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없이 잘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꿈은 등단이 아니다
내가 쓴 51편의 시들은 2018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우리의 꿈은 등단이 아니다.’ 펀딩 당시 내가 부제로 달았던, 이를테면 슬로건 같은 문구였다.
‘우리의 꿈은 등단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요란스럽게 데뷔해서인지, 3년이 지난 지금도 ‘비등단 작가’로서의 입장 표명을 종종 부탁받는다. 지금까지 다섯 번 정도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떤 용기를 통해 등단을 거부하고 비등단 작가의 삶을 결심하게 되셨나요?’가 인터뷰의 요지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답은 한결같다. 조금은 머쓱하게 “등단을 거부한 게 아니라 못한 겁니다.” 분명한 건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 찬찬히 되짚어봤을 때 그 끝에 등단이 있었던 적은 없다. 등단은 그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바람직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 청탁을 받았을 때 기쁜 마음과 씁쓸한 마음이 반반이었다. 시집을 낸 이후로 총 일곱 개의 지면에 시를 발표했지만 대부분 청탁이 아닌 투고를 통한 발표였으므로, 우선 내게도 청탁이 왔다는 사실이 기쁘고 낯설었다. 다만 비등단 작가의 삶이 여전히 구분되어 있다는 현실은 씁쓸했다. ‘비등단 작가’로 활동하면서 ‘내가 등단만 했었다면……’ 하고 스스로를 책망하거나 환멸을 느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또래 기성 작가들과의 만남에서도 오히려 응원을 받았으면 받았지,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데뷔한 나를 향해 고까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예술가지원정책 역시 ‘본인의 창작집을 발간한 작가’까지 공모 대상에 포함하는 경우가 많아져 비등단 작가에 대한 벽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도 등단 없이 활동하는 많은 동료 작가들의 행로를 바라보면, 더 치열하고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등단 제도, 사라져야 하는 악습일까?
비등단 작가의 경계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걸까? 단순히 등단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여러 매체에서 다루는 비등단 작가란, 사실상 등단을 도전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 혹은 적어도 순수문학을 소비하고 등단 제도를 이해하는 작가 지망생이었던 사람들을 일컫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페이지 1장에 감성적인 글귀 두어 줄을 예쁘게 배치하고, 책 1권이 끝날 때까지 사랑과 위로를 부르짖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향해 비등단 작가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의 꿈은 등단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으로 데뷔를 한 만큼,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등단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지녔으리라 짐작한다. 혹자는 등단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맞서는 잔 다르크처럼 호전적인 행로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등단 제도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다.
등단이라는 제도가 배출해내는 신인 작가들의 작품은 기성 작가 개개인의 문학세계가 고리타분해지지 않도록 환기시켜주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공식적인 등단 제도 없이 도제식 추천 시스템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기성 작가들의 입소문만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문단이라면 얼마나 큰 권력의 부작용이 팽배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실상 등단 제도는 이러한 문단 정체를 막아주는 순기능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신인 작가들에게는 얼마간의 상금과 함께 공식적인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한걸음 더 확신을 가지고 목소리를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에너지를 채워 넣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등단 장사이다.
등단이라는 이름의 강매
첫 시집을 내기 전부터 SNS를 통해 매주 신작 시를 발표해 왔다. 나와 소통하는 팔로워 중에는 문예창작과 지망생부터 재학생까지, 고등학생부터 이십 대 초반인 친구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날아온 장문의 메시지가 나를 기함하게 했다. 메시지의 요지는 이랬다. 이십 대 초반의 학생이었는데 모 문예지에 자신의 시가 당선이 되었다고.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주최 측에서 최종 당선 확정을 위해 등록비를 요구하더란다. 뿐만 아니라 추후 문예지가 출간되면 의무적으로 홍보를 위해 몇 권 이상을 구매해야 한다고. 메시지 속 그녀는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인경님, 원래 등단을 하면 증명서 같은 게 유료로 발급되나요?
