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신작로―바다를 건너온 안개
맑고 투명한 햇살이 머리 위로 뜨겁게 쏟아지고 있다. 길가 키 큰 미루나무의 무성한 이파리와 신작로 작은 모래알 위에 햇살이 부딪쳐 반짝인다. 빛의 놀이터다. 아지랑이 오르는 하얀 길은 얕은 산허리를 돌아 멀리 그 끝을 감추고 있다. 꿈이다. 환하다. 요즘 나타나는 칙칙하고 우울한 꿈과는 다른 모습이어서 나는 한동안 그 풍경 속을 더듬었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었다.
얼마 전부터 나는 죽은 이들의 얼굴을 꿈속에서 자주 만났다. 꿈속뿐 아니라, 일과 중에도 잠깐씩 보이는 현상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얼굴 한번 뵌 적 없는 고모부의 모습이 그것인데, 처음엔 나도 어느덧 죽음에 가까이 이른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그런 느닷없는 공포는 조금씩 나를 차분하게 앉혀주었다. 무언가 쫓기듯 더 채우려는 욕망이 아닌, 살아온 지난 생의 회한이나 참회에 가까운 성찰의 시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이십 대부터 이미 내 생의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 가까이는 아버지 어머니의 누비함과, 멀게는 할아버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단으로 맥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준 힘이 다름 아닌 신작로의 풍경이었다. 할아버지의 거친 손에 이끌려 걷던 기억과 아버지의 딱딱한 등에 업혀 어깨너머로 보았던 신작로, 그것이 때때로 나를 다시 숨 쉬게 했다.
내게 그 길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이게도 아픔들로 남아 있다. 마르지 않은 이슬을 헤치고 산길을 나와 책보를 메고 신작로를 달리던 기억. 그 길에서 나는 가끔 동낙아범을 만났다. 그는 사철 어깨와 허벅지가 드러난 누더기 차림새였는데, 두 팔을 웅그리고 손으로 연실 가슴께를 긁적이며 걸었다. 그렇게 스무 걸음쯤 가다가 제자리에 서서 왼쪽으로 네댓 번 맴을 돌고 다시 제 방향으로 걷길 반복했다. 주로 하굣길에 그를 만나곤 했는데, 동무들은 나뭇가지로 그를 건드리며 깔깔거렸다. 동무들이 그를 앞질러 내달렸으나, 나는 늘 뒤쳐져 걷곤 했다. 그나마 여름철이면 나았다. 한겨울 추위엔 그가 금방이라도 얼어 굳어버릴 것처럼 온몸을 떨어대 나도 뒤에서 그만큼 오들거리며 돌아오던 기억이 지금도 겨울바람처럼 남아 있다.
어머니는 그가 참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억울한 누명을 얻어 고문 끝에 저리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동낙이라는 아들이 집을 나가 홀로 남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웃의 도움으로 살고 있단다.
얼마 뒤 나는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통신수단이 사람의 입이나 소문이 전부이던 시절, 그는 용케도 이웃 마을의 대소사에 빠짐없이 찾아오곤 했다. 몇 채 되지 않는 우리 마을 아랫집 초상 날에 나는 그를 보았다. 차양이 쳐진 문간 멍석 한편에 그가 있었다.
“어서 오시게, 동낙아범.”
마을 어르신들이 그를 맞았다. 아무도 그를 막 대하지 않았다. 곧이어 고봉밥과 국 그리고 여러 반찬이 오른 소반이 그의 앞에 놓였다.
“많이 드세요.”
소반을 내온 아주머니가 떠나자,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의 몸에서 오래된 지린내가 풍기고 있었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수저를 쓰지 않았다. 끝이 없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먼저 밥을 입에 넣었다. 씹기보다는 우물거리다가 그냥 삼켰다. 이어서 반찬을 순서대로 비우고 끝으로 국을 그릇째 들고 마셨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로 일어서서 제자리에서 맴을 돌았다. 음식이 더 나오진 않았다. 또한 누구도 더 권하지 않았다. 그는 떠났다. 오랜 날이 지난 뒤에 나는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참 아픈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인천에 터를 잡게 된 까닭은 순전히 아내 덕이다. 내가 그녀를 만난 건 문래동 온도계 공장이었다. 군대 전역 뒤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마지못해 찾아 들어간 공장에 그녀는 경리직원이었다. 내 이력에서 그다지 큰 결점을 발견하지 못한 담당자는 곧바로 나를 온도계 센서를 만드는 부서로 배치했다. 내가 맡은 일은 크게 숙련을 요하는 기술이 아닌, 사수가 몇 차례 시범을 보이면 따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회사는 쇳물을 다루는 사출작업이나 온갖 전자기기에 쓰이는 온도자동제어기술을 장착한 제품을 생산했다. 처음엔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했다가 내가 입사했을 때는 어느 정도 독립적인 기술을 터득해 수익을 내고 있었다. 회사에 신제품 개발이나 영업 따위의 부서가 있었지만, 나는 이루고 싶은 어떤 희망이 없었다. 그저 제시간에 일을 끝내고 술 한잔 입에 넣을 수 있으면 좋았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적이고 사회 부적응자인 연유이다.
나는 군 복무 중 어떤 휴가도 쓰지 않았다. 일찍부터 문제 사병으로 분류되어 간단한 외출, 외박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이 어이없고 분하여 오히려 나는 한 해 사이를 두고 이승을 떠난 조부모의 상에도 귀가를 거부했다. 나는 그 무렵 군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어느 추석날 밤 야간초소에서 선임병이 M16의 총구를 입에 물었다. 자살은 아주 간단히 수습되었다. 대신 초소 근처에 쏟아부은 에틸알코올의 소독약 냄새가 부대 안을 오래도록 채웠다. 그 냄새는 장마철 폭우를 지나고 한겨울 폭설을 뚫고도 집요하게 기어 나오는 끔찍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 더러운 냄새를 끝내 떨치지 못하고 뜻한 목적을 잃었다. 죽음을 소독할 수 있을까. 나는 제대 뒤에도 오랫동안 그 냄새를 안고 살았다.
