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노블인가 코믹스인가

  

  그래픽 노블이란 무엇일까? 흔히 그래픽 노블은 ‘소설처럼 깊이 있는 만화’라고 정의된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만화에 대한 편견 섞인 차별적 용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만화가 소설에 비해 정말 ‘깊이’가 없는가? 그렇다면 모든 소설은 깊이가 있는가? 애초에 소설과 만화가 등치될 수 있는 매체이긴 할까? 등등. 그래픽 노블을 정의하기 어려운 데에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개념이 아닌 탓도 크다. 그래픽 노블은 서구 만화 고유 펄프 픽션들과 맺어온 관계, 60년대 만화가들과 범죄·SF 소설가들의 다양한 협업, 만화 회사들의 실험적인 시도 등 복잡한 역사 위에 정립되었다. 심지어 서구 만화계에서도 그래픽 노블의 기원이 된 작품을 꼽기 어려워한다.
  다행히 그래픽 노블이 비평 용어로 처음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비교적 명확하다. 만화 평론가 리처드 카일이 1964년, 『카파-알파Kappa Alpha Junrnal』와 빌 스파이서의 『그래픽 스토리 매거진Graphic Story Magazine』에서 진지하고 예술적인 만화를 지칭하기 위해 그래픽 노블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전설적인 만화가 윌 아이스너가 상업 만화계를 떠난 뒤 발표한 자신의 만화 『신과의 계약』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지칭하고, 만화가게가 아닌 일반 서점에 유통하면서 이 용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래픽 노블은 당대 ‘코믹스’라고 분류되는 상업 만화와는 구분되는 예술적인 만화를 지칭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매체를 끌어와 고안된 용어는 맞지만, 미국 만화의 역사와 유통 환경 등의 배경을 동원해야 설명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종종 ‘미국 만화 같은 만화’ 혹은 ‘종이로 된 예술적인 만화’라고 쓰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숙고해볼 가치가 있는 만화, 좀 더 예술성 있고 작가주의적인 세공이 들어간 만화라는 정의가 그래픽 노블에 가깝다. (한국의 만화 시장에 이 정의를 그대로 갖다 붙이다보면 그래픽 노블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상업 만화들이 예술성이 모자라지만은 않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한국에도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얽힌 비극과 그 비극이 후대에 끼치는 영향을 면밀히 묘사한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소개된 바 있다. 이란 혁명 이후 억압된 무슬림계 여성의 삶을 그린 마르안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나 스페인 혁명의 실패와 혁명가의 추락을 담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등이 한국에 소개된 대표적인 그래픽 노블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는 판이한 전통선상에 있는 듯 보이는, 마블과 DC코믹스 계열의 작품의 경우도 한국의 그래픽 노블 시장에서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다.

  

히어로 코믹스가 가볍다는 편견은 접어둬~

  히어로 코믹스는 그 특성상 그래픽 노블과는 거리가 먼 장르처럼 보인다. 일단 마블과 DC는 미국 만화 시장에서 가장 상업적인 축을 담당하며, 캐릭터의 상표권마저 작가가 아닌 회사가 가져간다. 때문에 작가주의적인 측면 대신 시장의 논리대로만 작품을 생산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 내용면으로만 보더라도 초기 히어로 코믹스나 1950~60년대 대대적인 만화 검열 시대의 만화들―당대의 모든 히어로 만화를 그렇게만 취급할 수는 없겠으나―은 너무 명확한 선악 구도로 이루어져 있거나 내용이 단순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자 일상의 고뇌가 녹아든 히어로와 좀 더 악랄한 현실이 반영된 악당들이 히어로 코믹스에 포진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는 현실적 함의가 담긴 작품들의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인종 간의 갈등을 뮤턴트라는 알레고리로 표현한 ‘X맨’ 시리즈가 그렇다. 80년대 후반에 발표된 『왓치맨』과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는 냉전체제의 비합리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히어로물을 ‘진지한’ 그래픽 노블을 수준으로 끌어올린 만화로 대표된다. 특히 미국을 둘러싼 다양한 이념 형태와 사회상을 반영한 『왓치맨』은 타임즈지에 ‘100대 영문학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씬 시티』 『300』 등의 유명 작품을 배출하기도 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는 우파적 시각과 아나키즘을 보유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만화는 ‘배트맨은 서민들의 자유를 가로막고 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회악’이라고 말하는 학자들과 이에 맞서는 시민들의 모습을 텔레비전 미디어 뉴스 장면들로 계속 등장시킨다. 