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리전사

  

*

  5시가 안 된 시간, 설은 눈이 번쩍 뜨였다. 옆자리에서 코 고는 남편을 한번 돌아본다. 침대를 벗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치며 설은 거실로 나온다.
  핸드폰을 챙겨 집을 나선 설은 여느 때보다 속도를 냈다. 경사진 도로를 내려가 상가 골목을 누비자 대로가 나왔고 대로를 건너자 지하철역이 앞을 막아선다. 철로 맞은편으로는 만둣가게, 화원이 이어지고 구둣가게, 청과물상이 연달아 나타났다. 오늘따라 설은 그 길이 낯설게 느껴졌다. 한겨울에 도착한 여름 택배물이 된 기분이랄까. 영업 전이라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상가들은 몰풍경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 늦은 밤이나 한낮에는 지나다녔어도 이 시간에 볼 일은 없던 거리였다. 일제히 걸어잠근 것으로는 모자라 틈이란 틈은 모조리 발라버린 철옹성 같았다. 덩달아 설도 꽁꽁 싸매고 옷깃이라도 여며야 할 것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한참을 걷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언덕길로 이어지고 철로가 저만치 물러나면서 공원이 끼어들어 따라왔다. 공원은 제법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한껏 빨리 걷다 보니 콧등에 땀이 솟는다. 열대야가 있는 한여름은 이른 시간에도 서늘한 맛이 없었다. 어느새 가슴으로도 땀이 차올랐다. 설은 옷섶을 잡고 아래위로 흔든다. 가슴부터 아랫단까지 달린 단추가 한꺼번에 움직이며 원피스가 출렁인다. 개갈 안 나게 바람이 인다. 설은 숲을 가로지르기로 한다.
  공원으로 성큼 발을 내딛자 소나무 향이 싱그럽다. 설은 마스크를 턱밑으로 끌어내린다. 발아래 풀숲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에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린다. 잔잔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며 이마와 볼을 간질였다. 원피스 자락이 종아리를 쓸고 가는 느낌이 좋다. 운동 나온 이들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사람이 다가오면 설은 일부러 사람과 조금이라도 먼 거리를 골라 걸었다. 저편에서도 그러는 눈치다.
  공원 숲을 빠져나오자 오솔길 같은 골목이었고 골목 안쪽으로 고물상이 서 있었다. 원래 저렇게 컸던가? 언제 봐도 삐딱한 고물상은 어둠을 마구 삼켜 팽창한 괴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고물상 주인이 뭐라고 외쳤더라? 골목을 벗어나자 사거리, 얼마 전까지 주유소이던 사거리 모퉁이는 몇 달을 가림막에 싸여 있었다.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라도 별다방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목 좋은 곳에 들어서는 대형 카페, 설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별다방 옆에 행성처럼 붙어 다니는 어느 프랜차이즈 브랜드처럼 상생할 수 있을 테니. 세상은 각자의 규모대로 각자의 길을 가게 돼 있다. 한 블록 벗어나자 저 앞으로 목적지가 드러난다.
  드디어 도착했다. 이십 분 남짓 걸어왔을까. 설은 숨이 찼다. 시원한 얼음물 한 사발이 간절하다.
  설은 카페가 있는 건물에 대고 말한다.
  유채야, 유채야. 뒷문은 저쪽으로 돌아가고 앞문을 내 앞으로 마주하렴.
  소심한 목소리였다. 흠, 흠. 설은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외쳤다. 앞문을 내 앞으로 돌려주렴. 설은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뗀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대수라고. 내뱉으며 피식 웃는다.
  설은 건물을 빙 돌아 카페로 다가간다. 덱 위로 점점이 뿌려진 새똥이 거슬린다. 뭐지? 생각하지만 설은 일단 지나친다.
  카페 문을 열자 훅, 냉기가 밖으로 끼친다.

*

  수박빙수 나왔습니다.
  설은 테이블로 다가가 빙수 볼을 손님 앞에 내려놓았다.
  우와아~!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 여자 손님은 빙수 비주얼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마가 드러나도록 앞머리를 헤어밴드로 넘겼다. 설은 핑크색 헤어밴드가 수박빙수와 조화롭다고 생각했다. 하얀 물방울무늬가 점점이 박혀 시원해 보였다. 지난번에도 같은 색 밴드를 하고 온 그 손님을 설은 기억했다.
  맛있게 드세요.
  설이 물러나자 여자는 사진을 찍고는 핸드폰을 든 채 분주하다. 이윽고 손놀림을 멈추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여자가 빙수를 한술 뜬다. 부드러운 빙수는 스며들듯 스푼 위로 저항 없이 올라앉았다. 핑크밴드는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맨 위에 얹힌 아이스크림은 놔두고 볼 가장자리의 눈가루 같은 수박을 연신 떠먹고 있었다.
