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서정 ─게오르크 트라클의 전쟁시 「그로덱」 깊이 읽기

* 이 글은 『독일어문학』제69집(한국독일어문학회)에서 2015년에 발표한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재수록한 것이다.

 

1. 새로운 거대한 도살장이 준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2014년 8월 4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뜻깊은 시낭송 행사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당시 병력을 파병했던 14개국 유엔 주재 대사들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시를 낭송했다. 그 중 하랄트 브라운 독일 대사가 선택한 시는 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의 「그로덱Grodek」이었다. 2014년은 트라클이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로덱은 2022년 2월 러시아가 무력 침공한 우크라이나의 동갈리치엔 인근 지명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러시아 군대를 맞아 격전을 벌였다가 대패한 곳이다. 이 살육의 현장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위생부대 소속 약사로 종군한 시인 트라클이 있었다.
  당시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전쟁이 타락한 기계문명과 시민사회를 일거에 파괴하고 새로운 인류의 여명을 열어줄 기회라 기대하며 전선에 뛰어들었다. 준엄한 역사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한 시대 전환의 상징으로 전쟁을 인식했던 것이다. “진정 앞으로 나가길 원한다면, 우리를 과거와 연결하는 탯줄을 끊어야만 할 것이다.”라는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의 단정 속에, 낡은 가치체계와의 과격한 결별을 선언한 당대 젊은 지식인의 의지가 잘 나타난다. “싸움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미래주의 선언」(1909)에서도 전쟁을 찬미하던 당시의 도발적인 분위기가 잘 읽힌다. 그러나 트라클은, 그들처럼 전쟁을 무조건 찬미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계기로 직업 없이 전전하며 겪던 경제적 어려움을 돌파하고, 자신의 알코올 및 약물중독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가 용기나 혹은 오만에 들떠 참전했던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전쟁의 허상에 가려져 있던 전쟁의 실상을 체험하는 순간, 이미 때는 늦었다. 초기 표현주의 시단의 주역이었던 에른스트 슈타들러, 아우구스트 슈트람, 알프레드 리히텐슈타인 등과 함께 트라클은 전장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로덱」은 트라클의 마지막 작품이다. 연이은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이 1914년 9월 11일 그로덱 전선에서 퇴각할 때, 트라클의 정신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는 90명이 넘는 부상병들을 거의 혼자 돌봐야 했다. 피범벅이 된 중상자들의 비명과 살려 달라는 절규를 트라클의 예민한 정신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을 꺼내 자기 머리통에 발사한 부상병의 최후를 목도했다. 피는 사방으로 분사되어 시뻘겋게 벽을 물들였다. 이 아비규환을 감내할 수 없었던 트라클은 급기야 두 차례 탈영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정신감정 후 크라카우 위수병원 정신병동으로 후송되었다. 시인 횔덜린이 앓았던 정신질환인 조발성 치매증이 그의 병명이었다. 트라클은 자신의 극단적인 전쟁 체험을 10월 초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문예지 『브렌너Der Brenner』 발행인 루트비히 폰 피커Ludwig von Ficker에게 편지로 알렸다. “새로운 거대한 도살장이 준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트라클에게 전장은 인간 도축장에 다름 아니었다. 트라클의 발병과 입원 소식을 들은 피커는 10월 25, 26일 양일간 크라카우를 방문했다. 트라클은 병문안 온 피커에게 야전병원 침상에서 쓴 두 편의 시 「탄식Klage」과 「그로덱」을 낭송했다.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한 트라클은 피커가 인스부르크로 돌아간 다음 날인 10월 27일 자필 원고 「탄식」과 「그로덱」을 우편으로 친구에게 부쳤다. 그가 유언장처럼 쓴 마지막 편지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야전병원을 방문한 이래 난 갑절로 슬퍼진 기분입니다. 나는 이미 이 세계 저편을 느끼고 있습니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가진 돈과 그 밖의 물건들을 모두 내가 사랑하는 누이 그레테의 소유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자 뜻입니다.