전역을 하고 돌아오니 집이 사라지고 없었다. 근 백여 년을 이어온 터전, 할아버지가 홀로 들어와 맨손으로 일군 화전 밭과 다랑이논 들이 순식간에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농협 빚이 원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야반도주를 했고 어머니는 식솔을 이끌고 통절의 이주를 감행했다. 나는 동네 사람에게 물어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은 가까이 강이 흐르고 있었고, 새로 뚫린 고속도로가 지나는 마을이었다. 새로 든 집은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일대가 전부 어느 국회의원 집안의 종중 땅이라서 간신히 지상권만 얻어 들어간 거였다. 다행히 어머니의 조용한 성품과 함께 오진 않았지만 사전 작업을 한 아버지의 호기 덕에 도지 논을 얻기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해가며 농사를 지으셨다. 낯설었다.
산마을 높은 산등성이에서부터 내려오는 아침 햇살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밤새 골 안을 덮고 있던 안개가 아침이면 너무도 아름다운 천사의 옷자락처럼 지붕과 마당을 지나 작은 돌담을 넘어 집 앞을 흐르는 개울을 빠져나갈 때, 나는 얼마나 환희에 젖었던가. 그리고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 소리라니!
강가 마을의 풍경은 달랐다. 낮은 강과 들판 위에 무겁게 가라앉은 안개는 밤새 은밀하고 음흉한 작당을 도모하다 아침이면 마지못해 햇살에 밀려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강물 또한 세상의 모든 적들과 내통하듯이 뱀처럼 꿈틀거리는 거였다.
나는 가늘게 떠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곧바로 산속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동낙아범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리고 어떤 권력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노래가 학교 운동장과 온 마을에 울려 퍼지던 어릴 적 기억을 바탕으로 새 이야기를 썼다. 한때 그 노래처럼 전국이 들썩거렸던 새마을운동에 관한 이야기인데, 하나같이 오래된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며 곳곳의 동산과 들판을 파헤쳐 경작지를 넓히고, 새 길을 뚫는 모습이 농촌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던 당산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그 자리에 이웃 동네 것과 똑같이 닮은 시멘트 탑이 들어섰다. 마침내 이웃 사이에 각자의 셈법으로 인한 다툼이 일어 끝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뿐이었다. 무언가 스스로에게 토해내야만 조금이라도 견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을 거였다. 내가 머물던 오두막에 아버지가 낡은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충청도 어느 산골 지인의 집에서 숨어 지내다 돌아왔다고 했다. 그의 손에는 소주 서너 병이 들려 있었는데, 그날 밤 술병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즈음, 아버지는 내게 가족사에 대해 털어놓았다. 할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산중에 들어와 맨몸으로 일군 화전이며, 당신의 씩씩하고 성실한 모습에 이웃의 주선으로 배필을 얻어 일가를 이룬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고무친 젊은이의 땀은 쉽게 풍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남의 논밭을 얻어 짓는 농사의 한계는 겨우 식구들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을 뿐, 어린 딸들은 서둘러 출가시켜야 했고, 사내아이들은 학교 문턱에도 보낼 수 없었다. 다만 맏아들인 아버지만큼은 이웃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과 기초 한학 정도를 떼었다고 했다. 그것도 할아버지의 처가, 아버지의 외사촌들과 어울려 어렵사리 동행한 배움이었단다. 아버지의 취한 목소리가 살짝 노래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이런 부분이었다.
“허허, 고거. 그때 훈장 선생님이 나를 무척 예뻐하셨단다. 내 글씨가 생긴 것처럼 빼어나다고 칭찬하셨지. 그래서 내가 더 수난을 당하기도 했어. 서당 다니던 길이 20리는 족히 되고도 남았어. 그때 그놈들 책보를 내가 다 짊어지고 다녔지. 참 짓궂었어, 내 외사촌 형제들. 허허.”
그러고 보니 언젠가 어머니가 보여준 아버지의 서당 책이 떠올랐다. 문고판 서적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수제 묶음이었는데, 한지에 한 장 한 장 붓글씨로 작고 예쁘게 쓰인 교본이었다. 아마도 서당 교과서였을 텐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잘 간직하라고 했단다. 내가 보기에도 누렇게 변한 한지 위에 쓰인 한자가 어찌나 반듯하고 예쁜지 그 내용은 모르더라도 참 귀한 뜻을 지녔을 거라고 믿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는 천자문을 뗀 뒤에 논어 맹자를 필사해 그걸 반복해서 공부했단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버지의 말소리는 낮은 한숨으로 바뀌어 갔다.
“네게 미안하다. 사는 게 참 쉽지가 않구나.”
아버지는 이어서 가족이 겪은 육이오를 간단히 들려주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 무릎 위에서 들었던 얘기와는 다른 내용이었다. 산골 깊숙이 자리했던 집이기에 국방군과 인민군 그리고 말 탄 중공군 등 피아를 가리지 않고 밥을 해주어야 했던 이야기는 할머니의 오래된 레퍼토리였다. 그중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가장 신사적인 군대는 중공군이었단다. 큰 밥그릇이 부족하여 뒷간 오줌 항아리를 씻어 담아내어도 군말 없이 맛나게 비워내며 고마움을 표했다는 것이다. 혹여 남편이 끌려갈까 염려되어 허벅지에 낫 끝으로 상처를 내어 광목으로 두껍게 동여매고 목발을 짚게 해 모면했다는 무용담은 차라리 박수를 칠 정도였다. 그러나 국방군의 밥시중은 할머니에게 기억하기 두려운 참혹함 그 자체였다. 어린 내 직감으로 얻은 느낌일 뿐, 옮기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할머니의 전쟁 이야기 끝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여섯 살이던 아이를 국방군은 길잡이로 앞세웠단다. 차라리 다리를 싸맨 아비가 나서면 좋겠는데, 악독한 국방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그를 깊은 토굴로 숨겨놓고 있었다. 다만 아들의 소매를 잡고,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 오거라! 입술이 떨려 말도 맺지 못하고 그저 간절한 눈빛만 전했단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느 산등성이를 넘자마자, 정말 도망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 국방군 부대는 얼마 뒤 멀지 않은 지평리라는 곳에서 전멸을 했단다. 어릴 적 내 여러 질문 가운데 답한 할머니의 이야기인데, 그 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은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전쟁 통에 할아버지는 큰사위를 잃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매형인데, 그는 빨갱이로 몰려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시체조차 찾지 못했단다. 더한 것은 전쟁 뒤에 이어지는 뒷말과 손가락질의 따돌림 세상은 숨조차 쉴 수 없는 질식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거기에 끝 간 데 없이 따라붙는 연좌제의 고통은 쇠사슬처럼 아버지를 옥죄었단다. 아버지는 찢어진 가난을 나에게 대물림하는 게 가장 두렵다고 목소리를 떨었다. 나는 그날 밤 아버지의 울음소리 같은 숨소리를 들으며 아프게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아버지 오토바이 꽁무니에 실려 산속을 나와 서울로 떠났다.