  설은 무심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착착착착 공기층을 품은 수박 알갱이들이 꺼지며 내는 소리가 카페 안으로 퍼졌다. 가장자리를 스푼으로 다져 빙수 숨을 죽이더니 정수리로 옮겨가 아래로 푹푹 내리꽂는다. 몇 번을 반복한다.
  스읍 입맛을 다시고는 핑크밴드가 다시 한동안 퍼먹는다. 지켜보던 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정신없이 퍼먹던 핑크밴드가 문득 고개를 들어 카운터를 본다. 차가운 빙수를 먹느라 핑크밴드의 입술은 살짝 부풀어 있었다. 뚫어져라 보던 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시선을 준다. 그냥 외면하는 게 더 민망한 짓이란 걸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날씨가 많이 덥죠?
  그래선지 여기 빙수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죠? 저희 빙수 맛있죠?
  설은 데스크 밖으로 윗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 여기 너무 맛있어서 블로그에도 올리고 인스타그램에도 올렸어요.
  설도 봤다.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이거, 이거 찐이다. 내 10년 포스팅 경험을 걸고 장담하건대 어설프게 수박 맛을 낸 게 아니라 순도 100% 레알 수박으로 만들었단 말이다. 향이 강하지도 과하지도 않다. 설탕이나 액상과당을 섞지 않아 달지 않고 인공적이지 않다. 혓바닥에 들러붙는 맛 1도 없어 뒷맛은 개운하다. 우유와 어우러져 고소하고 부드러운 게 딱 내 취향! 얼마 전 먹은 더위를 거짓말처럼 날려버려 입맛이 되돌아오고 말았지 뭔가.─우유를 섞어 얼린 수박의 색감이 살아나게 사진을 찍고 어떤 맛인지 섬세하게 갈라 정성스레 포스팅했다. 방문자도 많은 파워블로거가 그렇게 써주니 설은 고마울 따름이지 뭔가. 핑크밴드가 블로거의 닉네임이었다.
  그렇게 핑크밴드는 한여름 정점에 카페까지 먼 걸음 해서 수박빙수 앞에 앉아 있었다.
  딸랑, 방울 소리가 들리고 손님 둘이 카페로 들어왔다. 설은 핑크밴드에게 미소를 보내고 새로 들어온 손님들을 향해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은 주문한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매장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4시가 지나자 손님은 끊겼다. 무료하게 앉아 있던 설은 폭풍 검색을 벌였고 드디어 찾아낸 핑크브러시 주문을 누르고 핸드폰을 닫는다. 시계는 6시를 가리켰다.
  설은 늘어지게 하품하다가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간다. 냉동실에서 비닐팩을 꺼내 개수통에 던진다. 수박과 우유를 갈아 얼린 기본 재료였다. 빗자루로 매장을 쓸고 걸레질을 한다. 테이블을 닦고 커피머신을 청소한다. 다시 개수대로 가 수도 밸브를 올리고 물을 틀고 가위를 찾아 들었다. 납작하게 펴서 얼린 수박빙수 재료는 그새 녹아 흐물거렸다. 비닐팩을 자르고 내용물을 쏟았다. 아깝다고 썼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핑크밴드에게 줄 빙수를 만들 때는 층층이 겹쳐놓은 냉동실 재료 가운데 맨 아래 것을 꺼내 썼다. 먼저 만들어놓은 위의 재료부터 소진해야 했지만 설은 그러지 않았다. 어제 주문받고 꺼냈을 때 살짝 시큰한 냄새가 났더랬다. 곧 찬 바람이 날 테고 여태껏 주문 속도를 보면 그것까지 쓸 일은 없었다.
  지난해 이맘때는 얼린 빙수 재료 두 통을 몽땅 버리느라 속이 이만저만 쓰린 게 아니었다. 미련 맞은 일이었지만 이게 다 비용 치르고 배우는 운영 노하우려니 생각했다.
  카페를 운영하면 다들 수박 열 통쯤은 쓰는 거 아냐?
  가게를 오픈할 때 품은 막연한 생각이었다. 여름 전략 상품을 팥빙수, 수박빙수로 정하고 개업 초기에 이렇게 저렇게 재료를 소비해가며 개발한 빙수는 좋은 재료가 최대 강점이었다. 시댁에서 농사지은 팥을 공수해다 재료로 쓰고 수박은 우유와 함께 얼려 갈아서는 최대한 식감을 살려 다시 얼려놓았다. 무턱대고 수박 두 통을 빙수 밑 재료로 만들어서 냉동실을 채워두고 든든했었다. 벼락부자를 꿈꾼 건 아니지만 여름 내내 그깟 수박 두 통을 못 팔 거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
  지난해와 다른 점이라면 올해는 재료를 한꺼번에 장만해놓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지금 또 버리고 있었다. 오늘 다녀간 파워블로거는 제비 한 마리에 불과했다. 파워블로거 한두 명 다녀간다고 카페가 번창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은 몸으로 체득했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몰고 오지는 않는다. 그런 서포터즈 백 명은 되어야 별다방이 사거리에 들어서는 마당에 이런 동네 장사로 살아남을 것이다. 몇 년 걸리려나? 그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생각지도 않은 기회를 잡아 차린 카페였으니 설이 아예 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 잘하고 있는 거지?
