기의 힘이다. 또한 이것은 ‘책을 든 소녀’가 생산해내는 창발성의 힘이기도 하다.
 

5. 미래의 책은 여성을 꿈꾼다

    보이지 않는 자리를 재현하려는 시도. 그것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온 지식 담론의 바깥, 인식론적 바깥에 자리함으로써 비존재자들(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던 존재자들)을 불러 모은다. 광기가 대표적이다. 광기는 비정상의 카테고리에만 등록될 수 있었다. 광기는 정상성의 양태를 벗어난 것, 즉 인식론의 범주에 포함할 수 없는 것, ‘카테고리 바깥’의 무엇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인들은 광인을 인식론의 지평에서 길들이는 데 수백 년을 소모했지만, 정작 광기와 결합한 여성의 자리는 그 노력의 와중에서도 마련한 적이 없다. 그들은 그런 여성을 마녀라 이름 붙이고 불태워버렸다.33 마녀가 사라지자, 그렇게 이름 붙여야 할 여성들은 광녀가 되었다. 『채식주의자』 속 김영혜의 남편이 그녀를 ‘특별’하지 않아서 골랐다고 말하는 것, 『82년생 김지영』 속 담당 의사가 김지영에게서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적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내 아내나 환자가 ‘정상적’인 재현의 범주 안에 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여자는 의사(의학/과학 지식)의 재현 바깥에 서 있다. 영혜가 새벽에 냉장고 앞에 서 있듯이. 김지영이 옛 연인의 얼굴로 남편에게 “지영이 잘 해줘”라고 충고하듯이.
    서사의 비선형적 꼬임과 이질적인 에피소드의 병렬 역시 매끄러운 재현의 방식은 아니다. 그런 구성 방식을 통해 독자는 한 여성이 ‘나무-되기’를 실천함으로써 저항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타인과 다르지 않은 복수의 여성들의 삶이 수평적으로 링크됨으로써 그 사이에 자신의 자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변화는 재현에 접근하는 패러다임을 바꾼다. 이것은 ‘페미니즘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나 ‘페미니즘 인식론’이라는 새로운 지식을 기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재현의 방식을 창안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생산한다. 이것은 재현의 도식이 보여준 무한의 구분선을 넘어서서 새로운 접촉의 지점들을 발명하는 일이다. 여기서 더 다양한 존재자들이 책을 손에 쥐고 실핏줄처럼 연결된다. 이 세계가 책을 든 자의 손, 인쇄공의 발, 책과 종이, ISBN과 라벨들, 해시태그와 리뷰, 통계 데이터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쓰는 자의 손가락과 평평하고 이질적으로 연결된 생태계라는 것이 마침내 알려진다. 도래할 책은 이 생태계에서 더 많은 행위자에게 행위를 재분배하는 다양한 접촉과 연결, 즉 네트워크 짓기를 경험할 것이다. 모세혈관처럼 얇고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섬세한 피부조직을 다독여 책장을 넘기는 일. 그것은 여성이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주석>

  1. 이 글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다. 본문에 인용할 때는 표제와 쪽수를 밝히도록 하겠다.
  2. 베스트셀러를 조사한 매체에 따라 세부 순위는 다를 수 있다.
    https://www.asiae.co.kr/article/2019122616295924108
  3. 통상적으로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나 ‘사회상’, ‘망탈리테’를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 현상’이 사회의 중요한 현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천정환에 따르면 베스트셀러에는 출판자본주의와 정치 이데올로기 등, 독서 행위 밖의 사회의 잡다한 것들이 반영되고 연루되어 나타난다. 천정환, 「한국 독서사 서술 방법론(1)─독서사의 주체와 베스트셀러 문화를 중심으로」, 『반교어문연구』 제43집, 반교어문학회, 2016.
  4. 서영인은 「1990년대 문학지형과 여성문학 담론」(『대중서사연구』 제24권 2호, 2018, 30~31쪽.)에서 1990년대 문학의 ‘대중성’에 대한 강박적 거리두기의 사례로, 여성문학의 부상을 대중적으로 입증한 공지영 소설이 “비평적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5. 그레이엄 하먼, 『쿼드러플 오브젝트』, 주대중 옮김, 서동진 해제, 현실문화연구, 2019, 25~43쪽 참조.
  6. 브뤼노 라투르는 총을 든 인간의 사례를 들면서, “총이나 시민 중 어느 것이 행위자인가?”라고 질문한다. (브뤼노 라투르, 『판도라의 희망』, 장하원‧ 홍성욱 옮김, 휴머니스트, 2018, 282~289쪽 참조) 김홍중은 총을 든 사람의 총과 사람은 총과 사람의 산술적 합을 초과하는 창발적 속성을 갖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홍중, 「21세기 사회이론의 필수통과지점: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 이론」, 『사회와이론』 제43집, 한국이론사회학회, 2022, 19쪽.)