  피커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 트라클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릴케와 트라클에게 2만 크로넨의 창작 장학금을 지원해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트라클의 입원 소식을 듣고 서둘러 크라카우로 왔으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하기 사흘 전인 1914년 11월 3일 트라클은 27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11월 6일 트라클은 크라카우의 라코비츠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25년 그의 유골은 피커에 의해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근교의 뮈라우로 이장되었다.
  여기까지가 「그로덱」의 비극적 전사前史다. 그렇다면 트라클 사후 1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로덱」이 시적 울림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예민한 시인이 정신병원에서 쓴 「그로덱」이 독일어로 쓰인 가장 감동적인 전쟁시로 평가받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이 전 세계를 분노케 하는 여기 지금, 트라클의 「그로덱」이 지닌 현재적 시의성은 무엇인가?

 

2. 모든 거리는 검은 부패로 흘러든다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각 부분들이 서로 비슷하고 그것들의 관계가 조화로울 때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각 부분의 적절한 관계는 조화, 질서, 통일을 낳으며, 미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소를 토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근저에는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척도와 수에 따라 배열했다는 신학적 믿음과 ‘미에선 형태로, 형태에선 비례로, 비례에선 수로 즐거움을 얻는다’는 그리스 미학의 기본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이 주장한 황금비율만이 미를 보증하는 기본원리라고 보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은 차이나 대조와 같은 불균형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런 생각을 『신국론』 11장 18절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세계의 미는 반명제들의 대조에 있다.” 조화, 질서, 통일만이 미를 구성하고 감동을 창출하는 요소는 아니다. 트라클의 「그로덱」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양한 차원에서 ‘반명제들의 대조’가 나타난다. 요약해 보면, 문장구조, 음향성, 수사법(모순형용), 공간(넓음/좁음), 소리(소음/정적), 색채(황금색, 푸른색/붉은색, 검은색)의 차원에서 ‘대조의 미학’이 발견된다. 시의 전문을 인용한다.

     저녁에 가을 숲은 살인적인 무기들 소리로
     울린다, 황금빛 평원
     그리고 푸른 호수들, 그 위로 태양은
     더욱 암울하게 구른다. 밤은
 5  죽어가는 병사들을, 산산이 깨진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거친 탄식을 감싸 안는다.
     그러나 목초지에는 어느 진노한 신이 머물고 있는
     붉은 구름, 다 토해낸 피가
     조용히 모인다, 달빛 싸늘함.
10  모든 거리는 검은 부패로 흘러든다.
     밤의 황금가지인 별들 아래
     누이의 그림자가 침묵하는 숲을 가로질러 흔들거리며 간다,
     영웅들의 혼령과 피 흘리는 머리를 맞이하고자.
     그리고 갈대밭에서는 가을의 어두운 피리 소리가 나직이 울린다.
15  오 더욱 자랑스러운 슬픔이여! 너희 청동 제단이여
     오늘 격렬한 고통이 넋의 뜨거운 불꽃을 키운다,
     태어나지 않은 손자들.
     Am Abend tönen die herbstlichen Wälder
     Von tödlichen Waffen, die goldnen Ebenen
     Und blauen Seen, darüber die Sonne
     Düstrer hinrollt; umfängt die Nacht
 5  Sterbende Krieger, die wilde Klage
     Ihrer zerbrochenen Münder.
     Doch stille sammelt im Weidengrund
     Rotes Gewölk, darin ein zürnender Gott wohnt
     Das vergoßne Blut sich, mondne Kühle;
10  Alle Straßen münden in schwarze Verwesung.
     Unter goldnem Gezweig der Nacht und Sternen
     Es schwankt der Schwester Schatten durch den schweigenden Hain,
     Zu grüßen die Geister der Helden, die blutenden Häupter;
     Und leise tönen im Rohr die dunklen Flöten des Herbstes.
15  O stolzere Trauer! ihr ehernen Altäre
     Die heiße Flamme des Geistes nährt heute ein gewaltiger Schmerz,
     Die ungebornen Enkel

