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적인 의미에서 ‘그래픽 노블’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을 두고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나 ‘웹툰’으로 부를 수 있다. 물론 ‘만화’가 가장 오래된, 기본적이자 포괄적인 용어이다 보니 그래픽 노블이건 웹툰이건 모두 만화라고 불러도 된다. 그래픽 노블이나 웹툰이나 각자의 특수성을 지닌 만화의 한 유형이므로 이를 인지한 상태에서 만화라고 부르지 않고 그렇게 지칭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딱히 분석할 이유도 없다. 흥미로운 점은 꼭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왕이면’ 만화보다는 그래픽 노블이나 웹툰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 또는 그래픽 노블이나 웹툰은 만화가 아니다, 다르다고 주장하는 현상이다. 물론 만화에 대한 연구사가 짧은 것이 원인 중 하나일 수 있겠으나 일부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다수에게서 이런 마음과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화가 원인이다. 이 글에서는 만화, 그래픽 노블, 웹툰을 순차적으로 개념을 정리한 후 무엇이 만화를 만화라고 부르지 못하는 또는 부르지 않는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만화라는 유일무이한 표현형식
만화라는 표현형식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이 매력을 식탁과 비교하자면 가장 적절한 건 쌀밥, 그것도 곧바로 혀를 자극하는 백미보다는 오래 씹을수록 고소해지는 현미 쌀밥이다. 편안하고 당연해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막상 없다면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탄생 시기부터 많은 이들의 감각적, 지적 호기심을 독차지했던 영화에 비하면 거의 유사한 시기에 탄생한 만화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움직이는’ 재현물의 충격파는 글과 그림, 말풍선, 이들을 둘러싼 칸들의 연쇄가 가져온 조용한 재현물의 탄생을 가뿐히 덮어버렸을 테니까.
우리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만화는 ‘한칸만화’도 아니고, 만화영화(애니메이션)도 아니며 오로지 ‘다칸만화’이다. 한칸만화의 역사는 사실상 다칸만화의 탄생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으며 구성 원리가 다칸만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한칸만화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모든 메시지나 이야깃거리를 단 하나의 칸 안에서 끝내야 한다는 ‘단일한 칸의 자기완결성’이다. 반면 다칸만화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연쇄적 칸들의 상호의존성’이다. 다칸만화에서의 칸은 언제나 미완결이며 다른 칸들과 상관적으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뿐이다. 만화에서는 그 어떤 서술자도 직접적으로 나서서 칸을 설명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연쇄적인 칸들을 읽어나가며 그 차이에서 의미를 파악한다. 그리고 현재의 칸들을 보며 독자가 파악한 이 의미들 역시 페이지를 넘길수록 뒤에 등장하는 칸들에 의해서 추가적인 또는 전혀 별개의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이 성격 이외의 것들은 지엽적이며 관습적일 뿐이다. 예컨대 인물의 재현 스타일, 채색, 분량, 이야기의 성격, 서사의 속도 등은 만화라는 표현 형식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일본, 미국, 프랑스, 나름 만화 종주국의 만화 유형은 모두 다르지만 글과 그림, 말풍선을 포함한 칸들의 연쇄, 이들의 상호의존성이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만화는 물리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대신 가상의 움직임과 속도를 제안한다. 칸 내부에서는 주인공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다양한 관습을 만들었고, 칸 외부에서는 이야기의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칸들의 형태와 모양, 연결에 변화를 부여한다. 이런 가상의 움직임과 속도는, 실제 물리적인 움직임과 속도를 전달할 수 있는 동영상(애니메이션이나 영화)과는 완전히 다르다. 동영상은 선택 불가능한 강제적 움직임과 속도를 부여한다. 만화는 이런 강제성이 없다. 작가가 제안하는 움직임이나 속도는 독자에 따라 달라진다. 만화적 관습에 익숙하고 평소에 만화를 많이 읽는 사람들은 훨씬 더 창작자의 의도를 잘 따라갈 것이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독자는 결국 자신만의 고유한 속도로 칸에서 다음 칸으로 넘어갈 뿐이다. 이런 면에서 만화는 ‘자율적 서사물’로, 동영상은 ‘강제적 서사물’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만화는 물리적으로 침묵의 예술이다. 그 어떤 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시각적으로 소리를 제공한다. 이 시각적인 침묵의 소리야말로 만화의 마술적 매력 중의 하나이다. 