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까지 꾸는 경험을 ‘재미있게’ 읽게 하기

『남동공단』은 2013년 나온 마영신 작가의 만화다. 내게 남동공단은 1990년대 PC통신 시절을 달구었던 인기 소설 『퇴마록』 세계편에서 많은 이들이 악당의 손에 좀비화했던 배경지로 등장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마영신 작가는 이곳의 한 방위산업체에서 3년 반 동안 대체 복무한 경험을 그곳의 이름을 제목으로 단 만화로 기록했다.
꿈에 다시 나올 것 같은 공장에서의 기억
대체복무란 국방부에서 병역특례업체로 지정된 회사에서 근무함으로써 병역을 대신하는 제도다. 겉에서 보면 군대에 안 간다는 것만으로 부러움을 사는 경우도 많지만 실제로는 현역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복무해야 하고, ‘잘리거나’ ‘회사가 망하면’ 그간의 근무 기간이 모조리 무효화되어 현역 복무를 해야 한다. 따라서 대체복무자는 앞날이 어찌 될지 매우 불안한 입장에서 강도 높은 업무를 맡게 된다. 『남동공단』은 바로 이런 대체복무자로서의 공장 근무 경험을 그렸다.
종민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웠지만 작중 내용 대부분은 작가가 실제 겪었던 이야기다. 덕분에 작품은 지면 너머에서 먼지 냄새와 쇠 냄새가 고스란히 풍겨오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실어 나르고 있는 건 작가가 용접과 제관, 조립을 맡으며 보내야 했던 시간 자체다. “차라리 군대에 갈 걸, 하고 후회할 정도로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던 이 청춘의 한 토막을 작가는 마치 잊지 않겠다는 듯 지면 곳곳에 거칠지만 꼼꼼히 그려 넣었다.
작품은 엉겁결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방위산업체에 들어와 생판 처음 해보는 일에 맞닥뜨린 어리바리하던 주인공이 어느덧 자를 댈 필요 없을 정도로 숙련도를 높여가는 동안 겪고 만나고 떠나보낸 공장 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자전적 이야기임을 모르고 본다면 장르를 일종의 군상극이라 여길 수도 있을 만큼 작품은 공장 안 사람들이 이루는 어떠한 관계 도식과 그들이 툭툭 던지듯 내뱉는 말들에 시선을 주고 있다.
쳇바퀴같이 돌아가는 반복 노동 속에서도 생겨나는 유대감, 아차 실수하면 곧바로 피부와 눈이 타들어가고 문자 그대로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위험천만한 현장의 긴장감과 진짜로 벌어진 손가락 절단 사고, 외국인 노동자에게 괜히 한번 그 나라 유행가를 되도 않는 발음으로 불러보려는 시답잖은 마음, 벼룩의 간을 빼먹듯 근로자들 돈을 훔쳐가던 사장의 사촌동생을 보는 어이없음, 그리고 한편으로는 폐쇄된 공간답게 그 공간 안에서 골목대장 노릇하는 사람을 향한 짜증스러움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하지만 주제가 묵직하게 다가올 법한데도 한 권을 읽어 내려가는 데에는 신기할 정도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실제로 작품 안에서는 ‘잘리면 군대 간다’라는 불안함과 어느덧 ‘이렇게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라는 묘한 익숙함, 그리고 군사 훈련 잠시 받고 왔더니 그 사이에 일하던 부서와 사람들이 깡그리 ‘정리’돼 있을 때의 황량함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교차한다. 이는 본인의 경험담이라고 주절주절 늘어놓기만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인물들을 평면적이지 않게끔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런 속도감과 입체감 때문일지, 독자 입장에서는 심지어 ‘경쾌하다’는 심정마저 든다. 내용이나 그림체 어디에도 가볍게 읽을 만한 구석이 없는데도 그렇다.
노동만화로서의 『남동공단』
노동자 중에서도 유난히 더 불리한 위치에 서 있는 특수한 노동자 신분에,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는 업무에 돈도 제때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사람 대하는 태도로서도 좋은 점수를 주려야 줄 수 없는 사용자. 이 정도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 당연히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라 할 수 있을 법도 한데, 막상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기를 주문하고 있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의 이야기라 하여 어떤 목적을 위해 이 만화를 만들지 않았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작가가 적은 말을 그대로 반영하자면 이 작품은 노동자들의 권리와 부당 대우에 관한 현실적 개선을 주장한다기보다 오롯이 작가 개인이 겪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괴로움을 주었던 이(들)을 향한 본인의 분노를 드러낸 것에 가깝다.
실제로 2022년 복간판 마지막에 수록된 특별 단편 「김 사장 동생 김 실장」은 2006년 작으로 표시되어 있다. 작가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품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던 26~28세 무렵보다 시기상으로 앞이다. 즉 프로토타입에 가깝다 할 만한 이 작품에서는 작가 본인을 대리한 캐릭터 ‘종민’이 아닌 작가가 직접 등장해 “아직도 전 당신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이렇게 얘기해야 제 속이 좀 풀릴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을 그렸던 당시의 마영신 작가에게 그 경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기억이었으리라. 한데, 개정판에 추가한 작가의 말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노동 현실”이란 말이 덧붙어 있다.
이는 출간 이후로도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결국은 한 편의 ‘노동 만화’이자 ‘노동자 만화’로서 해석할 수밖에 없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분명 작가 본인이 장르나 주제 의식을 본격적으로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한 여타의 본격적인 노동 현장 고발 르포 만화들과는 결이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 건 군 대체복무 노동자로서 보낸 ‘남들이 그리 겪을 일 없을’ 시간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남들이 쉬 만나지 못할 군 대체복무 현장의 일면과 내부 생태계를 작가가 의도했던 바와는 별개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작가의 성향 때문인지 한없이 무겁게만 내리깔리거나 적극적인 고발에 목적을 두지 않았을 뿐, 현장의 구조적인 문제는 물론 폐쇄된 공간 안이기에 더욱 드러나는 인간관계상의 문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작품을 오로지 자전적 구술채록의 결과물로만 볼 수는 없다. 심지어 이 작품은 작가에게 “완성 후 원고료 없이 노동 관련 매체에 연재 조율을 하다가 무산되었던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한다. 결국 만화 제작이라는 또 다른 노동 측면에서의 맥락성도 작품에 덧붙은 셈이다.
『남동공단』 복간의 의미
『남동공단』은 2013년 새만화책에서 출간되었고, 2022년 3월에는 송송책방에서 복간했다. 그사이에 마영신의 만화 활동은 꾸준히 폭을 넓혀왔다. 『삐꾸 래봉』 『아티스트』 『19년 뽀삐』 그리고 근자에 하비상을 수상한 『엄마들』에 이어 상업 장르 만화의 틀을 갖춘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스토리 작업과 웹툰 레이블 ‘즐겨찾기’의 구축과 활동에 이르기까지, 마영신의 만화 실험은 소재와 주제 의식에만 침잠하거나 강화하려 들기보다 한층 더 다양한 형태와 새로운 독자를 향한 방향성을 띠고 진행되는 듯하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띠든 마영신 만화에는 마영신 특유의 조미료 따위 거의 안 친 신랄한 필체와 인간 군상을 사이에 둔 건조한 위트가 시그니처처럼 담겨 있다. 『남동공단』은 그러한 마영신 표 만화의 거의 시작점에 가깝다 할 수 있을 작품이다. 근자에 마영신 만화들을 처음 만나보았다면 이번에 복간된 이 작품을 접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