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 발생 기계, 비평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비평을 시작한 지도 벌써 만 2년이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이 새삼스럽다. 연말이라 더욱 소회가 깊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장에서 보낸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니 속이 울렁거리는 설렘으로 괜히 마음이 벅차다. 오늘은 작품과 작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평론과 평론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등단 후 썼던 모든 글 중에 ‘나’ 자신에 관한 가장 많은 말을 하게 될 글이라는 걸 직감하기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옮기는 일이 다소 묵직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나’다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즐겁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글은 독자, ‘읽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므로 미리 나는 벌써 행복하다. 평론가는 세상에서 가장 열렬히 읽기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행어라서 쓰는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어쩌다’ 비평을 시작하게 된 내게 한국문학(장)은 열망과 선망의 대상이라기보다 아는 것이 조금도 없는 채 온몸으로 겪어내고 부서지면서 사랑하게 된 여전히 미지의 신비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매 순간이 낯설고 아프면서도 바로 이곳이야말로 ‘나’를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 없는 수많은 매혹적인 ‘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에 나는 앞으로도 이 문학(장)이라는 미지수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다. 미지수가 품고 있는 변수에는 시와 소설, 희곡 그리고 평론이 있는데 나는 특히 평론을 편애한다. 평론은 나머지 변수들을 모두 끌어안으며 사랑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개별 작품이 지닌 각각의 고유한 매력을 더듬고 짚으면서 독자에게로 가닿을 미래를 응원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품들을 격려하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와 소설, 희곡이 작가적 예술이라면 평론은 독자적(of readership)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평론의 ‘사랑’은 포장하지 않는다. 평론은 비평적 예리함과 엄정함으로 무장한 언어이기에 작품을 과하게 미화하거나 지나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문학적으로 ‘완벽한’ 작품을 발굴하거나 만드는 것이 평론의 궁극은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완벽해 보이는 작품에서조차 그것의 한계와 아쉬움을 찾아내어 작가와 작품의 세계를 미리 ‘새로고침’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사랑받기 어렵다. 하지만 괜찮다. 평론가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비평 역시 문학이라는 언어 예술에 포함되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이기에 ‘비평의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비평이야말로 그 어떤 작품보다 독자와의 만남을 갈망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의 읽기’를 읽어주는 ‘너’와의 만남을 고대한다고나 할까. 비평가-독자로서 내게 나의 글쓰기는 다음과 같이 오직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네’가 보기엔 어떠니?” 그렇다면 비평가-독자는 조금 외로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에게 ‘나의 글’을 읽는 ‘너’의 목소리는 투명하고 희미한 그러나 분명 있다고 믿어야만 하는 간절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비평의 가장 큰 매력은 ‘나’의 읽기를 독자들과 공유한다는 데에 있다. 항간에는 평론을 읽는 사람은 평론가와 작가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절반쯤은 사실을 담은 말이다. 실제로 그간 비평을 발표해 오면서 비평의 독자들을 실감할 기회는 몹시 적었다. 동료나 친구들이 읽고 난 후기를 들려주기는 하지만 그 외의 일반 독자들의 의견을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창구는 거의 없다고 느낀다. 2021년 이전에는 비평이 독자와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 비평가-독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의 ‘나’ 역시 도서관에서 여러 비평집을 찾아 읽었으나 나의 그러한 읽기-수행이 저자들에게 가닿을 방도는 딱히 없었다고 여겨진다. 간혹 블로그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에서 독자분들의 후기를 보지만 그 숫자는 매우 적고, 있다 하더라도 주로 글 내용에 대한 요약이거나 독해 난이도에 관한 평일 때가 대다수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혹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비평이 어렵다는 말은 아주 유구하게 내려져 오는 누구도 반박하지 않는 오래된 속담처럼 느껴지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실은 “맞아, 그렇지……” 하고 생각을 정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평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텍스트에 대한 분석을 기초 삼아 출발하고 이론적·문학적 평評을 해내야 하므로 엄격하다. 텍스트를 느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해하며 비교하고 새로운 의미의 층위에서 정돈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것에 대해 쓰다 보면 글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비평이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해야 한다’는 책임에서 다소 자유로워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어려운 것은 어렵게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비평이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쉬운 문법과 논리로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려운 글을 소화할 수 있는 독자성을 생성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북클럽, 독자를 성장시키는 독자
어려운 글을 읽는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현학적인 글을 읽는 ‘나’에게 도취되어 자족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고, 조밀한 텍스트의 결을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따라가며 새로운 해석의 세계에서 이해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혹은 이해에 그치지 않고 이해한 바를 논평하며 비판적으로 자기 독서를 갱신하는 깊은 즐거움을 맛보는 독자도 있을 테다. 독서는 자유로이 행해져야 하므로 어떠한 당위를 곁들이기 어렵지만, 그러나 평론가로서는 아무래도 전자의 경우보다는 후자의 경우들을 경험하기를 추천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독자가 성장하고, 성장한 독자들과 함께 작가와 비평가, 그리고 문학(장)이 최종적으로 ‘새로고침’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비평가들이 단지 지면, 글로써만 자신의 존재와 생각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얼마간의 아쉬움, 불만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와 비평, 그리고 작품의 직접적인 만남이 가능하다면 기꺼이 나는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요컨대 비평은 작가와 독자를 길러낼 수 있는 (그래서 사랑이며 사랑할 수 있는) 우주의 유일무이한 기적 같은 ‘읽기’이자 ‘쓰기’다.