배트맨이 사회악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배트맨은 범죄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그들은 공포를 통해 범죄를 압제하는 배트맨의 특성상 과학적 재사회화의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응보적 사법을 기피하는 진보적인 학자들을 범죄자를 위하는 ‘순진한 지식인’이자 정의의 집행을 가로막는 방해꾼들로 묘사한다. 여기서 응보적 사법 대신 회복적 사법을 토로하는 학자들이 피해자들의 회복까지 주장하는 측면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반면 소련과의 군비 경쟁 속에서 미국 정부의 무기로 전락한 슈퍼맨과 이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대항하는 배트맨, 그리고 아나키스트 캐릭터로 대표되는 그린애로우를 슈퍼맨과의 대립항으로 설정하여 당대 냉전체제가 품은 미국의 독재화 가능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가장 미국적인 정의를 함의해왔던 슈퍼맨이라는 캐릭터를 정부의 도구로 전복시키는 작업은 슈퍼맨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미국적 정의를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곳에 갈 수 있으며, 핵무기만큼 가공할 힘을 가진 슈퍼맨의 능력은 독재 감시체제의 권력을 비유한다. (물론 여러 코믹스에서 슈퍼맨과 미국식 우파 군사주의를 구분하는 시도가 있었다. 『슈퍼맨 언체인드』에서는 세계를 감시하고자하는 미군 수뇌부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슈퍼맨이 나온다.) 내용상 슈퍼맨은 정부가 다른 히어로들을 사냥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정부의 도구가 되어, 소련과의 전쟁을 방지하고자하는 ‘대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배트맨은 그 ‘대의’가 품지 못하는 개개인을 대변하는 아나키스트 전사로, 대의가 어떻게 손쉽게 개인의 권리를 박탈시킬 수 있는지 그 위험성을 증명하고자 슈퍼맨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작품의 우파-아나키스트적 정치사회 현실 반영 이외에도 흥미로운 부분은 많다. 배트맨의 최초 트라우마로 인한 고뇌, 투페이스·조커와 같은 오래된 악당과 배트맨이 관계하는 방식, 배트맨과 새로운 파트너(새로운 로빈)의 성장기 등이 그렇다.
  앨런 무어가 글을 쓰고 데이브 기븐스가 그린 작품 『왓치맨』은 보다 더 정교하게 당대 정치사회를 반영한다. 히어로가 금지된 1980년대, ‘코미디언’이라는 히어로가 의문의 살인을 당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이 작품은 DC코믹스의 히어로들 대신 그 히어로들을 패러디한 인물을 내세운다. 캡틴 아톰처럼 원자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힘을 지녔지만 『다크나이트 리턴즈』의 슈퍼맨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에게 이용당하는 ‘닥터 맨해튼’, 배트맨처럼 수많은 도구를 사용하지만 성격은 배트맨과 달리 저항적이지 않은 ‘나이트 아울’. 히어로 코믹스의 여성 캐릭터들이 성적 대상화되었던 역사를 함축해놓은 듯한 ‘실크 스팩터’, 퀘스천과 유사한 코스튬을 갖춘 채 극우적인 음모론을 설파하는 탐정 ‘로어셰크’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저마다 인간적 결여를 안고 있으며 어느 누구의 정의관도 완전히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히어로들이 악에 대항하는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왓치맨』은 미국이 베트남전에 승리하여 소련과의 냉전이 심화되었다는 대체역사 하에서 히어로들이 걸어가는 길을 그린다. 히어로들이 외쳐대던 ‘정의’는 미국 정부의 이념 선동과 뒤섞이며(베트남전에 참여한 코미디언이나 미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이미지가 소비되는 닥터 맨해튼, 시위 진압에 뛰어든 나이트 아울을 보라), 나중에 시대착오적이라는 여론에 휩싸인 히어로들은 법적으로 금지된다. 그리하여 대부분이 소시민의 삶을 전전한다. 오직 로어셰크만이 ‘불법’적인 히어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왓치맨』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오지만디아스’다. 그는 히어로들의 정의 놀음 따위는 진정한 세계 평화를 이루는 데에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히어로 금지법이 공헌되기 전 일찍이 은퇴한 뒤 거대한 대학살을 준비한다. 옛 히어로들이 다시 뭉쳐 코스튬을 입고 오지만디아스를 처단하려 하지만 오지만디아스의 학살 계획은 실현된다. 심지어 대학살로 인해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를 위협하는 세계의 적을 상정함으로) 미·소 간 핵무기 경쟁이 해소되고 거짓말처럼 세계 평화가 찾아온다. 만화는 말미에 오지만디아스의 계획을 낱낱이 밝힌 로어셰크의 노트가 언론사에 도착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인위적으로 건설된 거짓 평화는 언제든 무너질 수도 있음을 예고한다.