  설은 온갖 날들 동안 굳건한 출입문을 쳐다보며 그렇게 떠올리곤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 혁이다. 사회적 거리두리와 영업시간 제한으로 저녁이면 이 거리에 아예 인적이 끊겼다. 멍 잡으며 빈공간을 지키느니 집에 가자 싶어 한두 번 가다 보니 어느새 7시면 문을 닫고 있었다. 이렇게 해도 되나 하다가도 아침에 일찍 열고 저녁에 일찍 닫으며 손님들을 내 사이클에 맞추겠어, 되도 않은 생각을 했다. 나 잘하고 있는 거지? 아침 8시에 열고 저녁 7시에 닫으며, 때로는 6시에도 닫으며 내내 꺼림칙한 중이다. 나 잘하고 있는 건가? 남편도 그러려니 하며 퇴근길에 설을 태우러 왔다.
  종일 쌓아둔 설거지를 해치우는데 혁이 가게로 들어왔다.
  이것만 씻으면 끝나.
  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설거지를 해치우고 있었다.
  아침에 보니까 샌드위치 간판 쓰러져 있던데…….
  혁은 지금 입간판을 말하고 있었다. 샌드위치 메뉴를 세로로 인쇄한 포스터는 사람 키를 넘는 사이즈라 멀리서도 잘 보였지만 잘 넘어졌다.
  어? 그걸 어떻게 알아?
  입구에 설치한 덱 옆에 얼마 전부터 하루 24시간 세워두고 있었다. 설은 수세미질 하던 손길을 멈추고 잠시 속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다행인가, 남편은 아침에 카페를 다녀간 것이다.
  어제 뭘 두고 가는 바람에.
  평소라면 뭘?이라고 물었겠지만 지금 설은 새벽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새벽에 무슨 바람이 불어 눈이 번쩍 뜨이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 이 시간을 대비한 행동이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침에 들른 남편이 카페 문을 연 순간 냉동고라 해도 될 정도로 빵빵하게 돌아가는 매장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면 지금 저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잔소리 대마왕에다 좀팽이 남편 아니던가. 오늘 새벽 일을 남편이 알고 나면 석 달 열흘 뒤끝 작렬할 사건이었다. 실수로라도 오늘 일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지, 설은 마음에 새긴다.
  여보, 에어컨 좀 꺼.
  설은 수도밸브를 내리고 마른행주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메뉴 입간판을─밖에 세워둔 또 다른 간판이다─안으로 들여놓은 남편이 리모컨을 들어 허공에 대고 눌렀다.
  설은 가방을 들고 앞장서 나선다. 남편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블록 두 개가 샌드위치 간판을 완강히 받치고 있었다.

*

  먼저 설은 크림모카와 솔티큐브라떼, 캐러멜마끼아또를 만들어 테이블로 내간다. 석 잔 다 크림을 올린 음료라 테이블이 더 풍성해 보였다. 손님들도 그렇게 느꼈는지 기분 좋은 반응을 한다.
  맛있게 드세요.
  설은 빠르게 주방으로 돌아와 주문서를 지우고 다음 메뉴를 확인한다. 브런치 메뉴와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이다. 인덕션 스위치를 터치하고 팬을 올린 뒤 냉동실에서 새우를 꺼낸다. 빵은 전자레인지에 넣어 해동 버튼을 누른다. 전자레인지 작동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카페 문이 열리며 방울 소리가 겹친다. 홀을 쳐다보는 순간 설은 머릿속이 엉키려 한다. 손님 두 사람이 카운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설은 기계적으로 인사했고 전자레인지 작동음이 멈추는 소리에 빵을 꺼내고는 달궈진 팬에 버터와 새우를 올린다. 빵에 치커리와 토마토를 올리다가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 카운터로 간다. 주문을 받으려던 설은 지글거리는 소리에 놀라 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설은 주문을 받으려다 멈추고 조리대로 돌아간다. 이렇게 허둥대서야…… 설은 고개를 젓고는 새우를 꺼내 빵에 올린다.
  리코타치즈를 듬뿍 올리는 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침착하자, 침착해. 설은 소리 내어 말해본다. 접시에 브런치 메뉴를 올리는 중에도 설의 손은 여전히 떨렸다. 이제 됐어. 가장 복잡한 메뉴를 해치운 것이다. 이즈음에서 주문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손님들도 덜 짜증스러울 것이다.
  먼저 테이크아웃 주문하고 기다리던 사람 셋과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 엉켜 카운터 앞은 많지도 않은 인원으로 바글거린다. 그 광경을 보자 설은 다시 진땀이 났다. 그새 손님이 더 불어난 것도 같았다. 낯선 손님 한 사람, 그 뒤로 낯익은 손님 한 사람이 언뜻 보인다. 누구더라?