왜 그렇게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문학에 대한 순수를 짓밟은 그 단체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등단’과 동시에 환멸감을 먼저 느끼게 된 그녀에 대한 동질감 같은 것이 뒤섞였을 것이다. 나는 ‘돈 주고 등단하지 마세요. 문예지 정기 구독이든 협회비 납부든 대가를 요구하는 매체는 냉정하게 무시하세요’라는 내용의 장문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내 계정 피드를 빌어 또 열변을 토해냈다. 상금을 주면 줬지 되려 돈을 요구하는 곳은 정상적인 매체일 리가 없다고. 알고 보니 등단 장사가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지망생들이 수두룩했다. 어떻게든 문예지 발간을 이어나가려는 입장과 어떻게든 등단을 하고 싶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돈을 받고 등단을 시켜준 후 그 신인 작가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작품들을 더 널리 노출시키기 위해 절실하게, 혹은 효과적으로 문예지 홍보를 한다던가, ‘북 토크’나 ‘신작 낭독회’를 정기적으로 열어준다던가. 돈을 받고 등단시켜주는, 등단 장사를 하는 곳이 그런 노력을 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비단 등단 장사를 일삼는 문예지뿐만 아니라 협회라는 이름의 몇몇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입회비를 내고 단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과연 내가 문단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얼마나 제대로 공론화를 도와줄 수 있을지, 혹은 신작 발표 플랫폼을 확장시킴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노력하는지 의아스러웠다.
나의 꿈은 좋은 시인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등단 경로로 원고가 몰리는 현상이 도드라진다. 사실 대형 문예지나 중앙 신춘문예를 통해 발표되는 등단작들은 경쟁률이 높은 만큼 검증된 작품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새로운 작품을 읽고 싶다면 굳이 검증을 거치지 않은 비등단 작가를 발견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이미 기성 작가들의 인정을 받은 등단 작가의 글을 쭉 살펴보는 것이 시간 관계상 더 효율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비등단 작가의 숙제는 용기를 내어 활동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다.
앞서 서두에 ‘비등단 작가의 삶이 여전히 구분되어 있다는 현실은 씁쓸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다. 사실 자신의 작품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다양하게 노출시키는 것. 즉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를 알리고 브랜딩하는 것은 비단 비등단 작가에 국한된 숙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노 사회, 즉 개인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독자들은 점점 확고한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고 있다.
1년 전쯤,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은, 그리고 그 기준을 정하는 객체는 ‘독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이 어떤 매체나 플랫폼으로 넘어가는 순간 권력이라는 벽이 생긴다고. 권력의 벽을 마주한 순간부터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용기가 되어 버린다. 2016년 대두되었던 문단 내 성폭력 역시 이러한 권력 이해 관계에서부터 비롯되었고, 나 역시 그 시기에 엄청난 환멸을 느꼈으므로 문제의 근본을 찾는 일에 오래 골몰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은 작가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를 의식하는 순간 대중성의 굴레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제한한다. 독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스스로의 색깔을 가질 수 있을 때 오롯이 작가 자신만의 소신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청탁 없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나요?
