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국 현대시와 만주 <3회> : 정책이민 시대 2 (1931~1945)

  

4-2. “너희 죽어 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유치환은 왜 만주행을 결심했을까?

  그 질식할 일제 질곡의 하늘 아래 (중략) 가증한 원수인 일제 앞에 자기를 노예로 자인하고 그들에게 개같이 아유구용하는 길밖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러므로 그 시기에 있어서는 적으나마 겨레로서의 자의식을 잃지 않은 자라면 원수에 대한 가열한 반항의 길로 자기의 신명을 내던지든지 아니면 희망도 의욕도 저버리고 한갓 반편으로 그 굴욕에 젖어 살아가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비굴하게도 그 중에서 후자의 길을 택한 것 (중략) 나는 용하게도 그 호구를 모면할 길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나의 주변에는 많은 ‘아나키스트’와 그 동반자들이 있었고, 따라서 내게도 항상 일제 관헌의 감시의 표딱지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다녔지마는, 영광스런 돼지우리의 구경만도 끝내 한번이고 해본 적이 없었으니, 나의 천성의 비겁하리만큼 적극성의 결핍한 소치의 결과로서, 생각하면 부끄럽기 한량없는 일입니다.

─ 유치환, 『자작시 해설─구름에 그린다』(신흥출판사, 1959), 22∼23쪽.

  만주! 만주는 이미 우리의 먼 선대에서부터 광막한 그 벌판 어디메에 모진 뼈를 묻지 않은 곳이 없으련만, 나는 나대로 내게 따른 가권을 거느리고 건너갈 때는 속으로 슬픈 결의를 가졌던 것입니다. 오직 나의 인생을 한번 다시 재건하여 보자는 데 있었던 것 (중략) 사실 나는 식민지 백성으로 모가지에 멍에가 걸려져 있기도 하였거니와, 자신에 대한 준열을 잃고 게을하게 서성거리고만 살아 왔던 것 (하략)

─ 위의 책, 35쪽.

  청마의 이 회고에 의하면, 그의 북만주 이주는 ‘지식인의 비굴, 일제의 감시, 자기 태만’을 떨치고, 호구지책의 ‘인생 재건’을 꾀한 하나의 “슬픈 결의”였다.1

  호나라 호동胡洞에서 보는 해는
  어둡고 슬픈 무리[暈]를 쓰고
  때 묻은 얼굴을 하고
  옆대기에서 첨과甛瓜를 바수어 먹는 니-야여
  나는 한궈인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짓적 물려받은
  도포 같은 슬픔을 나는 입었소
  벗으려도 벗을 수 없는 슬픔이요
  ─ 나는 한궈인이요
  가라면 어디라도 갈
  ─ 꺼우리팡스요

─ 유치환, 「도포」(『생명의 서』, 행문사, 1947) 전문

  화자는 낯선 이역의 시골마을 뒷골목, 금세 빗줄기 뿌릴 듯 “어둡고 슬픈” 햇무리 진 여름날, 생오이 씹는 중국인 ‘너’(니-야; 你呀)에게 어설픈 중국어로 자신의 비천한 행색을 거듭 되뇌고 있는데, 그 무렵 군색하기 이를 데 없는 재만 조선인의 사회경제적 처지가 깊디깊은 비감을 자아낸다. 여전히 대대의 “슬픔 같은 도포”를 예장한 이 물색 좋은 ‘한궈런’(한국인)은 언제 또다시 쫓겨갈지 모를, “가라면 어디라도 갈” ‘꺼우리팡스’2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 끝에 시인이 붙인 주석대로, ‘꺼우리팡스’란 중국인이 “조선사람을 천시하여 부르는 말”이라는 사실에 상도할 때, 시적 퍼스나는 되놈 땅에서 저 왕소군王昭君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세월을 살고 있는 가련한 존재임을 문득 자각하는 것이다.
  중일전쟁 직후의 ‘치외법권 철폐’(1937. 11. 6.)로 명색 ‘만저우궈런’滿洲國人이던 당시 조선인에게 만주란 정녕 무엇이었던가. 600명 조선개척민 관리책이자 충용한 ‘만주제국협화회 빈강성 협의원’이었던 이선근李瑄根(1905∼1983)3에게조차 만주는 한낱 “인연이 먼 고장, 고향에서 살 수 없는 무리가 막다른 발길을 옮겨 놓은 서글픈 고장”(이선근, 「만주와 조선─역사적 인식의 새로운 검토」, 『조광』, 1939. 7.)일 뿐이었다.
  ‘오족협화五族協和4, 일만일체日滿一體, 왕도낙토王道樂土’라는 건국이념의 기치를 내걸고 각족 상호융합의 ‘복합민족국가’를 지향한 만주국 치하의 조선인은, ‘제국 신민, 2등 국민’이라는 겉치레 우대마저 ‘치외법권 철폐’로 이내 끝장나고 일본인으로부터는 줄곧 ‘조센징’으로, 중국인으로부터는 ‘일본 앞잡이’로, 또는 ‘일본놈 아류’, 즉 ‘얼꾸이즈二鬼子’로 심하게 멸칭되었다.
  몸소 그 현장을 참관이라도 한 듯, 만주 체류 시절 발표한 유치환의 「수5의 ‘비적 효수’ 장면은 참으로 리얼하다.