평론 활동을 시작하면서 서초구에 자리한 ‘책방오늘’에서 8명 내외의 독자님들과 함께 계절마다 북클럽을 진행해왔다. 때로는 계절감에 어울리는 책들을 선정하여 흰 눈이 내리는 장편소설들을 모아 읽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 혹은 ‘폭력’과 같은 주제어로 선정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읽기도 했다. 시와 소설, 그래픽 노블, 문학상 수상 작품집 등을 함께 읽었고 학생, 주부, 회사원, 작가 등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 직업의 독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자유롭게 소감을 나누었다. 다른 북클럽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내가 진행하는 북클럽에서는 텍스트를 읽는 법을 공유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책을 덮은 후의 감상을 나누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결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편안한 후기와 감상은 ‘제2의 독서’─비평 행위를 위한 여유로운 출발점이다. 매 회차가 끝날 때마다 독자들은 책을 읽기 전보다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며, 답을 찾지 못한 수많은 물음표를 텍스트 여기저기에 붙인 채 집으로 돌아갔다. 반드시 평론가여야 북클럽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평론가가 하는 북클럽이라면 나는 독자들과 작품을 ‘읽는 법’을 공유하고 그들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힘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취향을 알고, 스스로 텍스트의 작품성을 판단할 수 있는 독자는 문학의 가장 큰 재산이다. 재산일 뿐만 아니라 문학의 기반이며 미래의 작가들이다.
가까스로 만 2년이 되어가는 고작의 시간이지만, 그동안 내가 만난 많은 독자들은 평론가의 말을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히 ‘해설’ 지면에서 마치 논술 문제의 모범답안을 읽고 머리에 각인시키듯 자신의 독해와 다른 지점에서 ‘해설’의 견해를 ‘정답’으로 받아들이고 작품에 대한 하나의 정리된 ‘해법’을 손에 쥐면 독서를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북클럽을 진행하는 동안 내가 깨부수고자 했던 가장 큰 고정관념이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완전한 독서는 어디에도 없으며 하나의 작품은 한 개가 아니라 최소한 그것의 독자들 수만큼 새로이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론의 말은 유일무이한 정답이 아니라 다만 수많은 독해 중 하나일 뿐이며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다른 독해들이 태어나도록 돕는 하나의 조력하는 물길이라고 말이다.