그날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너, 동낙아범 기억하지? 그분이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는데 왜 그리 마음이 아프던지……. 그 양반이 네 고모부랑 함께 끌려갔다가 혼자 살아 돌아오신 분이란다.”
온도계 공장의 일상은 뒤숭숭했다. 낯빛이 어둡고 더러는 핏기 없는 혈색에 섬뜩한 살의마저 띤 친구들이 오갔다. 전부는 아니지만, 유독 몇몇의 그런 표정을 대할 때마다 나는 불편했다. 나는 글을 썼다. 점심시간이나 짧은 휴식 짬에도 종이에 메모를 하고 퇴근 뒤에 원고지에 옮겼다. 단편 분량의 소설을 끝내고 나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그녀에게 한 문예지 앞으로 발송을 부탁했다. 출근하고 퇴근할 때까지 붙잡혀 있어야 하기에 그 방법을 택한 것인데, 그녀는 일주일이 넘도록 답이 없었다. 다른 사정이나 하물며 우편료가 부족하다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사실 나는 입사하고부터 내내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그녀는 그저 내게 꽃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눈빛 한번 제대로 부딪친 적 없지만, 그럴수록 나는 혼신을 다해 그녀에게 마음의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원고 발송을 그녀에게 맡기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데 어쩌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저, 제 원고 보내셨나요?”
사무실 안 여럿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네? 아─, 이거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는 오른쪽 아래 책상 서랍에서 원고 뭉치가 든 우편물을 꺼냈다.
“바빠서 부치지 못했어요. 그리고 제가 왜 이런 부탁을 들어드려야 하는지 모르겠고요…….”
나는 갑자기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무대에서 혼자 멋대가리 없는 춤을 췄다는 민망함으로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원고를 되돌려 받아 나오며 입속으로 슬며시 상스런 몇 마디를 삼켰을 것이다. 며칠이 참으로 우울했다.
퇴근 뒤 나는 거의 매일 술집을 찾았다.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인데, 어느 날 그곳에서 나는 공장의 한 사내를 만났다. 입사한 지 세 달쯤 되었을까. 오가며 안면은 튼 사이였다. 주문한 곱창볶음 안주가 미처 나오지 않았을 때였으니, 아마도 나를 미행한 듯했다. 그가 내 곁으로 다가앉았다.
“기, 형이시죠? 이젠 우리 공장 돌아가는 분위기, 어느 정도 눈치채셨죠?”
얼굴에 무겁게 깔린 그늘이 왠지 마음에 걸렸으나, 얼핏 보니 시골에 두고 온 막냇동생과 오래전 내 곁을 떠난 동창 친구 상철이의 모습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형은 군대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우리에겐 애들보다 형 같은 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나 같다니! 나는 안타깝게도 이미 오래전에 어떤 미래나 희망 그리고 변화에 대한 소망을 잃거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기에 또래의 가난이나 불우한 환경에 대해 동조하거나 공감하지 않았다. 그건 절망의 다른 이름일 터인데, 당장 하루하루의 시간이 끔찍하도록 길었다. 나는 술도 거의 혼자 마시고 취한다. 조금은 자주. 그것은 나를 내려놓아주기도 하고 때론 작은 용기를 북돋는다. 그뿐이다. 불편함이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슬며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내 뒤를 향해 자조하는 말투로 낮게 뇌까렸다.
“누군가 죽어야 끝나겠지요. 그래야 다른 시작이라도 해볼 테니까…….”
그날 돌아와 나는 밤새 뒤척였다.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치고 외삼촌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오면서부터 시작된 내 어깨에 얹힌 무게를 생각했다. 시골 촌구석에 무슨 미래가 있니? 너라도 먼저 독립해서 식구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니? 외삼촌이 나를 앞세우고 반복했던 말이었다. 겨울나무처럼 마른 어머니의 떨리는 손길이 자꾸 가슴 한쪽을 찔러대고 있었다.
뒤늦게 독학으로 신학을 전공한 외삼촌은 그때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 건물에 있는 종교 신문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웃한 사무실에 나를 소개한 것이다. 미국 교회의 지원과 국내 부자 교회 장로급 신도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성경책을 찍어 전국의 학교 병원 군부대 교도소 등에 무료로 나눠주는 선교사업을 하는 국제단체의 한국본부였다. 그곳에서 나는 사환이었다. 단체의 회장이나 사무총장 그리고 간사와 경리의 잔심부름을 했다. 나는 외가에 머물며 외삼촌과 함께 통근을 했다. 외삼촌은 친절하게 내가 다녀야 할 은행이며 우체국 복사집 따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하얀 종이에 직접 그려주었다. 나는 사무실을 청소하고 집기를 정리하며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진통제와 생리대를 사러 약국에 다녀오고, 윗분의 빠트린 물건을 찾으러 사택에 다녀오기도 했다. 대학원이라는 높은 교육을 받은 간사라는 분과 가끔씩 방문하는 옆 사무실 노회한 목사의 부탁이 그것인데, 나는 그조차 사환이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우습게도 나는 따뜻한 고마움의 표시 한번 제대로 받은 기억이 없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늦거나 실수라도 생기면 내 뒤통수에 와 달라붙는 경멸의 눈총이라니!
