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보존 등급 : [V] 외 1편
종 보존 등급 : [V]
그들은 잡초다
여름이 자라는 콩밭에 엎드려 김을 매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과 죽인다’는 말에 대해,
그리고 도망갈 구멍에 대해 생각한다
인터넷으로 제초제 초주금 5001밀리리터를 산다
배달된 초주금이 현관 앞에 가볍게 던져진다
‘죽는다와 죽인다’가 가득 든 플라스틱 병
얼굴이 없다
초주금은 이제 기정사실처럼 내 콩밭에 살포되리라
나는 아버지께 ‘처음’ 이라고 이른다
눈 한번 찔끔 감고 ‘처음’ 을 해치우리라
죽는다와 죽인다는 무궤열차처럼 신의 언저리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닐 수 있다
돌이켜보면, 콩밭에서 신의 영역이란 종보존등급:[v]
비감시대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종족
초주금을 병뚜껑에 따라 통에 붓는다
푸른하늘구름무늬 ‘죽인다와 죽는다’ 한 통이 만들어 진다
약통을 메고 종보존등급: [V] 앞에 선다
‘죽인다와 죽는다’의 무게가 어깨를 옥죈다
‘처음’이란 숨이 막히고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기 마련
갈등을 지우기 위해 마스크, 안경, 모자, 긴 장화를 장착하고
빽빽하게 솟은 그들 앞에 선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급한 것은 일을 저지르기 전,
펌프를 누르고 노줄 레버를 당기는 일은
종보존등급:[V]와 여린 콩잎사이 희미한 경계를 더듬어내는
느리고 느린 무수한 선택
편이 나눠지면 ‘죽인다와 죽는다’는 기다리지 않는다
놈의 실체가 안개처럼 분사된다
늦은 오후의 햇살로 종보존등급:[V] 위에 무지개가 폈다 졌다를 거듭한다
‘죽인다와 죽는다’에 숨겨진 색들도 저 하늘의 약속과 같아서
발목 잡혔던 내 죄의 그늘이 묽어진다
제초제 초주금 몇 통을 더 풀어놓은 콩밭을 뒤에 두고
돌아오는 가벼운 발걸음을 숨긴다
찌는 듯 한 더위에 콩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농부라고 기록한다
바람에 맞서는 법5
바람의 발자국을 쫓고 있었다 다시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놈의 뿌리를 캐내야 한다 지난여름 놈이 할퀴고 지나가는 골목에서 보았다 막무가내였다 놈이 휘두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무기 스치는 곳마다 너덜너덜 찢겨져 피가 흘렀다 언제 뿔이 났을까 뿔이 돋는 것은 허약한 뿌리를 숨기기 위한 몸짓
서둘러 가방을 쌌다 모래사막으로 그림자를 끌고 가는 그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있었다 더위가 잦아드는 계절 놈은 느긋하게 모래 위를 굼실거리며 사막을 누리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모래를 얇게 저며내는 칼날 같은 놈의 뿌리가 잡힐 듯하다 지금이다 놈을 잡아낼 기회
가방에는 괭이와 삽이 들어 있었다 저 나풀거리는 깃털 하나 놓치면 또 내 여름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을 놈들이다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삽을 찔러 넣는다 수천가닥으로 반짝이며 흩어진다 실뿌리 하나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을까? 삽을 더 깊숙이 찔러 넣는다 끊임없이 흘러드는 모래 속에 묻는다
눈 쌓인 하일리2 여우고개에서 놈을 다시 만났다 마른 풀잎에 매달려 은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파르르 떨면서, 망설이면서, 주춤주춤 돌아보면서, 나비처럼 파닥거리면서,
마른 수숫대처럼 매달려서, 끙끙거리며 고개를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