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私生兒 그래픽 노블―새로운 참여문학(?)의 징후에 대해
“한국 소설은 개폼 잡는 얘기가 많아서 노잼이야.”1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숨기고 있는 출생 배경에 대해 논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개념이 현재 진행형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단어가 탄생해 소멸하거나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추적은 아니더라도 선행 연구자들의 행보를 점검해야 한다. 그럴 때, 당대의 여러 분위기나 마케팅에 휘둘리지 않고 생소한 개념으로 느껴질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을 객관적으로 쳐다볼 수 있다. 이 개념이 오랜 시간 무분별하게 쓰였던 이력 때문에 더욱더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이 개념의 애매모호함을 직접 겪은 적이 있다. 7개월 전 어느 신문사에 만화 관련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지금은 퇴직했지만 그 당시 문화부장은 “만화면 만화이지 ‘그래픽 노블’은 무엇인가요?”라며 정중히 내게 물었다. 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오랜 시간 일했던 그의 경험과 저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픽 노블’이라는 개념이 문화계에 깊이 몸담은 당사자들에게도 낯선 대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그 당시 직접 느낀 것이다. 글을 쓴다는 나 역시 당시에는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으니, 내게도 이 개념은 생소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래픽 노블에서 ‘노블novel’의 영역은 문학에서 소중한 지점이기도 하니 문학의 영역에서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은 낯설지 않다. 실제로 토마스 폰 슈테이네커와 바바라 옐린의 합작품 『마지막 여름』(2020)은 출판되기 전 독일 문학 온라인 잡지 『훈데르트피르젠Hundertvierzehn』에 연재되었고, 유열열음의 〈거래불발〉, 〈옅은 물〉, 〈윙크〉 등의 작품들도 문학과 연관 있는 웹진 〈아는 사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노블’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어떤 방식이든 당대의 영화나 애니메이션과도 만난다.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해치지 않아』(2016)의 경우, 글을 맡은 정미진은 소설집을 내기도 했다. 이처럼 문학은 그림과 종종 만난다. 문학잡지로서는 처음으로 『작가들』에서 ‘그래픽 노블’에 무게 중심을 실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여러 평자2들이 공통으로 논한 탄생의 시작은 이렇다. 1964년 잡지 편집자이자 만화 평론가였던 리차드 카일Richard Kyle은 편집자로서 기존과는 새로운 ‘만화’를 두 눈으로 목도한다. 여기서 기존의 것이란 미국의 코믹스 만화로 분량이 적고 줄거리 역시 훑어가며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를 말한다. 우리 방식대로 편하게 말해 킬링타임용으로 읽을 수 있는 소소한 만화다. 그런데 리차드 카일은 이런 스타일의 만화가 아닌, 새로운 만화를 응시한다. 낯선 대상을 만났으니 고민에 빠진 것이다. 기존의 만화 형식과 내용이 사뭇 다른 이 만화를 어떤 방식으로 명명해야 할지 리차드 카일은 깊은 사색에 휩싸인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이 새롭게 ‘명명’하는 행위이다. 평론가에게 ‘명명’ 행위는 도전적이기도 한 것인데, 그는 이 행위를 통해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그 무엇’을 대중들에게 당당히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한 비평가의 이러한 바람은 사후적으로 만화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운 좋게도 시대가 그런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래픽 노블’의 호명 방식과 관련해 이 부분을 많은 평자는 첫 번째 표정으로 기억한다.
평자들은 그래픽 노블과 관련된 두 번째 표정으로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든다. 1978년에 출간된 윌 아이너스의 『신과의 계약』이 그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출간할 당시, 창작자로서 기존의 ‘만화’와는 다른 만화를 표방하고 싶었다. 그래서 12년 전 리차드 카일과 동일한 방식으로 새로운 ‘명명’을 시도한다. 그때 그가 사용한 명칭이 ‘그래픽 노블’이다. 재미를 위한 진도 빼기식 만화, 유머를 위한 유머, 얇은 분량의 지면을 지양止揚하고 만화가 개인의 독창적인 주제와 연출을 내세운 아티스트적인 형식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만화와는 사뭇 다른 방식의 ‘명명’이 필요했다. 새로운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한 창작자의 선한 욕망과 바람은 이처럼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명명 행위가 아니다. 역사가 이러한 ‘사건’을 의미 있게 기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그래픽 노블은 이들이 명명했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나의 작은 물줄기를 형성한다. 이들의 명명 행위 이후, 후속 세대들은 묵직한 작가주의 ‘만화’를 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 있게 호명하기 시작한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자들은 아트 슈퍼겔만의 『쥐』(1986)를 꼽는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은 무수히 많을 테지만, ‘첫’ 시작이라는 점에서 초기의 흔적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억한다.
여기까지 평자들의 의견을 내 방식대로 정리한 것인데, 이 과정을 셈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래픽 노블’이라는 명칭이 과거의 ‘것’을 갱신하려는 목적으로 탄생한 용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과거의 ‘그 무엇’에 오래도록 들러붙어 있는 흔적을 과감히 털어내고 이제는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는 패기 있는 열정마저도 느껴진다. 그것이 운동의 측면에서 또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힘 있게 진행되지 않았을지라도 과거의 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행위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명칭에는 ‘새로운 것’들이 조금씩 달라붙는다. 그러면 그래픽 노블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면 편할 듯하다. 물론, 이 방식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선행 연구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던 방식이다.