무의식적으로 칸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만든 목소리를 듣고 있다. 작중에서 여러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말풍선의 꼬리표만 있으면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그 어떤 어려움도 없이 들을 수 있다. 소리가 없는 덕분에 독자들은 다양한 방식의 다중발화들을―말이건 생각이건―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오로지 글과 그림, 말풍선과 칸들로 이뤄진 특정 형식이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전달하기도 하고 또는 메시지나 인상을 던져주고, 심지어 독자들의 감성과 감정을 자극한다. 움직임도 소리도 없기에 만화는 그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표현 형식보다도 독자의 연상력과 상상력을 많이 요구한다. 독자들은 무성과 부동의 연쇄된 칸들을 읽어나가며 이 주어진 재료들을 통해 자기에게 고유한 속도로 소리와 움직임을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납작하고 평면적인 글, 그림, 말풍선, 이들을 둘러싼 칸들은 어느새 독자의 머릿속에 생생한 장면이 되어간다. 이러한 적극적인─하지만 이 적극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경험을 제공하는 표현 형식은 만화밖에 없다. 만화가 120년을 훨씬 넘어 여전히 오늘날에도 건재하는 이유는, 단지 이야기가 재미있거나 의미심장해서만이 아니다. 이야기들은 만화가 아니더라도 넘쳐나지 않는가. 만화는 문자와 그림을 활용하지만 문학적 경험과도 미술적 경험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없다.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기초적인) 질료를 사용하긴 하지만 전혀 다른 경험, 만화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고, 이 경험의 유일무이성이 여전히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2. 그래픽 노블의 기원과 활용
그렇다면, 이런 만화, 영어로는 ‘코믹스comics’와 ‘그래픽 노블’은 어떻게 다를까. 그래픽 노블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미국 만화의 주류는 1930년대에 나타난 올 컬러, 약 32페이지의 얇은 종이에 인쇄한 22×28cm 판형의 ‘코믹 북comic book’. 1938년에 등장한 슈퍼 영웅인 ‘슈퍼맨’은 코믹 북을 슈퍼 영웅물로 정착시켰고, 이때부터 1950년대 상반기까지를 황금기로 본다. 1950년대부터 코믹 북은 쉬운 언어, 유머와 감정의 즉각적인 표출을 이유로 문화적으로 ‘수준 낮은’ 것으로 낙인찍혔고 이런 관습적 태도는 만화와 청소년 비행을 연결하는 연구를 통해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결국 정부의 검열을 막기 위해 출판사들은 자체검열코드를 만들었고, 재미없어진 작품들은 성인 독자층을 떠나보냈다. 이러한 자체검열을 피하는 방법은 ‘코믹 북’이 아닌 다른 형태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1960년대 하반기 ‘코믹스comix’라는 언더그라운드 만화운동으로 이어진다.
1976년 조르쥬 메체거George Metzger의 『시간을 너머 그리고 다시 한번Beyond Time and Again』이라는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처음으로 ‘그래픽 노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작가의 유명세가 덜하다 보니 보통 윌 아이스너의 『신과의 계약A Contract with God(1978)』을 첫 번째 그래픽 노블이라고 주장한 작품으로 떠올린다. 아이스너는 작품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합법적인’ 일반 책처럼 보이게끔 노력했으며, 기존의 슈퍼 히어로물 같은 형태로는 결코 내가 다루려 하는 테마를 다룰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정확히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의 문화사적 맥락을 보여준다. 즉, 코믹 북, 또는 코믹스의 ‘비합법성’에 대한 인지이다. 실질적으로 법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다뤄주지 않는다’는 심정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인용한 문장의 뒷부분은 슈퍼 히어로물의 세계가 제한적이라기보다는 그가 표현하려는 세계가 슈퍼 히어로물로는 맞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표현하려는 주제에 더 어울리는 소재를 찾겠다는 것은 작가의 선택이지만, 이후의 몇몇 슈퍼 히어로물이 증명했듯이 이 장르라고 해서 깊이 있는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여하간 ‘그래픽 노블’은 1970년대 하반기에서 1980년대 초, 서서히 ‘코믹 북’보다 훨씬 더 분량이 많고 아동보다는 성인이 이해할 수 있는, 사색 거리를 던져주는 내용을 담은 만화 작품들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미국 만화를 ‘성숙기’라고 칭하는데, 주류 만화계에서 이러한 성숙에 커다란 역할을 한 작품으로 알랭 무어의 『왓치맨』과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다크 나이트 리턴The Dark Knight Returns』을 가장 많이 언급한다. 이들과 더불어 이제 기존의 코믹 북 출판사들도 서서히 그래픽 노블을 출간하게 된다.