  12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히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山河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렬險烈함과 그 결의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恩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 유치환, 「수」(『생명의 서』, 앞의 책) 전문

  여전히 광야의 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는 듯한 카라바죠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의 유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1607)나, 신수이처身首異處의 참경이 실로 선연한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의 흑백화 〈도살자의 손에 잘린 세례 요한의 목을 받는 헤롯〉(15세기)의 사실적 묘사와 방불한 전율감이 오롯이 스며 있다. 만주국의 질서 보전을 위해 ‘강아지, 닭새끼’처럼 “율의 처단”을 당한 “비적의 머리 두 개”, “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무뢰한 넋”에 대한 단죄가 실로 추상 같은데, 삭북 한천 12월의 북만주, 한 지방 소도시 네거리 장대에 달아맨 비적의 수급을 사납게 힐책하는 시적 퍼스나의 모습은 흡사 부당하게 극형을 선고한 엄위한 판관의 그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청마는, 1943년 10월 현재 “하얼빈협화회 근무”라고 자서한 바 있다. 만주국 배후 실권자인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으로 설립된 ‘만주제국협화회’(1932. 7. 25.)는 “괴뢰 만주국의 건국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교화적·정치적 실천 단체이며, 만주국 정부의 정신적 모체”로, 만주 전체 주민을 ‘협화회’라는 이 준 국가적 기구로 조직화한 일제는 1933년부터 이른바 보갑제保甲制를 실시, 전 ‘국민’을 그들의 정보 요원으로 만들었다.6
  그런데 하필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인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비적의 효수’가 내걸린 곳은 아마도 하얼빈 북방 소도시인 듯하다.7 또 주목할 것은,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라는 구절이다. 만주국 정치란 일찍이 공자가 『논어』 「요왈편堯曰篇」에서 언급한 ‘4악’, 즉 ‘학정, 폭정, 적정賊政, 유사정有司政’ 등과는 가히 견줄 바 없는 극히 흉포한 “피의 법도”8라는 것이다.
  이 시의 “비적”과 관련하여, 유치환이 만주로 건너간 1940년 전후의 빈장성濱江省9 치안 상황은 어떠했는가.
  전남 담양의 죽세공 아들로, 1937년 3월 중국 펑티엔奉天(현 瀋陽)을 거쳐, 만주국 선만척식회사鮮滿拓殖會社(1936년 설립) 관할 ‘영구현营口縣 조선이민 농장’(영흥촌)에서 2년간 근근이 더부살이하다, 1939년 빈장성 주허현珠河縣으로 이주한 전 연변대학 부총장 정판룡鄭判龍(1932∼2001) 교수의 회고록 일절을 인용한다.

  1939년 2월에 우리는 또 이불짐을 지고 머나먼 북만땅으로 떠났다. 봉천에서 북행열차를 타고 하루 밤낮을 가니 할빈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할빈에서 목단강으로 가는 동행 기차를 갈아탔다. 오르고 내리는 여객 가운데는 이따금씩 조선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할빈 부근의 오상五常·아성阿城·주하珠河·연수延壽 등지에는 조선이민이 퍽 많다는 것이었다. 민족독립군이거나 항일유격대들도 이곳 산골에서 활동했었는데 지금은 좀 잠잠해졌다고 하였다. 저녁 무렵에 우리는 주하역에 도착하였다. (중략) 하동河東은 주하역에서 근 2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하는 현소재지이고 또 빈수선濱綏線이 통하는 교통요지라고는 하지만 퍽 어둡고 더러운 도시였다. 1930년대 중엽부터는 일본만척회사에서 강제로 이곳 땅을 징수하고 수전을 위주로 하는 개척농장을 만들었다. 이것이 곧 하동농장이다. (중략) 일본이 패전하자 위만 때 경찰노릇을 했거나 위만군대에 있었던 놈들, 그리고 농촌에서 건달노릇을 하던 놈들이 아직 정부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일본군대들이 내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들을 주워다가 사사로이 토비 대오를 무었다. 이 토비들은 조선사람만 보면 ‘얼꾸이즈二鬼子’(‘두번째 일본놈’이라는 뜻─정판룡)라고 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이런 토비들을 우리는 습관적으로 마적떼들이라고 했는데, (중략) 민국 때나 위만주국僞滿洲國 성립 초기만 해도 동북에는 마적들이 욱실거렸다고 하였다. 북만지구의 토비들은 일반적으로 조선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였다. 조선사람은 대부분이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 정판룡, 『고향 떠나 50년』(북경: 민족출판사, 1997.), 18∼29쪽.