  7. 브뤼노 라투르, 위의 책, 287쪽.
  8. 김홍중, 앞의 글에서 재인용, 19쪽.
  9. 양윤의, 「재현‘들’─이 시대의 소설은 재현을 어떻게 사유하는가」, 『쓺』, 2023, 봄호. 이 글에는 2020년대 소설이 재현에 관한 기존의 도식을 어떻게 새롭게 변형하는지 살펴본 바 있다. 문제는 재현이 아니라 재현‘들’이다.
  10. 「‘82년생 김지영’ 미 최고 문학상 ‘전미도서상’ 후보 올랐다」, 《한국일보》, 2020. 9. 2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92212540004909
  11.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두 번째 연작 「몽고반점」은 2005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채식주의자』는 2016년 베스트셀러 목록 반열에 올랐다. 「한강 맨부커상 ‘후광 효과’ 5월 소설 판매량 급증」, 《서울신문》, 2016. 5. 30.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530800159
  12.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비평가들은 여성 독자의 실천적 참여를 유도하였다는 점을 평가하면서도 작품의 내적 성취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작품이 서사의 구성이나 인물의 묘사에서 다소간 평면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약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평가이다. 이것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부인(denial)의 논리다. 부인의 논리로 작품의 의의를 밝히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13. 조남주의 소설과 한강의 소설을 비교 분석한 논문이 제출된 바 있다. 류진아, 「여성 소설의 주제 형상화 방식 연구─환상소설과 리얼리즘 소설을 중심으로─」, 『젠더와사회』 제31집, 신라대학교 여성문제연구소, 2020 ; 김응교, 「고기와 우유, 식탁의 가부장제─한강 『채식주의자』와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영주어문』 제48집, 영주어문학회, 2021.
  14. 2016년 상반기 ‘예스24’ 베스트셀러 순위 참고. https://ch.yes24.com/Article/View/30885
  15. 도서 판매 점유율은 대체로 남성보다 여성이 높다. 「예스24, 2015년 베스트셀러 분석 및 도서판매 동향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베스트셀러 판매 권수 점유율에서 여성이 27.3퍼센트이고 남성이 11.3퍼센트이다. (예스 24, https://ch.yes24.com/article/view/29620) 『82년생 김지영』의 경우에는 여성 독자의 비율이 78퍼센트로 폭등한다. 《한국일보》, 2017. 5. 22.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705220451805737
  16. 조연정,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문장웹진』, 2017.8. https://webzine.munjang.or.kr/board.es?mid=a20104000000&bid=0004&list_no=2403&act=view
  17. 허윤, 「광장의 페미니즘과 한국문학의 정치성」, 『한국근대문학연구』 19권 2호, 한국근대문학회, 2018, 138쪽.
  18.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 안팎」, 『문학들』, 2017년 겨울호, 29쪽.
  19. 허윤, 「로맨스 대신 페미니즘을!─‘김지영 현상’과 ‘읽는 여성’의 욕망」, 『문학과사회』, 문학과지성사, 2018년 여름호, 52쪽. 허윤은 “『82년생 김지영』은 로맨스 대신 페미니즘을 선택한 여성들이 ‘착한 여자’로 남으면서 손에 쥘 수 있는 무기”(52쪽)라고 설명한 바 있다. ‘무기를 든 여성’의 이미지는 이 글에서 영감을 얻었다.
  20. 이때의 ‘여성’은 동일성의 표현이 아니다. ‘여성’은 지위나 계급, 영역, 범주와 같은 관념들로 환원할 수 없는 집합체이다.
  21. “젠더 데이터 공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것이 대개 악의적이지도, 심지어 고의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사고방식의 산물일 뿐이기에 일종의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남자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고, 여자들은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중 무념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인간이라 통칭하는 것은 남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황기한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0, 16쪽.)
  22. 『채식주의자』는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발표된 작품이다.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의 관점에서 서술되었으며, 「몽고반점」은 인혜 남편(영혜의 형부)의 관점에서 서술되었고, 「나무 불꽃」은 인혜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신수정은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채식’의 의미」(『문학과환경』 9권 2호, 문학과환경학회, 2010, 207쪽.)에서 한강 소설에서 채식 혹은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가부장적 공동체의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저항적 실천의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 바 있다.