이런 작업은 비평가가 계간지나 문학 단행본으로 발표하는 지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북클럽이나 북토크, 제도권 밖의 아카데미아에서 열리는 강의 등,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가능하다. 비평의 언어가 소통의 언어를 만나고 독자들의 반응과 질문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때 갱신되는 ‘성장’이 있다. 그건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비평가의 성장이기도 한데, 비평가 역시도 일반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받고 글을 쓴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언제나 독자 세계의 1/n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부터 나는 일반 독자라는 말을 사용해오고 있다. 이제 이 말에 대해 조금 설명을 보태보려 한다. 이 글에서의 ‘일반 독자’는 버지니아 울프가 정의하였던 일반 독자common reader를 말한다. 원래 이 말은 영국의 작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이 처음 쓴 말이었으나 울프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한정된 지식과 권력을 누리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 “문학적 편견이나 교조적인 학식에 오염되지 않은 채 자기만의 독자적인 독서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독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 읽기 자체를 즐기면서 그 즐거움을 통해 창조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탁월한 사람”1으로 재정의한다. 주의할 점은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비평가 역시도 어떤 경우에는 일반 독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독자에서의 ‘일반common’은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가르는 경계의 용어가 아니라 “어떤 충고도 받아들이지 말고 당신 자신의 본능을 따르고, 당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 당신 자신의 결론에 도달”2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지평에 선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성과 판단, 해석, 그리고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독존의 정원에서 탈출하여 무수히 많은 다양한 읽기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니 북클럽을 진행하는 평론가 역시도 일반 독자가 되기 위해, 그 자리에서 한 명의 ‘독자’가 되어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계절마다 한 번씩 발행되는 문학 계간지와 드물게 쓰게 되는 해설 지면은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와 만난다기보다, 자신의 언어와 논리를 조금씩 축적해가는 평론가의 일방적인 말하기 국면에 가깝다고밖에 볼 수 없다. 북클럽은 비평가-독자가 ‘일반 독자’의 일원으로서 독자를 길러내는 특별한 ‘독자’의 시간이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독자평을 하나만 예로 든다면,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초인적 힘의 비밀』(움직씨, 2022)을 읽고 저자의 인생에 대한 태도가 ‘너무나 자기의 이야기 같았다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오십 대 기혼 남성 독자가 절절하게 전해오던 감상이다. (『초인적 힘의 비밀』은 저자와 동치되는 중년의 레즈비언 캐릭터가 유년 시절부터 현재 시점까지를 회고하며 퀴어 정체성을 자각하는 과정, 퀴어로서 사랑하는 일, 파트너와의 만남, 이별, 그리고 가족사 전반을 풀어놓은 서사다.) 그는 삶의 어려움, 해결할 수 없는 난제와 가치관의 혼란을 느낄 때마다 각종 운동─사이클링, 요가, 무술, 헬스 등에 무서울 만큼 골몰하였던 인물의 태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확실한 편견이지만, 오십 대 이성애자 중년 기혼 남성이 레즈비언 퀴어 만화에 공감하리라고 생각할 확률은 적다. 그러나 북클럽 참여자들 중 가장 열렬하게 이 책에 공감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더불어 그는 책을 읽고 나서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영역, 레즈비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고 들뜬 감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때 당시 북클럽 리스트를 좀 더 ‘일반’적인 공감대의 형성이 쉬운 도서들로 했어야 하나 후회했는데, 최종적으로 모든 회차를 마치고난 후 그것은 단지 나의 기우였음이, 독자에 대해 평론가로서 편협한 시선을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북클럽 리스트를 짤 때 나는 부러 독자들이 잘 사지 않을 것 같은 책들로 고를 때가 있다. 독자들의 세계에 전에 없던 새로운 세계를 문학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독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그 누구보다 이미 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3. SNS 라이브 방송, 유튜브 채널: 영상 시대의 비평
북클럽과 비슷하게 출판사와 편집자가 주도하는 신간 출간기념 북토크도 독자와 작가, 작품이 만나는 행사다. 평론가는 보통 북토크를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참여하게 되므로 독자와의 만남이라기보다 작가, 작품을 독자에게 건네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작품이 쓰여지기까지의 과정이나 특별한 일화, 혹은 작가가 작품에 대해 가지는 개인적인 소견이나 감상 그리고 작품 자체에 관한 이야기 등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진행한다. 그간은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줌zoom,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으로 댓글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는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올해부터는 소규모 인원(최대 20명 정도)의 신청을 받아 대면 행사가 점차 늘고 있는 형국이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온라인 행사의 경우 작가는 독자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댓글을 통해 현장에서 진행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 반응을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의 경우 독자들의 즉석 질문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지만 행사가 끝나고 사인을 받거나 독자 개개인이 직접 작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을 물어보고 감상을 전할 수 있으므로 양적인 소통의 규모는 적어지지만 그 밀도는 훨씬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를 겪은 후 출간 기념 북토크는 그래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병행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어서 역설적으로 코로나19 상황을 계기로 작가와 작품, 독자의 접촉 양상은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변화했다고 느껴진다.