  1) 문장구조

  시행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17행으로 구성된 자유 리듬시이다. 연의 구분도 없고, 전통적인 정형시의 율격을 따르지도 않았다. 이러한 무질서 속에 두 가지 대조의 규칙성이 발견된다. 첫째, 8행을 제외하고 모든 시행의 끝에는 명사가 포진되어 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한계상황에 직면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언어로 치환한다면, 조사, 부사, 형용사 등이 생략된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 모든 수식과 부연이 제거된 본질의 언어인, 명사와 동사로만 구성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참전한 표현주의 시인들의 작품이 주로 명사와 동사로 구성된 사정은 여기에 있다. 열여섯 개의 명사가 빠른 호흡으로 이어가며 시 전체에 긴장감과 속도감을 부여한다. 전쟁이 증폭시키는 심리적 공포와 두려움의 심장박동이, 가파르게 늘어선 명사들의 수직축에서 가시화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명사들이 갖는 가치 값(긍정성/부정성)이 8대 8로 양분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긍정성을 지시하는 명사는 가을의 풍경(숲, 평원, 목초지), 따뜻함(태양), 빛(별), 미래(손자)와 연관되어 있다면, 부정성을 함의한 명사는 아픔(고통, 탄식), 신체(입, 머리), 암흑(밤), 죽음(부패), 냉기(싸늘함), 희생(제단)과 제휴한다. 앞으로 전개될 시의 내용 분석에서 밝혀지게 되겠지만, 분화된 명사들의 가치 값은 다른 시어와의 관계와 맥락에 따라 긍정에서 부정으로, 혹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되거나, 긍정과 부정의 양가성을 동시에 지니기도 한다.
  둘째, 명사로 시행을 종결하기 위해 시의 구문을 중간에서 강제로 끊어 다음 행에 걸치게 만든 앙장브망enjambement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전쟁의 참상을 표현한 시의 전반부(1-9행)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기성의 질서와 제도를 유린하는 전쟁의 무차별한 폭력성이 문장의 기맥을 강제로 자르는 앙장브망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로덱」에서는 앙장브망으로 인해 통사적 단위가 다른 시행으로 넘어가는 시행들run-on lines과 한 시행이 통사론적 단락으로 끝나는 시행들end-stopped lines이 대조를 이룬다. 문장의 분절과 연속이 대비를 이룬다.

  2) 음향성

  압운이 사용되지 않아 음악성을 느낄 수 없었던 대부분의 시행들과 대조적으로 11~13행에서 서정적 음향성이 감지된다. 초두음의 자음(g, sch, h)이 일치하는 두음법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11~13행인가? 전쟁에 동원된 무기의 포효(“살인적인 무기들 소리”)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신음(“거친 탄식”)에서 서정적 화음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유사한 소리를 내는 음절의 반복으로 인해 음악성을 내장한 11~13행에서 전사자들의 영혼(“영웅들의 혼령”)을 품어 안고 이들의 고통(“피 흘리는 머리”)을 위령하는 절대적 모성의 상징인 “누이”가 등장한다. “누이”는 트라클이 사랑했던 4살 손아래 누이 그레테이자 전장에서 쓰러진 모든 망자들의 누이이다. 누이는 “그림자”로 존재한다. 죽은 이들의 혼백이 그림자로 떠도는 하데스의 명부冥府에 도착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누이가 걸어가는 “침묵하는 숲”은 피안의 세계를 의미한다.
  ‘누이’의 임무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누이는,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제2부 〈발퀴레〉에 나타나듯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전사자의 영혼(“영웅들의 혼령”)을 오딘의 발할라 궁전으로 인도하는 게르만 신화의 여사제 발퀴레(전사자를 선별하는 여인)를 대변한다. 두 번째로 누이는, 바흐의 오라토리오 〈마태 수난곡〉 합창 63곡 〈오 피투성이로 상처 난 머리여〉가 환기하듯이, 인류의 죄를 등에 업고 희생당한 자(“피 흘리는 머리”)를 품어 안는 성모 역할을 구현한다.

오 피투성이로 상처 난 머리여
  고통과 비웃음으로 가득하도다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당하신 머리
  오 한때 모든 존귀와 장식으로
  아름답게 입으신 머리가
  이제 가장 큰 모욕을 당하셨으니
  제게 찬미 받으소서!