우선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래픽 노블은 자전적 이야기나 증언의 형식을 지닌다. 때에 따라서는 픽션이 될 수도 있지만, 논픽션의 형태가 되기도 한다. 그래픽 노블을 단순하게 생각해보았을 때 그림으로 그린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논픽션의 형태를 지닌 그래픽 노블의 경우, 앨리슨 벡델의 『펀 홈: 가족 희비극』(2018)처럼 ‘나’의 이야기와 ‘픽션’이 자연스럽게 섞이기도 한다. 따라서 내용보다도 ‘그림’과 ‘칸’을 통해 표현되는 형식이 이 장르를 규명하는 데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
최근에 출간된 올가 그레벤니크의 『전쟁일기: 우크라이나의 눈물』(2022)의 경우 출판사나 작가 스스로가 그래픽 노블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러시아 침략으로 인해 피난 가는 여정을 녹여낸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글과 그림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래픽 노블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도 있다. 반면에 치매에 걸린 엄마의 끝을 다룬 나에젤 베인스의 『엄마, 가라앉지 마』(2022)의 경우, 번역자이자 시인 황유원은 “픽션이 아닌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그래픽 노블’과는 구분된다”3고 적었지만, 온전히 ‘픽션’ 하나로 재현된 텍스트는 존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 발언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시인이 작품 활동을 할 때, 가상의 화자를 이용해 쓴 작품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시를 짓는 찰나의 순간, 가상의 화자라 하더라도 그 화자는 ‘나’와 섞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픽션’의 유무로 그래픽 노블을 나누기는 힘들 것 같다. 오히려 여러 층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 명명이나 합의가 필요하다. 여하튼 이러한 호명이 가능한 것은 책으로 묶일 수 있는 하나의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예술가의 치밀한 작업에 의해 만들어진 만화 형태에도 이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E. Butler의 원작 『KINDRED』를 데이미언 더피가 각색하고 존 제닝스가 그림을 그린 『킨: 그래픽 노블』(2022)에 서문을 쓴 은데디 오코라포르는 “이제 그 이야기가 그래픽 노블이란 강력한 형태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킨》을 접해본 독자라면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식으로 인해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올 것”4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은데디가 ‘강력한 형태’라고 말한 것은 치밀한 작가주의를 의미함과 동시에 소설과는 사뭇 다른 그래픽 노블의 ‘형식’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작가주의, (논)픽션, 그림, 말풍선, 색, 칸 등의 형식이 ‘그래픽 노블’의 명칭을 논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층민과 유대인, 동성연애자, 유색인, 유곽遊廓에서 일하는 여성의 삶을 그린 에밀 페리스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몬스터: 몬스터홀릭』(2018)의 경우 논픽션보다는 픽션에 치우쳐져 있지만, 치열하고 열정적인 작가주의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이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주로 유통 방식이나 책 구성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신문, 잡지, 정간지 등이 아닌 서점에서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단독 판매될 수 있는 서적이 이 범주에 들어온다. 하나의 묵직한 결과물이 묶여 나왔다는 것은 어느 한 예술가의 결을 비평할 수 있는 조건이 됨과 동시에 예술가의 표정이 온전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래픽 노블로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거나 책으로 출판되지 않는 작품은, 그 순간만큼은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명명은 이르다. 정식적인 호명을 받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명칭’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 무슨 이유로 논의되고 있느냐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논의된 내용은 만화계에서는 이미 상식적인 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연구자들이나 평론가들은 이미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러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쩌면 반복적인 이런 내용보다도 당대의 독자들이 그래픽 노블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을 운용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래픽 노블’이라는 개념이 확고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픽 노블이 자전적인 이야기로 주로 호명되지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는 수학처럼 잘라지지 않는다.5 그러니 뚜렷하고 명확한 호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모호하다. 무엇보다도 ‘만화’ 자체가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변한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화의 형식은 영화에도, 문학에도, 어린이 교육 서적에도, 희곡에도, 시나리오 대본에도, 에세이 형태로, 자전적인 모습으로도 다양하게 변주된다. 이 과정에서 만화의 본모습은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흐려진다. 따라서 문학 안에도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래픽 노블 역시 수많은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만화의 편견을 깨고 예술이 되고자 했던 그래픽 노블은 그래서 애초부터 두루뭉술하게 호명될 수밖에 없었다. 통계의 형태로 개념 정립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은 많은 발품이 필요하다.
