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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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기본적으로 기록이다. 인류가 오랜 세월 지구에서 살아오며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객관적인 문자 기록’,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에 의해 기록에서 제외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가 되지 못하고 ‘누락된 사람들’이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최은영은 그런 ‘누락된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최은영의 『밝은 밤』은 역사에서 ‘누락된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기록이다. 이 새로운 기록은 문자가 아닌 ‘목소리’에 기반한다.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소설이 ‘소설-코러스’라는 장르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르는 특별하지 않은 개인, 우리 주변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 체험하고 목격한 사건에 대한 목소리와 메모, 편지 등을 날것 그대로 사용한다. 이렇게 모인 개인의 증언들은 “목격자 혹은 체험자 개개인의 목소리가 모인 합창으로서의 콜라주”1가 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또한 ‘목소리 소설’의 형식을 따른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독소 전쟁인데, 알렉시예비치가 모은 체험과 목격의 목소리들의 주인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자다.
전쟁은 사실, 크고 작은 전쟁들에서부터 널리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전쟁들까지, 이미 수천 번도 더 넘게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2
약 5년 동안 지속된 독소 전쟁에서 전선에 나가 무기를 들고 독일군과 싸운 것은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성인뿐만 아니라 십 대에 불과한 어린 소녀들까지 전쟁에 참여했다. 군의관, 세탁병, 조리병 등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보직은 물론이고, 소총수, 저격수, 포병, 공병, 전차병, 공군 전투기 조종사와 같이 최전선에 서서 적과 마주하는 분야에서도 여자들이 활약했다. 알렉시예비치가 기록한 목소리들은 독소 전쟁에서 여자들이 남자들 못지않게 활약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 역사로 기록된 것은 ‘남자의 목소리’다. 전쟁의 역사로 가득한 전쟁기념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남자들의 영웅적인 활약과 희생과 영광, 그들의 당당하고 멋진 모습이라는 점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전쟁박물관에서 여자들은 “전장의 참상에 몸부림치는 어머니들, 퀭한 얼굴과 성마른 표정으로 폐허 위에 주저앉은 여성들처럼 철저히 전쟁의 피해자로서 재현”3될 뿐이다. 수없이 많은 여자가 참전했으므로,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묻기만 했어도 그들의 체험과 목격담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누구도 묻지 않았다. 여자들은 역사에서 누락되었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4
역사에서 누락된 여자들의 체험과 목격담 들 속에서 알렉시예비치가 발견한 것은 여자들의 시선으로 해석된 역사, ‘여자의 목소리’가 말하는 역사다. ‘남자의 목소리’가 국가와 이념에 방점을 둔 승리와 전공, 영광을 말한다면 ‘여자의 목소리’는 죽음과 비극,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람을 처음 죽였을 때의 감각, 적과 육탄전을 벌이던 동료가 죽는 순간, 붕대로 만든 웨딩드레스, 죽어가는 독일군을 보고 느꼈던 연민과 같은 것들. 그들의 기억은 ‘남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기존의 역사와 다르게 지극히 인간적이다. 여자들에게 전쟁 또한 삶의 일부였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다 보면 느껴지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 아닌 너무 다른 두 역사,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다.
이름 없는, 구체적인 형상도 없는, 엄마의 할머니로만 존재했던 사람이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와 금방이라도 내 앞에 나타날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의 증조할머니, 이정선.5
최은영의 『밝은 밤』의 화자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 후 새 직장을 구해 희령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수십 년 만에 할머니 영옥을 만난 지연은 영옥과 교류하며 “엄마의 할머니로만 존재했던 사람”(49쪽), 증조할머니 정선에 대해 알게 된다. 사실상 전혀 모르는 남과 다름없던 정선은 영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금방이라도 내 앞에 나타날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49쪽)온다. 목소리와 편지로 다른 이의 삶과 만나는 『밝은 밤』의 구조는 ‘목소리 소설’의 형식을 연상케 한다.