  “피 흘리는 머리”를 맞이하는 누이의 모습에서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해하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연상된다. 트라클의 시 세계에서 누이는 신화적 신비함과 종교적 숭고함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다. 이러한 누이가 등장하는 배경(“밤의 황금가지인 별들 아래”), 누이가 망자의 숲을 통과하는 과정(“누이의 그림자가 침묵하는 숲을 가로질러 흔들거리며 간다”), 그리고 누이가 현현한 이유(“영웅들의 혼령과 피 흘리는 머리를 맞이하고자”)를 묘사하는 시행에서 모두 두음법이 사용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처참한 현실과 대조되는 구원의 초현실을 음향적 차원에서 구현해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읽힌다.

  3) 모순형용

  「그로덱」에서는 어떤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얻기 위해 보편적인 단어의 연결체로부터 벗어나는 시적 비유 형태인 모순형용이 눈에 띈다. 맥락상 서로 반대되거나 양립할 수 없는 어구가 결합된 모순형용은 수사학적 차원에서 대조의 미학을 실천한다.

① 태양은
    더욱 암울하게 구른다

② 더욱 자랑스러운 슬픔이여! 너희 청동 제단이여
    오늘 격렬한 고통이 넋의 뜨거운 불꽃을 키운다

  ①에서는 주어(태양)와 동사(구른다)의 결합이 모순된다. 태양은 땅 위를 구를 수 없다. 태양은 천공의 궤도를 따라 운행한다(태양은 항성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지만, 시적 화자의 눈에는 당연히 태양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라클은 태양이 풍경을 밝히는 광원光源이 아니라 풍경을 압사시키는 거대한 돌덩어리로 상상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무자비하게 훼손하고 파괴하는 태양은 전쟁의 마성魔性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그로덱의 “황금빛 평원”과 “푸른 호수” 위로 쿵쾅쿵쾅 굴러가는 태양은 전쟁의 무차별적인 폭력성을 설득력 있게 재현한다. 태양이 지상을 짓밟으며 빚어내는 마찰음은 그로덱 숲 속에서 울리는 “살인적인 무기들 소리”(1행)와 연계되고, 병사들이 내지르는 “거친 탄식”(6행)의 원인이 된다. 맷돌처럼 구르는 ‘돌덩이 태양’은 자연과 인간을 으깨어 부순다. 전쟁의 폭력은 전면적이다. 트라클에게 생명의 근원, 희망의 빛으로 상징되는 태양은 절망적인 대상으로 인식된다. 태양이 “암울하게” 구른다고 상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암울한 태양’의 이미지도 어둠과 빛이 결합된 또 하나의 모순형용이다.
  ②에서는 형용사(자랑스러운)와 명사(슬픔)가 서로 양립한다. 아귀 지옥의 전장에서 몸부림치는 실존의 정신적 고통을 수식하는 시어로 ‘자랑스러운’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랑스러운 슬픔”도 역설적인 조합인데, 시인은 슬픔 앞에 “더욱 자랑스러운”이라는 형용사 비교급까지 덧붙였다. 트라클의 슬픔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의 제단에 봉헌된 제물이다. 슬픔과 제물의 연관성은 “더욱 자랑스러운 슬픔이여”와 동격으로 쓰인 “청동 제단”이란 시어에서 분명해진다. 청동 제단은 유대교에서 번제燔祭를 지내는 전형적인 제단 양식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신에게 올린 동물의 희생의식에 사용된 제단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피 흘리는 머리”의 슬픔은 구원을 위한 공희供犧를 의미한다. 실존이 체험하는 ‘지금 여기’의 고통은 새로운 인류의 여명(“태어나지 않은 손자”)을 여는 최후의 통과제의이다. 극한의 한계상황에 내몰린 실존의 고통은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당연히 치러야 할 자기희생이다. 트라클의 후기시 「뇌우Das Gewitter」에 이런 시구가 있다.

  오 고통이여, 그대 위대한 영혼을
  불태우는 응시여!