  만주국 초기부터 일본 패전 직후의 정치 공백기에 이르기까지 북만주 ‘마적떼, 민족독립군, 항일유격대, 토구, 토비’ 등의 활동상이 확연한데, 여기서 ‘비적’이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홍정선은 위의 기록에 일부 근거하여,

  유치환이 거주하던 지역(빈장성 옌서우현─필자)에는 당시에 독립군이 없었다는 사실과, 비적들이 자주 출몰했다는 사실 (중략) (1940년 들어─필자)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부대로는 동북항일연군이 유일한데, 이 부대의 활동지역은 청마가 살았던 지역과는 멀리 떨어진 동쪽이었다. 그리고 이 부대 역시 일본군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1940년까지는 모두 소련으로 넘어갔다. 그런 만큼 「수」에 나오는 비적은 말 그대로 비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중략) 청마는 우리문학사에서 인격과 작품이 일치하는, 드믄 경우였다.10

며, 「수」는 ‘친일시’가 아니라고 결론했다. 여기서 ‘비적’은 “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도둑”을 뜻하는 사전적 의미일 뿐 항일세력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논자는 일반 민중을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던 동북의 ‘중국인 토비’를 특히 유념한 듯하다. 청마는 “인격과 작품이 일치하는”, ‘시와 삶’이 부합하는 드문 시인으로, ‘친일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으로의 전략적 이동’(1940년 10월말~11월초) 이후 항일연군의 유격활동이 청마 거주지역 북만주에서 그냥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1941∼1942년, 개편된 소련 주둔 항일연군 중, 김일성 부대(남야영 소속 1로군)는 주로 연변 지역(연길·화룡·안도·돈화·왕청·훈춘 등지)에서 활약했지만, 조상지 소부대(북야영 소속 2로군)는 북만주 싼장성三江省에서,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은 허형식(‘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 소부대는 북만주 빈장성에서 치열한 유격전을 속개했던 것이다.11
  ‘비적’이란 무엇인가.

  비류匪類·마적馬賊에는 대개 몇 종류의 유형이 있다. 우선 마적인데, 이것은 정규의 마적단과, 비슷한 몇 개의 인접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정규의 마적은 군대식 편제와 장비로 수백∼수천 명이 현청縣廳·부락을 습격하여 관병·보위단병保衛團兵과 교전하면서 약탈하는 유력한 집단이다. 2∼3 내지 10여 명으로 권총과 말을 이용해서 은행 상가나 부자집을 터는 조무래기 준마적단도 마적이다. (중략) 이밖에 병비兵匪라는 종류가 있다. 패잔한 정규 관병들인데, 무질서하게 약탈, 방화, 살상, 능욕을 자행한다. 토비土匪라는 것은 비적질을 하는 토착민 집단이다. 이런 무리들이 횡행하던 왕년의 만주는 그야말로 극동의 무법지대였다. 일제는 동북항일의용군 같은 반만항일세력도 ‘병비’라 불렀고, 조선독립군도 ‘비적’이라 하였다. 항일 공산게릴라는 의례히 ‘공비共匪’로 호칭되었다. 일제는 이들 반만항일세력을 전부 비적匪賊으로 통칭하였다. (중략) 어용마적단과 야합한 일·만군의 공세에 대해서, 대륙의 전민중적 자위조직인 반만항일진영은 모조리 ‘비적’으로 호칭되었다.(임종국, 『일제침략과 친일파』, 청사, 1982, 286∼287쪽, 317~320쪽 참조.)

  유치환의 「수」 역시도 거짓말 평가를 받고 있다.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대륙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세력의 총칭이었다. 일제는 조선독립군을 선비鮮匪, 공산게릴라를 공비共匪, (중략) 항일 만주군벌을 병비兵匪, 대도회大刀會 같은 항일교단抗日敎壇을 교비敎匪, 홍창회紅槍會 같은 항일 결사원을 회비會匪라 하면서, 그 전체를 ‘비적’이라 총칭했다. 침략적 잔인행위가 아니라, 항일하다 죽어 효수당한 “머리 두 개”를 꾸짖은 친일시가 「수」이다. (임종국, 『실록 친일파』, 앞의 책, 6∼7쪽.)