다른 한편, 비주류 만화계의 아트 스피겔만Art Spiegelman이 1986년에 출간한 『쥐』 역시 그래픽 노블의 확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92년에 이 작품이 퓰리처상의 ‘특별상’을 수상한 것은 만화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을 산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서히 만화책은 만화 전문 서점만이 아니라 일반 서점까지 파고들어갔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와 그에 해당하는 작품은 2000년대 들어서 자신만의 차별성을 제시했다. 즉, ‘그래픽 노블’은 코믹스지만 ‘코믹 북’은 아니다. 코믹 북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책의 규격을 정확하게 지킨다. 슈퍼 영웅물이며, 컬러 채색이다. 반면 그래픽 노블은 책의 규격이 자유롭고 소재도 무한하다. 페이지 분량도 제한이 없고, 채색이나 하드커버 여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픽 노블은 코믹 북은 갖지 않는 도서 식별 표시(ISBN)를 지닌다. 이처럼 그래픽 노블의 의미가 고착되는 듯했지만 곧이어 혼선이 일어났다. 이 용어가 멋져 보였는지, 다른 유형에서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는 세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주로 한 작가가 만든 고유한 창작성과 테마를 지니고 있는 경우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며, 깊은 주제 의식과 폭넓은 범주의 테마를 지닌, 정교하고 회화적인 그림 스타일과 화려한 연출을 보여주는, 그다지 책의 크기나 페이지 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작품들을 지칭하며, 주로 일반 서점에서 책과 함께 다뤄진다. 두 번째로는 아시아권의 ‘망가’나 유럽권의 ‘앨범’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어찌 보자면 자신들에게 낯선 것들, 타 만화문화권의 작품들, 즉 비주류 만화들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지막은 메인스트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여러 코믹 북의 합본 출판물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첫 번째, 그 어떤 형태나 분량 스타일과 상관없이 깊이 있는 문제 제기를 하는 작품들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미국에서 자신들에게 낯선 만화를 그렇게 불렀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낯선 미국의 코믹스나 유럽권의 앨범을 그렇게 지칭하기도 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아주 대중적인 만화책으로 인식되는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조금 다른데, 실제로 작품이 그다지 ‘작가적’이지 않아도 출판사에서 마케팅 목적으로 이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더라도 원래의, 성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용어만으로는 어떤 유형의 작품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경우, 1990년대 하반기에 기존의 메인 스트림이었던 일본 번역 만화 중심의 만화출판시장은 불법 스캔본 유통과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어진 무료 웹만화 등으로 거의 붕괴했다. 웹툰 독자들이 훨씬 더 많은 현재, 종이 출판만화시장은 박리다매형의 일본 만화 스타일보다 높은 가격의 그래픽 노블을 소량 인쇄하는 것이 훨씬 더 매력적인 상황이 되었다. 많은 국내 작품들과 해외 번역 출간물들이 ‘그래픽 노블’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주로 일반 출판사의 만화 브랜드에서 출간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여러 의미의 그래픽 노블에 둘러싸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3. 웹툰이라는 용어
그렇다면 웹툰은 무엇인가. 1990년대가 되기 전까지 세계의 모든 만화연구자들은 단 한 번도 만화 형식에 대해 ‘종이’라는 지지대support를 특별히 고려하지 않았다. 만화는 그냥 종이만화, 단 한 가지밖에 없었으므로. 합법적 불법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스캔 만화본, 그리고 개인 홈페이지 만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디지털’이라는 지지대에 대해 생각해야 했고, 이는 점차 하나밖에 없는 원고, 종이라는 지지대가 가지는 원본성原本性, originality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원고에 무한한 복제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물론 디지털 출판만화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종이원고에 작업하고, 이를 스캔하여 컴퓨터에서 채색이나 보정, 편집하여 웹상에서 보이는 경우도 있다. 최근엔 점점 더 처음부터 디지털 저작도구로 창작하여 그대로 웹상에서 출간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만화 형식을 상위에 두고, 하위에 종이와 디지털을 구분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의 만화는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종이 출판만화Paper publishing comics와 디지털 출판만화Digital publishing comics. 전자는 종이라는 지지대로 출판한 만화를, 후자는 디지털이라는 지지대로 출판한 만화를 지시한다.