  이 시구가 암시하듯이, 트라클에게 고통은 과거로의 퇴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통은 영혼을 불사르는 뜨거운 응시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가치에 대한 간절한 호소이자 기구祈求이다. 트라클이 슬픔을 ‘자랑스럽다’고, 아니 ‘더욱 자랑스럽다’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혼(넋)을 양육하는 고통, 달리 말하자면 ‘더욱 자랑스러운 슬픔’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 슬픔은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정신의 한계선을 넘어선 무한한 사태가 일어나는 숭고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트라클의 슬픔이 갖는 기능은 추모와 애도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대조적인 명제들이 결합된 두 가지 모순형용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두 사례에서, 모순을 새로운 의미 생성의 내적 추동력으로 삼는 대조의 미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긍정적인 가치 값을 방사하던 ‘태양’은 ‘구르다’라는 동사와 만나, 파괴의 집행자가 된다. 반면, 부정적인 가치 값을 분무하던 ‘슬픔’은 ‘더욱 자랑스러운’이란 형용사 비교급과 만나 성스러운 종교적 아우라를 갖게 된다. 이렇게 두 가지 모순형용 ‘구르는 태양’과 ‘자랑스러운 슬픔’에 내포된 의미 값의 방향성도 대조를 이루고 있다.

  4) 공간

  넓은 공간과 협소한 공간이 교차되면서 대조를 이룬다. 맨 먼저 전쟁의 참상이 그려진 시의 전반부(1~8행)를 보자. 서두에서는, 트라클이 1914년 10월 피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로덱을 “완만하고 밝은 구릉지”라고 묘사한 것처럼, 어느 가을 해 질 녘 그로덱의 평화롭고 드넓은 자연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을 숲”, “황금빛 평원”, “푸른 호수”가 마치 영화에서 피사체로부터 카메라가 멀리 떨어지면서 얻는 원경遠景처럼 전개된다. 그러다가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짙어지자 시적 화자의 렌즈는 롱 샷에서 클로즈업으로 교체된다. 스크린 전체가 죽음을 목전에 둔 군인들의 “깨진 입”으로 가득 채워진다. 군인들의 선혈이 한 장소로 ‘집결’하는 시적 이미지는 ‘줌 인zoom in’ 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넓은 공간과 협소한 공간의 대조는 10행에서 첨예화된다. “모든 거리는 검은 부패로 흘러든다.” 샛길은 없다. 우회로도 없다. 인간의 문명(“모든 거리”)은 몰락의 소실점(“검은 부패”)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삶의 공간은 해체의 흑점黑點 속에서 사멸된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트라클의 비관론이 이 참언讖言적인 아포리즘에 집약된 것이다.
  「그로덱」 후반부(11~17행)에서 협소한 공간은 다시 넓어진다. 황금빛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낭만적인 밤하늘이 펼쳐진다. 트라클은 별자리를 “밤의 황금가지”로 상상했다. 참혹한 현실 저편을 향한 동경이 시적 무대를 우주로 확산한다. 이러한 천상의 세계와 조응하면서 누이가 횡단하는 “숲”이 나타난다. 피리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갈대밭”도 나타난다. 모두 열린 공간이다. 그러나 시가 종결로 치달으며 현실의 구체적인 공간은 추상적인 원점으로 응집된다.

  태어나지 않은 손자들.

  “태어나지 않은 손자들”은 현실태가 아니다. 이들은 시공간을 점유한 실존이 아니다. 이들은 미래를 상상 임신한 인류의 순수한 잠재태이다. 앞서 언급한 “검은 부패”의 흑점이 죽음의 종점이라면 “태어나지 않은 손자들”은 생명의 시원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진실로 충만한 곳, 신과 자연과 인간이 신비적 일체unio mystica를 이루던 곳이 ‘태어나지 않은 손자’의 본향이다. 이곳이 바로 트라클 시학의 긍극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손자의 자양분이 전쟁에서 부당하게 희생당한 자들의 “격렬한 고통”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몰락하는 자가 손자의 부양자인 것이다. 트라클은 모든 것이 파괴된 전장 한복판에서 새로운 시작을 예언하고 있다.

