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라의 모든 것
*
처음에는 하나였다.
모서리를 맞추고 면을 맞댄 여덟 개의 책상이 하나의 커다란 테이블이 됐다.
책상에는 열다섯 개의 의자가 놓였다. 둘씩 셋씩 간격을 맞춰가며 책상 사이에 의자를 놓았다. 의자를 옮길 때마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중요한 건 의자의 개수였다. 모두 모이면 15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열다섯 개를 넘길 필요는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고 열다섯 개의 의자가 모두 쓰이는 날은 없었다. 늘 여러 개의 의자가 비었고 빈 의자에는 사람들의 가방과 옷가지들이 놓였다.
이런 것들이 경계가 되곤 했다. 의자에 올려놓은 크고 무겁고 냄새나는 것들이 기준이 되어 여기와 저기,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그어졌다.
회의의 시작은 이랬다.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가 의자에 앉으면, 다음, 그다음, 또 그다음의 손짓이 먼저 들어온 사람의 손짓과 만나 자리를 만들어갔다.
이럴 거면 책상을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 저요!
한 달 전, 율라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은하수 안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다면 손을 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제가 여기 살아요.
손을 번쩍 들었을 때만큼 율라의 목소리가 높지 않았다.
율라가 살고 있는 여기는 주변 동네와 달리 오래된 빌라가 붙어 있는 마을이었다. 낡은 빌라와 빌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좁은 골목길과 어쩌다 밀려왔는지 알 수 없는 외국인들이 모여 있는 동네. 그곳에 율라가 살고 있었다.
― 잘됐네.
율라를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결정됐다. 빨간색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 도구를 든 율라가 은하수 안에서 열리는 회의를 준비하는 사람이 됐다.
그게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앞으로 율라가 해야 하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여섯 번의 회의를 준비하는 것이다. 은하수 안에 새로 들여놓은 여덟 개의 책상을 하나로 모으고, 의자를 정리하고 현수막이 보이는 위치에 이동 칠판을 고정하는 일, 여기에 기본적인 청소와 회의가 끝나면 은하수 안을 정리하고 불을 끄는 일까지 율라가 맡은 일이 됐다.
― 이것도 하면 되겠네.
율라가 해야 하는 일이 추가됐다.
― 15인의 민주시민사회. 잘됐네. 좋네, 좋아.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 뭐가 좋아요?
*
율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하수
율라가 은하수 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한 달 전이다. 그때는 저 은하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율라의 고개가 다시 갸웃했다.
창문에 붙은 분홍색 은하수가 저렇게 보여도 은하수는 은하수다.
이번에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았다.
율라의 시선이 ‘은하수’를 지나 ‘민주시민사회 15인의 만남’이 적힌 현수막으로 옮겨졌다.
― 뭐가 좋아요?
한 달 전, 율라가 물었을 때의 답이 저 현수막에 있었다.
은하수를 중심으로 여기와 저기, 이쪽과 저쪽의 사람 15명이 필요했다.
율라는 은하수 뒤편에 사는 사람이었다. 은하수 뒤편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15명 중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면 율라가 제격이었다.
열다섯 개의 의자가 중요한 이유도 현수막에 쓰여 있었다. 율라는 다시 한번 열다섯 개의 의자를 헤아렸다.
마지막 열다섯 번째 의자를 셌을 때였다. 그때, 여자가 들어왔다.
― 내가 제일 먼저 온 건가.
여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 민주시민사회 15인의 만남.
이번에는 벽에 붙은 현수막을 소리 내어 읽었다.
― 멋지다. 그죠? 민주시민사회⋯⋯.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여자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현수막인 ‘민주시민사회 15인의 만남’ 앞에서 한 컷, 여덟 개의 책상을 하나로 만든 테이블을 배경으로 한 컷, 그리고 율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고 한 컷.
― 이런 건 바로바로 찍어야 하거든요.
여자의 어깨 너머로 핸드폰 액정 속의 율라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금빛 머리칼의 율라가 웃고 있었다.
― 혹시⋯⋯ 피렌체 가봤어요?
여자가 물었다.
― ⋯⋯.
뜬금없는 말이었다.
― 며칠 전에 피렌체에 갔었거든요.