지지대를 기준으로 보면, 종이 출판만화는 신문 만화, 잡지 만화, 단행본 만화 등을 포함하고, 디지털 출판만화는 개인 홈페이지 만화, 블로그 만화, 웹툰, 앱툰, 스마트툰 등을 포함한다. 완전한 디지털 출판만화로 넘어가기 전, 스캔본은 인터넷 만화방과 불법 공유를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를 통해 종이 출판만화 시장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기존의 작가군들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창작자들이 등장한다. 1998년 권윤주라는 디자이너가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한 만화 〈스노우 캣〉이 시작점이다. 스캔본과는 달리 온라인에서 읽히기 위한 만화들을 창작했다. 이런 개인 홈페이지 만화들은 서서히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의 웹툰 플랫폼으로, 이어서 ‘레진’을 시작으로 웹툰 전문 플랫폼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많은 작품들이 음향과 움직임을 작품 속으로 소환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을 웹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앱툰, 스마트툰, 무빙툰, 컷툰, VR툰, K툰 등 수많은 호명들이 웹툰 주변에 떠돌았다. 이러한 호명들 역시 만화 영역에 대한 고민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고 유통 플랫폼이나 신문기사들을 통해 자의적으로, 상업적으로, 즉각적으로 나타났고,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활용되다 사라져갔다. 현재는 거의 웹툰으로 정착되었으며 한국 작품을 번역 소개하는 해외에서도 웹툰이라는 용어 사용을 발견할 수 있다.
어쨌건, 디지털이라는 지지대로 옮겨오면서 발생한 새로운 다양한 실험들, 특히 종이 출판만화에서는 불가능했던 음향과 움직임들의 활용, 댓글을 통해 훨씬 더 적극적인 독자들이 관여했다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이다. 이를 이유로 들어 웹툰은 만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들이 과연, 기존의 종이 출판만화를 통해 만화 형식이 구축해왔던 독자들의 독해 방법을 완전히 뛰어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음향이나 움직임의 활용은 제한적이자 선택적이고─즉 독자의 자유를 방해하는 수준이 아니고─, 이것들이 과한 경우 독자들은 외면했다. 이렇게 본다면, ‘웹툰은 종이 출판만화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디지털 영화가 필름 영화와 차별성이 있다 하더라도 영화 일반을 뛰어넘은 새로운 형식이라고 할 수 없듯이, 디지털 출판만화가 종이 출판만화와 차별성이 있다 하더라도 만화 일반을 뛰어넘은 형식으로 보기 어렵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웹툰은 디지털 출판만화의 한 양태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현재의 웹툰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디지털 출판만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사실상 웹툰이라는 용어 자체도 엄밀하게 보자면 적절하지 않다. 웹사이트가 아니라 앱 사용률이 훨씬 높으며, 카툰(한칸만화)이 아니라 코믹스(다칸만화)이므로 어쩌면 ‘앱 코믹스’가 더 합리적인 용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착된 용어를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카툰의 광범위한 정의(코믹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 한칸, 다칸, 스토리만화를 모두 포괄해서 지칭하던 전통)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이 유형들이 포털이라는 웹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웹툰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웹툰에 AR, VR을 접목한다는 프로젝트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노력들이 웹툰의 영역을 확장시킬지, 아니면 다른 표현 형식의 탄생으로 이끌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사라질지 지금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만화적 경험을 지속시켜줄 것 같지는 않다. 한때 〈아바타〉 이후 모든 스크린과 TV를 점령할 것처럼 굴었던 풀 3D영상이 실제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기억을 소환해보면, 아무리 새로운 기술의 접목이라도 독자가 원하는 경험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사라진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4. 만화를 만화라 부르지 않고 또는, 부르지 못하고
지금까지 본 것에 따르면 그래픽 노블은 성인 정도는 되어야 이해할 수 있는 깊이가 있는 종이 출판만화이고 웹툰은 디지털 출판만화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왜 그래픽 노블은 또는 웹툰은 만화가 아니라거나 만화와는 다르다는 발화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논리적인 취약성이 원인이 아니라면 이런 주장에는 만화에 대한 무의식적인 사회적 편견이 깔려 있고, 현재의 문화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대체 이 뿌리 깊은 무시와 냉대, 편견의 근원은 어디일까. 1960년대 유신의 칼날은 모든 문화예술의 사전 검열로 이어졌다. 심의의 가이드라인은 뒤죽박죽이었고, 만화의 질은 점점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억압이 표절과 저질을 만들어내고 이런 결과는 사회적 편견을 정당화시켰다. 1968년에는 심지어 만화를 ‘밀수, 도박, 탈세, 폭력, 마약’과 함께 ‘6대 악’으로 규정했으며, 어린이날만 되면 악서를 추출한다고 만화책을 모아 화형식을 거행했다. 만화를 읽으면 공부를 못한다는 근거가 취약한 발화가 엄청난 교육열을 자랑하는 부모들 사이에 횡횡했다. 왜 유독 만화 형식에만 더 커다란 압박이 가해졌을까. 그 원인 중의 하나엔 만화의 대중적 파급력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하드웨어 인프라 없이 손에서 손으로, 소문에서 소문으로, 심지어 일반 책은 읽기 버거워하는 이들에게도 쉽게 퍼져나갈 수 있다는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강력했던 기억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을까. 