  임종국은 만주국의 비류匪類들, ‘마적, 토비, 병비, 선비鮮匪, 공비共匪, 비적’ 등의 역사적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한 끝에, “비적은 대륙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세력의 총칭”이며, 「수」는 “항일하다 죽어 효수당한 ‘머리 두 개’를 꾸짖은 친일시”로 단호히 판정하였다. 이에 동의한 박태일은 “여기서 ‘비적’은 만주국의 ‘왕도낙토’ ‘협화국가’ 건설에 방해가 되는 ‘반만항일’ 세력”을 가리키며, 따라서 「수」는 “유치환의 부왜의식뿐 아니라, 타자의 ‘생명’에 대한 잔혹한 가학심리까지 내보이고 있는 작품”이라고 크게 폄하했다.12
  일제 관동군은 「1936년 4월∼1939년 3월 만주국 치안숙정계획 대강」(약칭 「3년 치안숙정계획」, 1936. 3.)을 제정, ‘간도성·길림성·빈강성·삼강성’ 등에 대한 ‘관동군·만주국군·헌병·특무·경찰’ 혼성의 대대적인 군사 탄압을 감행해 동북항일연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 대토벌로 3만여 명의 동북항일연군 병력은 1941년 2,000여 명으로 감소됐으며, 김일성金日成(1912∼1994) 휘하 ‘제2방면군부대’가 속한 제1로군 병력은 고작 1,000명 미만에 불과했다.(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연변대학, 1999, 370쪽.) 결국 ‘중공길동성위─북만성위 대표연석회의’(일명 ‘제1차 하바로프스크회의’: 1940. 1. 24.∼1940. 2. 5.) 정신에 따라 소규모 지대支隊로 재편성한 동북항일연군 각 부대는 1940년 10월말∼11월 초 소련으로 전략적 이동을 단행, 소련 원동遠東(연해주─필자) 경내에 2개의 임시주둔지 ‘남야영南野營·북야영北野營’을 설치하였다.13 ‘소일중립조약’(1941. 4. 13.) 체결로 동북공략이 난망한 항일연군은 1941∼1942년, ‘2차 하바로프스크회의’(1940. 12.∼1941. 1.) 끝에 남야영·북야영 소부대들을 동북 각지에 파견, 소규모 항일 유격활동을 간단없이 전개하였다.14 1939∼1942년 간의 동북 정세는 그만큼 흉흉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치환 시 「수」의 “비적”의 정체란 무엇인가. 단순한 ‘중국인 토비’인가, ‘항일 세력’인가? 전자라면 ‘친일’에서 면제되고, 후자라면 곧장 ‘친일시’로 되는 것인가? 그런데 이 비적은 곧 동북항일연군 ‘조상지 장군’이라 특정한 김관웅(중국 연변대)의 논의(2013)15가 비상히 주목된다. 그 요지인즉, ⓛ 1942년 2월 12일, 조상지가 산장성三江省 탕위엔현湯原縣 우통허분주소梧桐河分駐所16 습격 중 첩자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체포된 후 순사(1942. 2. 12.)한 시기와, 「수」의 발표 시점이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 ② “비적의 머리 두 개”는 조상지 장군과 그 부하인 중국인 왕용샤오王永孝라는 것, ③ 시행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는 신장 162센티미터에 불과한 왜소한 몸집의 조상지 장군을 가리키며, 유치환은 비적의 효수 현장을 직접 참관했으리라는 것, ④ “적은 가성”은 산장성 청두이자 산장성 경무청 소재지 자무쓰佳木斯의 약칭일 수 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수」는 명백히 ‘친일시’라는 것이다.17 여러모로 매우 현실성 있는 입론이다. 과연 이 실사적 맥락에서 제2행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은, 흑룡강 건너 동북항일연군 ‘북야영’北野營을 고투하며 넘나든 조상지 장군의 신산한 형상을 한층 핍진하게 부조한 것으로 된다.18
  조상지趙尙志(1908∼1942)란 누구인가? 1933년, 그는 동북 빈장성 주허현珠河縣 ‘주하반일유격대’를 창설(1933. 10. 10.)했으며, 1934년에는 450여 명 전사와 수천 명의 농민자위대를 거느린 ‘동북항일유격대 하얼빈 동부지대’를 편성(1934. 6.)하였다. 2년 뒤 이 부대는 ‘항일연군 제3군’으로 개편(1936. 8.), 1937년 3월까지 쏭화강 양안에 40여 개 유격구를 개척했으며, 100여 회의 대소 전투로 일본군에 심중한 타격을 가했다. 중공북만성위 결정(1937. 9.)에 따라 ‘항일연군 제3, 6, 9, 11군’을 통합한 ‘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으로 한층 격상된 조상지 장군은, 1939년 2월∼1940년 10월까지 300여 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 500여 명 격살, 포로 1,557명’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19
  중공중앙 명의의 「동북항일연군의 군대편제를 통일할 데 관한 선언」(1936. 2. 20.)에 깊이 관여한 조상지는 항일연군 제3군 군장으로 ‘중공길동성위─북만성위 대표연석회의’(일명 ‘제1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참가했으며, 쏘련 원동(연해주) 당국이 동북항일연군 영도자들에게 보낸 ‘1940년 12월 전, 하바로프스크 간부회의 소집’ 통지문(1940년 9월 말)에도 ‘제3로군 총사령 조상지’ 자격으로 포함돼 있었다. “북야영 항일연군 제2로군 부총지휘 조상지 등 5명으로 무어진 소부대는 1941년 10월에 동북에 들어와 소부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적의 특무 류덕산이 기편적 수단으로 우리 소부대에 혼입한 까닭에 조상지는 결국 간악한 한간의 흉탄에 희생되었다.”20 흑룡강 대안의 북야영 본거지 뱌츠코예로 끝내 원대복귀하지 못한 조상지야말로 동북항일연군의 단연 영용한 투사였다.
  그런데, 훗날 청마는 「수」에 관해 아래와 같은 사뭇 불가해한 회고를 남겼다.