  주문을 챙긴 설은 뭔가 빠뜨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대로 움직였다.
  설은 브런치 메뉴와 음료를 완성해 내놓는다. 고소한 새우 냄새가 카페 안으로 퍼지자 사람들 시선이 모두 그리로 향했다. 조리대로 돌아서는 설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다시 눈에 띄었고 설은 그게 누군지 알아챈다.
  설은 나머지 주문 메뉴를 처리했고 한바탕 시끌벅적하던 매장은 텅 비었다. 그사이 설은 서서히 진정되었고 이제 완전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게 다 매출액 때문이었다. 설은 지난 1년 동안 메뉴별로 샌드위치를 만들다가 말아버렸다. 오늘처럼 북적거리는 시간을 대비한 일이었고 만든 샌드위치 유통기한은 이틀로 잡았다. 팔리든 안 팔리든 메뉴별로 두 세트씩은 만들어 놓았는데 그런 날이 이어지다 보니 재료값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이 두려웠지만 누적되는 마이너스 매출이 두려움을 끝내 이겨 먹었다. 장사가 안되던 올여름에 남편과 함께 먹어 치우느라 이제 샌드위치의 ‘샌’ 자만 들어도 입맛이 달아났다. 커피 몇 잔 팔고 문 닫는 날은 한 잔도 못 팔았다는 어느 카페 주인의 하소연을 읽으며 이웃의 안녕을 빌었다.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던 설은 그제야 뭔가 하나 빠뜨린 기분이 다시 들었다. 낯익은 손님한테 주문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냥 돌아갔구나. 누구였더라? 떠올리다가 그만둔다.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이런 날은 소중하다. 1년 넘게 희망고문 하며 설을 버티게 해주는 희귀한 시간이었다. 잘할 날이 오겠지. 어떤 일이든 시작은 있는 법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설은 하품을 하며 혼잣말을 하고 시계를 본다. 그렇지, 4시. 습관이 무섭다고 아무리 바쁜 날도 그 시간이 넘으면 손님들 발걸음은 뚝 끊겼다. 기지개를 켜던 설은 주방으로 들어가 조리대를 살피고는 카운터로 갔다. 카운터 주위에도 없는 것을 확인한 설은 바닥을 내려다보다 거기 떨어진 링을 발견한다. 정신없이 일할 때 걸리적거려 빼둔 반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반갑게 주워 든 설은 반지를 약지에 밀어 넣는다.

*

  오늘 설은 다른 코스를 거쳐 카페로 가고 있었다. 어젯밤에 문자음이 울리고서야 포스기에서 돈 빼가는 날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설이 거래하는 은행은 집 가까운 곳에 하나 있었고 다른 한 곳은 카페 근처의 ATM기가 없어지는 바람에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멀었다. 잔액을 채운 설은 카페로 향했다. 지급일에 맞춰 이체해 놓았는데 엉뚱한 곳으로 돈이 빠져나간 것이다.
  카페를 하면서 굵직한 대금 치를 일 외에 온갖 곳으로 지출할 자잘한 구멍투성이였고 설은 생돈 들어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매달 치를 값이었으므로 엉뚱한 곳이 아니라 마땅한 곳이긴 했다. 주문계산프로그램인 포스기가 어젯밤 11,000원 빼갔고 다행히 주머니에 현금이 있어서 오늘 카페 가는 길에 메울 수 있었다. 내일 음원료로 빠져나갈 8,000원까지 합쳐서 넣어두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는 주머니에도 다른 통장에도 없었다.
  설은 9시가 다 돼 카페에 도착했다. 한여름이 지난 어느 날부턴가 설은 8시가 넘어 문을 열고 있었다. 어차피 8시에는 손님이 없었고 아침부터 샌드위치를 만들어둘 일도 없었으며 쿠키나 스콘이 다 떨어진 날은 일찍 와서 구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것들은 정해놓은 패턴 없이 미리 준비하기도, 그때그때 만들기도 했다.
  한여름 지나고 손님들이 그나마 늘었다. 너무 추우면 카페에 손님이 없지만 너무 더울 때 손님이 없는 건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듯했다. 이건 순전히 설의 감이었다. 설에게 데이터는 팬데믹 1년 차 여름과 2년 차 여름밖에 없긴 했으나 그걸 부인할 다른 그럴듯한 이유를 끌어올 수 없었다. 설은 장사가 안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설이 자꾸 이런저런 생각에 매달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인간은 설득할 이유를 찾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동물이었다. 소비지원금이 나올 때 내심 기대도 있었건만 그냥 생긴 공돈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커피나 샌드위치를 먹기보다는 좀 더 대범하게 소비하는 게 틀림없었다. 설의 집만 하더라도 가족들이 돌아가며 한턱 쏘는데 주로 고기나 회를 골랐다. 지글지글 속을 태우며 이유를 찾던 여름, 설에게는 그런 여름이었다.