정선에서 시작해 영옥과 미선을 거쳐 지연에 이르는 이 4대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혈연으로 묶인 이들의 이야기를 지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특히 증조할머니 정선과 할머니 영옥이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지연에게 낯설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이러한 지연의 무지는 체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60쪽)
할머니는 배려하는 남자, 아내와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지지 않는 남자를 자신의 배우자로 상상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대신 그 안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체념하고 나니 그런 삶도 견딜 만했다. (220쪽)
다시 한번 역사 이야기를 해야겠다. 역사로 기록된 것은 ‘남자의 목소리’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주로 논하는 것은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이나 한국전쟁의 승리와 전쟁영웅 같은 것들이다. 그 중 ‘여성의 목소리’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일례로, 위안부 문제는 해방 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공론화가 이루어졌다.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도 개개인의 목소리가 꾸준히 누락되어온 것이다.
그녀들의 체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선은 위안부로 끌려갈 뻔한 위기를 남편의 도움으로 모면한다. 정선의 남편, 즉 지연의 증조부가 정선을 구한 이유에는 사랑도 있지만, 그가 자라면서 들어온 성경 속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더 큰 지분을 차지한다. 증조부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다는 영웅심리에 심취해 있었다. 증조부는 자신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원한다. 그가 원하는 보답은 정선의 순종이며, 가장으로서의 권위로 나타난다. 지연의 할머니, 영옥의 경우도 비슷하다. 영옥의 남편 남선은 영옥의 돈을 앗아가 지인에게 술을 사주기 바쁜 사람이었다. 영옥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던 남선의 관심사는 정치와 노동운동이었다. 그는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떠들어댔다. 성경 속 희생과 사랑, 정치와 노동자의 권리는 이념과 사상으로 만들어진 ‘남자의 목소리’다. ‘남자의 목소리’ 아래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체념하고 “그런 삶도 견딜 만했다”(220쪽)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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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역사라는 것이 인류가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객관적인 문자 기록이라면,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고 누락된 개개인의 목소리를 다시금 꺼내어 기록하는 알렉시예비치와 최은영의 작업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물며 객관적인 사실이 중요한 역사에서 그들의 글 속에 등장하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은 진실성을 확보하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의문들은 결국 그들이 주목하는 개개인에게 증언의 자격이 있냐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해답은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6
증언이 공백을 포함하고 있고, 그러한 공백이 증언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하여 생존자들이 증언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 곧 분명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에 주석을 다는 일은 이 공백을 심문하는 일 또는 차라리 그것을 들으려고 애쓰는 일을 뜻했다.7
아감벤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공백이 존재하며, 그 때문에 증인과 증언의 신뢰성에 의문이 생긴다고 말한다. 공백은 생존자들이 증언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생존자들은 공백에 대해 증언한다. 이러한 모순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이슬람교도’들이다. 인간이 분명하지만, 극한의 상황에 몰려 인간임을 포기한 이들,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들은 그들을 ‘이슬람교도’라고 불렀다. ‘이슬람교도’들은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전형적인 예이다. ‘이슬람교도’들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고, 동시에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경계에 서 있다. 다른 수용자들은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은 ‘이슬람교도’들을 외면했는데, 그 ‘이슬람교도’가 자신들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증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슬람교도’는 생존자의 목소리를 통해 증언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슬람교도’가 아닌, ‘맨 밑바닥’에 떨어져본 적 없는 생존자가 증언한 적이 없고 증언할 수도 없었던 이들을 대신해 증언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은 사라진 증언에 대한 증언이다. 때문에 “온전한 증인은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자다.”(125쪽)