  황량한 삭북의 네거리에 죄상을 적어 높이 세운 방과 함께 내어 건 처참한 효수 앞에 서서, 더구나 가마귀 떼 같은 이방인들 속에서 그것을 바라볼 때, 여기까지 쫓기어 온 나라 없는 백성인 사나이의 가슴에 다가드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나를 여기까지 추격하고 나의 조국과 내게 속한 일체를 탈취하고 박해하는 나의 원수를 그로서는 정당하다고 인정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결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 정당할 유일의 길은 나도 마땅히 끝까지 원수처럼, 아니 원수 이상으로 굳세어야 한다는 준렬한 결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갓 살벌한 사상이 아니라 마지막 허용된 명료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까지를 버리는 날이면 영원히 나를 회복치 못하고 원수의 힘 앞에 강아지나 닭 새끼처럼 굴욕 속에 묻히어 죽어도 다시 말할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변과 함께 현실의 내 자신을 돌아다 볼 때 거기에는 더 큰 절망이 지켜 있을 뿐이었습니다.(유치환, 앞의 책 『자작시 해설─구름에 그린다』, 1959, 40∼41쪽.)

  꽤나 궁색한 자기변호적 해설인데, 한마디로 요령부득이다. 참수 현장을 시인은 직접 목격한 듯한데, ‘비적 효수’가 “한갓 살벌한 사상이 아니라 마지막 허용된 명료한 길”이라니! 여러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오른다. 누구보다 그 ‘친일 의혹’ 가능성을 번히 인지했을 청마는 어째서 이 작품을 『생명의 서』(행문사, 1947)에 어엿이 올렸을까?21 구차하게도, 비적의 죽음을 통한 자기 생존의 ‘존재의 집’이 그에게 과연 필요했을까. 비적은 문자 그대로의 단순한 ‘비적’인가, “반만항일세력”(임종국)인가.
  중국인 비적이건 항일세력이건, 만주국의 “피의 법도”를 엄중히 선무하고 강권하는 이 시적 퍼스나를 과연 ‘친만친일 협력자’가 아니랄 수 있을까. 훗날 신석정이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꽃덤풀」, 1946)고 애통히 읊조렸듯, 결국 유치환은 일본제국주의의 ‘직접 식민지’ 조선에서가 아니라, ‘비공식적 식민지 만주국’(김기훈)에서 ‘우회 친일’에 가담한 셈이다. 무리한 정치지향이 되레 정치적 무의식으로 귀결된 형국이다. 이처럼 유치환은 ‘민족시─친일시’ 사이에서 심히 동요하는 이중성22을 보였으니, 그에게 ‘수시처중隨時處中‘이란 실로 힘겨운 과업이었던 것이다.
  1939년 만주로 건너가 측량 보조원·소작인·세관원 등으로 전전하다 해방을 맞아 신의주로 귀향한 백석白石(1912∼1996)은, 암울한 만주 유이민 현실에 굳건히 기초하면서도 자신의 시 세계에 자유분방한 노마드적 상상력을 탄력적으로 착근시켰다.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夫餘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를 금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해ㅅ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백석, 「북방에서─정현웅에게」(『문장』, 1940. 7.) 전문

  화가 정현웅23에게 헌정한 백석의 이 작품은 무엇보다 순결한 우리말의 활발한 구사, 조근조근 친근한 시적 어조와 웅대한 서사적 화폭으로 이채를 띤다. 조선 민족은 중앙아시아 “파밀고원 부근으로부터 동북으로 닫는 산맥을 따라와 흥안령興安嶺을 넘어 만주 평원에 들어온 후 거기서부터 차차 남하 (중략) 반도까지 내려오게 되었다”는 ‘민족 이동설’을 함석헌이 제기했듯(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광문화사, 1950, 81~82쪽 참조.), 백석 역시 민족의 시원을 중국 동북방의 저 싱안링산맥興安嶺山脈이라 여긴 것일까. 흡사 민족적 자아를 대신한 듯한 일인칭 성찰적 화자를 통해 시인은 찬란했던 옛 고구려, 남북국 시대의 발해와, “게을리 따사한 해ㅅ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며 나태와 안일로 잔뜩 오그라든 치욕의 반도 조선으로 남향한다. 1939년 만주 이주 직후에 쓴 작품인데, 고구려의 옛 터전 부여, 북만주 “흥안령”과 “음산”, “아무우르”와 “숭가리”, 그리고 중국 동북의 극소 소수민족 “쏠론”索倫, “오로촌”鄂倫春24 등 매우 이색적인 지정학적 아펠레이션에 의해 더욱 생동한 사실감을 보유하고 있다. “녯 한울로─나의 태반胎盤으로” 복귀한 끝에 자신의 주체적 신원을 힘겹게 확인하는 일종의 이야기시라 하겠는데, 여기서 ‘북방’은 시인의 현실 인식을 일깨우는 하나의 든든한 균형추 같은 것이다.