나는 외숙의 도움으로 야간전수학교에 입학했다. 낯설지만 새벽부터 밤늦도록 분명 도시의 한 공간은 내 것이었다. 나는 때때로 편지를 썼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그리고 동생들에게. 나는 그들에게 그저 봄꽃이며 명랑한 노래이고 싶었다. 어느 때부턴가 눈에 보이게 힘을 잃어가는 아버지에겐 응원을, 어린 자식을 도회지로 떠나보낸 어머니의 저린 가슴을 향해선 최대한 씩씩한 노래를 부르려 애썼다. 그러나 정작 나는 쉽게 지쳐갔다. 매일 새벽마다 외가 식구들과 함께하는 예배도, 일상처럼 사무실에서 수행하는 성경 공부도 도무지 힘이 되지 못했다.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기도는 온통 깜깜한 어둠뿐이어서 숨이 막혔다. 체육관처럼 커가는 대형 교회 목사들과 부와 사회적 지위에 한껏 고양된 장로들의 얼굴엔 항상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그들의 혀와 입술은 각자 독특한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 특성에 따라 성격이 조금씩 다른 교회의 십자가 불빛이 서울 하늘 밑에 광활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보신탕을 즐겨 먹는데, 식후엔 언제나 이쑤시개를 물고 소파에 앉아 껄껄대며 웃었다. 하나같이 먼저 선택받은 은혜로운 자애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자선으로 성경책을 만들어 나라에 넘쳐나는 죄 많은 백성을 하나님께 인도하니, 그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그런데 나는 점점 더 아파왔다. 내게 처음 세례를 준 목사는 어느 날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공항에서 잡혔다. 나는 그 종교단체에서 4년 반을 일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이름은 ‘어이―, 기 군’ 혹은, ‘미스터 기’였다.
여동생이 알려온 소식에 의하면 고향 가족들의 형편은 좀체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어떤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고통만 커갔다. 내가 버는 월급으로는 도대체 어쩌지 못하는 노릇이었다. 해가 지날수록 아버지는 농사보다 읍내 다방에서 살기 바쁘다고 했다. 학년 내내 등록금 독촉을 받은 여동생은 어느 날 담임으로부터 ‘너희 아빠, 다방 레지하고 살림 차린 거 아니냐?’라는 핀잔을 듣고 지금까지도 그를 저주하고 있다. 물론 그때 어머니와 나는 달리 해명할 방도를 찾지 못해 애를 태웠지만 말이다.
야간전수학교는 내게 작은 도피처였다. 언젠가부터 나는 교문을 들어서기 전,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작은 맥주 한 병을 입에 털어 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인마! 너 몇 학년이야?”
“어? 너, 동휘?”
“그러고 보니 너. 수요일마다 예배 인도하는 놈이구나!”
우리는 마주 보며 킥킥 웃었다. 그때(1976년, 서울에도 전기 전압이 낮았다)만 해도 야간학교의 교실은 형광등으로 조명을 밝혔는데, 그 불빛이 칠판과 아이들 머리 위에서 쉴 새 없이 잘게 끊어지며 튀어서 다들 시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끝날 때쯤이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기에 대부분 공부보다 명상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밖에서 한눈에 반 친구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샀고, 나는 맥주 한 병을 더 집었다. 그 무렵 학교 앞 문방구는 만물상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가 나보다 나이 들어 보였다. 체구는 작았으나 코밑이 벌써 시커메져서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를 똥털이라고 부른 녀석이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는데, 서울 큰형 신혼집에 얹혀살며 종로 전자학원을 마치고 세운상가에서 납땜 보조 일을 하고 있었다.
얼마 뒤 그가 같은 동네 상철이라는 친구를 소개해 우리 셋은 단짝이 되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함께 움직였다. 수업을 빼먹기도 하고 주말이면 동대문운동장 근처 계림이나 청계극장 그리고 단성사 피카디리에서 테렌스 힐과 이소룡을 만났다. 그곳에서 〈어제 내린 비〉와 〈별들의 고향〉(〈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있었다)을 보았다. 월급날이면 통 크게 대한극장에서 찰턴 헤스턴과 머리카락이 없는 율 브리너도 만났는데, 특히 그들의 큰 싸움(〈벤허〉와 〈십계〉)은 우리의 주량을 배로 늘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우리는 졸업을 했다. 다행인지 모르나, 우리 학교는 문교부장관 고등학교 학력 인정 전수학교여서 별다른 과정 없이 예비고사를 치렀다. 나는 전문대학에 턱거리로 붙었고, 동휘와 상철이는 바로 방위와 현역으로 입대를 했다. 우리는 몇 날을 술에 취해 지내다 헤어졌다. 그런데 전방으로 떠났던 상철이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신병교육대 훈련 중에 다친 손가락 부상이 그를 병가사 제대로 돌려세운 것이었다.
“정기야, 고것 참 우습더라. 각개전투 교장에서 철조망을 통과하다가 손가락이 찢어진 건데……. 어쨌든 나한텐 잘된 일이야.”
상철이는 그러잖아도 입대를 꽤나 고민했었다. 대부분 현역 징집보다 면제나 방위로 소집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었다. 조그마한 뒷배가 있다면 누구나 쉽게 빠져나올 수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는 손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했다. 관심 갖는 이도 없고 또 엄살이라는 핀잔을 듣기 싫었다고 했다. 부어가는 손으로 얼이 빠지도록 고된 사격훈련까지 마쳤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뒤 아침 점호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단다. 작은 상처에서 시작된 나쁜 피가 몸 전체를 쓰러뜨렸다고 했다. 그는 그곳에서 오 개월 가까이 머물다 손가락 끝마디 두 개를 잃었다.