  정리하자면 만화 『왓치맨』은 거대한 국가 간의 이념 전쟁과 그런 환경에 놓인 다양한 인간군상, 히어로들 간 정의관의 대립, 역사의 반복된 실수 등의 문제의식을 미국 현대사에 결부 지은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왓치맨』의 후속작은 DC코믹스의 『둠스데이 클락』이라는 이벤트와 HBO의 드라마 〈왓치맨〉으로 각각 제작되었다. 『둠스데이 클락』은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으나 결국 크로스오버 이벤트를 마련하는데 그쳤다면, 드라마 〈왓치맨〉은 정치적인 함의를 충실하게 담아낸 모범적인 계승작이라고 할만하다.
  후속 드라마는 인종차별을 중심축에 두고 전개된다. 그리하여 원작의 빈 공간에 해당하는 부분을 인종차별적 의제로 재구성하고, 원작 만화가 담지 못한 인종차별이라는 의제를 미국 현대사 속에 배치한다. 드라마 〈왓치맨〉은 주제적인 측면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원작을 충실히 반영한다. 오지만디아즈가 벌인 학살에 의해 생존자들이 견뎌야 했던 공포와 해당 사건 이후 변화된 미국 사회의 모습이 구체화된다. 원작의 중심인물인 로렐 제인 유스패칙(실크 스팩터 2세), 에드워드 바이트(오지만디아즈), 존 오스터만(닥터 맨해튼)도 나이든 모습으로 한 자리씩 역할을 담당하며, 로어셰크의 의지를 이어받은 단체가 등장해 로어셰크 캐릭터가 표상하는 바를 그대로 따른다.
  『왓치맨』의 스토리 작가 앨런 무어는 80년대 당시 현실 정치와 역사에 대한 숙의가 함축된 히어로물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샤잠』의 표절작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마블 맨’을 재창작한 『미라클 맨』과 서문에 마거릿 대처 시대를 디스토피아라고 언급한 『브이 포 벤데타』는 한국에서도 무게감 있게 소개되었다. ‘브이 포 벤데타’는 영화로도 유명하지만 그래픽 노블과 주제적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의 혁명은 민주주의적 혁명으로 등치되는 반면, 그래픽 노블에서는 체제 자체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아나키즘 성향이 짙다. 결말에 벌어지는 혁명 이후에 대한 세계의 전망도 영화보다 그래픽 노블이 훨씬 염세적이다.
