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와 형식의 윤리

이병국, 『내일은 어디쯤인가요』, 시인의 일요일, 2022.

  게오르그 짐멜은 말한다. “인간은 위로를 갈구하는 존재다.” 그에 따르면, 위로는 인간만이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이다. 도움은 동물 간에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위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것은 위로라는 것이 고통을 통하여 고통을 나누며, 그로부터 치유를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위로는 영혼의 일이고, 영혼의 몫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것은 시의 일이다.
  위로의 건넴. 이병국의 두 번째 시집 『내일은 어디쯤인가요』가 향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는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잠시라도 편히 쉬어요.”란 간결하고 덤덤한 「시인의 말」에서 이병국 스스로가 언급하고 있는 바다. 위로를 건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텍스트를 접하고 있는 이들을 향하는 것일 테지만, 동시에 그 자신을 향하고 있을 터다. 그것이 타자를 향하든 자족의 영토에 머물든 중요한 것은, 이 위로를 완성하고 건네기 위한 치밀한 텍스트 내외적 작업과, 그 열도이다. 시인의 내밀한 감정의 밀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블록을 이루고, 그것이 시의 형식으로까지 번져 가는지를 살피는 것.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축의 긴밀성이 바로 한 시인의 시세계를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이유다.
  위로의 건넴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을 위한 내용과 형식의 긴밀성이란 측면에서 먼저 『내일은 어디쯤인가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주체의 위치이다. 시집 속의 주체는 응시하는 자의 위치에 서 있다. 응시하는 자로서 무엇인가를 오래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기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무너지더라도, 혹 이미 무너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하게 기록해야만 한다. 시인이 “발을 굴러 나를 해하려는 이해를/ 쳐다보는 것만이 최선이다”(「나는 자꾸만 틀린다」)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조금 웃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봄」). 그것이 위로를 건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내 발이 가까스로 바닥을 딛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색하지 않는 것. 그리고 위로를 건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 내면의 단단함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스스로 감내할 수 있어야만, 위로를 건넬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무너지는 순간에 대해서라면/ 선명한 바닥을 딛는 기분으로 말할 수 있다”(「봄」)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문제는 ‘기분’이라는 단어, 그리고 『내일은 어디쯤인가요』뿐 아니라 그의 전 시집에서도 주로 선택된 단어들. 여기에서 시인이 점하고 있는 독특한 자리를 감지할 수 있다. 이병국 시의 주체는, 이미 무너짐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쉽게 증언하거나 격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는 “나는 머리를 움켜지고 말한다/ 여긴 아주 좋다// 머무르고 싶다”(「최초의 고백」)에서처럼, 늘 현실에 머무르고 싶어하기 때문이고, 시가 현실을 벗어나선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무너짐을 어떤 강렬한 소리의 형태로 말하는 순간, 위로는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될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시인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는, 타자로 둘러싸인, 그래서 타자를 향해서 말을 건네야 하는 현실의 자리. 때문에 시인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몸부림치지 않고, 위악적이지도 않다. 시를 대하는, 그리고 시가 타자에 대한 위로의 건넴이라는 시적 사유로부터 비롯된 이 조심스러운 자세가 ‘기분’이라는 단어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다정’과 ‘다행’, ‘안녕’, ‘안부’ ‘포개짐’ 등 이와 비슷한 감정적 단어의 블록을 통해서 확장되어 나가며, 동시에 시인 자신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인지적 틀이 된다. 때문에 이병국에게 응시한다는 것은, 곧 누군가의 고통을 듣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 자체는 도리어 응시하는 자의 자세를 견지하는 이에게 딜레마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것이 딜레마인 것은 그것들이 자칫 생을 향한, 그리고 자신의 삶-생활과 바깥세계를 향한 의지가 증발된 듯이, 혹은 섣부른 위로인 듯이 읽히기 때문이다. 『내일은 어디쯤인가요』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진술들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생강을 어떻게 먹니」), “조금 웃는다”, “괜찮다”(「봄」),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장비야, 어여 가자」), “무심하다”(「나는 자꾸만 틀린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모든 실수들의 집합」),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매일의 라테」), “나는 상관없는 일이라고”(「가위─다음은」), “끝은 아무렇지 않았다”(「사랑의 역사」) 등은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적을 떠올려보자.