웃음과 비非웃음
웃기고 익살스러운 문학이 있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문학은 진지한 영역에 속했다. 진지했고 정직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부조리한 권력에 대응해 온 힘을 쏟았다. 시인 임화는 「현해탄」(1938)을 통해 젊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좌절과 극복을 노래하기도 했고, 해방 후 설정식은 「원향原鄕」(1946)에서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시기 자신의 욕망만을 탐하려는 권력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시기 시인 박인환은 「검은 신이여」(1952)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담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시인들은 자신만의 진지한 방식으로 세상과 싸웠다. 김수영은 발표되지 못한 자신의 작품 「김일성 만세」(1960)로 억압된 시대 분위기를 비판했고, 김남주는 자신의 전투적인 작품을 통해 농민과 도시 빈민의 편에서 우직하고 당당하게 싸웠다. 백무산과 김해자 송경동 역시 당대의 부조리한 노동 현실과 맞섰다. 당대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소설가나 시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움을 청한다. 많은 작가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맞서 잊혔던 ‘여성’의 삶을 복원하고자 애쓰고 있으며, 일부의 작가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을 새롭게 정의해 ‘동물’이나 ‘환경’ 담론에 초점을 맞춰 부조리한 ‘인간’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은 과거의 인간보다 더 진화된 ‘인간’일 테다. 더 나아가 문학상과 같은 상징적인 권력에 맞서 반성의 자세를 보이기도 하고, 당대의 합평 시스템과 문단의 보수주의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문제를 제기한다. 문학은 이처럼 오랜 시간 부조리한 것에 싸움을 청했다. 싸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들의 용기는 값지다.6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진지함’이 ‘문학’에서만 재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사실은 비평의 대상이 ‘문학’ 안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알려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시적인 것’이 굳이 ‘시詩’ 자체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냉정하게 응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만화든 영화든 가요든 춤이든 어떤 방식이든지 비평 대상에 들어온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만화’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만화가 동시대의 흔적을 외면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많은 작가가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품고 이 사회를 응시한다. 더 나아가 ‘개인’의 문제를 보편화시켜 ‘우리’의 문제로 견인한다. 개별적인 것을 통해 보편적인 문제까지 들여다본다. 자신을 그림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많은 작가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으니, 당대의 이러한 현상은 하나의 징후이기에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과 경쟁하고 싸운다는 점에서 과거에 문학이 전유했던 방식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화’와 관련된 많은 관계자들은 당대의 ‘만화’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리차드 카일이나 윌 아이너스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다시 글을 쓴다면 ‘그래픽 노블’ 개념을 좀 더 다듬어 명확하게 사용했겠지만, 2021년 ‘그래픽 노블’과 관련해 쓴 「그래픽 노블의 역습─문학과 만화를 넘어 당당히 지금, 이곳에」7의 경우도 그런 문제의식 위에서 쓰인 텍스트였다. 이 글에서 동시대 담론인 자기 응시, 기술, 동물 개념을 통해 이 시대의 만화가들이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동시대와 호흡하고 있음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이 만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었다. 만화계뿐만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 지독한 자극을 줄 수 있을 듯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입장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만화’와 ‘그래픽 노블’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만화는 ‘만화’ 자체이거나 ‘그래픽 노블’이었다면 이제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발명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발견이 아닌 ‘발명’된 매체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판 자체가 종이에서 ‘웹’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일 수 있는데,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이 웹 환경에 적응해가며 기존과는 전혀 다른 만화를 재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물질을 기준으로 ‘그래픽 노블’을 명명했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러한 시대도 이제는 옛날 옛적 시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화는 손가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며 읽는 방식이지만 웹툰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읽는 방식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만화’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한 권의 이야기로 완성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도 더 이상 당대의 ‘만화’를 호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많은 연구자에 의해서 연구되었으니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이 차이로 인해 ‘진지한’ 만화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책이 사라진다는 것은 작가주의 만화로 호명되었던 ‘그래픽 노블’이 물러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가주의는 주춤해질 수밖에 없고 끝내는 사라져갈 수도 있다는 위협8을 느끼게 된다.
가령, 2013년에 네이버 웹툰 연재를 시작해 2022년 7월 최근까지 끊이지 않고 연재되고 있는 〈더 게이머〉의 경우, ‘한지한’이라는 어느 한 고등학생이 일상생활 속에서 소소한 것들을 체험해가며 자신의 능력치를 게임처럼 올리는 세계관을 품은 웹툰이다. 그런데 이 만화는 레벨 올리기에만 집중한 나머지 스토리 면에서 ‘그래픽 노블’이 가진 작품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고 축적될수록 독자들은 웹툰이 이런 형태일 수 있다고 규정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문제의식을 품은 작품들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현재 네이버 베스트 도전에 응시하고 있는 김길규의 만화 〈발버둥 치다〉(2019~)의 경우, 웹툰을 만드는 주인공 당사자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험담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현재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험을 웹툰으로 발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받으며 소소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내용이 아니다. 웹툰의 형식이 나를 투사하는 과정에서 우울증이라는 보편적인 ‘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더 의미 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길규의 만화를 지켜본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생소했던 우울증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과정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너’와 ‘그’가 아닌 ‘곁’에서 함께 숨 쉴 수 있는 ‘우리들’에게 시선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큰 혁명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가슴속에 사소한 혁명 하나쯤은 품게 된다. 이처럼 ‘나’를 고백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품는 방식은 예술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누군가는 길규의 이 만화를 비주류 만화라고 낙인찍으며 인기 없는 작품을 왜 논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인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징후’는 미래의 아티스트들에게 ‘고백’으로 점철된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니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징후’ 자체다.