물론, 이때 평론가는 소통 과정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하게 되므로 일반 독자의 위상에서 조금 더 비껴나게 되지만 실제로 작품을 읽은 대중 독자들의 반응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사건 속에 놓이므로 그의 독서 경험 역시 북토크를 매개로 변화를 겪게 된다. 작품이 평론가들이 가늠하는 문학성과 비평적 평가의 바깥에서 다수의 독자에게 어떻게 가닿는지를 실제로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가령, 평론가로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작품이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그들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소감을 들으면 문학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작품 하나가 어떻게 생명력을 뻗어나가는지, 그리고 평론가의 비평이라는 것은 그러한 활력의 고작 하나의 자리일 뿐이라는 것, 정확히 1/n만큼의 비중을 차지할 뿐이라는 걸 여실히 실감한다. 평론가는 읽으면서 돈을 받는 전문 독자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역시도 일반 독자general and common reader인 것이다. 그러니 비평은 언제나 스스로를 경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한편, 평론가가 독자에게 작품을 소개하고 전달하는 또 다른 창구로 유튜브 채널이 있다. 평론가가 단독 혹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중에는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세 가지 유형이 있는 듯하다. 먼저, 문학 계간지 『자음과모음』에서 운영하는 채널 〈자음과모음〉에 ‘시소’(이 계절의 시와 소설)가 있다. 〈자음과모음〉에서 매 계절마다 선정된 시와 소설 각 1편을 선정하여 총 사계절동안 선정된 작품과 작가, 평론가의 대담을 수록하여 단행본으로 발행하는 이 프로젝트는 2021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두 번째 회차를 만나고 있다.3 계간지 편집위원(평론가)과 외부 심사위원(문학 관련 종사자)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후보작들을 어떻게 읽고 평가하는지 그 과정을 직접 영상으로 담아 유튜브 채널로 공개한다. 나는 2022년 봄의 ‘시소’에 외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고, 해당 기획이 독자와 평론가 그리고 작품을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느꼈다. 대개 계간지 출판사가 주관하는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선정 과정은 작품에 대한 최종 심사평으로 정리되어 발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심사과정을 구술 대담으로 정리한 지면도 있지만 활자로 정리된 지면이라는 특성상 개별 작품에 보다 밀착하여 생생한 평을 느끼기는 어렵다. 구술 대담이긴 하지만 비평적 언어로 정리된 문장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심사과정의 현장을 공개하여 서로 좀 더 가볍고 쉬운 언어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지면 전달이 가진 한계를 정확하게 극복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의 댓글이나 후기를 보면 직접 여러 표정과 몸짓을 동반하여 작품을 비평하는 현장성 넘치는 행위를 목격하면서 ‘평론가’라는 존재와의 거리감을 줄이게 됐다는 내용들이 꽤 있다. (평론은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은 곧 평론가와 독자가 느끼는 거리감이 크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독자가 평론(가)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체감이 곧 평론을 읽는 일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이나 국제작가축제 등의 행사에서만 등장하던 평론가들이 독자를 향해 직접 손을 뻗을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영상 미디어로의 소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유형으로는 계간지나 출판사의 바깥에서 자발적으로 동인crew을 꾸리고 비평 텍스트 또한 자유롭게 선정하여 독자와 소통하는 채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문학리뷰방송 〈리액추〉다. 〈리액추〉는 문학평론가와 소설가, 사회비평가로 구성된 패널들이 매달 한 권의 책을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돌아가며 선정하여 각자의 리뷰를 나누는 형식으로 매주 1회씩 업로드된다. 말하자면 문학 잡지에서의 작품 조명 지면이 영상화된 것이다. 계간지들이 작품에 관해 1년에 네 번만을 다룰 수 있는 것에 비해 매달 한 권의 작품, 총 열두 권의 문학/비문학 저서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지면의 양적 한계를 극복한다. 