그렇다면, 생존자들의 증언에는 계속해서 공백이 존재하고, 증언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감벤은 생존자 레비가 관찰한 ‘이슬람교도’ 후르비네크를 주목한다. 수용소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르비네크는 다른 이에게서 언어를 배운 적이 없다. 때문에 후르비네크가 내뱉는 단어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비언어다. 레비는 그런 후르비네크를 ‘증언’하는데, 아감벤은 그것을 두고 “그러한 무의미한 소리가, 다시 한번, 전혀 다른 이유에서 증언할 수 없는 무엇 또는 누구의 목소리가 되어야만 한다”(59쪽)고 말한다. 그로 인해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공백이 무너지고, “결국 후르비네크의 비언어가 레비의 언어가 됨으로써 증언으로 살아난다는 것이다.”8
올가 바실리예브나: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바이올린 소리가…… 그리고 바로 그날이 나한테는 전쟁이 끝난 날이었어요…… 갑자기 음악 소리라, 그건 기적이었죠……9
“아침에 독일군 추격대가 우리 마을에 불을 질렀어…… (중략) 그리고 율레치카 밑으로 아들만 넷이었는데, 다 어리고, 누나처럼 배가 고프다고 칭얼댔어. 그러자 나스차 아줌마가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지 뭐야. ‘우우우’ 괴상한 소리를 내고, 밤에 율레치카가 아줌마에게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어……10
아감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발견한 신뢰성의 문제, ‘이슬람교도’라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가 만들어낸 공백의 모순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자유로울까? 그 안에 실린 증언들이 “진짜 원본”(26쪽)이라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26쪽)일까.
올가 바실리예브나는 알렉시예비치가 만난 수많은 증언자 중 하나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말을 타고 길을 가던 도중 음악 소리를 듣는다. 그 음악 소리는 ‘기적’과 다름없었고, 바로 그날 그녀의 전쟁이 끝났다고 말한다. 음악 소리가 바이올린 연주 소리였다는 것, 말을 타고 있었다는 것,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까지. 그녀의 증언은 체험과 목격담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실린 증언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증언자들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들은 ‘남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 전쟁 속의 삶, 일상, 감정을 담고 있다. 그들이 직접 겪은 체험에 기반했기에 그 모든 증언은 진실이며 신뢰할 수 있다. 간혹 다른 이에게서 들은 증언을 다시 증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도 ‘이슬람교도’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 증언의 주인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가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경계에 존재하며 언어를 남기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증언을 남긴 이가 죽었더라도, 그의 입을 떠나 언어로 발화된 순간부터 공백의 모순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나스차 아줌마의 경우는 좀 달라 보인다. 그녀는 음식이 바닥나고, 굶주린 자식들을 챙겨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끝에 미쳐버렸다. 나스차 아줌마는 언어를 상실하고 ‘우우우’라는 해석 불가능한 비언어를 구사한다. 그녀의 모습은 후르비네크와 닮아있다. ‘우우우’라는 비언어가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빌려 언어가 되어 결국 증언된 것까지도.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255쪽)고 말하는 알렉시예비치도 한 명의 증언자다.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자기 귀로 들은 증언을 가공하지 않고 우리 앞에 내보이는 방식으로 증언한다. 그렇게 모인 증언들은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지만, 서로 녹아들면서, 그렇지만 사라지지도 않으며 비공식적인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든다.”11 이 ‘비공식적인 역사’는 ‘남자의 목소리’를 기록한 기존의 역사와 달리 ‘여자의 목소리’를 기록한 ‘누락된 사람들’의 역사다.
“그런데 할머니는 예전 일들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계세요?”
“우리 엄마……”
할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엄마가 이야기 많이 해줬어. 사람들이 흉을 볼 정도로. 왜 지나간 일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계속 자식에게 이야기하느냐고 면박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그랬어. 나도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니까. 너도 내가 했던 얘기 또 하면 말해줘야 한다.”12
『밝은 밤』에서 증언은 세 가지가 등장한다. 증조할머니 정선의 증언과 할머니 영옥의 증언 그리고 새비 아주머니의 증언이다. 정선의 증언은 기억의 형태로 남아 영옥을 통해 지연에게 전달되고 영옥은 지연에게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마지막으로 새비 아주머니의 증언은 편지의 형태로 지연 앞에 놓인다.
