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시기 일본문학, 그리고 여성
* 이 글은 전에 발표한 세 편의 논문에 기초하여 작성하였다. 이전에 발표한 글의 서지는 다음과 같다. 「〈전쟁〉 담론과 여성」(『일본연구』 제36집, 2014. 2) ; 「요시야 노부코 문학의 전쟁책임─‘전쟁미망인’을 둘러싼 담론을 중심으로─」(『일본연구』 제71호, 2017. 3) ; 「일본여성문학자의 ‘문예위문’과 전쟁책임」(『일어일문학연구』 제105집, 2018. 5)
1. 들어가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한 전쟁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유럽과의 관계에서 지속적 우위에 서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2022년 4월 22일 JTBC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 장관 세르게이 쇼이구가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한 영상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을 해방시켰다”1고 공식 선언했다. 전쟁의 명분으로 ‘해방’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는 것은 비단 이 전쟁뿐만 아니다.
조지 부시George W. Bush 미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공격 명분으로, 일본 점령의 민주화 성공 모델인 ‘여성해방’을 내걸었고 설득력을 얻은 측면2이 있었다. 일본이 패전과 함께 미군 중심의 GHQ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 점령하에 들어가면서 여성참정권 부여를 비롯한 여성해방이 큰 이슈로 떠올랐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범 국가 일본도 전쟁을 동아東亞에서 출발하여 아시아, 아시아 여성의 ‘해방’이라는 관점을 공유하며 ‘성전聖戰’으로 규정짓는다.
이러한 전쟁의 명분은 적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자국민의 명분은 될 수 없다.
전쟁을 어떻게 재현해내는가는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고, 따라서 전쟁의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이 글은 전쟁을 재현하는 미디어 담론과 문학, 그리고 여성에 주목하여 일본의 전쟁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여성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에서 여성과는 무관해 보이는 남성들의 전쟁을 후방의 여성들에게 어떻게 각인시키고자 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어떻게 전선과 후방의 일체를 꾀하고자 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전쟁 미망인을 통해 남성들의 ‘희생’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희생’이 담보된 전쟁에서 미디어와 문학의 기대 담론을 검토하고자 한다. 나아가 여성문학자의 전쟁협력적 문학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문학자의 전쟁 책임까지 조명해보고자 한다.
2. 가타키우치의 중일전쟁과 여성
근대 일본 정부는 부국강병을 내걸고 징병제를 실시, 모든 남성들의 무사화, 즉 병역화를 달성하였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거국일치挙国一致’, ‘진충보국尽忠報國’, ‘견인지구堅引持久’라는 슬로건을 중심으로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 중앙연맹을 결성, 여성까지 포함하는 총동원 전시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는 전쟁과 무관해 보였던 여성들이 여성의 국민화와 맞물려 적극적인 전쟁 참여로 내몰리는 형국이었다. 1937년 대일본연합부인회大日本聯合婦人会의 여성청년단은 ‘여성의용대女性義勇隊’ 결성 운동을 개시하고, 여성 사이에서 종군지원자가 속출했다3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성과 전쟁의 관계는 후방에서가 바람직하다4는 방침 아래, 여성의 병역화보다는 후방에서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주력한다. 1937년 11월 『제국교육帝国教育』에 기고한 「부인을 통한 국민정신총동원」에서는 이러한 후방 여성의 전쟁과 관련지어, 국민정신의 강건한 발양과 국민생활의 통제5가 요청되었다. 그 이듬해인 1938년 7월에는 식민지민까지 적극적으로 동원하고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전쟁은 일본 남성뿐만 아니라 일본 여성, 그리고 식민지민을 총동원한 총력전으로 전개되었다.
중일전쟁이 이전의 전쟁과는 다른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되면서 전선의 남성뿐만 아니라 후방의 여성, 식민지민까지 함께하는 전쟁으로 정의되었다. 그 안에 여성은 후방의 ‘방어전’을 담당하며, 남성들의 ‘무력전’과는 다른 “경제전, 정략전政略戦, 사상전”이 강조되었다. 이는 후방 여성들에게 “평시=전시”6라는, ‘일상적’ ‘전쟁 생활’로의 전환을 도모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부인공론』 1939년 9월에는 당시 소녀소설로서 인기를 끌었던 소설가 요코야마 미치코横山美智子의 격려에 의해, 전쟁체험자인 무명의 나카타 고지中田弘二가 쓴 「전우戦友」라는 작품이 게재된다. 이 작품은 창작이지만 실화이자 전장의 기록이라고 밝히면서 생생함과 진정성을 확보한다. 「전우」는 여성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남성들의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인 전쟁의 기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더 나아가 막연한 중일전쟁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한편, 전장과 후방의 전쟁, 즉 남녀의 전쟁, 일상화하는 전쟁으로의 체제 전환을 호소하고 있다.