  그 여름 끝물부터 설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식구 수대로 스웨터를 뜨고는 한동안 쳐다보지 않던 일이다. 개업하기 전, 설은 뜨개질을 해댄 적이 있다. 카페를 시작한 첫해 겨울에도 뜨개질을 하다가 중단했다. 오픈한 첫해 여름부터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으나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손님은 점점 줄어만 가던 때였다. 팬데믹으로 방역을 조이고 늘이기가 반복되면서 단골을 확보할 새도 없었다.
  설은 질 좋은 실이 눈에 띄는 대로 주문해 무료한 공간에서 스웨터를 뜨는 족족 식구들에게 다시 한번 돌렸다. 이어 꽈배기 무늬에 도전해 뜨다가 채 한 바퀴를 못 돌고 중단했다. 바빠져서가 아니라 손가락이 아파서 그만뒀다. 류머티즘 진단을 받았고 설은 양방에서 한방으로 병원을 옮겨갔다. 한의사는 손가락 관절마다 두꺼운 침을 사정없이 찔러댔고 그래서인지 증세가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한여름을 보냈고 찬바람이 날 즈음 설은 뜨개질할 마음이 다시 치밀었다. 장롱에 처박아둔 꾸러미를 꺼냈다.
  재미있을 거 같아요.
  노트북 작업을 하던 손님이 말을 걸었다.
  어, 재미있지는 않고요…….
  설은 다음 말을 고르며 여자가 앉은 테이블을 건너다보았다. 여자가 주문한 메뉴는 아직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온 여자는 대뜸 수박빙수를 주문했다. 재료를 다 소진해 팥빙수를 권했고 여자도 흔쾌히 동의했다. 냉동실에서 팥빙수 재료를 꺼내던 설은 기분이 가벼워졌다. 마지막 팥빙수 재고였다. 수박빙수도 중간에 버린 뒤로는 나머지 재료는 다 팔고 없었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무심히 따라부르던 설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어이없으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던 것이다. 설은 남은 재료들을 듬뿍 올려서 여자에게 팥빙수를 내갔다.
  맘에 드는 실이 있으면 습관처럼 지르고는 이렇게 뜨고 있네요. 설은 말했다.
  저도 그냥 시간 보내기 좋겠다는 뜻으로 말한 건데…….
  아주 가끔씩 와서 두세 시간 노트북을 두드리다 가는 여자다. 여자는 한 시간쯤 지나 샌드위치나 음료를 하나 더 시키곤 했다. 테이블이 네 개밖에 안 되는 좁은 홀이라 손님이 북적거리면 그런 진상손님이 없겠으나 그럴 일은 없었다.
  팥빙수 어떤가요?
  좋아하지도 않는 메뉴를 괜히 권한 건가 싶어 설은 물었다.
  저 팥 들어간 것도 좋아해요. 근데 찬바람도 나고 양도 많아서 맛있지만 혼자 다 먹기는 좀 그래요.
  여자는 스푼을 들어 한 술 떠서 홀짝인다.
  여자가 간 뒤 설은 무념무상으로 뜨개질을 했다. 스웨터를 열 개도 넘게 뜨는 동안 설의 실력은 휙휙 늘었다. 설은 식구들이 입은 결과물을 볼 때마다 흐뭇하면서 속이 쓰렸다. 까먹는 매출액만큼 늘어난 실력이었다.
  첫 스웨터를 뜬 설은 더 이상 싸구려 실을 쓰지 않았다. 엄청난 코를 꿰느라 엄청나게 시간을 들인 결과가 정전기 팍팍 이는 물건이라 생각하면 아까웠기 때문이다. 짬 날 때마다 검색했고 질 좋은 실을 보면 대뜸 뜨개질할 마음으로 꿈틀거렸다.
  저, 저기요.
  설은 깜짝 놀라 쥐고 있던 바늘을 놓친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모를 손님이 설 앞에 서 있었다. 고물상 주인이었다. 아, 맞다! 그 얼굴을 보자 설은 퍼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요즘 들어 설의 기억은 눈에 띄게 오락가락했다.
  쇼케이스 냉장고 앞에 선 고물상 주인이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문을 연다.
  제가 샌드위치를 사고 싶은데…… 어떤 맛인지 잘 몰라서요.
  쇼케이스에는 어제 만들어둔 샌드위치가 진열돼 있었다. 찬바람이 나고 설은 다시 샌드위치를 만들어 진열하고 있었다.
  세 가지 메뉴를 설명한 뒤 설은 이것저것 물어보고 바질과 치킨 넣은 샌드위치를 권했다. 고물상 주인 표정이 밝아졌다. 곤란한 상황을 모면했다는 듯 설의 권유를 반겼다. 마, 이런 게 주인의 카리스마 아니겠나? 설은 속으로 외쳤다.
