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 속 연필들이 보여준 삶의 철학

길상효 글, 심보영 그림, 『까만 연필의 정체』, 비룡소, 2022.

  의인동화는 어린이문학을 대표하는 하위 장르 중 하나이다.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동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들의 특성과 겹쳐 어린이 독자의 관심을 끌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의인동화가 아이들이 배워야 할 다양한 사회 규칙이나 도덕 관념을 손쉽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의인동화=교훈동화’라는 인식이 생겼다. 교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교훈이 중심이 되면 인물과 사건이 기능화 되고 이야기가 얄팍해지기 때문에 좋은 작품으로 독자 곁에 오래 머물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 우리에게 『곰돌이 푸Winnie the Pooh』나 『피터 래빗Peter Rabbit』같이 세대를 넘나들며 길게 사랑받는 작품이 없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길상효의 『까만 연필의 정체』(비룡소 2022)는 유년 동화나 저학년 동화에서 롱런할 수 있는 작품이 잘 나오지 않는 저간의 상황을 뚫고 나온 반가운 작품이다. 『까만 연필의 정체』는 지난해 제10회 비룡소 문학상을 수상한 『깊은 밤 필통 안에서』의 후속작으로 출간되었다. 『깊은 밤 필통 안에서』가 기대 이상의 수작이었던 데에다 작년에 작품을 볼 때만 해도 속편이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속편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기대 반 우려 반 이었다. 속편이 전편을 뛰어넘기 어렵다는 말은 속설 중에서도 가장 그럴싸하거니와, 유년과 저학년 분야의 시리즈물은 유사한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치기 쉬우니 말이다. 하지만 속설을 뒤집는 작품은 언제나 나오기 마련이다.
  『까만 연필의 정체』는 전작인 『깊은 밤 필통 안에서』와 세계관을 공유한다. 필통 속 연필들은 주인인 담이와 같다. 이들은 어려서 아직 서툴고 어설프지만 진지하고 씩씩하다. 이 작품의 빼어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가 어린이의 서툴고 무력한 것보다 진지하고 진취적인 것에 주목한다는 사실. 그간 이야기된 유년이나 저학년 동화의 한계는 서툴고 천진해서 ‘귀여운 어린이’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귀여운 어린이는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에 불과하다. 어떤 어린이가 스스로를 귀여운 어린이라고 생각하겠으며, 어설프고 미성숙한 자신이 그려진 동화책을 읽고 싶겠는가. 이 시리즈는 어른이 내려다본 어린이가 아닌, 어른과 같은 눈높이의 어린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우선 성공적이다. 이야기 속 연필들은 실재 어린이들처럼 조금 어설프지만 보다 많이 진지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작고 귀여운 존재들이 벌이는 한바탕의 소동극에 머물지 않고, 어른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통찰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깊은 밤 필통 안에서』에서 쓸모와 성취감에 대한 깊이 있는 깨달음을 주었던 딸기 연필은 『까만 연필의 정체』에 와서 몽당연필이 되어 모두와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는 사람으로 치면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연필의 한살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죽음과 이별이라는 묵직한 주제의식을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섬세하게 풀어낸다. 큰 연필에서 작은 연필로, 깍지를 낀 연필에서 깍지를 낄 수도 없는 몽당연필로 변한 딸기 연필은 필통만 지키는 자신을 안타깝게 여기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좋은데. 하기 싫은 걸 하다가 마지막을 맞은 게 아니잖아.” 한 존재의 시작과 끝을 이만큼 담백하고 가치 있게 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 속 딸기 연필의 모습은 자기 자신으로 최선을 다한 자의 마지막으로 손색이 없거니와, 이런 뒷모습은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끌벅적 우당탕탕 소동에서 삶에 대한 철학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딸기 연필이 필통 손잡이로 돌아오는 결말은 아쉽다. 어린이에게 여지를 남기고 싶어 한 작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는 어린이를 진지한 대상으로 바라본 스스로의 시선과 관점에서 한발 후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아쉬운 점도 있지만 나는 앞으로 계속될 이 시리즈에 거는 기대가 크다. 각 권을 독립된 이야기로 본다면 플롯이나 전체적인 완성도 측면에서 1권이 2권보다 더 단단해 보이지만, 시리즈로 본다면 다른 면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2권은 단순히 병렬적인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2권은 1권에서 만든 연필의 캐릭터와 설정을 기반으로 보다 넓고 깊은 이야기로 나아간다. 앞서 말한 딸기 연필의 에피소드가 그러하거니와, 1권에서 그려진 연필들의 우정이 2권에 와서는 담이에 대한 믿음과 지지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뭉클하고 뿌듯한 우정의 힘을 보여준다.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이처럼 한 뼘씩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면 ‘깊은 밤 필통 시리즈’는 한국식 의인동화의 새로운 기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다 읽고 내 필통을 열어보았다. 내 필통 속 친구들은 깊은 밤이 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 나를 최고라고 이야기해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따뜻해졌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배움에 망설이지 않는 필통 속 친구들이 보여준 서로를 향한 지지와 사랑은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도 맑은 기쁨과 깊은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동화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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