율라는 피렌체를 알지 못했다.
― 아⋯⋯ 영어. 영어로는 플로렌스라고 하는데.
― ⋯⋯.
율라는 피렌체도 플로렌스도 알지 못했다.
―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여자가 물었다.
― 여기요.
율라가 말했다.
― 여기? 여기면 어디?
율라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여자도 더 이상 율라의 여기를 캐묻지 않았다. 대신 율라에게 은하수에서 왜 회의를 하는지 아냐고 물었다. 율라는 ‘민주시민사회 15인의 만남’이 은하수에서 열리는 데 이유가 있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 이 동네가 제일 문제잖아요. 특히 여기, 은하수가 제일 골칫거리였고. 그런데 이제 사라졌으니 천만다행.
*
하나였던 처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동 칠판을 가운데에 두고 책상 두 개를 붙인 사각형의 테이블이 넷으로 갈라졌다.
이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의자를 끌었다 당겨 앉는 소리도 익숙하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품었던 멋쩍은 탐색도 없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신을 향한 손짓을 향해 걸어간다.
율라도 그렇게 한다.
― 여기요. 여기.
여기라고 해봤자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이 은하수 뒤편에 사는 사람들의 자리다. 율라가 있고, 율라의 옆과 맞은편에는 양꼬치 가게 사장과 아시안 푸드 마켓 사장, 밍차이 중국집 사장이 있다. 어쩌다 문 앞이 우리의 자리가 됐냐고 물으면 율라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문을 가리킨다.
― 잘 보세요. 회의가 끝나면 여기, 이 자리가 제일 먼저 나갈 수 있어요.
그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율라는 여기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손을 흔든다.
율라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 절대 거기로 가면 안 되는 여기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손을 높이 흔든다.
분명 달랐다.
이번에는 여덟 개의 책상을 하나로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 네 번째 회의가 시작됐어도 사람들은 두 개씩 붙여 만든 책상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
율라도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하나는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로 만든 책상에서 서로의 눈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민주시민사회 15인의 만남’ 현수막이 벽에서 떨어진 적도 있다.
율라가 현수막을 다시 붙이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날씨 얘기를 시작으로 무엇을 먹었거나 무엇을 먹겠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어도 여전했다. 시계를 보거나 빈 의자에 쌓인 짐들이 무너질까, 짐을 챙기는 손들이 분주했다.
율라는 사회자가 나눠준 자료를 꺼내 읽었다.
우리 마을을 지키고 우리 동네를 보존하는 마을 살리기.
원도심을 활용한 경제적 이익과 환경 보존.
마을 살리기에 앞장서는 민주시민사회 15인의 만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반복되는 문구였다.
― 원도심이 어디예요?
율라가 모르는 건 원도심의 정의였다. 하지만 율라는 원도심이 어디인지 물었다. 어디인지 알게 되면 뜻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 같았다.
양꼬치 가게 사장이 율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 여기지.
율라는 은하수 안을 둘러보았다.
열다섯 개의 의자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회자는 5분 정도 더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 은하수요?
율라가 다시 물었다.
양꼬치 가게 사장이 손짓으로 은하수 뒤를 가리켰다.
은하수 뒤에는 율라가 살고 있다. 양꼬치 가게 사장도 살고 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아시안 푸드 마켓 사장과 밍차이 중국집 사장도 살고 있다. 은하수 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사방이 고층 아파트로 막혀 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골목 안으로 커다란 십자가와 십자가를 타고 내려온 알전구가 밤마다 반짝인다. 그런 동네가 은하수 뒤편이다.
사회자가 마이크의 전원을 켜자, 스피커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 헛소리.
양꼬치 가게 사장이 말했다.
― 저게 다 돈 아니겠어.
― 돈이요?
율라가 물었다.
― 돈을 써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
양꼬치 가게 사장은 무엇을 한 것도, 무엇을 하겠다는 것도 없이 4주가 흘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이지도 않을 15명을 박아놓은 이유가 뭐가 있겠냐고 화를 냈다.
― 내 말은, 상관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야.
이번에는 15명에서 6명이 빠진 9명이 모였다.