  『미라클 맨』은 “키모타!”라는 외침과 함께 가공할 초인으로 변신하는 아동용 히어로 만화 ‘마블 맨’을 성인물로 재창작한 메타 픽션이다. 편두통을 앓고 있는 평범한 남성인 마이클 모란은 마블 맨이 아동용 만화 시절에 겪었던 사건을 꿈속에서 되풀이한다. 사실 그의 정체는 ‘미라클 맨(마블 맨)’이며 “키모타!”라는 주문과 함께 슈퍼맨 뺨치는 초인으로 변신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천부적인 히어로가 아닌 냉전 시대에 지속된 군비경쟁 속에서 전개된 초인화 실험 ‘차라투스트라 프로젝트’로 탄생한 존재였고, 꿈속에서 재연된 과거(아동용 만화 연재 당시 사건들)은 힘을 제어하기 위한 훈련용 캡슐이 주입한 가상이라는 게 밝혀진다. 미라클 맨이 제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의 계획에 따라 핵폭발에 휘말려 평범한 남성으로 살고 있는 것이었다. 미라클 맨의 탄생은 나치 시절부터 지속된 인종 연구와 니체의 초인 철학과 연관되며, 후반부에 이르면 미라클 맨의 기원이 되는 외계인들이 출현한다. 작품은 미라클 맨이 외계인과 함께 지구인들의 후손을 초인적 존재로 탈바꿈시키면서 ‘니체적 초인’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사실만이 전부가 아니야!

  앨런 무어가 히어로 코믹스 세계에 미친 반향은 지대하다. 정부가 히어로들을 고용한다거나 ‘히어로 금지법’을 공표한다는 설정은 2000년대 마블 코믹스 대형 이벤트 ‘시빌 워’에서 ‘다크 레인’까지 이어지는 흐름에도 주요 소재로 쓰였다. 픽사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은 앨런 무어식 80년대 사회비판적 만화를 3D 극장 영화로 확장시킨 사례다. 이 외에도 DC코믹스 히어로들이 서로 다른 정의관으로 대립한 끝에 세계가 종말할 수도 있다는 예언적 서사를 담은 『킹덤 컴』처럼 어두운 전망을 그리는 작품은 큰 틀에서 앨런 무어의 자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DC: 더 뉴프론티어』와 『마블스』는 히어로 캐릭터가 발표된 일시(『DC: 더 뉴 프론티어』는 DC 히어로, 『마블스』는 마블 히어로)를 미국 현대사 흐름에 맞춰 실제로 나타났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데, 근현대사 속 히어로들만의 역사를 창조한 〈왓치맨〉의 시도를 메인스트림 히어로로 재해석한 야심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만화의 사실주의화 조류 가운데서 반기를 드는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랜트 모리슨Grant Morrison이다.
  그랜트 모리슨은 『왓치맨』과 『다크나이트 리턴즈』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히어로 코믹스에 비판의 날을 들이댄다. 그에 의하면 리얼리즘은 현실적인 함의를 나타내긴 하지만 동시에 만화를 현실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킨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상상적 세계에서 마음껏 뛰놀아야할 서사들을 사실주의적 테두리에 가두어버린다. 그리하여 만화는 현실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랜트 모리슨이 『왓치맨』에 가한 대대적인 비판으로 앨런 무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품 『멀티버시티: 팍스 아메리카나』를 통해 『왓치맨』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멀티버시티: 팍스 아메리카나』는 9·11테러 이후 미국식 평화주의 이면에 감춰진 폭력이라는 정치적 함의를 담으면서도, 정방향으로 읽든 역방향으로 읽든 컷 구성을 독자들이 구성하게 만들 수 있는 대담한 형식을 구사해 사실주의적 만화가 닿지 못하는 상상의 영역을 확장시키려 했다.
  그랜트 모리슨은 픽션에 현실을 접목시키는 게 아니라 현실에 픽션을 접목시키는 작가다. 현실은 상상세계 내부에 존재하지 상상세계 전체를 점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서사작업은 곧 만화를 사실주의적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행위와 결부된다. 그리고 그 목적은 2006년 아이즈너 최우수신작 상을 수상한 『올스타 슈퍼맨』에서 완성도 높게 성취되었다.
  그랜트 모리슨은 『올스타 슈퍼맨』 속 슈퍼맨의 실험실에 ‘지구Q’로 묘사되는 현실 지구를 등장시키며 픽션과 현실의 관계를 탐색한다. 지구Q는 현실 지구이지만 만화 바깥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만화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도 아닌, 만화 안 슈퍼맨의 실험실에 놓인 소우주의 작은 행성으로 존재한다.