  

  

주석

  1. 박태일은 청마의 만주행이 결코 ‘지사형 도피’가 아니라, “고향 통영에는 더는 머물기 힘든 개인적인 일을 저질러 쫓겨나듯”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궁여지책의 ‘개인형 도주’라고 단언한다. 그에 의하면, 유치환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1940년판 조선연감』(경성일보, 1940) 별책부록 『1940년 조선인명록』에 오를 만큼 “‘친일’ 쪽 사람”, 즉 일제 식민지체제 “내집단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유치환을 ‘친일 시인’으로 못박기는 어렵다. 1940년 조선총독부 ‘분산개척이민’ 일원으로 만주에 들어온 청마는, 빈장성 옌서우현 지아신촌(嘉信村) 집단부락 관리처인 ‘가신 흥농회(嘉信興農會)’ 총무 및 ‘연수현 협화회’ 활동을 겸했으며, 1942년 후반∼1943년 전반에는 빈장성 청두(省都) ‘하얼빈 협화회’ 직원으로 승진, “개척민 협화 지도나 사상 선무공작 활동”에 종사하다 해방 직전 황황히 귀국하기까지 여러 편의 ‘부왜시문’(附倭詩文)을 남겼다고 박태일은 덧붙여 지적한다. 박태일, 「유치환의 만주국 체류시 연구─통영 출향과 만주국, 그리고 부왜시문」,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 소명출판, 2015, 41∼75쪽 참조. 유치환은 1943년, “현재는 북만의 자유이민촌에서 농장을 경영, 아울러 하얼빈 협화회 근무”라고 적고 있다. 『조선시집(朝鮮詩集)─중기(中期)』, 김소운 옮김, 일본 동경: 興風館, 1943, 329쪽. 그러나, 청마가 거주한 옌서우현 현청 소재지인 지아신촌을 2회 방문한 홍정선은, ‘연수현 협화회 간부 명단’(楊雨春, 「僞滿協和會延壽本部)」, 『延壽文史資料』 제3집,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흑룡강성 연수현위원회 문사자료연구회 엮음, 1988)에서 유치환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홍정선, 「청마 유치환을 향한 친일의혹, 그 문제점에 대하여」, 『예술논문집』 제56집, 대한민국예술원, 2017, 45∼74쪽 참조.
  2. 당시 만주에서는, 심지어 “일제의 위세를 빌려 그것이 마치 제 것인 양 내세워 본토인을 모멸하고 착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본토인은 오히려 망국지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로서 우리 겨레를 ‘꺼우리팡스(高麗房子)’라 불러 멸시하고 증오까지 하였으니,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고 유치환은 회고했다. 유치환, 『자작시 해설─구름에 그린다』, 앞의 책, 49∼50쪽.
  3. 이선근, 「만주제국협회회 의사록」(1941. 10. 15.), 『친일논설선집』, 임종국 엮음, 실천문학사, 1987, 150∼155쪽 참조.
  4. 「만주국 건국 선언」(1932. 3. 1.)에서 오족(五族)은, ‘한족(漢族)·만족(滿族)·몽골족·일본인·조선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주국 ‘민족 분류’는 시기적으로 달랐다는 점을 깊이 고려한 윤휘탁은 이를, ‘중국인(한족·만족·회족·몽골족)·일본인·조선인·무국적인(백계 러시아인)·외국인(1만 명 이하 소수민족)’ 등으로 재분류하기도 했다. 윤휘탁, 『만주국: 식민지적 상상이 잉태한 ‘복합민족국가’』, 혜인, 2013, 38∼39쪽 참조.
  5. 일찍이 임종국은 「수」(『국민문학』, 1942. 3.), 「전야(前夜)」(『춘추』, 1943. 12.), 「북두성(北斗星)」(『조광』, 1944. 3.) 3편을 ‘친일시’로 규정한 바 있다.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475쪽. 「전야」·「북두성」은 유치환 ‘만주 시편’이 대거 등재된 『생명의 서』(행문사, 1947) 미수록 작으로, 박태일은 전자를 ‘대동아공영’에 대한 “설렘과 바람, 그리고 믿음을 담은 부왜시”(앞의 글, 93쪽)로, 후자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동방의 새벽 도래’를 노래한 ‘친일시’로 혹평하였다. 이들 작품은 일제가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한 ‘태평양전쟁’(1941. 12. 7.) 개전 2개월 후 발표한 청마의 짤막한 산문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만선일보》, 1942. 2. 6.)에서 분명한 ‘황국신민 유치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박태일, 앞의 글, 80∼81쪽 참조. 한마디로, 유치환은 ‘친일시인’이라는 것인데, 필자가 판단컨대, 위 4편 중 명백히 ‘친일 시문’이라 할 것은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수」, 이 두 편이다.