「전우」가 어떠한 전쟁을 재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전우」의 주인공 ‘나’는 친구들과 요코하마横浜의 항만 시설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나가와品川에서 출정 군인들의 환송식을 보게 된다. “국가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이 불볕더위 아래 몇 개월 계속될지 모르는 쓰라린 고통과의 싸움, 그 생명조차도 기약할 수 없는 용사들”을 보면서 무사를 기원하고 돌아오던 날 ‘나’는 소집영장을 받는다. 전부터 각오했던 ‘나’는 헛웃음을 짓고 태연하게 휘파람을 불려고 했지만, 바짝 바른 입술은 냉정을 잃은 ‘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징집되어 한 부대에 소속되며, 생소한 이름의 이국적인 오키나와현 출신 일등병 시마부쿠로 겐포島袋憲法를 만나 친하게 지낸다. 출정 후 중국의 고안성固安城을 탈환하기 위한 절박한 순간에 겐포 일등병이 수송대 특수병으로 출정한 동생 니요二ーヨー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겐포는 동생을 착실하고 성실할 뿐 아니라 형제의 우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일본 제일의 동생이라고 치켜세운다. 형 겐포를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동생을 책망하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다. 동생과 헤어진 형은 동생의 부대 이름조차 묻지 못한 아쉬움에 식사, 휴식 시간에도 수송병만 보면 동생 찾기에 혈안이 된다. 며칠 후 북중국의 철옹성을 함락시킨 형 겐포에게 동생의 ‘장렬한 전사’ 소식이 전해진다. 명예롭게 일본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친 동생의 유골 조각을 받아든 형은 공병工兵 대신 적을 사살하는 포수를 자원하고, 동생의 원수를 갚는 ‘가타키우치敵討’ 즉 복수를 결심한다.
겐포에게 일본과 중국의 전쟁은 동생에 대한 ‘가타키우치’로 둔갑, 살기에 찬 결의로 전쟁에 대한 강한 ‘의욕’을 불태우는 복수의 전장이 된다. 그는 “동생의 몫까지 싸우고자 무리하게 포연탄우 속으로” 적을 향해 돌진한다.
‘가타키우치’는 본래 에도시대에 존재했던 복수로, 무사계급에 한해 주군과 부모, 형제에 대한 복수가 허용되었다. 요컨대 ‘죽여도 좋다’는 것으로, 법적으로 인정되는 ‘도덕적 행위’였다. 이렇게 볼 때, ‘가타키우치’는 상대인 ‘중국군’을 동생의 복수를 위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적’으로 규정하고 살인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후방의 독자,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가타키우치’야 말로 형제를 죽인, 일본인을 죽인 ‘적’으로 그 명분을 획득하게 할 뿐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으로 전쟁에 동참하게 만들고 있다.
동생 니요는 죽음으로써 “일본의 군인”으로 “일본을 짊어진 명예로운 전사”로 추앙된다. ‘명예’는 무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최고의 선善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라는 무사의 정신이 당시 쇼와昭和 시대의 일본 국민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7 이렇게 볼 때, 전쟁에서 무사인 황군의 최고 ‘명예’는 ‘전사’였던 것이다.
1937년 10월 21일 《도쿄아사히신문》에는 「장하다 군국의 아버지는 슬퍼하지 않고」라는 제목으로, 출정 시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지 않겠습니다”라는 각오로 전장을 향한 아들의 전사가 보도되었다. 이에 아버지 요네키치米吉는 “전장에 간 자식의 무사를 기도한 것이 아니라,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했습니다”라고 말해 이웃을 감동시키고, 아들 이나바 키요시稲葉清의 전사 비보를 받고도 “장하다. 잘 싸워 주었다”라며 기요시의 전공戦功을 기뻐했다고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다음날인 1937년 10월 22일에도 《도쿄아사히신문》에는 “내가 전사하면 축하해 주게……라고 설렌 마음으로 출정했던 시마다군”의 전사가 보도되며, 죽으면 불당에서 경사 때 올리는 팥밥赤飯을 차려 축하해 달라던 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미디어 기사는 ‘전쟁문화’로서의 ‘전사’가 황군과 후방의 가족, 여성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미디어 담론이 신문 지면에 계속 유통되면서 ‘전사’라는 죽음을 열망하게 만들었다. ‘전사’는 슬픔과 담담함을 넘어 기쁨의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용맹과감한 성전勇猛果敢聖戰”이라는 중일전쟁에서 ‘전사’는 ‘개인’의 명예가 아닌, 가족의 명예, 부대의 명예, 일본의 명예로서 추모된다. “조국을 위해서”, “천황폐하를 위해서”, “일본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기쁘게 목숨을 바치”는 “전사로 천황폐하의 은혜를 갚는”(《도쿄아사히신문》 1937. 11. 26.) ‘전쟁문화’를 형성했다.
3. 중일전쟁기의 ‘전쟁미망인’을 둘러싼 담론
‘미망인’은 한자 ‘未亡人’으로,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망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기보다는 근대에 이르러 일반화된 측면이 강하고, 러일전쟁 시기부터 압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지요다 아키코千代田明子는 ‘미망인’이 부유층의 과부 호칭에서 출발하여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고위 군인의 전쟁과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음8을 지적하고 있다.