  현실 지구의 역사는 이렇다. 예수라는 메시아가 세상을 다녀간 뒤, 니체가 초인이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했다, 이후 두 인물상을 참고한 만화 캐릭터 ‘슈퍼맨’이 탄생한다. 반면, 지구Q는 슈퍼맨에 의해, 정확히는 ‘슈퍼맨이 존재하는 만화적 우주’에 의해 만들어진다. 모든 역사과정 이전에 ‘슈퍼맨’이 있었다고, 이 만화는 주장하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거나 이끌어갈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존재한다. 슈퍼맨은 상상된 모든 메시아들처럼 열망된 존재다. 사람들은 이 열망된 존재들을 허구라고 자주 착각한다. 그러나 열망된 존재에 대한 사유는 유태인의 이집트 탈출로, 프랑스 민중혁명으로, 니체 철학의 염세주의 극복으로 이어졌으며, 종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만화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현실 지구는 열망된 존재라는 허구에 영향을 받는다. 허구는 더 이상 인간의 관념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눈앞의 사물처럼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허구적 실재다. 허구적 실재는 때때로 현실을 압도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실험실에서 지구Q(현실세계)를 지켜보는 슈퍼맨(열망된 존재)은 지구Q(현실세계)의 역사적 사건을 창조한 셈이다.
  모리슨은 상상은 상상된 그 자체로 실재와 관계맺고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올스타 슈퍼맨』에서 슈퍼맨이 고향을 찾아갔을 때, 평행세계의 슈퍼맨들의 뜬금없는 개입이 벌어진다. 평행세계의 슈퍼맨들은 ‘현실(만화적 현실)’의 슈퍼맨과는 다른 상상된 존재다. 소인 슈퍼맨, 황금 슈퍼맨, 마법사 슈퍼맨 등. 이들은 보편적 연결고리와 정체성으로 형상화되어야 하는 기존 슈퍼맨의 모습들이 아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현실적으로 형상화된 슈퍼맨, 즉 보편적 이미지로써의 슈퍼맨 칼-엘이 세상을 구하러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아버지 조나단 켄트가 곧 심장마비로 죽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칼-엘은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앞서 세상을 구하러 갔다가, 결국 조나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다. 이로써 평행세계의 슈퍼맨들이 사실주의적 서사의 인과관계를 구애받지 왜 않고 갑자기 등장했는지 밝혀진다.
  여기서 평행세계의 슈퍼맨들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와 같은 낡은 장치와 비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상상된 세계의 존재들은 언제나 실재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것은 상상된 그 자체로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인생사의 중요한 순간에는 구체화된 존재로서 실재와 소통한다. 평행세계로 묘사된 상상세계의 슈퍼맨들은 개연성 없이 이 세계에 강림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실은 그러한 상상세계의 개입과 계속 관련하고 있다. 그렇게 서로 실제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를, 단지 허상으로만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픽 노블인가 코믹스인가

  그랜트 모리슨은 기존의 핍박받던 소수자적 사연을 가진 히어로 팀 ‘둠 패트롤’을 다룬 『둠 패트롤』을 연재하면서 상상력이 가닿을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을 집합시키는 정신나간 (그러면서도 스토리의 완성도까지 보유한) 전개를 결합하고, 배트맨의 악당들을 정신분석학적 이미지로 재구성한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 엄숙한 땅 위의 엄숙한 집』 등 전위적 스타일이 가미된 코믹스를 발표하여 히어로 코믹스 세계의 예술적 층위를 넓혔다. 그러나 그랜트 모리슨과 앨런 무어를 비교하며 누구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앨런 무어는 『젠틀맨 리그』처럼 실험 가득한 만화를 집필한 이력이 있으므로 사실주의적 작가로만 한정짓기도 어렵다.) 두 사람은 히어로 코믹스가 단순한 선악 대립으로 이루어진 유아론적 서사라는 틀을 깨부수고 복합적인 예술의 차원으로 만화의 수준을 한차례 이끌어냈다.