이 시기 아이였던 이들—부모 몰래 만화를 경험하는데 성공했거나 아예 접해보지를 못했거나 했던—이 이제는 아마 부모나 조부모 사이 정도, 또는 각종 사회문화정책에 관여하는 연배가 되었을 터이다. 만화책은 태워도 될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여전히 다수라면, 만화는 단지 만화라는 이유로 그 어떤 진지한 관심도 받지 못하고 교과서에 실리지도 못하고 도서관에서도 귀찮은 취급을 받을 것이며 만화를 연구한다고 하면 웃겨서 편하겠다는 무시를 인내해야 할 것이다. 옛날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각 기초자치단체의 공공 도서관들 중 상당수에서 희망도서에 ‘만화책은 제외’라는 문구가 자연스럽게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만화를 합법적인 즉 구체적인 작품이 좋고 덜 좋고가 있을 뿐, 표현 형식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잠재태일 뿐이라는 시선을 기대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우리처럼 특수한 정치적 환경 때문만은 아니다. 만화에 대한 편견이나 무시는 다른 나라에서도 존재했었다. 문화적 비합법화의 상황은 바로 그래픽 노블이라는, 갖고 싶어 하는 이름 그 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화가 문자를 사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문자를 쓴다고 해서 모두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문자의 의미를 뜻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차원, 즉 크기나 두께, 위치 등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적 차원의 역할이 우세한 한, 만화와 문학은 동종일 수 없다. 만화를 문학의 한 장르로 다루려고 하는 다양한 시도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왜, 계속 문학, 특히 ‘그래픽 노블’로 규정되고 싶어 할까.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인류가 경험한 합법화된 지 아주 오래된 표현 형식이 바로 문학이다. 구전되었던 시, 이야기들은 문자에 안착했고, 문학은 만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지위를 지녀왔다. 결국 ‘소설’이란 표현을 쓰고 싶은 것은 만화의 문화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문학의 권위에 기대고 싶은 것이다. 사실 만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한때 미술도 예술의 지위를 갖기 위해 ‘문학과 미술이 자매예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프랑스의 경우 영어인 그래픽 노블 대신 ‘로망 그라픽roman graphique’이라는 불어식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고전적 예술형식에의 의존은 사실상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카스테르망Casterman 출판사가 기존의 만화보다 더 많은 페이지 분량을 지닌 흑백만화들을 출판하면서 ‘소설들Les Romans’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사실로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만화를 지칭하면서 ‘소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은 깊은 문화적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
만화에 쏟아지는 사회적 무시와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전술을 쓸 수 있다. 첫 번째는 괜한 편견에 시달리지 않도록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자체로 평가가 달라질 때까지 나름의 문화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래픽 노블은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소설, 즉 ‘문학’의 권위를 빌려 이 책은 수준 낮은 ‘만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그래픽 노블이 모두가 아니다. 기존의 ‘만화’라는 용어가 부여하는 ‘일회적인, 소모적인,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양한 용어들을 만들어왔었다. 대표적으로 ‘시퀀스적 예술Sequencial Art(윌 아이스너)’, ‘그려진 문학Litterature dessinée(프랑스의 헨리 모간Henry Morgan)’, ‘코믹 스트립 소설Comics strip novel(다니엘 클로우즈Daniel Clowes가 『아이스 헤븐Ice Haven』을 출간하면서 사용한 표현)’ 등이 있다. 만화의 문화적 비합법성, 달리 말하면 문화적 비하가 만화 대신 다른 용어를 만들어내면 문화적 합법성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화 형식의 본질적인 틀, 즉 문자와 그림, 말풍선, 이를 둘러싼 칸, 칸들의 연쇄 등은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단지 내용적 혁신성과 실험적 시도들을 근거로 만화 형식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알랭 무어는 두 번째 전술의 지지자이다. 그래픽 노블도 만화에 불과한데,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상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참 좋은 만화 작품’ 정도의 표현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첫 번째 태도는 사실상 만화의 합법성을 얻기 위한 문화투쟁은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들이나 보는 작품이라는 선입견 앞에서, ‘성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에 지금까지 없었던 파격적인 연출법을 제시하는 이런 훌륭한 작품’을, 다른 문화적 중립성을 지닌 용어로 지칭하고 싶다는 욕구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라는 모 형식(母形式)에 대한 선입관은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용어로 옮겨간다고 해서, 이 비논리적인 무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화 전체에 덧씌워진 ‘애들이나 보는 거다, 가치가 없다’ 등의 마녀사냥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물론 실천을 위한 선택은 언제나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지만 말이다.