예를 들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체하는 2020년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한 작가 심우도의 『우두커니』(심우도서, 2020)는 치매에 걸린 부모님에 대해 기록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치매에 맞서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었고, 치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치매를 간접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으로 인식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만화는 이제 더 이상 웹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하거나 홍보할 수 있는 매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살아 숨 쉰다. 최근에 연재가 막 끝난 〈요요나나〉(2020~2022)라는 인스타 만화는 어머니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지난 과거의 고백을 털어놓는다. 엄마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이지만 지나치게 종교에 의지하셨고 이런 삶의 습관을 딸에게 강요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이 흐름을 깨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감행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평범한 스토리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만화에 공감한 것은 독자들 역시 엄마와의 관계가 쉽지 않음을 알려준다. 독자들은 이러한 작가의 경험담을 통해 자신 또한 굴레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이처럼 당대의 만화는 다양한 매체적 특징에 힘입어 진지하게 ‘나’를 노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된다.
기억해야 할 것은 문학이 심각하게 진지한 방식만을 추구했다면 만화나 웹툰이나 4컷에서 5컷 정도의 ‘인스타툰’에서는 ‘웃음’이라는 키워드로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지하면서 웃을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수준 높을 뿐만 아니라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만화가들은 이 방식을 운용한다. 무엇보다도 이들 만화는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한다는 데 있다. 문학에서 인기 있는 작품의 경우, 많은 소통을 피할 수 없지만, ‘만화’는 적극적으로 독자들과 소통을 이어나간다. 출판 만화가 아닌 인스타툰이나 웹툰의 경우 독자들은 베스트 댓글을 통해 작품에 영향을 주고, 작가는 그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그 어떤 장르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2018)의 경우 웹과 드라마는 물론 책으로도 출간되었는데, 많은 독자의 반응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댓글들을 읽어보면 수신지의 만화가 얼마나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대의 주류 담론이 페미니즘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호응은 작가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들에게도 하나의 의미 있는 축제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어떤 영역이 더 진보한 장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 명의 평론가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을 넘어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텍스트 밖 상황에 대해서는 만화와 문학이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둘은 같지 않다. 만화와 문학은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다르다. 문학은 언어 자체로 항아리를 빚는 과정에서 상상 행위가 이뤄진다면, 만화는 연출된 칸과 그림과 말풍선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상상 행위가 이뤄진다. 그러니 그것을 느끼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9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를 걷어내면 이질적인 것보다는 만나는 지점이 더 많다. 혹자는 이 ‘차이’가 가장 큰 차이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반향의 측면에서 과거 문학이 취했던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자신이 창작하고 있는 장르가 더 값지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예술의 형태가 있을 뿐이다.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의미 없다. 하지만 당대의 파급효과를 생각해본다면 가볍고 투박한 과거의 만화를 ‘만화’라고만은 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시대적인 이러한 열풍이 사그라질 때쯤에는 ‘만화’의 위상이 떨어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탄탄히 버티고 서 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최근에 출판된 만화의 표정을 잠시 만나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여러 출판사에서 ‘그래픽 노블’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 높은 책들이 만들어지거나 번역되고 있다. 여기서 ‘수준’이라고 논했지만, 웹툰이나 인스타툰이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경우 그래픽 노블이 품고 있는 상징성을 확보하게 되니 출판 환경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출판사들이 두껍고 값비싼 ‘그래픽 노블’을 출간하는 것은 영리적인 목적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희생을 감수하면서 소신 있게 좋은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도 분명히 주변에 많다. 하지만 출판사는 기업이다. 기업은 책을 함부로 찍지 않는다. 그래서 출판사는 나름대로 이 시대의 유행을 응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여성의 삶을 복권하려는 텍스트이다. 최다혜의 『아무렇지 않다』(2022), 수신지의 『며느라기』, 『곤Gone 1-2』(2019~2020), 연상호 감독의 『얼굴』(2018), 마영신의 『엄마들』(2015), 김정연의 『이세린가이드』(2021), 정영롱의 『남남』(2021), 김은성의 『내 어머니 이야기』(2019) 등의 작품뿐만 아니라, 오드 메르미오의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2020), 앨리슨 백델의 『당신 엄마 맞아?: 웃기는 연극』(2019), 『초인적인 힘의 비밀』(2021), 훗한나의 『파더 판다』(2019), 딜리 윌튼의 『스피닝』(2020), 리쿤우·필리프 오티에의 『중국인 이야기』(2017), 오사 게란발의 『시간을 지키다』(2018), 『7층』(2014) 등의 번역서들도 넘친다. 이와 관련해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출판사가 이처럼 동시대 담론과 함께 호흡하면서 해외의 작품을 번역해 출판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동시대의 유행 담론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어필이 가능하다는 것과 이러한 이유로 어떤 방식이든지 이 책들을 판매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즉, 출판 이익과 더불어 선한 의지도 동시에 달성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그래픽 노블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앞서 논한 그래픽 노블의 형식과 내용에 들어맞는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겹치는 지점이 적지 않다.
