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와 베스트셀러: 소설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
2000년대의 이야기를 하자면 1990년대를 한번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지하듯 1987년의 ‘봄’으로 시작된 90년대는 현실의 변화가 시시각각 느껴지던 역동적인 시대였고 그것은 문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0년대가 굳건하게 쌓아 올린 민족·민중문학의 성취를 바탕으로 새롭게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에 대한 기대, 문학 본연의 미학적 가치의 발견에 대한 열망이 공존하고 있던 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을 비롯해 다종의 ‘후기’ 이론들이 몰려옴과 동시에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과 호황에 힘입어 폭발적인 문학의 성장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또한 대중문화 전반의 영향력이 거대해지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소비 행위가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면서 문학은 ‘위기’론에 직면하게 되기도 했다.
90년대의 ‘신세대’들은 특유의 가벼움과 파편화된 정서를 바탕으로 위반과 저항, 해체에 열광했고, 정치나 역사의 거대 담론은 힘을 잃어갔으며 ‘일상’이 재발견되기도 했다. 이토록 다양한 변화들이 급속도로 일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당연하게도 ‘자본’의 힘이었다. 영화나 만화, 음악과 미술 등 자본을 등에 업고 밀려든 문화적 ‘서사물’은 90년대가 마주하게 된 사회적 변화에 역동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매체적 환경의 변화가 ‘문화산업’이라는 말을 낳고 예술 장르가 자본주의 시장 원리에 매몰되다시피 할 때, 문학은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그러한 흐름에 편승하기도 하고, 그와 거리를 두고 비판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90년대적 흐름이 결절점을 맞은 것은 1997년의 IMF 사태였다. 빠른 속도로 팽창되어가던 한국 사회의 확장성은 다시 그만큼의 속도로 쪼그라들게 되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문학 매체는 큰 위기감 속에 위축되었고, 마침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인터넷’에 의해 전통적 텍스트 매체는 자칫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완벽하게 당도한 세기말의 풍경 속에서, ‘Y2K’나 ‘밀레니엄 버그’의 종말론적·묵시록적 풍문이 횡행하던 90년대의 끝자락을 지나 한국 사회는 21세기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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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생각보다 평온(?)하게 다가오면서 ‘예언’이나 ‘계시’는 20세기의 유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1999년에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컴퓨터, 인터넷, 홈페이지 같은 단어가 전면에 등장했다. 각종 ‘길라잡이’와 ‘따라잡기’ 유의 가이드북이 2000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어를 공부해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겠다는 포부도 여러 책들을 통해 증명되고 있었다. 자기계발서라는 이름의 출판물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의 일이었다. 물론 삶에 대한 통찰력과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대중 인문 교양서적은 이전 시기에도 존재했다. 다만 그것이 매우 특별한 사람의 일대기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경우가 많았던 반면 21세기의 자기계발서는 누군가의 특이한 삶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노하우’를 설파하는 형태가 많았다. 사람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싶어 했고 인생을 더 효율적으로 살고 싶어 했다. 2000년대 후반의 『시크릿』(살림Biz, 2007)은 자기계발서 시대의 정점을 보여주는 책인데,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의 전언은 긍정이나 희망, 믿음이 삶을 견디게 하는 시대적 감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는 현실의 암울함을 위로해주는 문학작품이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IMF 시대를 거치며 실직한 가장, 즉 ‘아버지’는 불황의 초상이 되었는데 조창인의 『가시고기』(밝은세상, 2000)는 자식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써냄으로써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대중적 신파에 가까운 소설이어서 작품의 생명력이 길지는 않았지만 포스트 IMF 시대의 초상이자 2000년을 전후한 한국 사회의 감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는 불멸의 대작으로 남게 될 ‘해리포터’ 시리즈가 시작된 때이기도 한데, 전 세계적인 흥행작이 한국 독자에게도 호응을 얻는 일은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판타지’ 장르가 광범위하게 수용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었다는 점도 기록할 만하다. PC통신 문학을 거쳐 형성된 한국의 장르적 생태계와 더불어 여전히 ‘장대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독자들의 존재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곧바로 이듬해에 최인호 작가의 『상도』(여백, 2001)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상업적 대중문학이라 폄하되기 일쑤였지만 한국의 독자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대하소설급의 역사물에 환호했다는 사실은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변하지 않았다. 당시 여전히 문학이 거대 담론을 다루지 않고 미시적인 일상성에 매몰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독자들이 수용한 작품의 양상을 살펴보면 서사의 스케일이 작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시기에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생각의나무, 2001)가 다시 한번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독자들의 큰 주목을 끌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가시고기』와 마찬가지로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연인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21세기 한국 사회가 요구했던 서사는 앞서 자기계발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절망의 정서를 희망과 감동으로 바꾸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라마 〈가을동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다시 책으로 발간돼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데, 이 역시 ‘불치병’의 소재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한편 2001년 11월부터 2004년 5월까지 MBC를 통해 방영되었던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는 이른바 독서 열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은 이를 통해 소개된 대표적인 한국문학 작품들이기도 하다. 