결국 전통적인 문학예술의 권위에 기대어 만화에 대한 편견을 희석시키려고 하는 입장과, 또 그러한 관습적 판단에 개의치 않고 만화에는 단지 여러 수위의 작품이 존재할 뿐이라는 입장, 이 두 가지 입장의 차이에 따라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또는 사용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웹툰의 경우는 좀 다르다. 물론 그래픽 노블도 마케팅적 필요에 의해 자주 소환된다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만화가 아니라 웹툰이라고 언급할 경우의 프라이드는 주로 상업적 성공에서 나온다. 오늘날의 웹툰은 2000년대 초반 태동기의 웹툰과는 그 추동력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엔 작가 개인의 개별적인 고전분투였다면 현재는 자본력이 움직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세계시장의 3분의 1. 가장 큰 만화대국인 일본을 옆에 두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만화의 영역에서 최초로 일본보다 나은 어떤 영역을 개척했다는 자부심, 세계시장에서 일본보다 더 많은 인정을 받고 있다는 뿌듯함, 웹툰 작가들이 공중파에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초등학생의 미래 희망에 웹툰 작가가 포함되기 시작한 점, 규모가 달라 항상 부러워만 했던 드라마업계나 영화업계가 웹툰의 저작권을 구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 많이 버는 작가의 수익이 놀라울 정도라는 점 등이 기존의 만화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표현처럼 웹툰은 그 수익성을 중심으로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다.
그래픽 노블이 만화의 합법성을 위해 일종의 ‘예술성’을 취득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적어도 웹툰업계는 아예 이런 부분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웹툰의 상당수가 거의 시스템적으로 제작되고 있고, 작가가 혼자 작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글, 그림, 배경, 채색 등 영역별로 역할을 분배하여 일종의 집단적 작업의 결과물을 산출한다. 선투자된 예산 규모가 클수록 투입하는 인력들이 늘어난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자본이 만화계로 투입되고 있지만 그 어떤 연재 플랫폼에서도 웹툰 리뷰라든가 평론을 싣는 곳은 없다. 오로지 얼마나 많은 수의 독자가 이 작품을 클릭했느냐, 이들이 별점 얼마를 주었느냐만이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정보이다. 어떤 수상 제도는 매출 규모가 얼마인지를 평가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어디 해외에서 수상한 그래픽 노블’이 아니라, ‘세계의 독자들 몇억 명이 본’, ‘세계 몇 개국으로 수출한’, ‘몇억 원의 수익을 올린’ 등이 그 작품을 홍보하는 지표가 되었다. 자본이 가장 중요한 우리 사회에서 문화산업적 효과를 충분히 내고 있는 효자 아이템인 것이다.
하지만 과거를 잊지 말자. 문화적인 합법성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제적 수익을 많이 내는 것에만 매진하다가 언젠가 수익이 줄어든다면 그땐 어떤 취급을 받게 될 것인지. 이미 90년대에 한번 당해보지 않았던가. 바라건대 이 시기가 최대한 오래, 만화를 문화적으로 괄시하던 과거의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 지속되고, 다양한 유형의 웹툰 작품과 담론들로 퍼져나갈 수 있어서─아주 어려운 조건이긴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