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이며, 괜찮을 거라고, 괜찮다고,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반복적 표현들을 통하여 위로의 장면이 형상화되면서, 훌륭히 딜레마로부터 벗어난다. 위로의 한 장면을 시의 형식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병국이 앞서 언급한 단어와 진술의 블록을 키워 나가는 까닭을 보여주는 텍스트 중 하나는 「가위─다음은」이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친구를 다룬 「가위─다음은」에서, 주체는 폭력에 대한 침묵과 공포에 갇혀 있으며, 또한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흰 페이지를 검게 칠하는 것뿐이다. 절대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는 공포 속에서,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소년. 그리고 “옮겨 심어도 잘 자라지 않는 어제가/ 오늘의 보금자리가 되었고”(「나는 자꾸만 틀린다」)에서 알 수 있듯, 어느 새 어른의 몸을 입게 되어버린 소년. 그 소년이 흰 페이지가 온통 멍이 들 때까지 가득 채우는 말들은 괜찮을 것이라는 말뿐이지 않을까. 때문에 괜찮다는, 아무렇지 않다는, 조금 웃는다는 이 진술들은 “몰래 끊어진 가끔의 하루에 밑줄이 고입니다”(「파란불이 켜지고 소년이 길을 건넙니다」)에서 보듯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러기에 비명이 되지 못한 말들이 입안 곳곳에 고여 있는 채로, 단속적으로 끊어진 채로, 어떤 말더듬의 상태로 확장되어 반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더듬이의 상태는 곧 시의 형태 문제와 같이 엮이게 된다. 동시에 이 시의 형태는 대상간의 일정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동시에 그것을 위하여 내면의 감정과도 일정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응시하는 자의 자세에 기인하기도 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텍스트 중 하나가 「오늘의 세계」이다, 「오늘의 세계」는 이별한 연인에 대해, 그 후의 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함께였던, 그리하여 다정했던 그 시공간은 이미 “흐릿한 창/ 너머로/ 나뉜 세계”이고, 이는 “그대로 다행인 먼 곳”인 것. 여기에서 이병국은 쉽게 감정의 격랑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시는 단형적인 형태를 지향하며, 그 징검돌과 같은 연과 행의 형태를 통해 그가 그 감정의 격랑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얼마만큼 조심스레 발을 내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떨어진 나날”(「매일의 라테」)들에 빠지지 않기 위한 형식적 고투의 결과물이다. 『내일은 어디쯤인가요』에 징검다리와 같이 구성된 형태를 갖춘 시들이 많은 것은 이병국이 추구하는 위로라는 정신적 가치들에 대해여 오래도록 궁리한 끝에 갖추게 된 형식의 윤리이다.
  현실과, 현실에까지 이어져 있는 과거를 끝끝내 응시하는 것.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병국은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겨우 나온 말이고, 나 자신보다는 타자와 세계의 안녕을 머리에 둔 윤리적 말이다. 여기에서 내면의 윤리와 형식의 윤리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시는 원심력의 중앙에 놓이게 되고, 시인을 바깥으로 떠밀어 배회하도록 만든다. 이병국의 시가 그러하다. 그는 버스를 타고, 횡단보도에 서 있고, 분식점을 가고, 욕조를 찾아 모텔로 향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비디오방을 비롯하여 과거의 교실로 향한다. 떠밀려 배회하는 이들은,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할 수는 있으나 그 대상과 끈끈한 애착으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때문에 원심력이 작동하는 비슷한 경우 일부의 서정시가 대상과 두는 밀접함은 그 대상에게도 시인 자신에게도 무책임하며 비윤리적이다. 이병국은 자신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힘의 방향성을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에 호응하는 최대한의 윤리적 자세를 견지하고, 그것을 시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시의 형식은 이병국이 어떤 앓음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앓는 중이다/ 시간을./ 감당할 수 없는 나를//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애를// 쓴다”(「지척」)에서 보듯, 간결하고 단속적으로 이루어진 시의 형식은 힘들게 내뱉는 어떤 호흡과 닮아 있다. 또한 벌어져 있는 연과 연 사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한숨과 닮아 있다. 그리고 이 한숨과 가쁜 호흡의 연속 끝에서 이병국이 내뱉고자 하는 말은 도리어 위로임을 시집을 덮으며 떠올린다.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잠시라도 편히 쉬어요.” 내일이 어디쯤에 있든, 괜찮을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듯,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낚아채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순간까지 자라 오르고 있는, 과거를 끊어내야 한다. 그때 순수하고 간결하게 남은 지금이라는 시간을 만나야지만 우리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이병국이 끝끝내 현실 속에서 두 발을 지탱하며, 괜찮다고 읊조리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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