독자들에게 이 작품을 추천할 것인지 비추천할 것인지를 거수하며 한 책에 대한 리뷰가 마무리되는데 이는 계간지에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솔직한 ‘평가’이기에 독자들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서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역대 선정된 책들을 보면 현재 2022년 11월 27일 기준으로 가장 최신 도서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문학동네, 2012)인데 이는 얼마 전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녀의 책 판매 부수가 증가하고 많은 독자들이 읽기 시작한 동향을 즉각 반영한 선정이다.4 뿐만 아니라 일본 미스터리 장편소설 『흑뢰성』(요네자와 호노부, 리드비, 2022) 그리고 올 한 해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비문학 도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곰출판, 2021) 등 매우 많은 일반 독자들이 읽었으나 문예 잡지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은 책들을 선정하여 비평이 독자들의 수행을 따라가며 언어와 사유를 겹쳐보려는 동시대성의 적극적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리액추〉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텍스트 선정과 대담의 형식이지만 동시대인의 독서가 아니라 고전문학과 페미니즘이라는 특정한 테마 안에서 한국 문학과 영문학의 접속을 시도하는 채널 〈옥상정원〉이 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1929) 등과 같은 영미 문학의 정전canon을 현재의 여성주의 시각에서 다시 읽고 한국 문학 작품과 확장적으로 연결 지어 비평하는 채널이다. 가령, 『자기만의 방』을 다룬 회차 중 세 번째 영상인 ‘거울 그리고 82년생 김지영 <자기만의 방> Episode3’에서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과 함께 다룬다. 전승민은 책의 한 대목을 언급하며 (9분 30초, “어떤 식으로든 여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의식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쓰인 것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글쓰기에 관한 울프의 견해가 『82년생 김지영』이 조사project하는 텍스트의 의식을 겨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자 심진경은 “기존에 여성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어떤 차별을 받았고 그런 의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거죠. (중략) 거기서 출발하되 거기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10분 41초)라고 응답한다. 약 100년 전 영국 작가의 작품과 동시대 한국 문학의 접속,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른 언어권의 문학 작품들이 비평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장을 생성하는 매체로서 유튜브 채널이 기능한다.
평론이 문학이고, 언어 예술이며 텍스트에 대한 메타적 예술이기도 하기에 어디까지나 1편의 완성된 글, 지면 위의 활자로 발표되는 형식이 공식적으로 가장 중요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적인 매체의 형식이 비평의 자유로움을 직간접적으로 제약하기도 한다. 담론의 역동성, 독자에게로 다가가는 좀 더 쉽고 유연한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면이 청탁에 의해 설정되는 가장 큰 한계─이러한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길로서 비평은 여러 소셜 네트워크와 온라인 매체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
4. 비평-기계, 노이즈 발생 장치
일 년 전, 〈옥상정원〉을 시작할 때 가장 염려했던 부분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영상만 생산되어 누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현재 가장 큰 걱정은 독자들의 관심만큼 그에 상응하는 개수의 영상을 빠르게 업로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평이 받는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작품을 선별해서 읽을 것과 읽지 말아야 할 것을 독자에게 제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5 물론, 비평은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가린다. 때로 유해한 문학 작품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비평의 목소리는 그 어떤 작품에 대해서도 ‘읽지 말아야 할’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평의 견해는 오히려 그러한 평가를 도착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삼아 텍스트 사이로 난 길을 어떻게 헤맬 것인지 그 방법론과 방향성을 제시한다.6 제작 비용과 시간, 유튜브 채널이 작동하는 알고리즘 등 여러 우려 사항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심차게 채널을 시작한 이유는, 시와 소설이 개별 영상 작품이 아니라 넷플릭스와 왓챠 등의 OTT 플랫폼 자체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청탁에 의해 만들어지는 