율라는 빈 의자에 쌓인 짐 너머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둘씩, 셋씩 모여 앉은 사람들의 수다가 한창이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학교, 같은 취미와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의 수다였다.
― 돈이 어디 있는데요?
율라의 눈에는 돈이 보이지 않았다.
사회자가 앞으로 나갔다.
늘 그렇듯이 이동 칠판을 끌어와 커다란 네모를 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사회자를 향했다.
네모의 한가운데에 작은 네모가 생겼다. 사회자는 우리가 앉아 있는 은하수라고 했다. 은하수 앞에 길게 그은 두 줄은 횡단보도였다.
― 횡단보도를 건널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 우리는 여기, 은하수를 시작으로 이 마을을 지켜야 하니까요.
사회자는 ‘이 마을’에 힘을 주어 말했다.
― 낸들 어떻게 아냔 말이야. 저들이 알겠지. 쟤들이 쓸 거 아니겠어. 안 그래?
양꼬치 가게 사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저들이라면 양꼬치 가게 사장도, 율라도, 아시안 푸드 마켓 사장도, 밍차이 중국집 사장도 아니다.
그사이 칠판에 그려진 커다란 네모와 작은 네모 안에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겼다.
사회자는 은하수 뒤편의 골목이라고 했다.
저곳에 저런 골목은 없다.
율라도 알고 있고 양꼬치 가게 사장과 아시안 푸드 마켓 사장, 밍차이 중국집 사장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율라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다고 말해야 하는지 처음을 찾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게 이유였고, 그다음은 민주시민사회 15인의 자격이 침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은 칠판에 그려진 은하수 골목 위에 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율라는 하나씩 더해지는 그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교회의 십자가였다.
철조망처럼 연결된 동그라미는 담장에 그려진 벽화라고 했다.
길가에 그려진 투박한 네모들은 화단이라고 했다.
우뚝 솟은 깃발은 쉼터라고 했다.
몇몇의 사람들이 웃고, 몇몇의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사회자는 이곳을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하는 일들이 우리 마을을 지키고 우리 동네의 가치를 높이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우와.
처음 은하수 안에 들어섰을 때 율라가 외친 첫마디였다.
밖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다방이었다가 도박장이었다가를 반복하던 곳이 이렇게 네모반듯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문과 정면으로 마주한 두 개의 창문에서 분홍의 빛이 비춰들었다. 쓸데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빛이었다.
율라는 들고 온 청소 도구를 내려놓았다. 율라에게 청소를 맡기고, 회의를 맡긴 사람들은 일찌감치 은하수를 빠져나갔다.
율라는 제일 먼저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쌓인 먼지 때와 달리 창문은 쉽게 열렸다.
1층 마트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한꺼번에 끼쳐 들었다. 건너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뒤로는 마트의 음악 소리가 더 크고 더 경쾌해졌다.
율라의 엄마는 안 그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저 앞의, 저 건너의, 저 아파트 단지 덕에 청소하면서 번 돈을 생각하라고 했다.
율라는 창문을 닫고 싶었다. 음악 소리도 귀에 거슬렸지만, 쉬지 않고 일했던 지난 몇 달이 떠올랐다. 입주 청소를 시작으로 아파트 계단까지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일을 해야 했다.
율라는 창밖으로 고개를 길게 빼보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은하수를 지나 마트 옆 횡단보도를 건너면 은하수와 마주한 건물 2층에 공부방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율라가 매일같이 가야 했던 공부방이었다.
율라는 늘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하얀 얼굴의 금발 머리 소녀, 오뚝한 코와 커다란 눈.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율라를 자주 쳐다보았다.
공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율라와 같거나 율라보다 못하거나, 율라보다 형편이 나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바글거리는 곳에서 율라는 한국말을 기똥차게 잘하지만 눈이 예쁘고 머리가 금발인 아이로 통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율라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신, ‘왜⋯⋯ 그⋯⋯ 다른⋯⋯ 그 아이’로 기억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몇몇의 선생님들은 율라를 ‘왜, 그, 다른, 그 아이’로 불렀다. 그럴 때마다 율라는 화를 냈다.
선생님! 저는 율라예요.