전 국민적인 호응에 힘입어 소개, 판매된 책들은 그러나 한국문학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공고하게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역사와 현실에 짓눌린 사람들이 토속적, 전통적 가치를 통해 일종의 회복을 도모하게 된다는 형식의 서사는 한국문학이 가진 다양성을 뒷전으로 밀려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베스트셀러에 초점이 맞추어진 지면이라 자세히 다루기는 어려우나 이 시기 박민규를 비롯한 ‘무규칙’의 비전통적 작가들에게 문단의 주목이 쏠린 이유가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과 웹의 활성화로 인해 소위 ‘인소(인터넷 소설)’가 엄청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시장이라 명명하기에는 유통이나 수익 구조에 있어 현재의 웹소설과 비교도 되지 않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연재하는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귀여니’의 사례로 보듯 단행본이나 영화 제작 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문장이나 표현의 문제, 특히 이모티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에 관해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매체에 특화된 서사의 리듬, 속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구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200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이른바 ‘칙릿’ 소설이 유행을 이끌기도 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06)와 백영옥의 『스타일』(위즈덤하우스, 2008)로 대표되는 이 계열의 작품들은 주로 이삼십 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전면에 내세웠다. 세련된 취향과 트렌디한 삶을 살아가는 직장인 여성들이 서사의 중심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당대에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고 다소 짧은 유행으로 끝났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페미니즘 리부트의 전조를 보여주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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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베스트셀러 목록의 대부분이 외국 문학으로 채워지게 된 것은 한국문학이 서사적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파울로 코엘료, 에쿠니 가오리, 댄 브라운 등의 작가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서사적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특히 일본문학은 여러 작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개되면서 주요 문학 독자들이 꾸준히 찾는 영역이 되었다. 신경숙, 박완서, 은희경, 공지영 등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들의 신작이 그나마 판매량이 유지될 뿐,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명관의 『고래』(문학동네, 2004), 김별아의 『미실』(문이당, 2005) 등은 문학상을 수상하고 화제작이 되기도 했다.
특히 『고래』는 조금 더 자세히 언급을 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20여 년이 지나 이 소설이 영어로 번역되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의 최종 후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쉽게 수상은 불발되었지만 이 작품은 당시 한국문학이 애타게 기다려온,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이야기는 전진한다”는 모토 아래 삶의 우여곡절을 넘나들며 3대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일대기를 그린 이 소설은 마치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판소리계 소설의 화자처럼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끄는 목소리는 파란만장한 삶을 어떨 때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어떨 때는 과감히 환상적으로 그려내면서 서사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이 소설이 ‘한국적’이라는 문제는 남아 있었다. 즉, 2000년대 중반의 한국 독자들은 이미 세계적인 동시성을 경험하면서 보편적인 이야기에 매료되고 있었으므로 『고래』와 같은 작품이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한국적 에로티시즘과 강렬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가 지금의 영어권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은 ‘한국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이 굵은’ 서사, 남성적 목소리가 역사적 배경을 통해 울려 퍼지는 작품이 여전히 독자와 자주 만나기도 했다. 황석영의 『심청』(문학동네, 2003)과 『바리데기』(창비, 2007)는 『고래』와 공통점이 많은 작품이다. 설화나 고전을 바탕으로 재창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성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었다는 점, 그것이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 신화적 환상성이 서사의 핵심을 차지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황석영의 경우 그러한 세계가 ‘동아시아’적 확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역사적 인식과 전망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른바 ‘꾼의 미학’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꾼’이라는 명명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반성적, 비성찰적 성격 때문에 다소간의 비판적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서사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구술성을 적합하게 보여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꾼’은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고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그러므로 소설가로서 이야기꾼이라는 명명은 이야기를 잘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잘 ‘전달’한다는 의미이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화자narrator는 말하는 사람인데, 묵독을 전제하는 근대적 형식의 소설과는 맞지 않는 개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사를 읽으면서 사실은 ‘듣고’ 있다. 흔히 소설은 ‘보는’ 것으로 생각해서 고안된 시점이나 초점화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데 반해 목소리voice는 의외로 무시되고 ‘전근대’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강담사나 기담사, 전기수와 같은 전문적 이야기꾼의 존재가 익숙한 한국문학의 전통에서는 더욱 그런 경향이 강했다.