  5) 소리

  소리의 높낮이(고저), 세기(강도), 모양새(음색)가 대조적이다. 「그로덱」에서 실제 전투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인은 전쟁의 참상을 소리로 표현한다. 목가적인 자연에서 울리는 무기들의 발포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총탄이 발사되고 수류탄이 터지고 포탄이 폭발한다. 이러한 전쟁의 굉음을 트라클은 “저녁에 가을 숲은 살인적인 무기들 소리로/ 울린다”고 압축한다.
  시의 서두를 강타하던 무기들의 날카로운 고음은 죽어가는(아직 죽지 않은) 병사들의 낮은 한숨 소리(“탄식”)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탄식”은 전쟁의 참상 앞에 몸부림치며 내지르던 비명과 경악 ‘이후’의 비극을 소리로 재현한다. 말하자면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내지를 수 없는 ‘실존의 영도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단말마가 “거친 탄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탄식의 톤은 낮다. 그러나 거칠다. 탄식에 농축된 고통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탄식은 비명과 경악 이후의 사건이다. 그러나 시의 후반부로 가면서 탄식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부상자들이 모두 전사한 것이다. 이제 숲에는 밤의 정적만이 흐른다. 그러자 “침묵하는 숲”에서 전투의 굉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던 소리가 조용히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갈대밭에서 가을의 어두운 피리 소리가 나직이 울린다.

  살의殺意로 들끓던 무기들의 소음 대신에 “피리 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시인은 갈대밭 사이로 통과하는 바람 소리에서 피리 소리를 연상한 것이다. 이 피리 소리는 신화적,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위령하기 위해 갈대를 꺾어 피리를 최초로 만든 목양신 판Pan과 구약 시대 갖은 핍박을 견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떠올리게 한다. 판과 예레미야에게 피리 소리는 상실의 슬픔과 연관이 있다. 트라클의 피리도 상실의 아픔과 ‘죽음의 명상meditatio mortis’을 노래한다. 그래서 피리 소리는 밝지 않고 침울하다. “어두운 피리 소리”는 저음이다. 망자의 혼백을 추도하고 위령하는 레퀴엠이 그로덱의 갈대밭에서 울리고 있는 것이다.