상철이는 돌아오자마자 평화시장이 멀지 않은 동대문 근처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 주로 새벽 도매 장사를 끝낸 가게에서 재고를 싸게 구입해 수레에 싣고 뒤늦게 도착한 지방 상인이나 행인에게 떨이로 파는 장사였다. 그는 일찍부터 일을 했으나 옷 장사는 처음이었다. 야간학교 시절에는 줄곧 을지로에 있던 한국 전통공예품을 제작 판매하는 회사에서 기념품을 포장하는 일을 했었다. 그의 솜씨는 완벽했다. 크기와 상관없이 세계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내용물이 파손되거나 변형되지 않을 만큼 그의 포장 제품은 튼튼하고 가벼웠다. 그러나 그는 옷 장사의 매력에도 즐거워했다. 하루의 매상이 마음에 들면 나를 불렀다. 우리는 늘 광장시장 근처 포장마차에서 철판곱창볶음 안주에 배부르게 취했다. 그의 얼굴에서 예전에 없던 밝음이 보였다. 우리는 자주 웃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그가 죽었다. 가슴에 칼을 맞았다. 그 좁은 골목에 어찌 그런 끔찍한 이권 다툼이 있을까. 어느 불량한 패거리에게 린치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잃은 아픔보다 끊어질 듯 이어지던 그의 어머니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지금껏 잊을 수 없다. 잊는다는 표현은 너무 가벼워 두렵다. 억세지 못한 어머니의 어깨는 처참히 무너져 바닥에서 조각조각 찢어져 밟혔다. 내 온 뼈와 살 속에 그게 꽂혀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우리 셋은 친아들이었다. 외갓집이 하숙방처럼 느껴지고 형과 형수의 얼굴이 부담스러운 날이면, 우리는 상철네 집에 모였다. 상철이네 동네는 성균관대학교 뒷산에서 타고 내려오는 능선을 끼고 대학교 담 옆으로 낮게 들어선 마을이었다. 그곳은 명륜동과 혜화동이 닿아 있는 와룡동이었다. 이마를 땅에 댈 정도로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집. 그 집에 들어서면 맨 먼저 예쁜 연탄 불꽃이 우리를 반겼다. 출입구 외엔 어디에도 없는 문. 낮은 천장 한가운데 작은 유리 통창이 있는데,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밤의 별빛들이라니! 기대앉으면 한쪽이 뒤로 알맞게 들어가 있고, 다른 한쪽은 또 반대편 다른 집 사람들이 등을 기대기 좋게 이쪽으로 불룩 튀어나온 방벽. 우리는 그 방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맛나게 배불리 먹었다. 특히 어머니가 해주시던 비빔국수는 어디에서도 다시 맛볼 수 없는 일품이었는데, 알맞게 익은 라면 면발이 국수 면발을 감고 오른 그것은 가히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감긴 뜨거운 면발을 보며 음탕한 상상을 했던가. 우리는 밤새워 취하고 노래를 불렀다. 상철이의 보물 1호 통기타로 우리는 비틀스를 불러와 〈이매진〉을 소리 질러 외치고, 동휘의 〈울고 넘는 박달재〉를 눈물 질금거리며 불렀다. 어머니는 우리가 오면 늘 옆집으로 피해주셨다. 그 방은 겨울밤에 더 따뜻했다. 언제였던가. 동휘가 느닷없이 나를 놀렸다.
“오호―, 우리 기 목사! 십팔번 한번 불러야지?”
우리는 낄낄거렸다. 나는 워낙 노래에 소질이 없던 터라 늘 반 박자 느리게 녀석들의 음을 따라가곤 했었다. 그렇지만 살짝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찬송가 364장 〈내 주를 가까이〉! 상철이 너 칠 수 있지?”
“조오치! 술자리엔 그게 최고지!”
동휘가 맞장구치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정작 상철이가 망설이고 있었다. 악보가 없다는 둥 먼저 불러보라는 둥 하면서 손에서 기타를 놓는 거였다. 마침 나도 썩 내키지 않아서 오줌이나 깔기자며 밖으로 나왔다. 대학 담벼락 옆으로 흐르는 작은 도랑 위에 대강 만들어 세운 공동화장실로 우리는 함께 들어가 걸침판자 구멍으로 오줌을 갈겼다.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도랑물이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흘렀다. 우리는 아침마다 그곳에서 길게 줄지어선 이웃을 만나곤 했다.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그곳을 다시 찾았다. 상철이 어머니의 안부가 늘 무겁게 내 마음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옆집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 답변도 없이 그저 꺽꺽 울음만 삼켰다.
나는 상철이를 보내고 무작정 군에 입대했다. 전문대학은 또다시 야간학업이라는 지긋지긋한 숙명의 연장선에서 서둘러 끝냈고, 4년 넘게 일하던 사환이라는 직업도 팽개쳤다. 어디에도 미련을 가질 만한 가치가 보이지 않았다. 훈련소를 거쳐 통신교육을 받고 전방 포병대대에 배치되었다. 나름 무선통신에 관한 소질이 선임병들의 눈에 띄었나보다. 분기별로 연대와 사단의 주특기 경연이 있는데, 내가 가진 통신음어 해독과 송수신 능력이 부대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통신용어 하나가 세 자리 숫자(음어)로 이루어져 보름마다 바뀌는데, 나는 그걸 하루 만에 외워 상하 부대와 교신했다. 무선통신의 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몇 군데 기지국을 거치면 어디든 닿을 수 있었다. 야전훈련이나 부대 이동 긴급임무에도 손쉽게 응급 안테나를 설치할 수 있었다. 물론 선임들의 빼어난 기술교육 덕이지만, 포탄의 착지를 정확히 찾을 수 있는 OP를 점령하는 일에도 그리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렇다고 군대가 체질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로지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명령체계가 늘 내 안의 신경체계를 흔들었다. 좀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입대 뒤 처음으로 술을 접한 날이었다. 자대로 배치된 뒤 삼 개월쯤 지났을 거였다. 저녁 점호가 끝나고 내무반에서 반합 뚜껑으로 소주를 받았다. 왕고참의 전역 회식이었다. 술이 꿀처럼 달았다. 내무반에 있는 군인들이 갑자기 장난감 병정처럼 보였다. 혼자 실실 웃다가 전역하는 왕고참에게 ‘인마! 사회에 나가서 잘살아. 죽지 말고!’라며 주절거렸다. 그리고 자다가 내무반 통로에 오줌을 갈겼다. 다음 날 새벽에 내무반 상병에게 끌려가 열불 나게 줘 터지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뒤로 나는 바깥 훈련이든 부대 상황실 근무일 때도 술을 마셨다. 부대 후문 밖 오 과붓집에서 술은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었다. 그건 계급이 오를수록 더욱 수월해졌다. 술로 생긴 흠결은 더 논하지 않겠다. 여태껏 끊어내지 못하고 끌고 온 부끄럽고 민망한 주사일 뿐이다.