정선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정확한 시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소설의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2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떴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지연은 아주 어렸을 적에 정선과 만났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살았다. 정선은 그렇게 잊혀질 수 있었다. 그녀가 자기 딸, 영옥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정선은 주변 사람들이 면박을 줄 정도로 “같은 이야기를 계속”(49쪽)했다. 그 덕분에 영옥은 정선의 이야기를 지연이 놀랄 정도로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영옥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정선의 생애와 일상 그리고 감정은, 정선이 본인 목소리로 직접 기록한 삶에 대한 증언이다.
영옥은 정선의 증언을 대신 전달하는 매개체임과 동시에 본인의 삶을 자기 목소리로 증언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밝은 밤』에서 영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의 중심이 정선에서 영옥의 증언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버리는 정선의 심정, 당시의 정황을 들은 그대로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면, 영옥 본인이 정선의 증언에 등장한 후부터는 자기가 보았던 것, 인상 깊었던 일, 일상의 모습과 감정들을 자신의 시점으로 풀어간다. 이러한 이야기의 변화는 영옥이 신뢰할 수 있는 증언자라는 증거다.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는 매개체 역할에 충실하고, 직접 체험해 증언 가능한 사건에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선에서 시작해 영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증언 과정은 증언과 증언의 만남인 셈이며, 이러한 만남은 또 하나의 ‘누락된 사람들’의 역사가 된다.
세 가지 증언 중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새비 아주머니의 증언이다. 새비 아주머니의 삶은 정선과 영옥의 증언 속에서 간접적으로 증언되지만, 새비 아주머니가 직접 남긴 증언은 편지, 문자의 형태다. 편지는 새비 아주머니가 살아생전에 직접 작성했다. 그 내용도 본인이 체험하고 목격하고 있는 삶에 대한 것이니 진실성에 대한 의심은 무의미할 것이다. 작은 상자 속에 순서대로 정리되어있는 편지를 본 지연은 “무슨 박물관 같”(118쪽)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정선과 영옥에 의해 수시로 펼쳐져 새비 아주머니의 삶을 증언하던 편지가 작은 상자 안에만 머무른 지 오래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물관’ 비유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은 대개 기존의 역사, ‘남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비 아주머니의 편지를 ‘박물관’이 아닌 영옥이 보관하는 이유가 있다. 지연이 편지를 펼치자 그 이유는 분명해진다. 지연의 낭독으로 새비 아주머니의 편지는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누락된 사람들’의 방식인 목소리의 형태로 재현된다. 목소리가 된 새비 아주머니의 편지는 그녀의 삶과 감정을 증언한다. 문자와 목소리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미 몇 번이고 편지를 읽어본 영옥이 “혼자 눈으로 읽을 때랑은 다르”(125쪽)다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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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예비치와 최은영, 두 작가는 신뢰할 수 있는 증언자의 증언을 통해 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겪었음에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누락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명한다. 기존의 역사가 ‘남자의 목소리’로 기록되어 왔다는 문제의식도 두 작가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과정과 의식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두 작가이지만, 작업의 끝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네들 사이에 ‘더이상은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장막이 쳐졌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지 이해가 된다. 전쟁 후에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곱지 않은 시선과 악의에 찬 오해이리라. 그네들은 이미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그들은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미 치르고 돌아온 전쟁에 견줘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은 또다른 전쟁.13
알렉시예비치가 귀 기울이는 대상은 개인이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알렉시예비치를 따라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념이나 국가, 알렉시예비치에 의하면 ‘남자의 목소리’로 쓰이고 정의된 것들이다. 개인에 대한 집중이 역설적으로 거대한 것들을 상기시킨다.