  23. 한강은 영혜(‘나’)의 독백을 그녀의 남편(‘나’)의 서술과 구별하기 위해 이탤릭체를 사용한다.
  24. 허윤진도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채식주의자’는 사람들이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기 쉬운 속성으로 환원한 호칭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르기는 어렵다.”(허윤진, 「열정은 수난이다」, 한강, 『채식주의자』, 앞의 책, 231쪽.)
  25. “고기는 강력하고 둘도 없는 음식으로 추앙된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노예인 채소는 자기가 타고난 운명에 만족해야 하고 왕인 고기의 자리를 탐내서는 안 된다. (중략) 육식을 멀리하려 하는 남자는 사나이답지 못하다고 놀림을 받는다. 육식을 하지 못하는 남자는 스스로 사내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중략) 고기는 ‘무엇의 본질 또는 중요 부분’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의 본질(meat of the matter)’이나 ‘핵심 질문(meaty ques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무엇을 ‘비프 업beef up’한다는 말은 무엇을 향상시키거나 보강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채소는 하찮거나 보잘것없는 무엇을 의미한다. ‘채소 같다’는 표현은 ‘수동적인 것, 따분한 것, 단조로운 생활, 활기 없는 것’ 같은 뜻이 있다. 고기는 누군가가 맛을 보며 즐길 수 있거나 탁월한 대상을 의미하는 반면, 채소는 무엇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 즉 단조롭고 수동적인 사람이나 식물인간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채소라는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전도됐다. 채소의 원래 뜻은 ‘생기 있고 활동적인’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둔한, 단조로운, 수동적’으로 정의된다. 식물처럼 생활한다는 말은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은 여성이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현실하고 마찬가지다. 여성의 음식으로 인식되는 순간, 채소는 ‘여성적인 것’, 즉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진다.”(캐럴 J. 애덤스, 『육식의 성정치』, 류현 옮김, 이매진, 2020, 91, 95쪽.)
  26. “성폭행 피해자나 구타당한 여성이 “제 자신이 고깃덩어리 같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는 데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례에서 고기의 의미는 고기 자체가 아니라 남성 폭력에 희생된 여성이 자기에 관해 느낀 감정을 지시한다.”(위의 책, 105쪽.)
  27. 엘자 도를랑, 『자신을 방어하기』, 윤김지영 옮김, 그린비, 2020, 368~369쪽. 엘자 도를랑은 역사적인 “남성에 의한 폭력의 독점”에 의해, 여성에게 ‘폭력(의 활용)’이 몰수되어왔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여성에게 ‘비폭력’이 본질화되었으며 강제되었다. 이렇게 이분화된 구도와 그 할당은 남성 중심적 질서의 ‘구조적’인 반영일 수밖에 없다.
  28.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28쪽.
  29. 마야 뒤센베리는 여성보다 주치의가 질병이 내는 ‘귓속말’을 무시한다는 전언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질병이 아니라 게으른 의학(과학)이 여성을 병들게 한다. (마야 뒤센베리,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김보은·이유림 옮김, 한문화, 2019, 432쪽.)
  30. “어두운 본성의 반대편 극단에서 광기는 앎이기 때문에 매혹적인 것이 된다. 우선 이 모든 부조리한 형상이 사실은 어떤 어렵고 폐쇄적이며 비의적인 앎의 요소이기 때문에, 광기는 앎이다. (중략) 그토록 접근하기 어렵고 그토록 무서운 이 앎을 광인은 순진한 어리석음 덕분으로 보유한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2003, 71~72쪽.)
  31. 『82년생 김지영』의 서사적 특성이 이런 ‘보편화’, ‘일반화’를 통한 공감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옳은 지적이지만, 김지영의 서사에는 보편적인 행위소(그녀는 왜 발병했는가?)가 빠져 있다.
  32. 김미정(앞의 글, 40쪽.)은 『82년생 김지영』을 재독하면서 중요한 키워드로 ‘재현’을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이 가진 대중적 성공은 보다 많은 개별자들의 삶과 “입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서 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대의에 대한 응답이다. “기존에 미학적으로 합의된” 기준선을 넘어서야 한다는 김미정의 논의는 이 글의 문제의식과도 다르지 않다. 이 글에서 그 뛰어넘기는 텍스트와 독자가 만나 이루어내는 네트워크적 교란에서 비롯된다.
  33. 실비아 페데리치,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신지영·김정연·김예나·문현 옮김, 갈무리, 2023, 35~36쪽 참조. “마녀사냥은 여성 전체를 상대로 한 테러 체제였다. 마녀사냥으로부터 새로운 여성성의 모델이 출현했다.” (70쪽.)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