며칠 뒤 나는 동원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기정기입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신도림역 근처 영다방입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전방 부대로 소집된 2박 3일의 동원훈련은 차라리 소풍이었다. 금방이라도 적들과 대치해 연막에 휩싸여 생사를 고민하게 만드는 재수 없던 전선의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인솔하는 현역병들의 얼굴이 천진난만해 보이고, 야외 병과훈련교장도 오락 시간으로 느낄 만큼 여유로웠다. 생각해보니 내 안에 누군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예상했던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나타났다. 다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내 앞에 앉았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그녀의 이름은 경미.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감돌았고 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그녀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태세였다. 아마도 그 순간처럼 내 얼굴에서 빛이 났던 순간이 있었을까. 나는 시종 웃었다. 가슴속 깊이 매달려 있던 어떤 덩어리 하나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무슨 까닭인지 그때 나는 흑백 사진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줄곧 지갑 속에 간직하고 있던 내 첫돌 사진이었다. 다행스럽게 홀딱 벗은 게 아닌, 그런대로 격을 갖춘 사진이어서 나는 자라면서 그 사진에서 본래의 나 자신을 찾으려 애썼다. 사진 속 돌잡이 아이 앞에 차려진 음식과 사물이 실재인지 알 수 없으나, 사진 바깥의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원이 내게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위안을 받았다. 그녀가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부드럽고 편한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회사의 몇 가지 소식을 전했다.
“아시죠? 우리 공장 사람 몇이서 노조를 만들었던 거요. 그들을 회사에서 해고를 했는데, 그중 한 명이 어제 공장 마당에서 몸에 불을 붙였어요.”
그가 끝내 오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녀가 작게 몸을 떨었다.
아무 일 없듯이 다시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내가 그를 만난 건 두 번뿐이었다. 포장마차에서 처음 만난 이후 한 달쯤 지났을까.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홀로 술잔을 들고 있었다. 내가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갈 무렵이었다. 그가 나타났다. 혼자였다. 그러잖아도 꽤 긴 날을 나는 그를 현장이 아닌 공장 정문 앞에서 출퇴근을 하며 보았다. 그를 포함해 서너 명이 종일 그곳에서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오로지 나를 짓누르는 어떤 부채감 같은 무게에 시달릴 뿐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밀고 가야만 하는 장자 의식이기도 했고, 또 그곳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픈 도피욕망이기도 해서, 나 이외의 어떤 분위기에 쉽게 몸을 싣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혼자 취했다. 포장마차 주인도 이제 나를 편한 시선으로 맞았다. 손님이 넘쳐도 조리대 옆 한 자리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등에 포장마차 가림 비닐이 닿아 바람이 불면 누군가 나를 어루만지며 토닥거리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포장마차에서 처음으로 그에게 술잔을 넘겼다.
“힘들어 보이는군, 한 잔 드시게.”
그는 어떤 이야기도 내게 꺼내지 않았다.
다만 혼잣소리로, 개자식들, 짐승처럼 뼈 빠지게 부려먹더니, 사돈의 팔촌까지 불러들여 배불리기에 혈안이 됐어. 공장 뒤편 넓은 땅도 집어삼키고 거기에 높은 빌딩을 올린다네. 썩을 놈들. 그래, 월급 조금 올리고 옥상에 탁구대 몇 개 놔달라는 게 뭐 어쨌다고 빨갱이 새끼라며 잘라! 그는 낮고 메마른 목소리로 숨이 끊어질 듯 토했다. 그 녀석에게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공장 앞에서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었다. 구멍가게에서 술병을 비우고 거기에 또 터무니없는 내 허위를 채웠다. 그리고 혼자 사장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책상이 보였다. 구사대 어깨들이 둘러싸 나를 제압했으나, 내 입은 틀어막지 못했다.
이 천하에 개만도 못한 사장새끼야! 악귀보다 더 추잡한 잡놈들아, 배 터지게 처먹고 뒈져서 지옥 불에나 떨어져라! 거기서 기름 똥이나 끝없이 싸질러라!
그뿐이었다. 나는 공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젊은 날 한때 내가 처음으로 그려놓은 슬프고 우울한 삽화 한 장이다.
나는 다시 서울을 떠났다. 간단한 짐만 챙겨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몇 날을 취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무언가 습관처럼 끼적여보기도 했다. 그러나 참으로 의미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 안을 들여다보아도 내놓을 무엇 하나 없는 빈 구멍뿐이었다. 하찮거나 허위의 거짓 위선만 들어차 있었다. 비겁하거나 온통 부끄러움만 가득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내가 머물고 있는 숲속에 무장한 순경 둘이 나타나 나를 연행했다.
“아―, 육군 전역 예비군이시군요. 얼마 전에 동원훈련도 다녀오셨네요.”
아마도 군대 관련 정보가 신원조회의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인 모양이었다. 젊은 순경이 얼굴을 활짝 폈다.