이런 역설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평범한 개인이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뽑아낸 진짜 고통과 아픔을 들려준다”(19쪽)고 할지라도, 그 역시 소련이라는 국가에 살았고, 소련군의 일원으로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나갔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스탈린에 대한 믿음이나 전쟁이 개전했을 때 느꼈던 사명감과 애국심을 고백하는 증언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증언은 물론 ‘남자의 목소리’가 아닌 ‘여자의 목소리’로 쓰인 ‘감정의 역사’, ‘누락된 사람들’의 역사이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배제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개인에서 국가로의 확장은 필연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다 보면 ‘여자의 목소리’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한 번씩 끼어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봐야만 한다.
역설과 확장을 알렉시예비치가 의도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앞부분에는 “또 하나의 전쟁”(395쪽)에 대한 증언이 실리지 않았다. 앞부분에 실린 증언들은 전쟁터에서의 삶과 감정, 철저히 ‘여자의 목소리’로 해석한 전쟁에 집중한다. ‘또 하나의 전쟁’은 책의 뒷부분에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 그래요, 우리는 정말 어렵게 승리를 쟁취했소. 그래서 당신은 영웅적인 사례들을 써야만 하는 거요. 그리고 그런 예는 수백 가지도 넘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전쟁의 추악한 면만 보여주고 있소. 냄새나는 속옷만 보여줬단 말이오. 우리의 승리가 당신한테는 무섭고 끔찍한 것에 불과한 거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 진실들.
─ 당신은 삶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거리에 있다고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천박해요. 지나치게 세속적이오. 아니, 진실은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것이오. 우리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것!14
‘또 하나의 전쟁’은 전쟁 이후의 전쟁이다. 남자들은 참전하지 않는, 오직 여자들만의 전쟁. 전쟁에서 돌아온 여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뜻한 환송도, 감사 인사도 아니다. 그녀들은 ‘여자의 목소리’로 멸시와 비난을 증언한다. 전쟁터에서 남자 병사들과 문란하게 지냈으리라는 의심, 사람을 죽인 여자랑 결혼시킬 수 없다는 단호한 거절, 함께 춤을 추다가 참전 용사라는 사실을 알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 부상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지만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는 정부. 이것이 여자들이 겪은 ‘또 하나의 전쟁’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이 새로운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남자들은 ‘남자의 목소리’로 역사를 채운다. 전쟁영웅을 위한 카퍼레이드, 칭송과 감사의 목소리, 포상, 남자는 양다리가 잘렸어도 참전 용사라는 이유로 쉽게 가정을 꾸리고, 정부는 전쟁에서 활약한 남자들을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남자들이 자랑스럽게 군복을 입고 그 위에 훈장을 차고 다닐 때, 여자들은 훈장을 숨기고 군복을 벗는다. ‘여자의 목소리’는 침묵하고 ‘남자의 목소리’는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같은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누군가는 역사에 ‘영웅적인 사례’(48쪽)로 기록되고 누군가는 ‘전쟁의 추악한 면’(48쪽) 취급을 받으며 누락되는 괴리가 발생한다. ‘영웅적인 사례’와 ‘전쟁의 추악한 면’을 구분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검열관이다. 전쟁이 철저히 ‘남자의 목소리’로 기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알렉시예비치는 이런 괴리를 보여줌으로써 ‘여자의 목소리’를 조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이념을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여자의 목소리’를 누락시킨 국가에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여러 증언을 통해 ‘또 하나의 전쟁’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15
지연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기억한다는 것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하고 어차피 모든 인간이 기억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엄마, 정선의 증언을 생생히 기억하고 새비 아주머니의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영옥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 더 사는 거”(81쪽)라는 영옥의 말은 지연의 마음에 작은 파문조차 일으키지 못한다.