  6. 임종국,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 111~112쪽 참조. 보갑제란 ‘주민 10호─1패(牌)로, 1촌(村)─몇 개 ‘패’로 ‘갑’을 편성하고, 1경찰서─몇 개 ‘갑’으로 ‘1보(保)’를 편성하는 방식의, 보장·갑장·패장 통솔 하의 물샐틈없는 ‘치안 연좌제’로, ‘비민(匪民) 분리 정책’의 전형적 소산이다.
  7.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쏭화강(松花江)은 하얼빈을 관통, 이리안(依蘭)에서 무단강(牧丹江)과 합류, 자무쓰(佳木斯)를 거쳐 그 북동단 동강(同江)에서 헤이룽강(黑龍江)으로 유입된다. 청마가 여기서 ‘송화강’이라 하지 않고 구태여 하얼빈에서 머나먼 ‘흑룡강’이라 한 것은 ‘비적’의 수급이 내걸린 곳이, 흑룡강 쪽에서는 하얼빈보다 다소 가까운 자무쓰나 그 인근 소도시임을 강조할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흑룡강’의 러시아 명칭은 아무르강(Amur R.)으로, 동강 동북방의 ‘아무르강’과 ‘우수리강’(Ussuri R.; 烏蘇里江)이 만나는 지점에 하바로프스크(Khabarovsk)가 있다.
  8. 만주국 「치안유지법 실시법」(1941. 12. 27.) 제2조는 만주국 초기 반포령 「도적, 비적 징벌잠정법」 제7∼8조에 근거하여, “싸움터에서는 닥치는 대로 죽여도 무방 (중략) 적당히 처리할 수 있다” 함으로써, 국체 변혁을 목적하는 단체 ‘조직자, 참여자, 지도자, 획책자’ 등은 ‘사형, 무기도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김기봉·방영춘·권림 편저,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87, 276쪽 재인용.
  9. 『만주제국전도(滿洲帝國全圖)』(坂西銅刻, 1937. 7.)에 의하면, 현 중국 동북3성(길림성·요녕성·흑룡강성)은, ‘길림성(吉林省)·봉천성(奉天省)·간도성(間島省)·통화성(通化省)·안동성(安東省)·금주성(錦州城)·열하성(熱河省)·목단강성(牧丹江省)·삼강성(三江省)·빈강성(濱江省)·용강성(龍江省)·흑하성(黑河省)·흥안북성(興安北省)·흥안동성(興安東省)·흥안남성(興安南省)·흥안서성(興安西省)’ 등 총 16개 성으로 분획되었다. 『최신 포켓 만주 지도─부록 만주지명사전(最新ポケット滿洲地圖─附滿洲國地名辞典)』(京城: 至誠堂, 1944.)은, 사평성(四平省)·동안성(東安省)·북안성(北安省) 3개 성이 추가돼, 총 19개 성으로 한층 더 세분되었다.
  10. 홍정선, 앞의 책, 45∼74쪽 참조.
  11. 자세한 것은 ‘각주 14’를 참조할 것.
  12. 박태일, 앞의 책, 「유치환의 만주국 체류시 연구―통영 출향과 만주국, 그리고 부왜시문」, 88∼89쪽 참조.
  13. 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연변대학, 1999, 380쪽. 병력 규모가 1,000명 좌우로 급격히 줄어든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는 1940년 12월, “쏘련 경내 원동(연해주─필자) 변경에 전이하여 야영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제1로군과 제2로군의 일부는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 ‘남야영’(B야영이라고도 함)을 건립하였으며, 제2로군의 대부분(제2지대 및 총부)과 제3로군은 하바로프스크에 ‘북야영’(A야영이라고도 함)을 건립하였다.”『중공연변당조직활동년대기』, 중공연변주위당사연구소 엮음, 연변인민출판사, 1989, 249쪽. 항일연군 ‘북야영’은 흑룡강 건너 쏘련 하바로프스크 북동쪽 70km 지점, 즉 아무르강 강변 뱌츠코예(Vatskoje)에, ‘남야영’은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112㎞ 지점인 보로실로프(Voroshilov; 현 우수리스크Ussuriysk) 인근 라즈돌리노예(Razdolnoye)에 설치되었다.
  14. 최성춘, 위의 책, 316쪽, 370∼381쪽 참조. 항일연군 부대장 11명 연석회의인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의 조선인 참석자는 김일성·김책·최용건·안길·서철 등이었다. (1) 제1로군 ‘월경부대’(남야영 소속)는 조선인 주력의 제1지대(2개 소부대)로 개편(지대장 김일성, 참모장 안길)되었다. ⓛ 제1지대 제1소부대장 김일성은, 1941년 4월 9일부터 11월 12일까지 7개월 남짓 연변지역(연길·화룡·안도·돈화·왕청·훈춘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벌였으며, ② 제1지대 제2소부대장 안길(安吉)은 1941년 8월 25일부터 10월 19일까지 왕청·도문에서 활약했다. ③ 최현은 1942년 4월 27일부터 6개월여 동안 왕청·훈춘·연길 등지에서, ④ 1942년에는 5월 12일 박덕산(朴德山) 소부대가, 5월 29일 안길 소부대가 도문·왕청·훈춘·돈화 일대에서 각각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김일성 소부대를 포함한 남아영 제1로군 제1지대는 ‘1941. 4. 9.∼1942. 11. 11.’ 이 기간 동안, 연변지구에 도합 18개 소부대를 파견하였다. (2) 1941년 10월 동북(북만주)으로 진출한 북야영 소속 제2로군 부총지휘 조상지 소부대(부대원 5명)는 이 간고분투한 반만항일투쟁 중 희생, 본대(북야영)로 귀환하지 못하였다. 