  샌드위치를 꺼낸 설은 잠깐만요, 말하고 커피 한 잔을 내리며 물었다.
  근데 사장님네 가게 이름이 뭐예요?
  커피머신 소음에 잘 안 들리는지 고물상 주인이 눈빛으로 되물었다. 설은 컵에 홀더를 끼워 내밀며 같은 말을 반복하곤 이렇게 덧붙인다.
  지난번에는 그냥 가셨죠? 제가 정신이 없어서 나중에 주문받으려고 보니 사라지셔서.
  아, 네. 커피를 받아든 고물상 주인이 말했다.
  저희 가게는 고물상이에요, 그냥 고물상.
  아, 네. 설은 웃으며 그냥 고물상에게 봉투에 담은 샌드위치도 내민다. 그게 아니라, 고물상도 여러 곳이 있으니까 거기 상호를 붙이잖아요. 설은 말하려다 말아버린다. 그냥 고물상이라면 고물상인 거지,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사장님께는 고마운 게 많아요. 가게가 옆이라면 벌써 커피 한 잔 날라다 드렸을 텐데.
  카페 인테리어 할 때 기대 없이 고물상에 들러도 설은 거기서 필요한 재료를 발견하곤 했다.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은 그의 작품이다. 새가 종을 물고 있는 모양인데 투박한 솜씨가 빈티지 감성을 자극했다. 출입문 옆에 설치한 에어컨 실외기 박스도 그의 고물상에서 해결했다. 그는 가게 안팎 여기저기서 헌 나무들을 그러모았다. 빗살 모양으로 짜서 흰 페인트를 칠하자 이번에는 모던 감성이 물씬했다. 시중에서는 자그마치 네 배나 높게 값을 불렀다. 무엇보다 카페 출입구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어줬다. 나중에 입주한 바로 옆 가게 펫미용실도 그 모양을 본떠 설치했다.
  뭘요, 예상한 대로 짧은 대답이 건너온다. ‘그냥 고물상’은 많지 않은 주인의 말수가 무색하게 온갖 것이 무한대로 있는 별세계였다. 설이 본 고물상은 그랬다.
  나가려던 고물상이 돌아보며 말한다. 재미있어 보이네요? 설이 방금 집어 든 뜨개질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뭐, 재밌어요. 설은 어깨를 으쓱했다.
  설은 바늘을 양손에 쥐고 코를 이어갈 참이었다. 앗!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짧은 비명이 들렸다. 문으로 들어서던 손님이 한쪽으로 비켜섰고 고물상이 카페를 빠져나간다. 손님은 옆집 펫미용실 주인이었다.
  괜찮아? 설이 물었으나 출입문을 쳐다보느라 펫미용실은 반응이 없었다.
  괜찮아? 카운터로 다가오는 펫미용실에게 설은 한 번 더 물었다.
  웬일이래요? 이런 데를 다 오고.
  펫미용실은 출입문을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대답을 못하는 설을 보며 펫미용실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근데 소문 못 들었어요?
  에이, 난 안 들을래.
  설이 손을 내젓자 펫미용실이 말한다. 뭐 없어진 거 없어요?
  특유의 건들거리는 자태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언니, 잘 보세요. 나중에 큰코다치지 말고. 그러고는 설을 쳐다본다. 펫미용실의 저 건들거리는 가벼운 자태가 주위 사람들과 잘 지내는 비결이었다.
  설은 그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커피 마실 거지? 펫미용실을 보며 원두 분쇄기를 눌렀다.

*

  설은 아침에 카페 문을 열자마자 분갈이를 했다. 우유박스가 없어진 걸 확인하고 치밀던 짜증이 작업 속도를 높여주었고 코로키아를 토분으로 옮기고 흙을 보충할 즈음 짜증은 누그러들었다. 설은 토분에 물을 주는 김에 덱까지 말끔히 물청소를 해버린다. 지난번에도 새똥 때문에 물청소를 했는데 오늘 또 덱에 새똥이 뿌려져 있었다. 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나 싶어 간판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손님이 많았다면 쇼윈도와 붙어 있는 덱에도 간이 테이블이나마 두어 개 놓고 여름 손님을 받는 자리로 이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화분 몇 개 놓고 벤치를 기역 자로 둘러놓았다. 밤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지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곤 했는데 요즘 들어 새똥까지 보태졌다. 설은 분갈이 도구를 정리해 다용도실에 갖다 둔다.
  싱싱하던 마오리 삼총사가 하나둘 스러지는 모습은 무슨 전조처럼 느껴졌었다. 지난해 초여름, 꽃을 피운 핑크브러시의 아련한 자태가 설은 지금도 눈에 밟힌다. 모헤어 실뭉치처럼 가늘고 폭신한 질감의 연분홍빛 꽃은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오픈하고 좋은 기운이 몰려오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설렜다. 꽃이 지고 이파리마저 말라버린 뒤 너무 물을 안 준 탓이란 걸 알았을 때는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른 전사들도 그렇게 망가졌다. 다 자란 외목대가 훨씬 고고하고 위용 있어 보여 쌍목대를 억지로 갈라놓은 게 문제였다. 그때 설은 서툴면서 의욕만 앞섰다.