하지만 공부방 안에 있는 누구도 율라의 목소리가 커지고,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 맞다! 너는 율라였지.
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율라예요⋯⋯.
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선생님이 고마웠다.
선생님! 율라가 울어요!
한 아이가 소리쳤다.
율라는 먼지 낀 창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우는 건 흔한 일이었다. 툭하면 울고, 툭하면 웃고, 툭하면 싸우고 소리치는 아이들 속에서 율라의 눈물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누군가 울면 요란하게 몰려와 추궁하듯 물어댔다.
더군다나 율라는 코가 오뚝했고, 금발 머리였지만 한국말을 기똥차게 잘하는 아이였다. 그런 율라가 창가에 서서 울고 있었다. 몇몇의 아이들은 율라의 눈물도 금빛으로 반짝일 거라 믿었다.
왜? 왜? 왜?
아이들이 다가와 물었다.
그럴수록 율라는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웅크린 율라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누가 운다고?
선생님이 물었다.
율라요. 율라가 울어요.
아이들이 율라의 이름을 외쳤다.
이번에는 제 이름이 불리는 게 창피해서 울었다.
울지 마.
가끔은 이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는 율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창문을 열어주었다.
말라붙은 율라의 눈물이 바람에 부딪혔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준 아이가 잠시 동안 율라의 곁에 서 있었다.
율라는 아이와 함께 매일같이 건너는 횡단보도를 내려다보았다.
신호등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이 움직였다. 녹색 신호였다. 잠시 후 차들이 달렸다. 빨간 신호였다.
율라는 다음에 이어질 녹색 신호를 기다렸다.
창가에는 율라 혼자였다. 찬 바람이 다시 율라의 마른 눈물을 닦아냈다.
녹색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뒤로 2층 창문에 커다랗게 새겨진 은하수가 보였다. 분홍색 글자의 은하수였다.
율라는 은하수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은하수.
아이가 율라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은하수야.
신호가 바뀌었다. 녹색등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이는 율라의 은하수를 듣지 못했다.
선생님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창문을 닫기 위해 선생님이 손을 뻗었다.
선생님, 저기 은하수가 있어요.
율라가 말했다.
선생님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건 은하수가 아니지!
선생님이 창문을 닫았다.
얘! 저기는 절대로 가면 안 돼! 쳐다봐도 안 되는 거야!
선생님이 먼저 돌아섰다.
율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율라는 제 이름이 ‘왜, 그, 다른, 그 아이’로 불릴 때마다 창문을 열고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뭐 해?
율라가 창가에 서면 아이들이 다가와 물었다.
저기에 은하수가 있어.
율라는 은하수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은하수?
아이들이 은하수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어디? 어디?
너도나도 창밖으로 목을 빼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율라의 손끝이 은하수를 가리켰다.
사람들 뒤에 은하수가 있잖아.
안 보여. 안 보여. 나는 안 보여.
아이들은 율라의 손가락 끝에서 은하수가 아닌 1층 마트 앞에 쌓인 과자 무더기와 라면 상자를 찾았다. 군침을 삼키는 아이도 있었다.
그때뿐이었다. 군침을 삼킨 아이들도, 은하수를 찾은 율라도, 공부방을 나오면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무조건 앞을 향해 뛰어갔다. 그건 율라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에 올라간 뒤에도 율라는 은하수를 잊고 있었다.
다를 건 없었다. 여전히 율라는 한국말을 잘하지만, 눈이 큰 금발 머리의 여학생이었다.
네가 율라야?
아이들이 물으면 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네. 똑같아. 말하는 게 우리랑 똑같아!
이번에도 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율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야?
한참을 웃고 난 아이들이 율라에게 물었다.
율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율라는 어디에서 오지 않았다. 어디를 간 적도 없다. 줄곧 여기에서 자랐다.
좁은 골목 사이의 낡은 빌라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동네를 찾아든 사람들이 교회의 십자가에 놀랄 때, 율라는 밤이 되면 십자가를 타고 내려온 알전구의 불빛이 징그럽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빼고 제일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이 은하수라고 했지만 율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피식.
율라의 웃음소리였다.
피식.
율라가 다시 한번 웃었다.