본래 ‘미망인’이라는 말은 남편의 사후에도 살아서 치욕을 당한다는 자기 비하의 자칭,9 즉 자괴어였다고 할 수 있다. 가노 마사나오鹿野政直도 과부의 겸칭謙称, 즉 자칭이었던 ‘미망인’이 러일전쟁 때에 타칭으로 정착되고, ‘과부’에서 한층 떠받드는 어감과 함께 규제력이나 감시를 강화하려는 사회적인 의식10이 작용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미망인’은 근대의 가부장적 사회시스템 안에서 남편, 남성의 부속물로서 기혼 여성의 위치를 잘 드러내고 있다. 자칭 자기 비하에서 타칭 타인 존칭으로 격상되면서, ‘치욕’의 호칭일 수 있으나 역설적으로 고위 군인 미망인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미망인’의 담론은 1923년 미야케 야스코三宅やす子의 「미망인론未亡人論」에서 일반 과부로까지 그 사용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요시야 노부코의 소설 「미망인」에서도 7명의 미망인 등장(사실은 6명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과부라는 말도 혼재되어 사용되지만, ‘미망인’이라는 용어는 군인 미망인뿐만 아니라 널리 일반인의 과부에까지 적용되었다. 야스코가 살았던 1920년대는 신여성들의 등장과 함께 젊은 남녀의 ‘연애의 신성’을 외치는 시대였다. 하지만 유독 미망인에게만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구시대적 사상으로 기혼여성을 옭아매고 있었다.
야스코는 미망인의 재혼 가부에 대해 여학교의 교육방침인 ‘현모양처’에 의거, 미망인에게도 재혼으로 가정을 꾸미게 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한다. 또한 남편이 죽은 다음에야 무슨 정조를 지킬 의미가 있는지에 강한 의문을 나타냈다.
그는 재혼장려론과 부정론 중 어느 것이 옳다기보다는 미망인이 자유롭게 결정해야 할 문제로 가부론을 뛰어넘고 있다. 이는 미망인의 재혼 문제를 본인이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는 ‘자기결정권’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시 획기적이었던 신여성 담론의 차용이며, 기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깨는 진일보한 생각이었다.
야스코의 『미망인론』11으로 진일보했던 ‘미망인’ 담론은 중일전쟁기를 맞이하면서 시대적 역행을 보인다. 1930년대 초에 권장되었던 ‘미망인’의 재혼은 1937년부터 전사戰死가 늘면서 전쟁미망인의 증가가 뚜렷해지자 미망인 문제와 재혼 문제에 이상 기류가 나타난다. 중일전쟁기 적극적인 전쟁 협력 작가이자 대중작가였던 기쿠치 간菊池寛은 젊은 미망인에게 독신을 강요하는 것은 잔혹하다며 미망인의 재혼을 적극 권장하였다. 하지만 2년 후인 1939년에는 ‘전사자의 미망인은 아무리 젊어도 중일전쟁 중에는 절대로 재혼해서는 안 된다’라는 재혼부정론자12가 되었다. 또한 “남편이 국가를 위해 희생되었기 때문에 미망인 자신도 희생해서 훌륭하게 아이들遺児을 키워야한다”(『주부의 벗主婦之友』, 1939. 10.)는 논조는 남편의 희생과 미망인의 희생을 강조하며 미망인에게 이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열녀貞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부녀신문婦女新聞》, 1938. 7. 17.)는 재혼부정론이 현저해지면서 ‘재혼’이라는 단어조차 금기시되었던 상황들도 보인다. 이러한 담론들의 구성이 청일전쟁, 러일전쟁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재혼부정론은 전쟁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30년대 말부터 ‘미망인’의 풍기문란이 증가하자, 전선前線에 있는 남편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여성단체들이 매월 한 번씩 방문하는 등13 미망인들에 대한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헌병과 경관은 출정군인의 처와 미망인의 동향을 국방부인회에게 분담14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중일전쟁 중에 있는 장병들의 사기 저하를 고려한 것이다. 당시 육군정보부가 소설이나 기사의 내용까지 간섭하는 등, 언론통제도 강화15되어갔다. 미망인의 재혼 가부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기제로 부상하고, 이러한 기제들이 미망인의 ‘성’을 관리하면서 여성의 내셔널리즘을 강요하는 규범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미망인’들의 몸이 남성의 재산 관리에서 국가의 재산 관리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망인의 재혼부정론과 맞물려, 1938년 10월, ‘전몰戦歿군인 유족’에 대한 원호援護에 만전을 기한다는 방침 아래, 미망인들에 대한 직업보장책 등이 강구되고 자녀들과의 생활을 위한 대책들이 나온다. 미망인의 경제적 지원책이 자립과 연동되며 재혼불가론을 지탱했다고 할 수 있다.