“하하, 수상한 사람이 산속에서 혼자 오래 머물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어요. 가끔 있는 일입니다. 하하하.”
그 외 일상적인 여러 질문에 답을 해야 했는데, 딱히 내가 누구라는 신분을 밝히기 어려웠다. 출생지와 직업 따위의 간단한 답조차 모두 거짓 같아서 목소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아무튼 시골 지서를 나오며 나는 더없이 기운이 빠졌다. 시골 지서에서 순경들과 같이 근무하는 방위 한 명이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내가 머물던 곳까지 오토바이로 태워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거절하고 소주 몇 병과 라면을 사 들고 느리게 걸어 되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숲속 나무 그늘이 낮은 텐트 지붕으로 무겁게 내려앉을 무렵 풀잎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였다. 그런데 아버지 뒤 쪽에 그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그녀는 야위어 있었다.
“이번엔 그다지 찾기 어렵지 않더구나. 이 아가씨 경미라고 하네? 아침에 왔는데, 네 엄마가 빨리 널 찾으라고 얼마나 성화를 부리는지……. 허허허.”
잠깐이지만, 한 지역에 오래 산 아버지의 이력이 새삼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른들의 반대를 침묵으로 견뎠다고 했다.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어른이 보기에 나는 눈 씻고 둘러보아도 기대할 만한 어떤 구석도 없었다. 나날이 야위어가는 딸을 바라보기가 안쓰러워 두 분은 손을 드신 것인데, 내 아버지는 마냥 좋은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귀한 새사람을 맞을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안절부절못하셨다. 그 무렵 보았던 두 분의 환한 모습은 이후 내겐 다시없는 사진으로 남았다.
나는 산을 내려와 어머니의 그해 농사를 거들었다. 아버지는 품앗이로 모를 심은 뒤에 내내 읍내 여러 부동산 사무실과 다방에 나가 사셨다. 당신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한몫을 챙기려 애썼으나, 어머니와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해 가을은 소득의 거의 반을 도지로 주고도 두 분의 기분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사주를 들고 그녀의 인천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어머니가 시골 우리 집을 다녀감으로 혼사가 이루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가 직접 써 들고 간 내 사주의 글씨를 보고 두 분 어른의 마음이 너그러워져 딸의 출가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내겐 고맙고 감사할 일이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제대로 그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그분들은 내게 어떠한 눈총이나 질책도 보내지 않으셨다. 한결같이 늘 따뜻한 눈빛과 넘치는 응원뿐이었다.
그러나 신혼은 달콤하지도 꿈같지도 않았다. 어린 동생들과 부모님의 시골집 동거는 나를 더욱 옴짝달싹할 수 없게 가두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곁에 다가온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가 내게 하나뿐인 끈인 게 분명한데, 그마저 초라한 내 욕심이라는 부끄러움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몇 날을 술에 절어 지냈다. 마침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인근 도자기 마을에서 도공 기술을 익혀 비교적 일찍 독립한 친구를 만나 저녁이면 나는 술에 취했다. 어느 날이던가, 그날도 나는 취해 새벽녘 읍내에서부터 집까지 걸어 들어왔다. 그런데 웬일일까. 그녀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그 옆으로 빈 소주병이 구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젯밤 코카콜라 공장 앞에서 기다렸어요.”
아, 이럴 수가! 군 제대 뒤 어머니도 한때 똑같은 그 장소에서 밤새 나를 기다렸다고 했는데. 숨이 턱 막혔다. 한동안 나는 방에서 부끄러움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 공장 주변은 온통 산이었고 밤엔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하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와 나는 서울 중앙시장에서 리어카를 개조해 만들어놓은 포장마차를 구입해 내려왔다. 내가 만든 음식으로 돈을 벌어야 하다니. 오직 그녀의 도움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젊은 부부가 미는 포장마차’, 두 개의 기둥과 바깥 비닐 가림막에 유성 매직으로 크게 써넣었다. 군청 뒤 강변 여주장 담장 밑에 포장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시장 포장마차촌에서 장사법을 염탐했다. 난생처음 멍게와 해삼을 자르는 법을 배우고, 그 어렵다는 육수 제조법을 터득했다. 수차례의 실패 끝에 아내가 얻어낸 비법인데, 포장마차촌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그 비법을 알려준 중년 부부의 따뜻한 눈길을 잊을 수 없다. 포장마차의 기본인 육수 제조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통무를 기본으로 하는 양념에 자연스레 어묵 물이 녹아들면 되는 거였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장사가 끝나도 남은 육수를 버리지 않고 반드시 다음 날에도 밑불처럼 이어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안주에 관한 한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철판곱창볶음이 그것인데 어쩐 일인지 그게 통하지 않았다. 아내는 접해보지 못했고, 나는 기본적으로 음식 조리에 재주가 없었다. 그건 실패였다. 그래도 아내의 솜씨가 나쁘지 않아 늦은 밤이면 여관에서 여러 주문이 들어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강변길에 고등어와 꽁치 굽는 냄새가 퍼지고, 아내가 말아 내놓은 잔치국수가 나그네의 배 속을 채웠다.
그런데 내 동생들에게 우리 부부의 모습이 그다지 멋져 보이진 않았나보았다. 중학교 졸업반이던 막내 녀석이 그해 가을날 가출을 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읍내 신문보급소에서 새벽 배달을 하며 아내가 결혼선물로 가져온 겨울 점퍼를 초여름까지 벗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조기 취업한 누이의 손에 잡혀 되돌아왔다. 나는 사정도 모르고 포장마차 옆 어둑한 곳에서 녀석의 엉덩이에 매질을 했다. 녀석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매를 맞았다. 그러곤 며칠 뒤 다시 집을 나갔다. 이번에도 누이의 손에 이끌려 왔는데, 이럴 수가! 녀석의 앞니 네 개가 모두 사라진 거였다. 여동생이 내 앞에서 펑펑 울었다. 어릴 적 그녀가 거의 업어 키우다시피 한 막내였다.