지연이 이토록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과거에 겪었던 상처 때문이다. 지연은 언니를 잃은 경험이 있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지연은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녀의 앞에 죽은 언니가 나타난다. 지연은 언니와 놀이터에서 놀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을 구경한다. 지연의 앞에 나타난 언니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환상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연이 “어떤 모순도 없다고 느꼈다”(170쪽)는 것이다. 언니와 함께한 시간은 지연에게 있어서 스스로 체험한 일이었고 진실이었다. 그러므로 엄마 미선에게 말한, ‘죽은 언니와 함께 논다’는 말은 증언이다. 지연의 체험, 증언은 부정당한다. 지연은 자신의 증언을 스스로 부정하고, 슬픈 표정을 한 언니를 밀어내야만 했다. 지연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171쪽) 이후로 지연과 미선은 언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언니는 그들의 삶에서 ‘누락된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 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16
스스로 증언을 부정했던 경험 때문에 기억에 회의적인 지연의 태도는 영옥과 만나면서 변화한다. 영옥의 말해주는 정선, 영옥,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굵직한 전쟁의 역사를 가로지르지만, 이야기 속에서 전쟁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물론 전쟁은 그들의 삶을 흔들어놓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자신들의 증언, ‘여자의 목소리’이다. 비록 정선과 새비 아주머니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증언은 영옥이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한데 모인 세 사람의 증언은 그들의 목소리로 쓰인 또 다른 역사가 된다.
기존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세 사람의 역사를 듣고 지연은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337쪽)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엄마 미선과의 화해로 이어진다. 미선의 삶에서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언니라는 것을 지연은 비로소 이해한다. 미선은 차마 사진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었다. 둘은 함께 사진을 정리하며 언니, 정연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다.
이제 지연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준비한다.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은 지연의 삶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그동안 외면해왔던 자신의 ‘목소리’들이다. 죽은 언니를 밀어낸 이후로, 지연은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 찢기는 고통을 경험”(298쪽)하고 싶지 않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쳤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렇게 버려진 자신들은 지연의 내면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위로받기를 원하고, 지연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끝났다. 앞으로 지연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자신의 증언을 모아 자기만의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알렉시예비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말하는 전쟁의 증언으로 ‘남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역사가 아닌, ‘누락된 사람들’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또한 국가가 의도적으로 ‘여자의 목소리’를 누락해왔음을 밝혀내고 그렇게 ‘누락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또 하나의 전쟁’에 시달려 왔음을 알린다. 최은영 또한 역사에서 누락되어 온 ‘여자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지연은 ‘여자의 목소리’가 말하는 전쟁, 기존의 역사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증언을 만나 변화하고 자기 자신의 역사를 준비한다. 이처럼 역사에는 기록되지 못하고 ‘누락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가진 ‘목소리’는 다양한 이야기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는 그런 ‘목소리’들을 부지런히 찾아내야만 한다.
주석
- 정철훈, 「애도의 방식으로서의 목소리─합창: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품론」, 『자음과 모음』 2016년 여름호, 402쪽.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일기장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17쪽.
- 기계형, 「전쟁 속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대조국전쟁’의 신화에 도전하다」, 『아시아여성연구』 55권 2호,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2016, 223쪽.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앞의 책, 17쪽.
-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2021, 49쪽. (이후 같은 책 인용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 임지현 역시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라고 이름 붙인 이 재현의 역설─‘사실’과 ‘진실’이 어긋나고 ‘입증’과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이 역설은 증언과 문서 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짚어낸 바 있다. 임지현,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침묵으로 기록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초청 토론회」, 『문학과 사회』 2017년 가을호, 341쪽 참조.
-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6쪽.
- 이소영, 「증인과 증언 불가능성─P. 레비, 아감벤, 서경식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어문학』 48집, 한국이탈리아어문학회, 2016, 76쪽.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앞의 책, 296쪽.
- 위의 책, 50쪽.
- 윤영순, 「문학과 다큐멘터리: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을 중심으로」,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53집, 한국러시아문학회, 2016, 114쪽.
- 최은영, 앞의 책, 49쪽.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앞의 책, 395쪽.
- 위의 책, 48쪽.
- 최은영, 앞의 책, 82쪽.
- 위의 책, 3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