4. 요시야 노부코의 「미망인」에 나타난 기대 담론
1939년 7월 「미망인」을 『주부의 벗』에 연재한 요시야 노부코는 일찍이 「꽃이야기花物語」(1916∼1926)를 발표, 다이쇼 시대부터 소녀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작가이다. 『꽃이야기』는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소녀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 후 「여성의 우정」(1934), 「여교실」(1937), 「미망인」(1939) 등의 소설을 신문, 여성잡지에 연재해 십 대 소녀 독자에서 성장한 이삼십 대 여성 독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대중작가로서 최고봉에 서게 된다.
이러한 인기 절정기에 있던 요시야는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주부의 벗』 황군위문특파원이자, 전장 시찰 여류작가 제1호로 북중국 현지를 방문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938년에는 ‘펜부대 22명’ 중 여성으로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와 함께 전쟁에 협력한다. 요시야 문학은 군 당국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장 시찰 경험을 바탕으로 쓴 보고문학報告文学과 소설 연재 등으로 전쟁협력적, 내셔널리즘적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당시 시대적인 문제로 부상한 ‘전쟁미망인’, ‘미망인’을 다룬 요시야의 「미망인」에 주목하여 미망인에 대한 기대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1939년 7월부터 『주부의 벗』(1939. 7.∼1940. 12.)에는 요시야의 「미망인」이 연재된다. 요시야는 소설 연재 첫인사에서 “작품은 간단 솔직한 제목인 미망인으로, 성격, 감정, 처지, 고민이 천차만별인 7명의 미망인이 주인공”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망인」의 광고에는 ‘시대 과제 미망인 군상’, ‘군국의 문제를 푸는 대소설’로 소개되며, 미망인 문제의 심각성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그 후 15년간에 걸친 전쟁의 전사자는 310만 명, 그리고 1947년 통계에 의하면 미망인은 188만 4,000명16에 이른다. 당시 이삼십 대의 미망인들이 73퍼센트에 달했는데, 이는 출정 직전 서둘러 결혼시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전쟁미망인들은 ‘영령의 처英霊の妻’, ‘야스쿠니의 처靖国の妻’로 불렸다.
요시야의 「미망인」에는 미망인 대부분이 모자 세대를 이루고 있는 6명의 젊은 이삼십 대 여성들이 등장한다.
미망인 교코京子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교코를 잊지 못하는 노총각 가쓰가와勝川를 만나게 되고 적극적으로 구혼해오자 여자로서의 행복을 꿈꾼다. 하지만 엄마 교코의 재혼에 반항하여 아들 시즈오静雄가 중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가출한 뒤 경찰서에서 데려오면서 어머니로서의 삶을 결심하고 재혼을 포기한다. 미망인 마쓰코도 재혼하면서 거두지 못한 아들이 소년감화원에서 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아버지를 잃은 미망인이 자식을 거두지 않으면, 그 자식은 결국 불량아, 불량 청소년이 될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스키야키점을 경영하는 미망인 지에는 이러한 상황을 전해 듣고 그 아들을 키우고 싶다고 간청한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아이라도 떠맡아 키워서 여자로 태어난 보람으로 어머니로서의 감정도 맛보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망인」, 1940. 7.)
지에는 자식이 없는 미망인이다. 동료 교코가 아들 때문에 재혼을 포기하는 모습에서 ‘모성의 위대함’과 ‘어머니의 강함’을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다. 하지만 지에는 ‘모성’을 맛보고 싶은 마음에 마쓰코의 아들을 떠맡게 된다. 엄마로서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스키야키점도 다른 미망인에게 맡기고 그만둔다. 그뿐만 아니라 미망인 교코의 세 자녀와 파출부 일을 했던 미망인 오후지의 딸 양육까지 떠맡으며 스키야키점의 요염한 마담에서 어머니로 거듭나고 있다. ‘모성’이란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에서 우러나는 감정으로, 자식이 없는 여성도 모성의 소유자로 거듭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이 모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는 지에와 교코, 그리고 오후지와 5명 아이들의 공동생활이 시작된다. 지에가 5명의 자식들을 돌보고, 교코와 오후지는 지에의 스키야키점을 대중음식점으로 변경해 생활전선에서 경제적인 생계를 책임지는 분업을 선택한다. 남성들을 배제한 여성들만의 공동생활을 형성하며 재혼부정론에 힘을 싣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연재인 1940년 12월 「미망인」에서는 6명의 젊은 미망인이 인생의 가시밭길을 아름다운 우애와 강한 모성애로 개척해간다며, 소설이 제기하는 ‘미망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대문제에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다.