두 번째 특징으로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는 소외된 타자들이다. 당대에 페미니즘이 중요한 것은 여성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타자들을 응시했다는 데 있다. 만화책 출판과 관련해 이 범주에 들어오는 개념은 ‘동성애’ ‘동물’ ‘인간’ 등의 주제이다. 동성애와 관련된 텍스트로는 최근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근하의 『사랑하는 이모들』(2022), 자신과 아버지의 동성애에 대해 다룬 앨리슨 백델의 『가족 희비극』(2018), 누하라 쿠토의 『너의 뒤에서』(2019), 딜리 읠튼의 『스피닝』 등의 작품이 있다. 동성애는 소설가 김봉곤이 오토픽션 사건 이후 조금 주춤해졌지만, 그가 문단에서 물러나기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소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전히 동시대에 중요한 소재로 여러 작가에게 재현되거나 번역되거나 소환된다.
동물과 관련해서는 마영신의 『19년 뽀삐』(2016), 라미의 『은돌아, 산책갈까?』(2019), 김금숙의 『개』(2021), 김경의 『남은 고양이』(2020), d몬의 『데이빗』(2021) 등의 작품이 있다. 포스트 휴먼 관점에서 이제 더 이상 인간의 관점으로 옮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고 있고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가 작품의 창작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다음 인간 자체가 있다. 이 인간은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흐름에서 남성들이 생각하고 사유했던 ‘인간’ 개념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로 인해 ‘인간’들이 겪고 느꼈던 시대적인 감각이 재편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페미니즘 담론과 만나고 후자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노동 문제와 깊이 만난다. 이러한 흐름도 다양한 방식으로 출판 만화에 영향을 미친다.
다소 평이하게 논했지만, 시대적인 흐름은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기술이나 동물 인간 동성애와 같은 존재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은 자연스럽게 창작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출판사 또한 동시대 담론이기 때문에 이들의 작품을 출판해 수익을 올릴 수 있고, 담론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인 의미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출판사는 이러한 작품에 ‘그래픽 노블’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출판사가 직접 붙이지 않더라도 일부의 독자들은 자신이 구매한 텍스트가 만화를 넘어선 ‘만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그래픽 노블’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어 한다. 이 명칭이 껄끄럽다면 좋은 만화라는 명칭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자들은 항상 만화 이상을 꿈꾼다. 앞서 이 단어의 탄생을 지켜본 것처럼, 질 낮은 ‘만화’에 대응해 수준 높은 텍스트를 품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독자들은 좀 더 나은 텍스트를 갈망하고 동시대와 적극적으로 호흡한다. 축적된 문학의 힘을 외면하지는 못하더라도 ‘만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시대와 나란히 어깨동무한다.
동시대同時代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작품을 논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작품이 출현하고 있고 예술성을 품은 작품들이 얼마만큼 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당당하게 문학과 견줄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 개념에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 된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개념은 번역된 고급만화에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급만화의 기준이 모호할뿐더러 지극히 상대적인 영역에서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수준 좋은 한국 만화에 ‘그래픽 노블’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여전히 조금 낯설다. 국내에서는 만화를 넘어서고자 했던 만화를 ‘대안만화’로 부르기도 했다.10 그래서 굳이 ‘그래픽 노블’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출판사들의 명명에 의해서인지, 고급만화를 선호하는 독자들을 겨냥한 출판 마케팅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회색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독자가 만화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이 용어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고, 습관적인 발화를 통해 의미가 고정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개념에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자. 그래픽 노블은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사적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래픽 노블’ 자체를 문학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던 적이 있다. 그 이유는 2016년에 출간한 이대미 작가의 『비우』(2016)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만화에 대해서 잘 몰랐던 내가 8년 전에 이 책을 읽고 이것은 ‘문학’과 큰 차이가 없다고 자신 있게 판단한 것은 정성 들여 채색한 작가의 노력과 비우라는 한 소녀가 자신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성장 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었는데, 그 스토리가 아름다웠다. 칸과 칸 사이에서 연출된 푸른색 계열의 흐름이 인상적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할 듯하다. 더불어 하드커버였고 묵직했기에 시집처럼 소장해도 의미 있으리라 판단했다. 이와 같은 판단들이 나를 ‘그래픽 노블’의 세계로 견인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웹진 〈문화 다〉 동인 시절에 과감히 이대미 작가와 인터뷰11를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 나로서는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문학’ 잡지에 다른 장르를 끌고 와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행위 자체가 괴기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메이저 잡지에서도 그래픽 노블과 유사한 대상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지금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아무튼, 이때부터 나는 만화의 역사에 관해 공부하지 않은 채, 무게 있는 작품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호명했던 것 같다. 문학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판단해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설픈 문학보다는 칸과 칸을 넘나들며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텍스트가 훨씬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
만화漫畫
이야기 따위를 간결하고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 대화를 삽입하여 나타낸다.
사물이나 현상의 특징을 과장하여 인생이나 사회를 풍자· 비판하는 그림.
붓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영상] 문학적 구성과 특성을 지닌 작가주의 만화.
웹툰webtoon
[명사] 인터넷을 통해 연재하고 배포하는 만화. 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이다.
