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땅이 되는 시, 새 땅을 만드는 시인

영원한 에로스가 영원한 타나토스와의
투쟁에서 분발해주기를 바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라는 시집의 제목을 처음 마주한 독자는 조금 산뜻한 기분이 되었을지도, 혹은 조금 다정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무수히 많은 산책길을 가졌을 법한 시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선물처럼 전달해줄 것만 같은 시인. 게다가 “멀리 떠내려간 자신을 되돌리는 데에 산책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다. 산책은 어제의 나와 미래의 나를 하나의 길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한다”(「시인 에세이」)는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시집의 제목은 그야말로 ‘나’를 오롯이 전달할 뿐 아니라, ‘나’가 온전히 회복되어가는 과정까지 모두 소상히 전달해줄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산책길은 “끝내려 했는데/ 내가 끝낼 수 없다는 것”(「산책」)을 깨달은 자의 산책길, 그러니까 “당신의 창가”에서 “가스불 켜고/ 모든 창을 닫아”(「휴일」)봤던 자의 산책길. “내 얼굴에 얽힌 당신의 얼굴을 길러봅니다”(「넝쿨」)라는 문장으로 시집의 문을 연 시인은 “아무도 없는데/ 피고 지는 자리”에 놓여 있는 “꽃”(「꽃잎」)들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산책길을 떠난다.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당신을 향한, 당신과 함께하는 산책길. 문제가 조금 있다면, 이 산책길이 평지나 얕은 오르막길 정도의 산책길은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당신과 나란히/ 날아보는 연습”(「사거리 꽃집」)을 하는 이 산책길은 그러니까 절벽에 가까운 내리막길의 산책길. 독자마저도 거듭 ‘추락’을 경험하게끔 하는 섬뜩한 산책길.
산뜻함과 다정함을 기대한 독자는 이내 곧 섬뜩함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에 조금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한편 어떤 ‘아름다움’을, 독서를 거듭 이어가게끔 하는 분명한 ‘힘’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작과 전개는 다소 섬뜩했을지언정, 그렇기에 시인이 보여주는 애도의 산책길은 어떤 산책길보다도 절절하고 또 진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집을 읽어나가며 느꼈던 아름다움과 힘은 추락에 가까운 산책의 방향을 반등시키기는커녕 이를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확정하고야 만다. “나는 나의 물을 메고 당신의 심장까지 차올랐는데/ 당신은 나를 가둬두기만 합니다”(「저수지」). 결국 ‘나’는 뱀처럼, 폭포처럼, “흙을 뒤척이는/ 빗물처럼// 당신을 찾아가”(「수련과 수레」)고자 한다.
그렇게 시집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가늠할 수 없어진 당신의 방 안에서/ 나는 밥을 짓습니다”(「살림」), “으깨진 밤의 다리에 붙어// 감전되고 있어요// 풀벌레처럼”(「청보리밭」)과 같은 문장들로 그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독자는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라는 시집의 제목이 실상 독자를 향한 문장이 아님을 뒤늦게 눈치채는데, 시집의 제목은 “멀리 떠내려간 자신을 되돌리는” 애도의 문장이기보다, 외려 그런 애도의 노력까지도 포함한 ‘나’를 온전히, 모조리 당신께 바치고자 하는, 반anti애도의 목소리, ‘우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처럼 애도의 산책길을 끌어모아 모조리 당신에게 바치고 마는 이 철저한 우울의 시 쓰기는 사랑의 한 극단을 보여주며 단번에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다. “리플리컨트-시인”, 그는 “실패하더라도, 사랑을 잃더라도, 시를 쓸 것이다. 정주하지 않는 그의 시가 삶의 고투를 추진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1라는 말처럼, 기어이 그의 산책길 통째를 우울의 시공간으로 만들며, 독자와 일상의 욕망을, 기대를 넘어선다. 어떤 ‘도착perversion’에 다름 아닐 시인의 시 쓰기에 일부의 독자는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울은 조금 속도가 느린 애도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울이야말로 사랑의 사랑다움을 가장 충실히 관찰하고 실험해볼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사랑은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극 관계에서 한쪽 극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양가감정으로 경험되는 양극 관계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랑과 미움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는 바로 그 역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2 따라서 “‘사랑은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을 잇는 무언가이기도 하지만, 내재적으로 양가적인 무언가, 따라서 사회적 유대 관계를 파괴할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또는 ‘사랑 그 자체가 그러한 사회적 유대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파괴적인 힘(인간이라는 생물을 파괴, 자기파괴로 몰아가는 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까지 파괴하게 하는 힘)이 사랑 안에 들어 있거나 사랑에 들러붙어 있다’”.3
추신: “왜 내가 이러고 있나”라는 절규로 시작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절규로 이어지다 결국 “살아야 하네”라는 절규로 끝맺는 한 노래가 있다. 벌써 10년 전의 노래가 된 무키무키만만수의 〈투쟁과 다이어트〉는 우리에게 날것의 정확한 질문과 더불어 그 질문의 전제를 제시한다. 요컨대 이딴 세계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만 한다는 것.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러나 어느덧 저 ‘살아야 하네’라는 당위적 전제 가운데,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 자체가 많이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사실상 저 질문의 핵심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새로운 씁쓸함을 덧붙이며 저 노래의 끝에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를 놓아본다. ‘살아야 하네’라는 절규를 가볍게 뛰어넘는 이 ‘리플리컨트-시인’의 목소리를 놓아본다.
시인은 ‘살아야 하네’라는 체념적, 현실적 배경으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내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의 저수지로 초대하고, 어느덧 우리로 하여금 그 끝에 터져 나온 “물과 흙을 번갈아가는/ 계절”(「물가에서」)에 이르도록 한다. 시인과 함께한 추락의 산책길은 그렇게 “흙을 뒤척이는/ 빗물처럼”(「수련과 수레」), “골짜기/ 흙물처럼”(「살림」), 우리가 굳게 ‘현실’이라 체념하며 믿고 있던 전제들을 뒤바꾼다. 물론 물과 흙이 범벅인 이곳에서 우리는 살 수 없지만, 그러나 시인과 함께하는 이 산책길은 적어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윤리적 질문에, ‘사랑’이 가로놓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우리’여야 한다는 사실을, 지독한 우울을 통해 설득한다. 불특정한 ‘나’들을 지탱하는 땅이 ‘생명’을 근거로 삼는 단단한 현실의 땅이라 한다면, 그 위에서 개진되는 질문이 좀처럼 저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우울’과 ‘사랑’은 ‘나’를 저 단단한 ‘나-생명’이라는 땅으로부터 탈출시켜 ‘우리-사랑’이라고 하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새로운 땅으로 유도한다. 특히나 ‘우울’로 구축된 그곳은 일견 저주받은 땅처럼 보일지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저 질문 자체를 다시금 살려내고, 또한 그에 대한 대답 역시 새로이 모색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는바, 더군다나 시인이 구축한 저 새로운 땅이 너무도 매혹적이고 아름답다면, 우리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