또 다른 등장인물로는 ‘나쓰요夏代’와 ‘유키코雪子’가 있다. 나쓰요와 유키코는 검은 기모노를 입은 미모와 지성, 인품을 가진 고귀한 ‘전쟁미망인’으로 등장한다. 나쓰요와 마찬가지로 유키코의 남편은 해군비행장교로 비행 연습 도중 동료 아카시明石 중위의 비행기와 부딪쳐 추락, 순직했다. 유키코는 이러한 아카시 중위를 원망하지 않고 ‘국가의 부름을 받은 운명의 해군장교 부인’, 미망인답게 눈물을 감추고 의연하게 슬픔을 이겨낸다. 나쓰요와 유키코는 ‘해군장교의 미망인’으로 수 년 동안 ‘정절’을 지키고 자식을 키우는 데 전념하는 전쟁 미망인으로 표상되고 있다. 두 사람은 “명예로운 해군비행장교의 미망인”(「미망인」, 1940. 4.)으로 스완양장점을 경영한다. ‘스완’, 즉 ‘백조’가 일반적으로 일부일처제의 상징이자 기품 있는 우아함의 대명사로 인식되듯, 이러한 이미지를 표상하는 군인 미망인, 전쟁 미망인으로 나쓰요, 유키코를 설정했다.
당시의 『주부의 벗』(1938. 5.)에 실린 「아버지는 전사했다. 유훈에 빛나는 하라다 중사 미망인을 방문하다」에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에 충성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전사한 군인의 유족 이야기가 있다. 전쟁 미망인에게 ‘자식을 키우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성’, 그리고 ‘미망인 자신을 지탱하게 하는 삶의 보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군인 미망인, 전쟁 미망인에게 연금은 남편 생명의 보상17이자 자녀들을 대를 이어 훌륭한 군인으로 키워내는 족쇄로 작용하며 재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전쟁 미망인은 ‘남편의 전사를 명예로 받아들여, 눈물을 흘리지 않고 남편의 유지를 자녀들에게 위탁18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즉, 대를 이어 충성스러운 자녀를 키워내는 것은 전쟁 미망인, 해군장교 미망인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1939년 11월 「미망인」의 표지에 “강해져라 미망인! 그리고 우아하게 인내하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1940년 1월 「미망인」에도 “인내하는 자는 강하다”는 문구가 보인다. 「미망인」에 등장하는 미망인은 재혼과는 거리를 두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강인하면서 ‘우아한 미망인’을 양성하는 데 한몫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소설 「미망인」 앞으로 보낸 독자 편지에는 자신도 이번 중일전쟁으로 남편을 조국에 바친 미망인임을 밝히며, 나쓰요와 유키코가 최후까지 분발해 줄 것을 작가에게 부탁19하고 있다. 「미망인」에서 전쟁 미망인 나쓰요와 유키코의 삶은 재혼한 나쓰요가 갈등하는 모습을 그리며, 미망인 유키코의 삶이 더욱 가치 있는 삶으로 투영되는 측면이 있다. 나쓰요의 재혼으로 유키코 혼자 스완양장점을 경영하게 된다. 요시야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전쟁 미망인의 담론과 연계하여 유키코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유키코는 양장점이 쉬는 휴일, 딸과 놀아주라며 파출부 오후지를 일찍 집으로 돌려보낸다. 오후지는 유키코의 배려에 진심에서 우러난 공경과 숭고함을 느낀다. 한편, 유키코는 나쓰요의 재혼을 염두에 두고 친동생처럼 지낸 요쿠와 따로 살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아들 히로시博에게 전한다. 여섯 살 난 아들 히로시는 요쿠와 떨어지기 싫다면서도 엄마만 있으면 괜찮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히로시가 아버지처럼 해군비행장교가 되어 전투기를 타기 위해 에다지마의 해군병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아버지 없는 아들의 어른스러움에 눈가가 촉촉해진다. 유키코도 히로시가 에다지마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볼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서 지켜보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당시 전쟁미망인의 기대 담론을 가장 잘 체현한 인물이 유키코라 할 수 있다.
나쓰요의 재혼으로 스완양장점을 혼자 경영하게 된 유키코는 재봉을 배우는 2명의 제자를 들이고 이들과 천인침을 만들 생각을 한다. 이를 출정하는 전사한 남편의 친구, 즉 아카시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천인침은 당시 후방 여성들이 출정하는 병사들을 위해 무운을 기원하는 표상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여성들에게 애국심과 단결을 호소하고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기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미망인 유키코의 역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는 출정하는 아카시와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처럼 여성이 일을 시작해도 동료 한 사람이 빠지면 후에 제대로 되지 않는 등의 말이 나오지 않도록 지금부터 후에 (미망인)되는, 저 같은 미망인의 자활自活과 용기의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一生懸命 하고 있습니다.” (중략)
“부디 이후에도 착실히 해서 요번 사변으로 아마 무수하게 생길 미망인들의 선배로서 그 지침이 되어 주십시오. 저도 출전을 앞두고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未亡人」, 1940. 9.)
유키코가 양재를 가르침으로써 그녀들의 ‘자활’ ‘자립’을 도울 뿐 아니라, 잠재적인 미래의 전쟁 미망인이 될 젊은 여성들의 이상적인 ‘미망인상’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요시야의 인기와 영향력은 여성 독자들에게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망인」 연재 당시에도 ‘행복한 미망인을 그려달라’는 미망인 독자의 엽서가 소개되기도 했다. 1941년 160만 부를 기록하면서 『주부의 벗』은 여성 잡지 최고봉에 설 수 있었다. 그 비결은 ‘통속소설, 장편소설 연재’의 인기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반 가정의 여성층이 문학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20에 기여했다.