서른 살을 목전에 둔 2017년 겨울, 무수한 낙방을 겪은 후였고 이러다 시인이 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잠을 설칠 때였다. 신춘문예에 투고하기 위해 골라 놓은 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우체국으로 가서 기대와 희망을 담아 부칠 것인지. 하지만 이번에도 낙방한다면 또 다시 용기 낼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매년 ‘이번 딱 1년만 더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하자.’라는 생각으로 신년을 맞이하곤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패배감과 무력감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이번엔 될 것 같아’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다가도, 아쉬운 결과가 나오는 순간 그토록 아끼던 시들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내 글에 확신을 주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되는 것이 미안했다. ‘주간 백인경’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SNS를 통해 접하는 시란 ‘하상욱’류의 개그를 더한 짧은 글귀가 주를 이루었다. 계정을 만들 때만 해도 나의 목적은 시집 출간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내 시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유행하는 간질간질한 느낌도 아니었고 재미있는 개그 요소가 들어간 글도 아니었으므로 초반에는 계정을 키워서 성공하겠다!라는 기대보다 단순히 내 시들을 스스로 발표하는 데에 더 의의를 두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서인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럴수록 욕심이 생겼다. 피드가 아닌 책자로 시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잦아졌고, 따뜻한 응원에 용기를 얻어 출간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책을 낸 후에는 어떻게 홍보하고 활동해야 할지 얼떨떨해서 많이 헤맸었다. 출간 기념 북 토크를 한 번 가진 이후로 별도의 오프라인 홍보나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는데 생각해보면 이 점이 가장 아쉽다. 사실 『서울 오면 연락해』는 텀블벅에서 후원을 받긴 했지만 출판사를 끼고 세상에 나온 책이다. 독립출판도 물론 생각해봤지만 당시 직장에 다니고 있었던 터라 유통이나 물류관리에 대해서 오롯이 시간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책을 위한 홍보만큼은 출판사에 의존하기보다 가능한 스스로 하고 싶어서 독립출판물 페어나 독립서점에 책을 입고하기 위해 문의했더니 ‘독립서적만 취급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실질적으로 물류관리와 유통을 제외하고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제작 과정, 즉 표지 디자이너 콘텍트부터 목차 정리, 펀딩 광고 운영까지 대부분 직접 해결했기 때문에 조금 억울했다. 어느 날 입고를 거절한 서점에 갔을 때 수많은 독립서적들 가운데 대형 출판사의 시집들이 알록달록하게 꽂혀 있는 걸 보고 뭔가 이방인 같은 슬픔을 느꼈다. 독립서점 유통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 전시와 낭독회였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비롯해 총 다섯 번의 전시를 했다. 그중 직접 작가들을 섭외하고 기획한 전시는 두 번이었는데 할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전시 안 해!’라고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전시는 독자들과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임이 틀림없었기에 어느새 지난한 고생들을 잊고 틈만 나면 새로운 전시 기획을 끼적여보는 것이었다.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장소 섭외가 일순위였다. 첫 번째 개인전은 연희예술극장에서 주최한 ‘업사이클링 프로젝트’ 아티스트로 선정되어 무료 대관이 가능했다. 하지만 늘 이러한 요행만을 바랄 수는 없는 일, 우선 버젓한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겠다는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했다. 카페나 작업실 등 모든 장소가 전시장이 될 수 있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전시 장소가 결정되고 나면 어떤 형태로 인쇄하고 배치할지 정해야 한다. 2019년 연희예술극장에서 열린 첫번째 개인전 〈광시증〉에서는 층고가 높고 넓은 공간의 특성을 이용해서 가로 150센티미터, 세로 200센티미터에 이르는 현수막 재질의 원단에 시를 인쇄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볼 수 있도록, 런 어웨이처럼 걸을 수 있는 무대를 설치하고 무대 위를 오르내리며 시를 관람할 수 있는 형태였다. 전시 종료 이틀 전에는 밴드 ‘에코 앤 더 머신’과 협업하여 시 낭독 퍼포먼스와 더불어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시 행동 예술Poem-Art Performance’이라고 명명되는 에코 앤 더 머신의 세계시선은 음악 공연과 시 낭송이 결합된 퍼포먼스인데, 세계시선의 묘미는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통해 매 회차마다 색다른 볼거리를 준다는 것과 모든 낭독 음악이 악보 없이 즉석에서 이루어진 즉흥 연주라는 점에 있다. 전시장에서 발표했던 15편의 시 중 6편의 시를 낭독한 후,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이어갔다. 