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들고 기억하며 탈주하는 시

나와 타인, 사물의 관계는 결국 서로 스며들면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나 없는 타인 없듯이 타인 없는 나 없고, 사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결국 이 관계의 스며듦, 어우러짐이 아닐까. 시는 이렇게 타인들과 스며듦과 어우러짐의 사회적 공간 속에서 성장하고 절명한다.
김영언의 시집 『나이테의 무게』는 이 스며듦, 어우러짐이 돋보인다. 잘려온 나무를 보면서 “나이테의 무게를 어루만”지는 마음과, “나이테의 사연을 경청”하는 마음은 시인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시인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빌딩 숲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인파에 휩쓸려 익사하지 않으려고/ 멀미약을 삼키고 으슥한 골목길을 경계하며/ 쫓기듯 날마다 발길을 재촉했던 것처럼”(「상수리 한 알」) 도시에서의 정착이 두렵고 낯설었던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때의 불안과 두려움이 남아 있다. 이 불안과 두려움은 근원적인 인간 생존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시인은 타자를 자신 속으로 불러들이며 함께 어우러지려고 하지만 그에게 도시는 여전히 “아직도 진행 중인 미완의 상륙 작전”을 감행해야 하는 두려움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도시에서의 삶은 적응되어가는 듯이 보이고 도시는 그에게 산발적으로 조금씩 곁을 내주며 그의 상륙을 승인해주는 듯이 보인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낯선 공간에 자리를 잡아야 할 때 그가 감당해야 할 불안과 두려움의 몫은 엄청나다. 그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각자의 기대지평에 따라 삶이 펼쳐지지만 시인은 “정해진 궤도 위만 직립 보행하고 있는/ 매일 매일의 순종을 향해/ 거꾸로 걷자고 잡아끄는 너의/ 저 무모한 패기와 대범한 반역”(「거꾸로 걷기」)을 꿈꾼다. 겉으로 보기에는 낯선 도시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고 정해진 규범에 순종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가 꿈꾸는 것은 ‘반역’이다. 이 ‘반역’의 꿈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서정시는 환대의 언어를 외피로 입고 있다. 서정시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환대하며 시적인 언어를 길어 올린다.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를 환대하며 맞아들였다. 그러나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환대에 반역의 꿈을 꾸면서 잉카족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환대만이 존재한다면 시적인 언어는 산문의 언어로 몰락한다. 시적인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환대 속에 감추어진 ‘반역’의 언어, ‘반역’의 꿈이 있어야 한다. 김영언의 시가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환대의 언어 속에서 반짝이는 ‘반역’의 언어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수평으로 나른하게 전개되면서 순종만 하는 삶은 정해진 좌표 위만 지루하게 걸어갈 뿐이다. 지루함은 시인의 죽음이다. 변화하는 좌표들 사이를 이리저리 어지러이 떠돌 때 삶은 중층의 의미를 가지며 깊어진다. 그 중층의 굵직한 주름들이 몸으로 스며들어 시가 되고 삶이 된다.
시인이 살고 있는 강화도의 사람들과 한때 우리 모두를 울렸던 팽목항의 아이들은 물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선 안으로 불려온다. 강화도 장화리는 “섬의 수액을 빨아올려/ 조각난 삶을 접합하려는/ 도시인들의 휴식을 눕히기 위해”(「장화리를 위한 변명」) 파헤쳐지고, “어둠 속 개 짖는 소리 몇 겹 접어 베고/ 창문 밖 달빛 가장자리 끌어당겨 덮고/ (중략) 손톱 채 자랄 틈도 없이/ 악착같이 땅 파서 자식들 대학 갈”친(「문산댁」) 문산댁은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다. 개 짖는 소리를 베고 누워 달빛을 덮고 자는 외로운 어머니의 노동을 먹고 자라 돈 잘 버는 직장 다니고 큰 아파트에 사는 도시물을 먹은 사람은 “남의 약점을 기회로 삼아 강화도 망월리 미꾸지고개 넘다가 농가 타작마당에서 서리태를 사 온 영악한 도시인”(「망월리에서 사 온 서리태」)으로 살아간다. 망월리 타작마당의 주인 역시 또 누군가의 ‘문산댁’인데 우리는 고향에서 달빛 밟으며 마당을 홀로 들어서는 문산댁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 영악스럽게 남의 타작마당에서 좋은 것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 오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쓸쓸한 풍경을 시로 옮기며 말한다. “망각도 소유다.”
망각은 사라짐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망각은 사라짐이 아니다. 서판처럼 살과 뼈에 새겨진 망각은 혼이 되어 사람의 몸을 맴돈다.
그해 난리통에 사라져서 소식이 없는 자식을 기다리다가 “조금이라도 기다리지 않게 문고리 손수 따주어야 한다고/ 허기지지 않게 따스한 밥 한 끼는 꼭 멕여 보내야 한다고/ (중략)/ 죽어서도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아 멀리 가지도 못하고/ 아예 대문 밖 마당가에 누워버린 할매”(「마당 무덤의 전설」)는 결국 살던 집 마당가에 무덤을 만들고 그리움의 서판을 등에 새겨버렸다. 그렇게 망각할 수 없는 존재들은 제4부 ‘베게를 베고 누운 교복’에서 다시 살아난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면서 써 내려간 시는 간절한 사모곡이면서 피로 불러야 할 이름들이다. 어머니들은 지금도 그 ‘할매’처럼 마당가에 무덤을 만들고 아이들을 기다릴 것이다.
굶주리고 힘들었던 삶이지만 역사의 아픈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그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불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김영언 시의 힘이다. 문산댁과 팽목항의 아이들을 불러내며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독자와 저자의 낯설지 않은 기억들이다. 우리는 가끔 마음속의 문산댁과 팽목항의 아이들을 잊고 싶어 한다. 잊음으로써 우리가 그들을 기억했을 때마다 느끼는 아픔과 충격을 거부하려고 한다. 그러나 김영언이 불러내는 문산댁과 박혜선과 남지현과 박정은과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과 또 많은 아이들의 이름은 우리의 아픔과 충격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비로소 망각 속에서 지연되었던 애도를 하게 된다.
김영언의 시는 바로 이렇게 사람과 사물을 호명하는 것, 그들 속으로 스며드는 것, 그리하여 그들을 기억하며 그리움의 서판을 새겨가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하고자 한다. 시는 침묵하면서 끊임없이 탈주한다. 기억과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