1940년 3월에는 「미망인」 연재 후 끝부분에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주부의 벗』사 사고社告가 게재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열성적인 애독자’의 성원으로 매진에 매진을 거듭하고, 최근 애독자 폭증激増으로 발매 당일 일찍 매진되는 서점이 속출하고 있음을 알리며, 용지 부족으로 증쇄가 불가하니 수 일 전 가까운 서점에 주문 신청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1940년 12월 「미망인」 최종회에서는 단행본 『미망인』이 곧 발매될 것을 광고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당시 「미망인」의 인기를 유추해볼 수 있다.
요시야 문학 「미망인」은 6명의 미망인들을 등장시켜 군국의 시대, 전쟁의 시대에 현재와 미래의 미망인들에 대한 기대 담론을 형성하고, 일본에서의 미망인 담론은 모두 전쟁 미망인 담론을 규범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5. 문예위문과 일본여성문학자의 ‘문학보국’(전쟁협력)
1933년 여성문화, 문학 관련 단체로 결성된 ‘가가야쿠회輝ク会’가 1939년 ‘가가야쿠부대’로 전환됐다. ‘가가야쿠부대’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종군 문예위문과 위문문학을 탄생시켰다. 가가야쿠부대는 하세가와 시구레長谷川時雨를 비롯한 여성문학자들이 주축이 되고 거기에 문화 종사자들이 더해지면서 문화, 예술 관련 단체로 ‘위문’을 강화했다.
「가가야쿠부대에 대하여」21에서는 가가야쿠부대의 활동을 지성 부인층知性婦人層의 국책 참가라고 치켜세우고, 동아건설의 대이상을 위한 여성의 역할로 중시한다. 이는 가가야쿠부대의 활동을 계기로 국책 ‘문학보국’에 여성들도 진출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찍이 청일전쟁부터 여성이 군인과 유족에 대한 위문을 담당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문학자들은 육해군의 원조 아래 여류전선 위문 문집 시리즈 『가가야쿠 부대輝ク部隊』(1940), 『바다의 후방海の銃後)』(1940), 『바다의 용사 위문 문집海の勇士慰問文集』(1941)을 연이어 발간한다. 이는 남성, 남성문학자와는 달리 여성, 여성문학자에게 ‘위문’ ‘위문문학’이라는 젠더적 역할이 주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가가야쿠 부대’라는 명칭은 지금이 ‘전시’임을 자각하는 동시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병사된 마음”(『가가아쿠』 1939. 4.)으로 나라를 위해 진력하기 위함이다.
젊은 여성이여, 당신들이 남자로 태어났다면 전선에 설 나이이다. 후방에서도 산업에 사력을 다할 나이이다. 남자 머리 위에 올라갈 대각오大覚悟 그것이 여성에게 없어도 좋은가. 나라를 떠맡고 나라를 다지는 것이 여성이라고 확실히 말하도록 하고 싶다. (시구레, 「일년을 돌이켜 내일로一年を顧て明日へ」, 『가가야쿠』, 1940. 7.)
당시 가가야쿠 부대의 강연회 활동을 보면, 소비적, ‘유한적’(『가가야쿠』 1940. 9.)인 젊은 여성들을 개인적인 삶에서 공적인 삶으로 끌어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공적인 삶에서 남성의 부재와 여권 신장이 연동되어 남성을 능가하는 후방을 지키는 여성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육군보급부 과장 다이라데 히데오平出英夫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말을 빌어 “나라의 흥함은 여성에 의한다. 특히 어머니에 의한다”며 여성의 조국 관념 강화(『가가야쿠』 1940. 8.)를 역설한다. 나아가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16세에서 70세까지의 남녀가 바로 동원되도록 각 지방 단위에 이르기까지 조직되어 있다(『가가야쿠』 1939. 9.)고도 말한다. 육군성 정보부 소령 아키야마 구니오秋山邦雄도 ‘일본여성이여! 군인이 되어라, 군대를 편성하라’(『가가야쿠』 1939. 8.)고 말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여성들의 모임에도 ‘부대’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유치원의 어린이들도 ‘토끼부대’라고 불리게 된다.
다음은 그보다 먼저 일어난 1931년 만주사변의 총알을 ‘전 만주 여성의 해방’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931년 9월 18일 즉, 만주사변이 발발한 한밤중에 봉천 시민의 단잠을 깨운 총성은 어느 의미에서 전 만주여성婦人에게 해방의 탄환이었습니다.
(이시카와 시노부, 「펑텐젠린학원의 탄생과 설립에 대해서奉天善隣学院の誕生と生立ちに付て」, 『가가야쿠』 1939. 5.)