  뭐야? 주인과 싸우다 전사한 거네? 토요일 알바로 고용한 막내딸 하니가 장난스레 던진 말이었다. 설은 가볍게 눈을 흘겨주었지만 마음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틈날 때마다 검색했고 건강해 보이는 것들로 점찍어 하나씩 사들였다.
  카페를 하려면 지겨워질 때쯤 인테리어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 방문한 손님이 인스타그램에 올릴 마음이 들도록 구석구석 재미있는 소품도 배치해야 한다. 식물은 카페 유채의 기본 콘셉트였다. 장사를 한다는 것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이란 걸 설은 배워가고 있었다.
  설은 물이 충분히 빠진 코로키아를 카페 안으로 들여놓는다. 마오리전사들의 자리는 출입문 옆에 확보된 공간이었다. 바람도 햇빛도 모두 있는 자리였다. 설은 코로키아와 같이 주문한 습도계를 소포라에 꽂는다. 이로써 마오리전사 완전체로 다시 새로운 진용을 꾸리고 방비까지 단단히 해놓았다. 과업을 완수한 기분에 화장실로 향하는 설의 발걸음도 절로 가벼웠다. 해안 절벽에 사는 마오리 소포라나 마오리 코로키아, 마오리가 아니면서 마오리와 다름없는 핑크브러시까지, 아주 지랄맞게 까다로웠다. 직사광선을 싫어하고 수분은 필요하지만 건조하고 서늘하게 환경을 유지해주어야 한다. 에어컨과 히터가 돌아가는 넓지 않은 카페에서 키우려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보란 듯이 키워내겠어. 핑크브러시 꽃도 피워내겠어. 화장실 문을 나서며 설은 주먹을 쥐어본다.
  겅중거리며 한달음에 달려온 설은 카페 문을 밀고 전사들에게 흐뭇한 시선을 준다. 괜히 한 번 더 자리를 잡아주고 허리를 펴던 설은 화들짝 놀란다. 카운터와 주방으로 통하는 간이 칸막이 아래서 사람이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다. 흡, 밖으로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설의 입에서 피식 새어나온다.
  아니, 사장님 거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설의 목소리는 지레 높아졌다. 고물상 주인이었다. 설의 뜨개질감을 들고 있었다.
  저는 그게 아니라 그냥…… 이게 궁금해서……,
  설은 그의 손에 들린 뜨개질감을 휙 낚아챈다. 그의 말은 변명거리도 못됐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은 손님은 들락거릴 수 없는 구역에 있던 것이다. 설은 용무가 무엇인지, 이를테면 주문을 하겠냐, 무슨 일로 오셨냐 같은 말 따윌랑 묻지 않고 고물상을 쳐다봤다. 민망했던지 고물상은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카페에서 나갔다.
  고물상이 쫓겨나듯 사라진 뒤 설은 종일 불쾌했다. 침착하다가도 불쑥 올라올 때는 서성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럴 때마다 손가락이 허전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우유박스가 안 보이더라니 이런 상황까지 벌어졌다. 우유 업자가 배달 용도로 제공한 박스는 분실하면 돈 주고 사야 했다. 설은 손수레 끄는 할머니가 의심스러웠다. 괜한 의심이 아니라, 밖에 내놓았지만 누가 봐도 버리는 물건이 아니고, 데크 한쪽에 잘 둔 것을 시침 떼고 가져간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설에게 우유박스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CCTV 달아야 할까 봐. 우유박스가 없어졌지 뭐야.
  혁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 설은 말했다. 새가 와서 자꾸 똥을 싼다는 하소연도 하고 여름에 잃어버린 팔찌 얘기도 다시 꺼냈지만 반지 얘기는 참았다. 액수가 적은 물건을 잃어버리고 잔소리를 듣는 것과 18k 금반지를 잃어버린 뒤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은 압박감이 달랐다. 혁은 설이 물건을 깜박깜박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할 게 뻔했다.
  잘 생각해봐. 자주 오락가락하던데 엉뚱한 데 두고 그러는 거 아냐?
  금속 재질이라 여름에 즐겨 차던 팔찌도 싼 물건이 아니긴 했다.
  글쎄? 그날은 그걸 빼논 기억도 없는데.
