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있어야 할 우주는

송수연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 문학동네, 2022.

  

    송수연의 첫 평론집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를 살피기 위한 시작점으로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에 관한 저자의 답변에서 출발해본다면 어떨까. 언제나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언어를 선별해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는 그답게 이번에도 답은 간명하다.

    타자를, 그 영원한 미지를 ‘신기’가 아닌 ‘신비’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모두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유의미한 차이를 아름답게 발견하는 것. 차이와 또 다른 차이가 손을 잡고 각자의 우주를 완성해 가는 것. 텅 빈 공간을 사람과 이야기가 가득한 장소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 소설이 꾸어야 할 꿈이며, 우리에게 ‘우주(SF)’가 필요한 이유이다. (81쪽)

    여기서 송수연이 말하는 ‘우주’란 SF 장르가 주요 무대로 삼는 공간적 배경이자, 우리에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이면서 동시에 (그가 리얼리즘 문학의 본령으로 강조하는) ‘있어야 할 현실’을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장소”로서의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SF에 관한 이야기이겠으나, 그의 전언은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이나 장르에만 국한하는 내용으로 읽히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우주란 송수연의 아동문학관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이 담겨 있는 장소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할 수 없었던 ‘타자’에게 저마다의 정당한 목소리(이야기)를 부여하는, 그래서 오랜 시간 가려져온 다양한 존재의 서사들이 가시화되고 이윽고 하나의 행성으로서 은하계 한자리에 위치하(기 위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실험적 공간. 그는 아동문학 역시 이것을 실현하는 하나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초기 평론인 「다문화시대, 아동문학과 재현의 윤리」(2014)에서부터 일찍이 송수연은 우리 아동문학이 소수자를 재현하는 데서 드러내는 근원적인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를테면 다문화 아동문학의 경우 적지 않은 작품이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를 ‘우리’로 표상되는, 즉 비슷한 피부색과 말씨를 사용하는 ‘한국인’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현단계 한국 다문화 아동문학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여기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103쪽)는 것이다. 이럴 때 작가의 선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품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획을 흐리기보다는 수행적으로나마 선을 견고케 하는 데에 손을 보태게 된다. 그러므로 소수자들이 이곳 우주에서 위성이 아닌 고유한 행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지점은 바로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있다. 이것이 그가 (특히 소수자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에 주목하는 이유겠다.
    이렇듯 평론집의 부제이기도 한 “아동문학과 소수자 재현”은 송수연이 오랜 시간 집요하게 탐문해온 비평적 주제다. 이 주제는 장르문학과 여성주의라는 비교적 최근의 의제를 다루거나(1부) 옛이야기와 리얼리즘 같은 한국 아동문학의 오랜 자산에 관해 숙고할 때는 물론이거니와(2부), 양자를 연결하고 아동문학의 미래를 모색하는 사유 속에서도 줄곧 중추적인 열쇳말로 떠오른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그가 웅변하는 바는 “유의미한 차이를 아름답게 발견하는 것”과 같은 다양성에의 옹호에 해당하나 이러한 내용을 단호하고 때로는 가차 없어 보이는 방식으로 전한다는 데에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보자.

    소설은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니 정답을 말하는 소설은 가짜다. (80쪽)

    하니, 어린이가 보고 듣는 것을 같이 보고 들을 수 있을 때 아동문학은 진정 어린이가 주체가 되는 문학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상상력이 없는 아동문학은 가짜다. (92쪽)

    ‘잠재된 공동체’라는 기적은 이렇게 현실화된다. 나는 이런 것이 진짜 장편이고 진짜 아동문학이라고 생각한다. (244쪽)

    ‘진짜’와 ‘가짜’를 일축하는 이 문장들에는 소박한 상대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누군가는 과연 문학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일이 가능한지, 또한 이것이 비평이 감당해야 할 소임인지를 의문시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나는 다른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요컨대 이런 물음이 떠오르는 것이다. 현시점 우리에게는 이만큼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비평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가.
    소수자(어린이) 재현의 윤리를 비평적 숙제로 떠안고자 하는 평론가답게 송수연은 어떤 경우라도 옳고 듣기 좋은 말 따위를 우리에게 건넬 마음이 없다. 모두에게 옳은 말은, 바꿔 말해서 지금 우리가 발 디딘 현실에 균열과 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언사는, 설령 미문일지언정 그가 앞서 비판했던 바처럼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 기왕의 부조리한 구조를 넘어설 수 없다. 그가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짐짓 과단한 태도로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우주가 무엇인지(또는 정반대로 ‘가짜’를) 가리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그 까닭이지 않았을까. 이처럼 아동문학으로부터 더 많은, 그리고 더 다양한 ‘있어야 할 현실’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던 송수연의 시야가 지구에서 우주로, 현실주의에서 여타의 장르문학으로 확장해갔던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테다.
    물론 단순히 ‘있는 현실’이 아닌 ‘있어야 할 현실’을 그린다는 것은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나름의 정답 내지는 지향점을 미리 설정하지 않고서는 실천할 수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언뜻 당위적으로도 들리는 ‘있어야 할 현실’이란, 건조하게 말한다면 사실상 기존하는 것이 아니므로, 발견되는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발명되는 편에 더 가까운 것일 테다. 하지만 송수연은 이 작업을 결코 (현실의) 발명과 같은 범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동문학은 어떤 세계를 그려야 할까. 이 역시 단 하나의 진리는 아니지만 나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아동문학은 최선을 다해, 기어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들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 확실히 존재하는 희망의 얼굴과 목소리, 그것을 찾아내 잘 보이고 잘 들리게 형상화하는 것이 지금 아동문학이 해야 할 일이며 그것이 우리가 현실주의를 올바르게 계승하는 방법이다. (162~163쪽)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최선을 다해”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할 때야 비로소 잘 보이지 않았던 하나의 진실이, 그러니까 어린이・청소년에게 ‘있어야 할’ 어떤 현실이 어렴풋이 그 모습을 비추리라는 것이다. “지금 아동문학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발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형상화해내는 데 있다는 것이 송수연의 주장이다. 그가 발명을 멀리하고 발견의 태도를 견지하려는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현실을 발명한다는 것은 그 현실의 당사자를 떠난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일지 이것은 때때로 그들의 삶을 판돈으로 건 내기로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발견은 어떻게든 그들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근사한 외양을 한 세계일지라도 그들로부터 나온 현실이 아니라면 이것은 대개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 말하기 위해 굳이 문명화나 계몽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된 지난 세계사의 과오를 돌아볼 필요까지 있을까. 시대별로 어른들이 자의적으로 발명해온 ‘이상적인 아동’의 상에 따라 이들을 교육·훈육해온 지금의 결과는 과연 어떠한가.
    결국 송수연의 말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어린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151쪽)이다. 어린이·청소년에게 진정 ‘있어야 할 현실’을 마주하는 방법이란 오직 그들과 그들의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벼리는 것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현실은 팍팍하고, 나쁜 인간들이 판을 치고, 갈수록 앞이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그게 유일한 진실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어른들만의 사실인 경우가 많다. 이 와중에도 아이들은 울고, 웃고, 사랑하며 무수한 꿈을 꾼다.”(162쪽) 그가 평론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러했듯, 어른들의 암울한 현실의 그림자 아래 가려져 있던 아이들의 목소리에 가닿으려는 이들이 더 많아질 때, 우리에게 있어야 할 우주는 차츰 그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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