비평문들이 문학 비평의 전부이기를 고수하는 것은 비평이 어쩌면 제 스스로 독자와 멀어지는 선택이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지면 밖의 영역에서 독자와 비평이 만나게 되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위상을 고려하면, 비평은 독자에게 노이즈를 발생 시키는 기계다. ‘기계’는 레비 브라이언트Levy R. Bryant의 개념으로 “입력물input을 변환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역능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물output을 생산하는 조직들의 체계”이자 “행위주체성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관계”를 생성한다.7 브라이언트의 기계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닌 역능power과 그것들이 생성해낼 수 있는 잠재적인 관계이며, 그는 이것들을 통해 억압적인 회집체assemblage를 해체하고 존재들의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고자 한다. 존재자들은 모두 기계이며 세계는 이들이 상호연결되어 있는 회집체다. 기계는 구체적인 실물의 형태를 가진 유형 기계(전통적인 ‘기계’의 의미에 보다 가까운─가령, 컴퓨터, 책, 피아노 등)와 그렇지 않은 무형 기계(가령,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악곡, 소설이나 시, 수학 공식 등)로 나뉘는데, 그는 이러한 기계들이 회집하는 방식을 통해 기존의 회집체를 변화시키고자 한다.8
브라이언트의 개념을 차용한다면 무형 기계9인 비평의 역능은 작품sender이 독자receiver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잡음noise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잡음은 메시지의 송수신을 방해하는 효과적이지 않은 외부 자극이다. 잡음의 강도가 커질수록 발신자가 보낸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오롯이 도달할 확률은 줄어든다. 문학 독서 역시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지만 오독을 향한 소통 행위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소통과 다르다. 하나의 작품은 최소한 그것을 읽는 독자의 수(n)만큼 새로이 생성된다. 이때 새로 생겨나는 각각의 작품들은 발신과 수신 내용의 확장적인 불일치에서 연유하는데, 필연적인 이 불일치를 촉진하는 촉매로 작용하는 기계가 바로 비평(가)인 것이다. 발신자(작품)는 주체로, 메시지를 받는 수신자(독자)는 객체로 위치되기 쉽지만 문학이라는 자장matrix 안에서 주체와 객체는 모두 준-객체10다. 준객체는 주체와 객체의 전통적인 위계를 끌어내리는 사이의 지위로 “세계에서 다른 기계들을 끌어모으는 역동적인 누빔점”11이며 “다른 존재자들을 회집체로 함께 누비거나 회집”12하는 “상호주관성의 놀라온 구축자”13다.
문학장 안의 모든 주체/객체가 준객체라면 비평(가) 역시 준객체이며 특히, 작품과 독자 사이에서 잡음을 증폭시키는 기계다. 새로운 독서를 제시하고 텍스트의 확장적·해체적 읽기를 통해 하나의 작품이 독자에게 가닿는 수많은 창조적 오독들을 생산해내고 또 그러한 생산을 조력하는 것이 비평인 것이다.
비평이 작품과 작가, 그리고 독자의 삼항 구도에서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비평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 작품이자 언어 예술이 되므로 비평(가) 역시도 발신자sender와 수신자receiver 각각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다. 가령, 비평(가)는 작품으로부터 무언가를 건네받을 때 수신자의 위치에, 그리고 독자와 작품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때는 발신자sender의 위치에 놓인다.14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모델에서 비평은 대개 하나의 고정된 항으로 여겨지곤 한다. 시집과 소설집에 수록된 해설은 다만 본문에 대한 부록이라고 생각하거나 작품을 내려다보는 구도에서 그것들을 평가하고 단정하는 버드아이뷰bird’s eye view의 위계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평도 하나의 작품work이다. 그도 발신자로서 독자의 수신을 기대하고 수신자로서 독자의 반응을 기다린다.
말과활아카데미15에서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비평 대담 〈BE평을 만나다〉는 그간 독자적인 행사의 주인공으로서 소외되어 있던 평론가와 독자들과 만나는 행사를 가졌다. 1회차 심진경 평론가(「더러운 페미니즘」), 2회차 김미정 평론가(「포스트휴먼, 새로운 지도를 제작하기」), 3회차 오혜진 평론가(「퀴어함은 문학장을 넘나들고」), 그리고 4회차 양경언 평론가(「우리, 살아있는 언니들의 시」)로 진행된 행사는 현장 참여와 온라인 줌 참여 신청을 병행하여 진행되었으며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독자들의 뜨거운 응답을 받았다. 비평가들이 주요하게 발표하였던 비평문을 선정해 독자와 함께 논해보고, 아직 지면으로 발표되지 않은 논의들, 최근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적 대화, 그리고 퀴어, 페미니즘, 포스트휴먼, 여성 시 등의 의제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나눔도 진행되었고, ‘비평’ 자체에 대한 이야기와 최근 문학장에서 발표되고 있는 비평에 대한 열띤 질의로 이어졌다.