  6) 색채

  색채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황금색과 푸른색이 긍정적 가치를 대변한다면, 붉은색과 검은색은 부정적 의미소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색이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적 인상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 수단을 넘어 내면의 감정, 영혼, 가치관, 현실인식 등을 이미지로 가시화하기 위한 시적 기제로 사용된다는 것과, 색의 가치 값은 불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첫째, “황금빛 평원”이란 시어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듯이, 결실의 계절인 가을은 풍요와 충만을 상징한다. 잘 익은 곡식의 이삭으로 황금물결을 이루는 들판이 핏빛 전쟁의 무대가 된다는 사실이 전쟁의 비극성을 서정적으로 높인다. 한편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에 대한 은유인 “밤의 황금가지”에서 황금색은 신성의 광채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빛을 발산하는 황금색은 신의 은총과 천국의 빛을 상징한다. 구원을 상징하는 누이가 등장하는 배경으로 황금색이 사용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수긍된다. 또한 “황금가지”는 트라클 시 세계의 이상향인 신과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황금시대를 상징한다.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에서 인류의 역사를 퇴보와 타락의 역사로 해석한다. 기독교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처럼 황금시대 이후 백은 시대, 청동 시대, 철 시대로 이어지면서 인류의 역사는 점점 분쟁과 전쟁으로 점철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황금가지”가 펼쳐진 별이 빛나는 천공은, 트라클이 동경하는 전쟁을 통해 인류가 몰락하기 이전의 황금시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시대로 되돌아갈 길은 없다. 황금시대에 대한 갈망의 정도는 엄존하는 현실(전쟁)에 대한 절망에 비례한다. 그래서 그로덱의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의 황금빛은 찬란하게 우울하다.
  둘째, 푸른색은 원죄 없는 순수성을 상징한다. 누이 그레테를 사랑한 트라클은 시민계급의 윤리적 금기를 파기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늘 자신을 저주받은 시인으로 생각했다. 자기 파멸의 나락이 깊을수록 시 쓰기에 대한 열망은 커졌지만, 내면의 분열은 트라클의 영혼을 황폐화시켰다. 트라클의 내면세계에서 푸른색은 사회적 억압과 도덕적 금기가 없는 세계, 인간의 성이 분화되기 이전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색으로 애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누이동생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개인적 비극이 초래한 원초 세계에 대한 갈망은 당대를 풍미했던 표현주의 예술사조의 이념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다. 세기전환기 위기의식 속에서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을 부정하고 억눌린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절대적이고 원초적인 세계로 귀환하기를 갈망했던 표현주의의 근본정신을 상기해보면, 트라클의 푸른색은 물질문명에 의해 세상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다. 이렇게 보면, 「그로덱」에서 묘사된 “푸른 호수들”은 그로덱 주변에 위치한 여러 호수들에 대한 묘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푸른빛을 깊이 머금은 호수들은 물질문명이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형태로 폭발하기 이전의 상태인 원죄 없는 순수한 세계를 조용히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푸른 호수는 곧 붉은 피로 물들 것이다.
  셋째, 붉은색은 파괴의 집행자와 희생자를 동시에 상징한다. 붉은색의 양면성은 트라클의 「가을의 영혼Herbstseele」의 다음 시구에서 잘 나타난다. “사냥꾼들의 외침과 피의 울부짖음 ”에서 피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파괴의 욕망으로 들끓는 사냥꾼의 피를 뜻할 수도 있고, 사냥의 희생물이 흘리는 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로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군인들이 흘린 피로 이루어진 “붉은 구름”에 거주하는 “진노한 신”은 전쟁의 신을 의미한다. 피에 굶주린 군신軍神 마르스Mars가 욕망하는 것은 전사자의 피다. 트라클은 그로덱의 목초지 군데군데 고인 시신들의 핏물에서 석양으로 붉게 물든 그로덱 가을 하늘의 구름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깊어지자 이 쏟아진 선혈鮮血 위로 차가운 달빛이 비친다. 트라클의 시에서 달은 낭만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구름과 마찬가지로 달도 피에 목말랐다. 달은 인간의 생명을 사냥하는 난폭한 냉혈한이다. 이처럼 「그로덱」에서는 서정적인 풍경(구름, 달빛)과 비서정적인 고통(피)이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전쟁의 비극성이 고조된다.
  다른 한편 붉은색은 정화의 기능을 지닌다.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의 몸을 상징하는 빵을 먹고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신다. 예수의 피는 인간의 죄를 사해주는 정화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 시대 번제에서 불순하고 타락한 것을 태움으로써 신에게 봉헌하고 속죄하는 매개로 불이 사용되기도 했다.
  넷째, 검은색은 죽음의 제왕이다. 괴테는 『색채론』에서 검은색을 “암흑의 대리자”에 비유했다. 신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색채의 본질』에서 검은색을 “생명에 대한 적대성”, “죽음의 영적인 이미지”로 정의했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색채 이론에 따르면, 검은색의 내면적 울림은 “가능성 없는 무, 해가 진 후의 죽은 무, 미래와 희망 없는 영원한 침묵”이다. 부연하자면 검은색은 “인생의 종언인 죽음 후의 육체의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트라클 시 세계에서도 검은색은 생명이 말살된 무의 세계를 상징한다. 트라클의 「길 따라서Entlang」의 2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 오래전에 죽었음을 말하려무나. 태양은 검게 나타나려 한다.” 죽음의 심연을 상징하는 ‘검은 태양’의 이미지는 「그로덱」에서 “검은 부패”의 이미지로 변주된다. 모든 가능성이 말살되는 일점, 해체가 종결되는 일점, 부정성이 완성되는 일점이 바로 “검은 부패”의 정체인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신 마르스의 정언명령은 이렇게 괄약될 수 있다.

  모든 거리는 검은 부패로 흘러든다.