그뿐만 아니라 만주에 있는 ‘일본 여성의 해방’ 즉 ‘일본 여성 계몽’의 신호탄으로도 강조한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 여성이 가정에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만주라는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는 일본에서 온 교풍회의 위문이 여성을 ‘가정’에서 해방하는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일본 여성이 만주 여성을 해방한다는 명목하에 식민지, 점령지의 여성, 아이들을 교육, 지배하는 선결과제로서 ‘친선’ ‘선린’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해방’은 먼저 폐쇄적인 일본 여성의 해방이고, 나아가 해방된 일본 여성에 의한 미개한 만주 여성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띠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수필가이자 등산가 구로다 요네코黒田米子도 친선, 선린을 통해 국경을 넘어, 민족을 넘어 일본, 만주, 중국의 삼국 여성 동지의 힘으로 ‘동아건설’의 대업을 이루자고 말한다.
중국 여성이여. 부디 어머니이고 여성인 까닭에 서로 마음의 위로로써 굳게 결합하여 함께 자손의 행복을 위해 동아건설을 완수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구로다 요네코, 「중국 여성에게 드리는 글中国の女性に贈る詞」, 『가가야쿠』 1941. 6.)
『가가야쿠』에서 보이는 문화일본의 여성 지도하에 대륙건설의 제일보가 내딛어진다(『가가야쿠』, 1940. 7.)는 담론 구성은, 남성에 의한 ‘군사적 승리’로 점령지, 식민지를 획득하고 그 뒤에 여성에 의한 ‘문화공작’으로 신흥대륙을 건설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만주·중국의 친선과 예술, 문화 교환(『가가야쿠』, 1939. 12.)을 통한 일본 정신, 일본문화에 입각한 대륙지배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공작’을 통한 대륙지배에 가가야쿠부대가 신문화의 모체(『가가야쿠』, 1939. 7.)로서 그 사명을 떠맡게 된다.
『가가야쿠』에는 중일전쟁부터 「위문호」 특집을 비롯하여 「위문 보고」, 「위문품 보고」, 「위문품 모집」 등이 매달 실렸다. 가가야쿠부대로 전환된 1939년부터는 「부상병 가족 위문회」, 「부상전사 위안회」, 「중중국 위문행」 등이 주를 이룬다. 가가야쿠부대의 문학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가지고 어떠한 위문을 할 것인가라는, 가가야쿠부대에 걸맞은 위안, 위문에 대해 고심한다. 그 일환으로 상이군인과 유가족의 위문 그리고 전장 현지 위문에 집중하게 된다. 한편, 『가가야쿠부대』에 이은 『바다의 총후』, 『바다의 용사 위문 문집』 등 일련의 위문문집을 전장의 장병들에게 보낸다.
다음은 한 해군 장병이 『바다의 총후』를 읽고 보낸 글이다.
가가야쿠부대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바다의 총후海の銃後』 위문 문집(제1집)을 더운 7월의 오늘 읽었습니다. (중략) 여기에 오고 나서 잡지나 소설을 받았습니다만 바다의 총후 만큼 감격 시키는 것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 붓의 흔적이 나를 도쿄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중략) 문집을 읽고 있으니 집에 돌아온 듯한, 여동생들을 데리고 긴자銀座를 산책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중략) 문집을 읽고 있자니 가족이 소상히 여러 가지를 알려주는 글처럼 느껴집니다. 제2집, 제3집은 이미 나왔을까요? 아직일까요? 만약 완성되었다면 특히 저에게 직송해 주시면 더한 행복이 없겠습니다.
(고이즈미 토라조우, 「객지 통신各地通信」, 『가가야쿠』 1940. 8.)
육해군위안문집은 가가야쿠부대의 대수확으로 예술부 분들에게 부대 일동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중략) 휼병부恤兵部의 후의厚意에 의한 출판은 국민 모두의 협력으로 된 문집으로 꾸며져 여류문단의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위문 문집·관극 감사·연말 사업慰問文集·観劇御礼·歳末事業」, 『가가야쿠』, 1939. 12.)
위의 인용은 위문문집이 전선의 장병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알 수 있는 글이다. 위문문집이 타지의 전장이 아닌 집에 돌아온 듯 나의 고향 도쿄와 나의 가족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군중위 다카세 고로高瀬五郎가 이 위문집이 전선과 후방을 결속시킴과 동시에 전선 장병의 ‘마음의 양식’이라며 장병들에게 읽히겠다22고 말한다. 이처럼 가가야쿠부대의 위문문학은 ‘총후’를 떠올리게 하고 남성들의 전쟁의식을 고취하며 끝 모르는 전쟁에 그 추진력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독서를 통한 교정’ ‘위문집을 통한 마음의 양식’과 ‘위안을 얻는다’는 당시의 담론은 강력한 문학의 영향력을 가늠하게 한다.