동료 평론가들은 종종 비평의 독자들이 보이지 않고 글에 대한 반응을 확인할 수 없어 계속해서 써나가는 일이 힘이 들 때가 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행사를 통해 비평의 독자들은 마치 비평가와 같은 마음으로 발표되는 문학 비평의 논의들을 따라 읽고 있었으며, 비평을 통해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동시대에 관한 성찰과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개 시나 소설에 대한 독자 반응은 출간되는 단행본의 구매와 이후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 등에 책에 대한 후기 작성으로 가시화되는데 비평의 경우 평론집은 수 년만에 한 권 출간되는 속도가 보통이므로 시나 소설과 동일한 방식으로는 독자 반응을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비평(가)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관찰자의 시선이다. 그렇기에 그 시선 끝에 가닿는 풍경, 텍스트가 단지 객체-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비평(가) 역시도 풍경의 일부로서 대상과 감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거나 못하는 시선은 대상을 객체의 지위로 포획하여 박제시킨다. 살아 있지 않는, 소통 불능의 오브제로 추락한 대상-텍스트는 애호가의 스크랩북을 채울 뿐이다. 비평가는 수집가나 애호가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수집되어 숨을 멈춘 것들의 세포벽을 허물고 숨을 불어넣어 살려낸다. 텍스트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텍스트와의 감응을 비평(가) 자신의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일반 독자들에게로 다시 돌려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평은 발신을 의무로 하는 수신기, 오독의 노이즈를 증폭시키는 기계다. 아름다운 수사는 비평의 옷자락쯤에 불과한 것이다. 비평은 지면 바깥으로 뛰쳐나가 여러 가지의 방식으로 독자들을 만나고 그들 스스로 독자가 된다. 그렇기에 비평은 문학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반증의 실존 형식이 된다. 세계를 ‘나’의 해석이라는 틀 안에 잘라 아카이브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 일부가 되고 일반 독자로서 온몸으로 텍스트를 살아내는 일, 그것이 비평이다.
주석
- 김영주, 「‘문학은 공동의 땅입니다’─현대출판문화와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스트」,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28권 1호, 2020년, 19쪽.
- 김영주, 앞의 글, 같은 쪽.
- 『시소 첫번째』, 김리윤 외, 자음과모음, 2022.
- 유튜브 채널 〈리액추〉, (업로드 날짜 2022. 11. 12) https://youtu.be/9MLG34uWr0E
- 김미정, “개인적으로 한 비평 수업 현장에서, 비평(critic)은 가성비 좋은 콘텐츠라는 말을 접한 일이 있다. 오늘날 비평은, 다양한 콘텐츠에 대해 선별하고 평가할 수고를 대신해주는, 한번 필터링 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콘텐츠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다른 회로 만들기: 탈근대 문화·예술의 조건과 OTT에 대한 메모」, 『뉴래디컬리뷰』 2022년 봄호, 206쪽.
- 〈리액츄〉가 작품에 대한 비/추천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대담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부가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고, 작품에 대해 서로 충돌하는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토론 형식이 핵심이다. 비평가들의 논박 과정을 보며 독자는 텍스트를 경험하는 다채로운 방식을 접할 수 있다.
- 레비 브라이언트, 『존재의 지도』,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180쪽.
- 앞의 책, 427쪽.
- “무형 기계의 무형성은 비물질적인 유령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런 기계가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중으로 예화되거나 반복되거나 복제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울프의 소설 『파도』는 여전히 바로 그 소설인 채로 있으면서 여러 권이 인쇄될 수 있다. 더욱이, 그 소설은 그것이 취하는 유형 신체에 상관없이 여전히 그 소설이다. 그 소설이 취하는 유형 신체는 칠판 위의 분필, 종이,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의 뇌, 컴퓨터 데이터뱅크 등일 수가 있다.” 앞의 책, 53쪽.
- “준객체 또는 주체는 (중략) 기계들 사이의 관계와 상태를 끊임없이 재배치하는 이동점이다.” 같은 책, 345쪽에서 세르(Serres)의 용어 재인용.
- 같은 책, 342쪽.
- 같은 책, 344쪽.
- 같은 책, 같은 쪽.
- 브라이언트의 기계 존재론은 모든 존재자들이 평평하고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논의가 아니라 다만 존재 양식의 층위에서 동등하며,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중력에 의해 휘어지고 공정하지 않은 국면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연결 관계, 회집체를 어떠한 배치의 새로운 회집체로 바꿀 것이냐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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