보편적인 논의를 위해 네이버 사전에 만화와 그래픽 노블과 웹툰의 사전적 의미를 옮겨놓았다. 이처럼 모두 형식과 성격이 다르다. 만화는 “간결”하고 “익살스럽”다. 대상을 “과장”하거나 “사회를 풍자·비판”하기도 한다. 그래픽 노블은 문학과 견줄 수 있는 작가주의 만화를 일컫는다. 웹툰은 내용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형식적인 측면을 반영해 사전적 의미가 정해진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만화의 한 형태임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가벼운 만화도 만화이고, 진지한 만화도 만화다. 웹이건 종이책이건 모두 만화다. 만화의 갱신으로 그래픽 노블이, 그래픽 노블의 내용과 형식의 갱신이 웹툰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차이가 있더라도 이들은 동일한 유전자다.
당대의 선진화된 기술로 인해 종이책이 웹으로 변화하게 되는 과정에서 ‘매체’ 성격에 따라 읽고 느끼고 공감하는 방법도 다르게 배치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그림이 있고 말풍선이 존재하는, 동일하지만 동일하지 않는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만화와 그래픽 노블과 웹툰은 단독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만화이면서 그래픽 노블적인 성격을 품을 수 있고, 웹툰의 형식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작품성을 얼마든지 내보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빈말이 아니다. 이 세 종류의 명칭으로 쓰인 작품이 영화로 드라마로 당대에 활발히 재구성되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더 나아가 독자들 또한 열렬히 반응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당대의 표정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어떤 작품이 있느냐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그래픽 노블’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당당히 이런 작품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른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어야 한다. 이 개념에 정확히 부합된 만화를 제시하지 못하더라도 수준 높은 작품에 대해 논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창작자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작품(만화, 그래픽 노블, 웹툰)을 써 내려가고 있으니 편견을 버리고 작품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많은 사람이 그래픽 노블을 시처럼 자전적인 논픽션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쓴다고 했을 때, 온전히 ‘나’를 드러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와 ‘나’가 관련이 없다고 우겨도, 자신의 흔적이 그림자처럼 스미게 된다. 논픽션이 온전할 때는 오로지 그때 그 순간만이 빛날 때뿐이다.
가령, 심우도와 박소림의 작품에서 「작가의 말」을 확인해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심우도의 경우 “〈우두커니〉는 아버지와 함께 지낸 시간 동안 겪고 느꼈던 것들을 재구성하여 만든 이야기입니다. 다 담을 수 없어 많은 부분 생략해야 했고, 이야기 흐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사실과 다르게 각색한 부분도 있습니다. 현실은 만화보다 더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12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현실’의 ‘재구성’이다. ‘나’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작품을 위해 재배치되어 다른 모습으로 변모될 수 있는 것이다. 박소림의 경우는 “첫아이를 낳고 먹이고 재우느라 좀비처럼 생활했던 시절, 뉴스에서 산후 우울증으로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여자들 이야기를 보았다. 짤막한 기사에서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거대한 고독을 끌어안고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겠다는 두려움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자들을, 나를, 껴안아주려고 『좀비 마더』를 그리게 되었다.”13고 고백하는데 이 작가의 의도는 공감과 연민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겐 이처럼 찰나의 ‘순간’만이 리얼한 삶일 뿐이다. 작품은 어떤 방식이든 왜곡된다.
끝으로 이 글에서는 마영신의 『아티스트』와 조성환의 『재생력』(2022) 데이비드 스몰의 『나혼자』(2021)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웹툰과 만화와 ‘그래픽 노블’이라는 서로 다른 예술가들의 발걸음을 추적해보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지면에 고백의 형식으로 점철된 심대섭의 『투명한 남자』(2021)를 소개하고 싶지만, 검열로 인해 그러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마영신은 웹툰의 형식으로 아티스트 시리즈를 연재했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 『아티스트』와 『아티스트 곽경수의 길』(2020)을 출간했다. 제목이 서로 다른 두 텍스트는 동일한 시리즈 연작물로 동료인 소설가 신득녕과 뮤지션 천종섭, 화가인 곽경수의 삶을 소재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웹툰 제목 자체가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다. 하지만 이 텍스트에서는 진지한 예술가들의 삶을 찾을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예술을 논하거나, 자신이 하는 예술을 위해 죽음을 응시하며 온몸으로 이행하는 존재들은 만날 수 없다. 이 웹툰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오히려 찌질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 웃기지만 실제로 그렇다. 열등감에 휩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눈치 보며 시대의 조류에 자신의 예술을 너무나 가볍게 취하기도 한다. 힘든 시기에는 서로를 도와주며 각자의 예술을 응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연민의 감정에서 이행되는 행동일 뿐, 그 이상은 없다.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서 있다고 판단되니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돕는다. 물론, 진심은 존재한다. 이처럼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를 의식하고 질투하며 자신의 예술을 쌓아 올린다. 이런 내용이 의미 있는 것은 흔히 문학에서 강조되어왔던 ‘진정성’이라든지 진지한 것과는 사뭇 다른 색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실제로 우리들은 수많은 질투와 열등감에 휩싸여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문학을 그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당대의 예술가들의 풍경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문제 삼기도 한다. 그러니 진지하게 문학을 열심히 탐구하는 동료들이 읽어도 배우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술의 영역에서 이렇게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가끔 슬퍼지게 만드는 내용을 선보인 작가가 있었던가. 우리는 너무나 진지한 것만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진지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겉모습에 신경 쓰며 문학을 쌓아 올린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만화 자체를 수준 낮은 텍스트라고 손가락질하며 ‘만화’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편견을 품고 있다면 만화가들에게 배울 수 있는 유머와 재치를 흡수하지 못할 것이다.