6. 나오며
전범 국가 일본의 전쟁과 문학, 그리고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여성들은 전쟁 출정식의 치어리더였으며, 문학자는 전쟁의 추진력을 제공하는 확성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할에 미디어는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많은 젊은 여성 독자층을 확보한 요시야 노부코의 문학이 독자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소설의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 내면화해버리거나 내면화되는 위험성으로 몰고 간다는 점에서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요시야는 “소설에서 그린 미망인의 삶의 과정이 미망인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시대에 다소나마 하나의 암시에 도움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작가로서 기쁨”(『주부의 벗』, 1939. 7.)이라고 말한다. 소설 「미망인」을 통해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한 미망인에 대한 담론을 쏟아내며 ‘희생 시스템’ 안에 가두는 행위는 대중적 인기 작가로서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전쟁협력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희생 시스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여성들을 인내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지탱하는 지치지 않는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요시야의 문학은 전쟁 책임과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성과 여성문학자에게 ‘위안’ ‘위문’과 ‘위문문학’이라는 젠더적 역할이 주어졌음도 살펴볼 수 있었다. 문학이 ‘마음의 양식’이자 ‘위안’이라는 역할에서 볼 때, 문학과 문학자, 나아가 이를 담는 미디어의 역할은 실로 중요하다.
일본은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패전의 기억이 없다. 왜냐하면 일본은 한 번도 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에는 승전보만 울리는 전쟁 보도가 한몫했다. 더 나아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서양 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 성전聖戦이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따른 천황의 성단聖断이 패전 아닌, 종전으로 이끌었다는 일본인들의 정서가 존재했다. 더 나아가 인류의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일본의 인식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범 국가에서 피해 국가로 변용되었다. 이러한 정서는 전후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석
- 「러 “마리우폴 점령”…피란민 태운 버스 4대 탈출」, 〈아침&월드〉(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2056345)
- 히라이 가즈코, 『일본 점령과 젠더(日本占領とジェンダー)』, 유시샤, 2015, 3쪽.
- 와카쿠와 미도리, 『전쟁이 만들어낸 여성상(戦争がつくる女性像)』, 치쿠마학예문고, 2000, 93쪽.
- 시마카게 지카이, 『전쟁과 점령(戦争と貞操)』, 다이도쿄출판사, 1937, 36~37쪽.
- 오카노 유키에, 「15년 전쟁과 여성(十五年戦争と女性)」, 『여성들의 전쟁책임(女たちの戦争責任)』, 도쿄도출판, 2004, 24~25쪽.
- 시마카게 지카이, 앞의 책, 36~37쪽.
- 한도 가즈토시, 『그 전쟁과 일본인(あの戦争と日本人)』, 분슌문고, 2013, 243쪽.
- 지요다 아키코, 『전쟁 미망인의 세계(戦争未亡人の世界)』, 도스이서방, 2010, 5쪽.
- 가노 미요코, 「‘귀환병’과 ‘미망인’이 있는 풍경(〈復員兵〉と〈未亡人〉のいる風景)」, 『전후 일본 스터디 ① 40·50년대(戦後日本スタディ─ズ①40・50年代)』, 기노쿠니야서점, 2009, 86쪽.
- 가노 마사나오, 「전쟁 미망인(戦争未亡人)」, 『아사히저널(朝日ジャーナル)』, 아사히신문사, 1983. 5. 27, 32쪽.
- 미야케 야스코, 『미망인론』, 문화생활연구회, 1923, 1~53쪽 참조.
- 가와구치 에미코, 「요시야 노부코의 「미망인」(吉屋信子の「未亡人」)』」, 『일본여자대학 인간사회연구과 논문집(日本女子大学 人間社会研究科紀要)』 제9호, 니혼조시대학대학원 인간사회연구과, 2003. 3,, 124쪽.
- 헨미 마사아키, 「전몰자 과부 특별교원 양성소 설립(戦歿者寡婦特別教員養成所の設立)」, 『홋카이도대학 교육학부 논문집(北海道大学教育学部紀要)』, 홋카이도대학교육학부, 2000, 300~301쪽.
- 가노 마사나오, 앞의 책, 34쪽.
- 가와구치 에미코, 『전쟁 미망인(戦争未亡人)』, 도메스출판, 2003, 124쪽.
- 위의 책, 8쪽.
- 같은 책, 31쪽.
- 같은 책, 24쪽.
- 하루코, 「요시야 노부코에게, 열성 독자가(吉屋信子に、一読者より)」, 『주부의 벗』, 슈후노도모사, 1939. 9, 71쪽.
- 와타나베 스미코, 「전쟁과 여성(戦争と女性)」, 『다이토분카대학 논문집(大東文化大学紀要)』제38호 다이토분카대학, 2000, 137쪽.
- 시구레, 「가가야쿠의 임무(輝クのこと)」, 227쪽. (『가가야쿠』의 인용은 하세가와 시구레 외, 『가가야쿠』, 후지출판, 1989의 복각판을 활용함. 이하 인용은 『가가야쿠』 연월만을 기입한다).
- 다카세 고로, 「서(序)」, 『바다의 총후 가가야쿠 부대 위문문집(海の銃後 輝ク部隊慰問文集)』 고아니혼사,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