  지금까지 언급한 색채 상징성을 바탕으로 색들의 상호 관계를 정리해 본다.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순수성을 저수貯水했던 “푸른 호수”는 전쟁의 폭력에 의해 도륙되어 붉은 핏물로 목초지 위에 고여 있다가 “검은 부패”의 심연으로 빨려들어 간다. 그 암흑의 심연 위에 “황금가지”가 펼쳐져 있다. 「그로덱」에서 붉은색(피)은 푸른색(호수)과 대조를 이루며 더욱 잔인해진다. 이렇게 광포해진 붉은색(피)을 모두 흡수하는 검은색(부패)은 더욱 무자비해진다. 영원히 빛나는 불멸의 황금색(별)은 모든 것을 필멸로 이끄는 검은색(부패)을 굽어보며 더욱 무기력해진다. 푸른 호수—붉은 구름—검은 부패—황금가지. 이 색채의 연쇄가, 트라클이 전쟁의 참혹함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구성한 대조의 색채 미학이다.

 

3. 최고의 시는 결정적으로 역사적이다

  「그로덱」에는 대부분의 전쟁시에서 출몰하는 격렬한 저항의 몸짓이나 반전의 외침이 부재한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전우들 사이의 휴머니즘도 느낄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브레히트)이 임리淋漓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로덱」은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시적 긴장이 빚어내는 울림이 있다. 트라클 개인의 불우한 운명과 전쟁의 광기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광인이 된 젊은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시 ‘밖’의 사정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시 ‘안’에 내재해 있는 대조의 미학이 「그로덱」의 생명력과 문학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고 판단된다. 시의 중심축 제10행(“모든 거리는 검은 부패로 흘러든다”)을 경계로 전쟁의 ‘현실’과 구원의 ‘초현실’이 맞대면 하고 있다. 절단된 문장과 온전한 문장이 대치하고, 음악성이 사장되어 파편화된 시어들 틈에서 모종의 낭만적 율동이 감지된다. 주어와 동사가 모순적으로 결합되고, 형용사와 명사가 뜻하지 않게 만나 시적 주제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줌 인’과 ‘줌 아웃’이 교차되면서 공간의 확대와 축소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무기의 포효와 자연의 호흡(“피리 소리”)이, 지축을 흔들며 굴러가는 태양의 요동과 망자의 숲을 걸어가는 누이의 미동이 대조를 이룬다. 색채들의 보색대비 속에서 시적 전언이 이미지로 가시화된다. 이와 같은 대조적 장치들을 통해 전쟁의 잔인성과 자연의 서정성이라는 대립적인 세계가 길항하고, 인류의 몰락과 시작, 파괴와 구원이라는 서로 다른 명제가 교호交互한다. 요컨대 「그로덱」은 ‘시의 옷을 입은 비극’이다. 20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르타 뮐러의 문학관은 트라클 시학의 빛나는 유산이다.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그로덱」에서 반명제들의 대조가 모두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클이 사용하는 대조의 미학은 하나의 비교 우위를 부각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평가 절하하는 흑백논리나 혹은 선동의 수사학에 매몰되지 않는다. 대조의 구분선이 분명해지면 시적 전언이 자명해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밀이 없는 시는 단 한번 읽히고 버려지기에 십상이다. 「그로덱」은 비밀을 슬쩍 드러내는 동시에, 그 비밀을 요령껏 감춘다. 극과 극이 정면충돌하기보다는 명제와 반명제 사이의 교호가 은밀히 이루어진다. 감춤과 드러냄의 변증법이 「그로덱」의 미덕이다.
「그로덱」은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고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 아니다. 「그로덱」은 ‘여기 지금’ 우리를 향해 계속해서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몰락한 자의 “거친 탄식”과 “격렬한 고통”을 벌써 망각했는가? “태어나지 않은 손자”는 정상 분만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문명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가? 인류의 미래는 황금빛인가 핏빛인가? 「그로덱」 이후에도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 아우슈비츠 대학살,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소말리아 내전, 걸프전쟁, 이라크전쟁 등을 경험해 왔다. “푸른 호수”가 언제든 “검은 부패”의 늪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통각痛覺했던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의 포성은 끊이질 않는다. 이 순간 우크라이나에서 들리는 비명이 들리지 않는가? “태어나지 않은 손자”의 출생은 요원하다. 따라서 「그로덱」의 시적 전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로덱」은 미학적으로 정교하면서 고도로 정치적이다. 괴테가 적시했듯이 “최고의 시는 결정적으로 역사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비극적 참상에 전율하는 우리가 「그로덱」을 다시 저작咀嚼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