마영신의 이 텍스트는 질투심 많고 찌질한 예술가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낸다. 이러한 표정은 드물다는 점에서 ‘고급’의 새로운 의미일 수 있다. 리얼리즘이 시대상을 온전히 보여주는 과정에서 동시대를 박제해놓는다면 마영신은 틈이 많은 예술가의 자화상을 이 텍스트를 통해 재현한다. 그런 지점에서 이 만화의 내용은 픽션의 형태일 수 있으나, 논픽션의 모습도 섞여 있다는 점에서 값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구의 ‘그래픽 노블’과 맞설 수 있는 작품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에 그는 『엄마들』로 하비상을 받기도 했다.
그다음 텍스트는 조성환의 『재생력』이다. 이 텍스트는 봉준호 감독이 책 표사에 “굵은 선으로 꿈틀대는, 예측 불허의 유머와 처절한 폭력. 다크한 에너지로 출렁대는, 그래픽 노블의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적었다. 봉준호 감독이 왜 이 텍스트를 만화가 아닌 ‘그래픽 노블’이라고 명명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하드커버일 뿐만 아니라, 단편이 아닌 장편의 서사가 담겨 있고,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고급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자기 고백적인 성격보다는 SF적인 요소가 가미된 ‘픽션’이기에 이 용어를 사용하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에서 봉준호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출판사의 마케팅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추천사이기에 관행상 좋은 평을 써주려고 했던 것일까.
이 텍스트는 당대가 아닌 미래의 시기를 다룬다. 이곳은 생명공학자 오명준 교수의 기술로 인간을 괴롭혔던 고질적인 유전병이 모두 사라진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병이 사라지면 더 나은 삶이 펼쳐질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반대였다. 역설적으로 기대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생명’ 경시 현상이 팽배해진 것이다. 이런 부작용 탓에 오명준 교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을 제약회사에 넘기게 되고, 책임을 통감한 나머지 아무도 살지 않는 숲속에서 은둔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정작 중요시 여겨야 할 ‘생명’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명준 교수는 쓸모없는 생명을 다시 살리려고 애쓴다. 그런데 이 살리는 행위 자체가 기이하다. 프랑켄슈타인처럼 시체를 도구로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실제로 오명준 교수는 이 텍스트에서 시체를 사고 이 시체를 통해 ‘머리’와 ‘매리’라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창조한 존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의식을 갖게 된다는 점인데, 이 과정에서 오명준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실종자 수가 매년 30만이 넘고 미복귀는 4만, 미신고까지 합치면 5만이 넘죠. 많은 거 같죠? 이게 건강 보험 민영화 이전 수치예요. 근 2년간 통계 발표도 없고…… 사람을 더 이상 숫자로도 안 보는 듯해.14
오명준 교수에게 시체를 매입해주는 사람들은 실종된 사람이거나, 미신고자 미복귀자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사람(대상)들에 대해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문제 삼는다. 심지어 정부마저도 말이다. 시체를 매입하는 처지에서는 자신들이 시체를 깨끗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니 오히려 정부는 자신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장면은 “의료 민영화보다 나쁜 건 없어요.”15라는 상징적인 발화와 만나 당대의 의료 민영화 제도를 문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 민영화가 되면 공공의 책임이 저하되는 지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SF적인 재미와 함께 의료 민영화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 대중성과 함께 작품성은 물론 사회 참여적인 시선마저도 획득하게 된다. 그래서 선과 칸의 형태로 재생된 이 텍스트는 값지다. 이것을 단지 재미있는 ‘만화’로 명명하기에는 무엇인가 아쉽다.
마지막 텍스트는 데이비드 스몰의 『나 혼자』이다. 이 텍스트는 편견과 소외로 힘겹게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해 다룬다. 동성애 성향이 있는 워런 매코, 마시필드의 작은 마을에서 중국 음식을 만드는 이민자 마 아저씨, 인간은 아니지만, 장난감이나 재미 대상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동물, 아빠와 엄마에게 모두 버림받은 러셀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한다는 데 있다.
소년인 워런 매코와 러셀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은밀한 놀이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은밀한 놀이란 워런 매코가 러셀에게 2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알몸으로 러셀을 끌어안는 행위이다. 러셀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코는 자신의 바람을 소소하게 이행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러셀이 그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는 데 있다. 러셀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수락하게 되지만, 이 행위는 사후에 ‘실수’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사건 이후로 매코와 러셀은 더 이상 친구로 지내지 못한다. 러셀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를 도와준 친구가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그를 등지게 된다. 불행한 것은 러셀의 이 경험은 다른 친구들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번지게 되고 매코와 러셀은 괴짜가 되거나 조롱에 가까운 ‘호모’로 호명된다. 그러니 매코는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홀로 남는다.