김훈이 2000년대에 써낸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2001), 『현의 노래』(생각의나무, 2004), 『남한산성』(학고재, 2007) 역시 역사소설의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준 작품들이다. 그는 장대한 서사의 유구한 전통을 『고래』와는 반대의 형식으로 구현해냈다. 묘사는 지나치리만큼 과장되었고 인물은 더없이 비장했으며 세계의 운명은 무참했다. 이렇듯 2000년대의 소설 독자가 기대했던 것이 서사를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목소리의 출현이었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 기존의 문학사적 시각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도 하다.
2000년대 한국문학은 흔히 역사나 사회의 무게로부터 벗어난 ‘무중력’ 세대의 출현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1990년대 문학이 그토록 애를 썼지만 여전히 ‘후일담’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면 2000년대는 특유의 냉소나 우울이 사라진 채로 백수와 찌질이의 세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불안은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그 자체로 폭발력을 갖지 못한다. 자조와 고립, 유머나 가벼움 등으로 한국문학의 인물들은 ‘위장’하고 있었다. 박민규나 이기호, 김애란과 윤성희 등이 보여주었던 2000년대적인 풍경은 그러나 문학 내부의 이동과 변화를 감지하게 했을 뿐 다수의 독자들과 활발히 조우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절대다수의 문학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다움’이었는데 2000년대의 끝자락에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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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도서 시장의 특징은 미디어를 통해 베스트셀러 다수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대중 매체를 통해 노출된 작품, 흥행한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이거나 유명인이 추천, 소개했다는 이유가 판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앞서 언급한 여러 작품들 역시 대부분 작가나 작품 바깥에서 동력을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문학 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러한 ‘후광’ 없이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사례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이다.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 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매우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2000년대의 한국문학은 아버지로 시작해 어머니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엄마를 부탁해』가 독자들의 호응을 비롯해 평단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영어로 번역되어 상당한 주목을 받은 ‘사실상 최초’의 경우이기도 해서 한국문학이 2010년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엄마를 부탁해』는 각 장에서 다른 목소리들이 등장한다. 1장에서는 엄마의 딸, 2장에서는 엄마의 아들, 3장에서는 엄마의 남편, 4장에서는 사라진 엄마의 목소리가 배치되어 있다. 이 목소리들은 실제 서술자의 눈, 즉 시점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독자의 상상력을 특별히 자극하지는 않는다. 분명하게 소설 속 인물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 부분이다. 엄마의 딸을 ‘너’로 지칭하면서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이 목소리 말이다.
너는 사람들을 헤치고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것을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고개를 쳐들고 살펴보았다. 피에타상이다.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성모가 방탄유리 안에 갇혀 있었다. 너는 이끌리듯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피에타상 앞으로 나아갔다. (중략) 너는 넋을 잃고 성모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한방울 너의 감은 눈 아래로 흘러내렸다. 너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듯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사를 보려는지 사제들이 줄을 지어 네 곁을 지나갔다. 너는 성당입구까지 걸어나와 긴 회랑과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광장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여인상 앞에서 차마 하지 못한 한마디가 너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엄마를 부탁해』, 279~282쪽.)
한국에서 2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세계 시장에서도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신경숙의 이 작품은 단순히 엄마의 실종과 이를 통한 기억들의 복원으로 요약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모성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는 대체로 통속성이나 대중성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주지하듯 2000년대에는 수많은 ‘가시고기’가 있었다). 순수문학이니 정통문학이니 하는 수사를 제쳐두고, 어떤 이야기가 더 훌륭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보면 이야기의 정서나 감정만큼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대번에 알 수 있다. 사실 신경숙은 『외딴 방』(문학동네, 1999)에서도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 시제로, 현재의 이야기를 과거 시제로 쓰는 등 소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관심이 큰 작가였는데 이 작품의 경우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서사 자체의 파급력이 너무나 큰 나머지 소설 형식상의 문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위 장면을 눈여겨보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위 고급 독자가 아니라도 이 대목은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낯선 목소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나아가 ‘그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문학성’을 감각하게 된다. 2000년대 소설의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서사에 참여해 그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형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위의 대목에서 인물을 “너”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작가 신경숙? 이 존재에게 서술자 혹은 화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음을 잊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구인 것일까. 독자는 여기에서 드디어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실종된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며, 제3의 누군가를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되었다 하더라도 각자가 읽은 이야기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유일한 목소리로 들은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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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화로 인해 2009년 베스트셀러가 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이레, 2004)에서는 책을 읽어주는 행위가 함께 샤워를 하고, 사랑을 나누고, 나란히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연인이 가장 내밀하게 나누는 대화가 곧 책 읽어주기라는 것은 소설이라는 형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 흥미로운 상상을 하게 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소년 미하엘이 한나에게 읽어주는 『안나 카레니나』는 한나에게 온전히 미하엘의 목소리로 기억되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것을 ‘내 목소리’로 전달할 수는 없을 것 같으므로 직접 ‘들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