잊고 있던 은하수가 떠오르는 건 이런 순간들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어도 율라는 여전히 눈이 크고 금발 머리의 한국말을 기똥차게 잘하는 학생이었다.
여기는 어쩌다 온 거야?
율라에게 묻는 질문도 똑같았다.
피식.
율라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온 사연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율라는 그걸 증명해야 했다.
율라는 엄마에게 물었다.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됐어?
어쩌다?
엄마는 ‘어쩌다’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헷갈리기는 율라도 마찬가지였다.
율라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왜 나의 엄마인 거야? 그러니까⋯⋯ 나는 어쩌다 엄마를 닮은 거야?
걸음을 멈춘 엄마가 율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 게 어딨어.
그런 게 있어야 했다. 그래야 여기에 온 이유를 남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율라도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엄마의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율라는 엄마의 큰 키를 느꼈다. 큰 키에 어울리는 짙은 쌍꺼풀과 오뚝한 콧날, 하얀 피부와 금빛 머리칼. 엄마를 쏙 빼닮은 율라였다.
그런 게 있지, 왜 없어!
율라는 화가 났다.
최소한 그런 게 있어야 했다. 꿈이라거나, 계획이라거나, 실수라도 좋았다. 실수가 아니면 사랑이라도 있지 않은가.
돈 벌러 왔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율라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즈베키스탄에서 엄마가 온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율라가 걸음을 멈췄다.
빨리!
엄마는 율라의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율라는 엄마의 곁에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율라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엄마가 먼저 은하수를 지났다. 은하수를 지나고 우뚝 솟은 교회의 십자가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율라가 엄마의 뒤를 따랐다. 은하수를 지나고 높이 솟은 교회의 십자가가 보이자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십자가를 따라 길게 늘어뜨린 알전구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밤이 아니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알전구에 불이 들어올 테고, 그러면 십자가를 타고 내려온 알전구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요동을 친다.
징그러워.
율라가 말했다.
징그러워? 뭐가? 뭐가 징그러워?
엄마의 손이 율라의 등짝을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율라의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흔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태양과 두 모녀의 금빛 머리카락.
이 모든 게 돈에서 시작했다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람들은 엄마와 딸의 허물없는 일상으로 보거나, 천박하게 딸의 등을 때리는 이국의 폭력적인 엄마로 단정하거나, 남의 나라에서 못 볼 꼴을 보이는 버릇없는 딸의 반항으로 치부했다.
율라는 상관없었다. 무엇이 됐든, 십자가를 타고 내려온 알전구는 징그러웠다. 너무 작았고, 너무 많았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전구가 왜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지, 율라는 엄마의 팔을 뿌리치며 생각했다.
*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여덟 개를 하나로 붙인 책상도, 둘씩 짝을 이룬 책상도 이제는 필요 없다.
율라는 마지막 회의를 남겨두고 더 이상 책상을 붙이지 않았다.
이동 칠판을 바라보며 하나씩 하나씩, 모든 책상을 떨어뜨렸다.
의자는 두 개씩 책상과 짝을 맞춰 넣었다. 하나의 의자가 남았다. 남은 의자는 사회자가 서 있는 이동 칠판 옆에 놓았다.
이동 칠판에는 지난주에 그린 그림이 남아 있었다.
다시 보아도 교회의 십자가는 땅에 박힌 칼처럼 보였다. 담장의 벽화는 뱀의 꼬리를 닮았고, 중간중간 놓인 네모난 화단은 길가에 늘어선 무덤 같았다.
깃발은?
깃발은 무의미했다. 저걸 왜 저기에 꽂아놨는지, 율라가 물었다. 사회자는 깃발은 깃발이니 꽂아야죠,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웃었고, 깃발이 아니고 쉼터라니까요,라는 누군가의 말에는 더 크게 웃어댔다.
마지막 회의를 앞두고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사람은 율라뿐이었다.
양꼬치 가게 사장도, 아시안 푸드 마켓 사장도, 밍차이 중국집 사장도 오늘은 나오지 않는다.
‘뭐 하러’가 이유였다.
― 진짜 헛소리네.
밍차이 중국집 사장이 말했다.
― 여기가 지들 동넨가, 우리 동네지.