안타까운 것은 러셀의 짓궂은 친구들이 매코를 동물학대범으로 덮어씌우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친구들은 동물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친구에게 치욕에 가까운 수모를 안겨준다. 범인으로 몰린 매코는 주변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주인공은 그가 동물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수’로 호명됐던 자신의 과거를 들키기 싫어 침묵한다. 이 사건 이후, 매코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만약, 러셀이 그를 위해 당당하게 변호해주었다면 이 텍스트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겠지만, 이 이야기를 만든 데이비드 스몰은 인간의 ‘실수’와 ‘편견’이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죄’를 묻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한 소년의 죽음을 다룬 이 그래픽 노블은 이처럼 큰 서사 속에 다양한 타자들을 숨겨 놓고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러셀은 어떤 방식이든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지만 이러한 설정 역시 인간이 타자들을 품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한테 상처 주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16라는 러셀의 말처럼, 뒤늦은 후회는 우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작가는 ‘러셀’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칸과 그림과 선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데이비드 스몰의 텍스트는 문학적이며 예술적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다양한 것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처럼 당대의 그래픽 노블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문자 언어보다도 매혹적인 방식으로 우리 곁에 펼쳐 보인다. 이러한 텍스트야말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정치적인 작품이지 않을까. 이것이 참여문학의 한 형태이지 않을까. 아니다. 이 표현은 잘못되었다. 만화가들에게 이 표현은 예의 없는 발언일 수 있다. 내용과 형식에 있어 문학보다 만화는 더 진보적인 영역에서 창작되고 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러니 문학과 만화 중 어느 영역이 더 값지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 마영신, 『아티스트1』, 송송책방, 2019, 146쪽.
- 2015년에 출간된 『보고(bogo)』 8호 특집은 ‘그래픽 노블을 말하다’이다. 이 특집에는 총 5명의 필자가 참여해 자신이 생각하는 그래픽 노블에 대해 논했다. 김낙호는 「그래픽 노블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로 김명열은 「로망 그라피크(Roman Graphique), 프랑스 그래픽 노블(Grapic Novel)―프랑스에서의 그래픽 노블 개념 정착과 현황」으로 한상정은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의 의미」로 이주석은 「한국 출판시장에서의 그래픽 노블 그 20년간의 흐름」으로 백정숙은 「그래픽 노블, 허명을 벗긴다」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 글의 ‘서론’ 부분은 이 평자들의 견해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직접 인용은 하지 않고 이들의 입장을 반영했음을 밝힌다.
- 황유원, 「가라앉지 않는 삶을 위하여」, 『엄마, 가라앉지 마』, 고유당, 2022, 181쪽.
- 은데디 오코라포르, 「서문」, 『킨: 그래픽 노블』, 옥타비아 버틀러 원작, 데이미언 더피 각색, 존 제닝스 그림, 박설영 옮김, 프시케의숲, 2022, 6쪽.
- 서은영, 「논픽션, 역사를 기록하는 또 하나의 방식」, 『지금, 만화』 13호, 2021, 한국만화영상진흥원, 8~15쪽. 이 글에서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며 “논픽션이 픽션을 교집합으로 두고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면, 중요한 것은 사실의 여부가 아니라 사건의 진실을 어떻게 포착해 내는가다.”라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입장은 작가의 ‘의도’보다도 재현된 ‘결과물’이 더 중요하다는 발언으로 ‘텍스트’ 자체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 문종필, 「미스틱한 권력」, 『문예연구』 112호, 문예연구사, 2022, 44~64쪽.
- 문종필, 「그래픽 노블의 역습─문학과 만화를 넘어 당당히 지금, 이곳에」, 『2021 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작 모음집』,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21, 60~87쪽.
- 세종대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는 이현세는 기존의 ‘만화(단행본)’와 ‘웹툰(웹)’의 차이를 2022년 3월 27일 OBS 방송에서 논했다. ① 출판 만화는 작가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제공하는 데 반해, 인터넷 만화는 독자와 쌍방 소통하며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즉, 매주 독자의 피드백을 받아가면서 작업한다. 쓰던 시대에서 말하는 시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문장력과 묘사력이 굉장히 중요했다면, 지금은 가독성이 가장 중요한 시대다. 독자들은 이제 더는 긴 문장을 원하지 않는다. 긴 대사가 없어지고 그림 묘사가 선명해지는 것은 그런 이유다. 독자들이 행간 이해를 어렵게 생각하니 소설을 읽지 않는 시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② 잡지의 경우, 과거에는 인기 작가를 중심으로 한 낙수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한 ‘독식구조’라는 점이 그것이다. 웹툰의 가능성에 전적으로 호의적인 이현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게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 문종필, 「여름—할머니를 상상하는 법」, 『현대시학』 608호, 현대시학사, 2022, 36~49쪽.
- 한상정, 앞의 글, 112쪽.
- 웹진 〈문화 다〉, 2020년 4월 28일(1), 29일(2), 30일(3), 5월 4일(4)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68 - 심우도, 「작가의 말」, 심우도서, 2019, 428쪽.
- 박소림, 「이 세상 모든 좀비 마더들에게」, 『좀비마더』, 보리, 2020, 311쪽.
- 조성환, 『재생력』, 미메시스, 2022, 82쪽.
- 위의 책, 82쪽.
- 데이비드 스몰, 『나 혼자』, 김승일 옮김, 미메시스, 2021, 3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