질문은 보통 ‘시 쓰는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2021년 가을에는 회화 작가들과 함께 다원 예술 전시를 진행했다. 펜화를 그리는 김정용 작가와 공동으로 기획했는데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문학과 회화로 풀어내면 재미있는 시선들이 나올 것 같았다. 김정용 작가와 더불어 넌지 작가, 이주영 작가가 회화 작가로 참여했고 나와 김누누 시인이 문학 작가로 참여했다. 전시 제목으로 쓰인 공동 주제는 ‘연결 혹은 다수결’이었고 5명의 작가들이 각자 포스터 제작, 배너 제작, 작가 인터뷰, 언론 홍보, 기사 작성, 공간 기획 등 업무를 자진해서 분배했기에 준비부터 철거까지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문학작품의 관람객뿐 아니라 회화작품을 보러 오신 분들께도 문학이라는 작품을 보여줄 수 있었으므로 보다 한층 다양한 관람객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2021년의 마지막 전시는 ‘빈칸 아트페어’ 참여로 마무리 지었다. 주식회사 트라이드가 개최한 빈칸 아트페어는 작가와 관객 사이의 벽을 없애고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행사로, 52개 팀이 3일간 상주하며 직접 작품을 소개했다. 나는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 크루인 어반스트라이커즈urbanstrikers의 멤버로 참여했다. 가로 세로 각 2미터의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설치할 수 있었는데 우리 팀은 이동식 작업대인 철제 가설물을 이용하여 각자의 작품을 관객이 직접 걸거나 부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나는 관객들이 시를 골라 원하는 위치에 매달거나 연결할 수 있도록 2019년에 전시했던 〈광시증〉의 시들을 행 단위로 잘라 커다란 뭉치로 만들었다. 정말 많은 관객들이 참여해준 덕분에 3일이 지난 후에는 설치물 전체가 거대한 한 편의 시처럼 보였다.
‘재미있는 관객 참여형/소통형 문학 전시’를 통해 시와 독자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싶었기에 항상 전시 프로그램에는 애프터 파티나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함께 넣었다. 늘 온라인으로만 대화하던 독자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의 가장 좋은 점은 독자의 실체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는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면 용기와 책임감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낭독회 역시 꾸준히 진행하고 있던 컨텐츠였다. ‘X월의 시소see saw’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공간을 대여하고 매월 신청자를 받아 각자 좋아하는 시를 낭독했었다. 새로 쓴 시를 발표하고 싶은데 마땅히 투고를 받는 곳이 없을 땐 친구가 운영하는 작은 바를 빌려 신작 낭독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 많은 제약이 생겼다. 대면 없이 신작을 발표하고 알리기 위해서는 홈페이지 구축, 메일링 등 온라인을 활용해야 했다. 글을 열심히 쓰는 것은 작가로서 당연한 의무고, 이제 어떤 식으로 자신을 알릴 수 있을지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이를 위해 다른 분야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고민하고, 낯선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은 시선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등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작품을 발표해?’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홈페이지, SNS, 전시, 낭독회 등 원한다면 작품을 세상에 발표하는 방법은 많다. 차이가 있다면 원고료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작가라는 직업으로서의 정체성을 혼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나만 해도 시를 써서 벌어들인 돈보다 SNS에 시를 업로드한 후 게시물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광고비라던가, 전시에 필요한 소품 구매 비용 및 인쇄비 등 시를 발표하기 위해 쓴 돈이 더 많다. 다행인 건 시인으로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접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등단 작가들의 삶이 궁금했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밥벌이를 하며 얼마나 충분한 만족을 얻고 있는가. 문예지의 원고료에 대해서는 알음알음 들은 기준이 있지만, 한정된 문예지 시장 안에서 매달 수십 편씩의 청탁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대부분의 문예지가 매달 발간되는 월간지가 아닌 계간지라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도 ‘글로소득’이라는 것이 과연 작품 발표만으로 가능할지, 어디에서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 출간일을 데뷔 날짜로 친다면 어느새 데뷔한 지는 햇수로 3년이 넘었다. 출간된 시집에 있는 51편의 시를 제외하면 일곱 번의 지면 발표, 다섯 번의 전시회, 두 번의 신작 낭독회를 통해 20편이 넘는 시를 발표했다. 발표 작품에는 시뿐만 아니라 메일링 서비스로 발표한 72편의 에세이도 포함된다. 작가로서 나는, 느리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 그걸 판단하는 건 여전히 자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