  앨런 무어와 그랜트 모리슨 작품 이외에도 닐 게이먼Neil Gaiman이 스토리를 담당한 『샌드맨』 또한 히어로 코믹스의 범주를 넓힌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꿈의 신 ‘모르페우스’와 ‘운명’ ‘욕망’ ‘절망’ ‘분열’ ‘죽음’ ‘파괴’로 지칭되는 그의 영원 일족 남매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만화는 얼핏 히어로 코믹스와는 관계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샌드맨』의 장르는 다크 판타지에 가까우며, 이야기 속에서도 DC코믹스 메인스트림 히어로들이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모르페우스가 지나치는 곳에 저스티스 리그 소속 히어로, ‘헬블레이저’ 시리즈의 퇴마 히어로 콘스탄틴 등이 옴니버스 형태로 등장하거나 히어로들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캐릭터를 주요한 자리에 위치시켜 은연 중 DC코믹스의 메인스트림 세계관과 같다는 걸 드러낸다. 그리하여 DC코믹스의 세계관은 동화적·신화적 일화가 가득한 다크 판타지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물론 마법이나 오컬트 소재를 활용한 히어로는 『샌드맨』 연재 이전에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샌드맨』이 그려낸 신화적 세계는 DC코믹스 메인스트림 세계관과 별도로 다루어도 될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점에서 이 만화가 DC코믹스에 미친 영향은 기념비적이다.
  앨런 무어, 그랜트 모리슨, 닐 게이먼의 공통점은 히어로 코믹스를 그래픽 노블 형태로 끌어올린 별도 형태의 작품뿐만 아니라 마블/DC의 메인스트림 히어로 코믹스의 작가로도 참여했다는 것이다. 『마블스』의 커트 뷰식, 『킹덤 컴』의 마크 웨이드 등 앞서 언급한 그래픽 노블의 스토리 작가들 역시 마블과 DC의 주요 연재물을 집필했다. 그리고 각 스토리 작가가 연재한 이슈들은 작가마다의 스타일이 녹아 있어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랜트 모리슨이 총괄 지휘한 DC코믹스의 메인 이벤트 『파이널 크라이시스』는 다크 사이드라는 가공할 우주의 존재가 ‘반생명 방정식’이라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 지구를 침공한다는 흔한 히어로물다운 아우트라인을 가지고 있으나, 그 내용은 각종 메타 픽션적 패러디와 정신의학적 비유를 담아내 그 어떤 만화보다 난해하다는 악명을 샀다. 만화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도라는 찬사와 만화의 기본적인 소양인 오락성을 망각한 오만한 작품이라는 비난이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DC/마블에서 그래픽 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품들과 일반적인 히어로 코믹스 연재물 사이의 질적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미지, 다이너마이트 등 DC/마블식의 프렌차이즈 형태가 아닌 독립된 작품을 출간하는 회사의 코믹스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프랭크 밀러의 시대착오적 만화 『300』의 안티테제로 기획된, 스파르타에서 주인을 죽이고 탈출한 세 명의 노예 이야기를 그린 『쓰리Three)』나 미식축구로 상징되는 미국 내 자본주의적 부패와 가부장적 폭력을 담아낸 『남부 새끼들Shouthern Batstard』은 당장 그래픽 노블의 딱지를 붙여도 손색이 없다. 다시 말해 그래픽 노블과 코믹스라고 불리는 상업 만화들의 경계는 이제 불분명하다. 아직도 히어로 코믹스 대부분이 말초적인 액션과 쾌감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다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분명한 건 코믹스 시장의 성장에 따라 1960년대 당시 리처드 카일과 윌 아이스너가 제공한 그래픽 노블의 정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중 용접공』 『에식스 카운티』 등 비교적 순문학에 가까운 그래픽 노블을 발표한 제프 르미어Jeff Lemire 역시 마블의 『문 나이트』 시리즈 스토리 담당자로 채용되었으며, 최근에도 DC 코믹스는 메인스트림 코믹스와는 독립된 작품을 다루는 임프린트 블랙 라벨의 호러 만화 시리즈에 호러 소설의 대가 조 힐을 섭외하는 등 다양한 시도의 기획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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