그 소도시엔 어이없게도 우스꽝스러운 전통 하나가 이어오고 있었다. 추잡스러운 깡패 양아치 문화가 그건데, 그들의 더러운 손이 어린애부터 십 대 이십 대에게 가리지 않고 뻗쳐오고 있었다. 막내는 여러 번 피해 다녔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놈들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아야 했고, 되지 못한 그들의 무용담을 들어야 했단다. 나중엔 신문 배달하는 친구들의 주머니를 털어오라는 주문에 기어이 대들어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막내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누이를 따라 서울로 갔다.
강변 비포장 길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때마다 흙먼지가 포장마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었다. 사실 포장마차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도공 기술을 가진 고향 친구 덕이기도 했다. 그의 처남이 여주의 중간쯤 가는 조폭 조직원이어서 장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들렸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요상한 점은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버릇없는 젊은 애들의 술주정이나 유독 눈초리가 기분 나쁜 사내들 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양복쟁이들의 방문이 의아스러웠으나, 나는 대개의 손님이 그렇거니 했다. 그리고 친구가 늘 가까이에 있었는데, 가끔씩 손님 사이에서 시비나 소란이 생기면 그가 조용히 다가가 그들을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런 어수선함은 쉽게 진정되곤 했다. 그래서 나도 그가 없을 땐 그 방법을 쓰기도 했다. 누군가 끝도 없이 주정을 부리면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잠깐 밖으로 따라 나오시죠.’ 하면 이상하게도 조용해지는 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손등과 팔뚝, 어깨에 문신이 그려진 버릇없는 녀석들의 출몰이 잦아졌다. 그들은 술값마저 계산하지 않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얼굴 밑으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빠르게 한 번 긋곤 사라지는 것이었다.
거리 곳곳에 선거 벽보가 나붙었다. 이제는 안정입니다. 기호 1번 민주정의당 보통사람 노태우. 군정종식 기호 2번 통일민주당 김영삼. 대중은 김대중, 기호 3번 평화민주당 김대중. 그중 한 사람은 내가 어릴 적 보았던 흑백 사진 속의 인물과 동일인이었다. 아버지 주머니 속에서 나온 사진이었는데, 내가 기억하기에 아버지는 그 무렵부터 줄곧 시골 선거운동의 책임자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한번 야당이면 평생 야당인 거야. 이것도 팔자인 모양’,이라는 넋두리를 들었다. 읍내 군민회관 벽면에도 선거 홍보 펼침막이 길게 매달려 펄럭거렸다.
날이 더욱 쌀쌀해지면서 나는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버스터미널이 가까운 중앙통으로 포장마차를 옮겼다. 포장마차는 내가 끌고 뒤에서 아내가 밀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구조였다.
자리를 옮긴 둘째 날이었다. 아내가 육수를 데우고 내가 멍게와 해삼 생선 등의 안줏거리를 진열장에 채우고 있을 때였다. 중년의 양복쟁이 둘이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이거, 뭐야! 이젠 여기저기 옮겨 다니네. 너무한 거 아냐? 암튼 닭똥집이나 구워봐!”
다른 한 사람은 말없이 솥에서 어묵 한 줄을 뽑아 입에 넣었다. 아내가 파를 잘게 썰어 육수에 넣어 그 앞에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어디서 나오셨어요?”
“네, 저희 군청에 있습니다.”
어묵을 입에 넣은 자가 다소곳이 답을 했다. 그러자 옆의 작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참고 봐줬는지 알아? 옮겨 다니며 지저분하게 만들고 도시 미관을 해치잖아!”
나는 돌아서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씨발, 막말하네.
“뭐?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그자는 끝까지 반 토막 말투를 썼다. 참지 못하고 내가 대꾸했다. 그들은 첫 손님이었다.
“공무원은 근무시간도 따로 없냐? 길거리에서 먹고 산다고 절차도 없이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아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탁자에 던지고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그들에게서 만만하게 얕잡아보고 깔보는 경멸의 눈빛을 보았다. 도저히 장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친구와 강변을 걸었다. 그리고 늦도록 술에 취했다. 헤어질 새벽녘 나는 친구의 등에 올라타 군민회관 벽면에 걸린 현수막 하나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웬걸, 불구경할 새도 없이 그게 후루룩 타버리는 게 아닌가.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얼마 뒤 내가 불태운 그 현수막의 주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내와 나는 그 장소에서 장사를 계속했다. 아이가 배 속에서 커갈수록 무엇보다 하루빨리 가게를 얻어 떳떳이 세금을 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하루쯤 쉬고 싶었으나 우리는 그날도 장사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였다. 나는 사복형사 둘에게 잡혔다. 그들은 나를 끌고 가 바로 경찰서 유치장에 가뒀다. 어이없고 당혹스러웠으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보다. 제대로 연유를 묻거나 따지지 못했다. 그저 내가 하는 짓거리가 죄다 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아버지가 경찰서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유치장에 갇혀 있는 나를 발견하자 대뜸 큰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들아! 여기 서장 나오라고 그래! 쟤가 뭔 놈의 큰 죄를 저질렀다고 저기다 가둬? 늬들 정말 혼나볼래?”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의 울음소리처럼 경찰서 안을 울렸다.
나는 간단한 진술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인천으로 옮겼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작은 구멍가게를 얻을 수 있었다. 주안 4동 경인상가 뒷골목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이었다. 때마침 배 속의 아이가 우리 곁으로 왔다. 녀석은 세상으로 나올 때 도무지 자세를 바꾸지 않아 결국 엄마의 배를 째고 나왔다. 순산보다 더 아프다는 수술 회복의 고통을 견디는 아내에게 나는, “그러고 보니, 저놈 우리랑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배 속에서 줄곧 똑바로 앉아 있었을까?” 말하자, 아내가 수술 부위를 잡고 깔깔 웃었다. 아이는 간호사 품에 안겨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방긋거렸고, 병원 유리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답동로 위에는 바다를 건너온 안개가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