최성춘, 같은 책, 379∼387쪽 참조. (3) 소련으로 퇴각하지 않은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 허형식(許亨植: 1909~1942; 본명 許克)은 1941년 말 20여 명 대원을 영솔, 빈장성(濱江省) ‘칭청(慶城)․톄리(鐵力)․바옌(巴彦)․무란(木蘭)․둥싱(東興)’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며, 1942년 8월 빈장성 칭청현(慶城縣) 칭쏭링(靑松嶺)에서 일만군(日滿軍)과 전투 중 장렬히 전사(1942. 8. 3.)하였다. 徐基述․徐明勛 主編, 『흑룡강 조선 민족(黑龙江朝鮮民族)』, 黑龙江朝鮮民族出版社, 1988, 81, 225쪽 참조. 허형식은 “1941년 동북 경내의 항일련군들이 모두 쏘련 국경지대로 철퇴한 후 (중략) 제3로군의 9, 12지대의 부분적 부대를 거느리고 동북에 남아 (중략), 1942년 소분대사업을 지도하다가 (칭쏭링) 샤오링허(小凌河) 기슭에서 적의 ‘토벌’대의 포위를 돌파하던 중 희생되었다.” 김철수·강룡범·김철환, 『중국조선족력사상식』,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98, 135~136쪽.
  15. 김관웅, 「류치환의 ‘수(首)’ 속의 ‘비적’의 머리는 누구의 것인가?」(2013. 5. 10; http://yanbian.moiza.com/466378; 2013.5.12.), 박태일, 앞의 책, 88∼90쪽 참조.
  16. 우통허(梧桐河)는 ‘쟈무스(佳木斯)─화촨현(樺川縣)─퉁장(同江)’을 관통하는 쏭화강의 한 지류로, 쏭화강과 헤이롱쟝(黑龙江)이 합류하는 산장성 퉁장과 가까운 지점에 있다. 하얼빈에서 현 퉁장시(同江市)까지는 700여km의 장거리이다.
  17. 박태일, 앞의 책, 88∼89쪽 참조.
  18. 참고로 두 가지 사항을 덧붙인다면, ⓛ ‘탕위안현(湯原縣)─쟈무스(佳木斯)’ 상거는 7km라는 것, ② 1947년 ‘주하현 공농대표회의’는 항일영웅 조상지 장군을 기려, 주허현(珠河縣)을 썅즈현(尙志縣; 1989년 ‘尙志市’)으로 개칭했다는 사실이다.
  19. 김기봉·방영춘·권림 외 편저, 앞의 책, 333∼347쪽. ; 허룡구, 「합동지대 사령원 리복림」, 현룡순·리정문·허룡구 편저 『조선족백년사화』 제2집, 심양: 료녕인민출판사, 1984, 372∼383쪽. ;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연구』, 북경: 민족출판사, 1998, 209쪽 참조.
  20. 최성춘, 앞의 책, 254쪽, 373∼385쪽 참조.
  21. 「수」에 대한 시인의 자부는 매우 컸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생명의 서』(재판; 영웅출판사, 1955)는 물론, 『유치환 시선』(정음사, 1958)에도 당당히 수록하였다.
  22. 김윤식은 「수」의 “비적이 혹시 항일 유격대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만주국에서의 조선인의 생존 방식의 이중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고 지적한바, 여기서 ‘이중성’이란 “일본족에 아부하여 그들과 거의 동격의 자리에 육박하고자 하는 경향과, 아예 일본족에 적대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김윤식, 「황건론─정치·문학 일원론에 이른 길」, 『한국 현대 현실주의 소설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175∼176쪽.
  23. 정현웅(鄭玄雄: 1911∼1976): 서울 출생. 화가.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 전신) 졸업 후 일본 도쿄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 수학. 해방 후 ‘조선미술건설본부’(1945. 8. 18.~1945. 11. 20.) 서기장, ‘조선조형미술동맹’(1946. 2. 28.~1946. 11. 20.) 맹원, ‘조선미술동맹’(1946. 11. 10.) 아동미술부 위원장 역임, 6·25전쟁 때 월북. 주요 저술로 『조선미술 이야기』(평양: 국립출판사, 1954) 등이 있다.
  24. ‘오로촌족’(鄂倫春族)은 알타이어계 퉁구스어족으로 중국 “동북부 내몽고자치구와 흑룡강성이 연접한 싱안링(興安嶺) 삼림지구에 분포”된, 인구 2,200여 명의 극소 소수민족이다. 국민당 정부는 “오로촌인을 ‘삼림유격대’로 만들어 그들에 대한 통치와 약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1931년 ‘9·18’ 사변 후 오로촌인은 또 일본 제국주의의 쇠사슬 밑에서 피압박자로 되었다.” 연변인민출판사 편, 『우리나라 소수민족 소개』(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57), 112∼114면 참조. ‘쏠론’(Solon; 索倫)은 남방 퉁구스족 계열 소수민족으로, 러시아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지방을 흐르는 흑룡강 남방에 분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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