아시안 푸드 마켓 사장이 말했다.
율라는 어떤 말은 맞고 어떤 말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헛소리를 닮았지만 헛소리가 실현되면 헛소리가 아니었다.
아시안 푸드 마켓 사장은 두 번 회의에 참석했고, 밍차이 중국집 사장은 세 번 회의에 참석했다. 양꼬치 가게 사장은 한 번을 빼고 모두 참석했다. 마지막 회의는 엄청나게 바쁜 일이 있을 것 같다며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가장 오랫동안 율라와 같은 책상에 앉아서 회의를 보았다.
묻지 않았지만 양꼬치 가게 사장이 네 번이나 회의에 참석한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율라는 생각했다. 율라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회의가 끝날 때까지 책상을 옮기고 의자를 놓는 게 율라의 일이었으니 이어지는 회의에 참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참석하고 받는 돈이 5만 원이었다.
양꼬치 가게 사장은 두 번 5만 원을 포기했다.
― 왜요?
율라가 물었다.
― 바빠.
양꼬치 가게 사장이 말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율라는 모른 척했다.
이동 칠판의 그림이 완성된 건 다섯 번째 회의였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모두 8명이었다. 15명에서 7명이 빠졌다.
세계다문화거리.
아시안맛집투어.
너랑나랑벽화랑.
깃발에 적힐 이름이었다.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나를 정하는 게 마지막 회의에서 할 일이었다. 하나가 정해지면 깃발에 새겨 넣는다. 그만큼 마지막 회의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게 오늘이다.
양꼬치 가게 사장은 율라에게도 나오지 말라고 말했다.
― 왜요?
율라가 물었다.
― 뭐가 왜야.
몰라서 묻냐고, 너는 저게 좋냐고, 양꼬치 가게 사장이 되물었다.
율라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 여길 봐.
양꼬치 가게 사장이 은하수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았다.
‘민주시민사회 15인의 만남’에서 15명이 모두 모인 적은 없다.
양꼬치 가게 사장은 빈자리가 많아야 이 모든 게 헛소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이제 알겠냐?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양꼬치 가게 사장이 말했다.
한 주가 지났어도 율라는 이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했다. 율라가 아는 건 일주일 만에 보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라는 가만히 서서 이동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세계다문화거리가 아니다.
여기는 아시안맛집투어도 아니다.
여기는 너랑나랑벽화랑도 아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동 칠판을 마주하고 있는 네 개의 테이블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모아놓은 책상 때문인 것 같았다.
하나였던 처음도, 넷으로 나뉜 지금도 사람들은 책상 너머의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율라가 책상을 따로 떨어뜨려 놓은 이유였다.
책상을 옮기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제일 쉽고, 제일 간단했다.
둘씩 맞댄 책상 중 하나를 옆으로 옮겼다. 앞줄에 두 개의 책상을 떨어뜨리고, 그 뒤로 또 다른 책상 두 개를 각각 떨어뜨린 채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한 줄, 또 한 줄.
모두 사이를 벌린 채, 각각으로 떨어진 책상이 네 줄이 됐다.
양꼬치 가게 사장의 말대로 빈자리가 많아야 한다면 열다섯 개의 의자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율라는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만 놓으려다 두 개씩 맞춰놓았다. 마지막 여덟 번째 책상에는 하나의 의자가 모자랐다.
이제야 은하수 안을 채운 책상이 마음에 들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무리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앞을 보고 앉을 것이고, 뒤에 앉은 사람은 앞 사람의 등을 바라봐야만 한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낯선 여자에게 피렌체에 가봤냐는 질문 따위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저쪽에서 올린 손짓을 넘보지 않았을 것이고, 처음부터 이랬다면 빈 의자에 올려놓은 쓸데없는 짐들이 경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여기가 가장 문제라는 말 따위는 듣지 않았을 것이고, 처음부터 이랬다면 율라도 마지막 회의에 참석했을지도 모른다.
율라는 은하수 안의 불을 껐다.
은하수
저렇게 생긴 은하수여도 은하수는 은하수였다.
어둠 속에서 은하수의 분홍빛이 회의실 안으로 비춰들었다.
여전히 은하수는 쓸데없이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