  설은 문득 카운터 아래 바닥에서 발견한 반지가 떠올랐다. 그때도 언제 반지를 빼놓았는지 통 기억에 없었다. 혹시? 설은 아침에 다녀간 고물상이 마음에 걸렸고 펫미용실의 말이 떠올랐다. 그 정도면 빼박 정황 아닌가? 그런 생각이 고개 들었지만 아, 아닐 거야. 설은 서둘러 머리를 저었다.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고물상 주인의 인상이 깨져버리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이 무슨 집착일까 싶었지만 설에게 그것은 마오리전사를 지키는 마음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지식하면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고물상에게는 그 말이 딱 어울렸다―를 가진 사람이 주변에서 수근덕거리는 대로 손버릇 나쁜 사람일 리가 없다고 설은 마음을 다잡는다.

*

  설은 한바탕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그나마 일이 익었다고 여유가 생겼지만 백신패스 시행 첫날이라 혼란스러웠다. 인증 과정에 자꾸 에러가 나면서 주문받고 브런치와 음료 만들고 큐알코드 인증까지 꼼꼼히 간섭하려니 혼자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손은 그대로인데 일만 는 셈이다.
  어제 보건소 직원 두 사람이 방문했을 때는 아참, 내가 요식업을 시작했지, 설은 새삼 실감했다. 그들은 관련 포스터를 들고 와서 실내에 부치라고 내놓았다. ‘지침위반 시 벌금 3백만 원’이라는 문구에 설은 등골이 서늘했다. 팬데믹 덕분에 받아본 적 없는 위생지도 단속반과 그런 식으로 대면한 것이다. 그들이 불시방문하면 가게 주인은 눈물 콧물 쏙 빠질 수밖에 없다. 부주의하게 놔둔 유통기한 지난 물건 하나만 발견돼도 단속반은 무섭게 몰아쳤다. 설은 1년여 토스트집에 취직했을 때 그 서슬을 경험했다. 출퇴근 손님으로 북적거리던 토스트집은 직원을 너덧 둔 잘 나가던 가게였고 어떤 루트를 통하는지는 몰라도 단속반이 언제 나오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손님들이 막 빠지고 설은 한숨을 렸다. 환기시키려고 출입문을 활짝 열고 흑당라떼 한 잔을 진하게 만들었다. 한입 홀짝이는데 펫미용실이 들어왔다.
  근데 오늘은 치커리가 좀 시든 거 같던데요.
  그 말은 그전까지는 항상 치커리가 싱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펫미용실은 점심으로 주문한 샌드위치를 말하고 있었다. 마침 채소가 떨어져 남은 재료 탈탈 털어서 만들었더니 귀신같이 알아채고 하는 품평이다. 바쁜 거 같아 가게에 가져다주면서 커피 한 잔도 내려주었더니 답례로 롤케이크 두 조각을 가져왔다.
  치커리 양도 좀 적고요.
  물가가 좀 올라야 말이지. 가격을 올려야 할까? 고민이네.
  그냥 넘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 설도 의견을 구하는 어투로 사정을 알렸다. 단골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상태에다 하루 서너 마리만 받으면 문을 닫는 펫미용실은 모를 고충이었다. 그래도 이웃으로 오고 가려면 그 정도쯤은 넌지시 알려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큰일이네요.
  펫미용실이 설의 말을 받았다.
  달걀을 시작으로 우윳값, 채소값, 원두값, 식빵값까지 안 오른 게 없었다. 그나마 오는 손님들 끊길까 봐 오르는 대로 다 메뉴에 반영할 수도 없었다.
  퇴근길?
  네, 오늘은 좀 늦어졌어요.
  펫미용실이 내민 손등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조심해도 물리고 발톱에 긁히느라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예약 손님만 받아 끝나는 대로 퇴근한다지만 강아지를 상대하는 직업도 녹록지 않았다.
  잘 먹을게.
  펫미용실이 나가는데 문밖으로 누군가 어른거렸다. 펫미용실은 문을 민 채 서서 설을 봤다. 나와보라는 뜻 같았다.
  고물상 주인이었다. 우유박스를 들고 서 있었다.
  이거…… 여기 물건 맞죠?
  고물상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유박스에는 유성펜으로 ‘유채’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 거 같아서 제가 따로 챙겨놨었죠. 우리 가게에 드나드는 할머니가 있는데 사람이 좀 사납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데…… 알아듣게 얘기해놨으니 그냥 넘어가주세요.
  설이 들어본 고물상이 하는 말 가운데 가장 길었다.
  네, 고맙습니다. 그날은 제가 반지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기분이 영 그래가지고 사장님께 다짜고짜 화를 냈지 뭐예요.
  한편으론 마음이 누그러들면서도 설은 마음에 담아둔 말을 털어내듯 하고야 만다.
  그렇군요. 그것도 찾게 되겠……죠.
  고물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네? 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설의 반응이 과했는지 고물상은 제 말은…… 곧 찾았으면 좋겠다구요,라고 말했고, 설은 네에,라고 반응했지만 그 말과 그 말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다. 다만 어딘가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은 들어서 설은 뒷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고물상은 카페를 나갔다.
  고물상이 가고 설은 겨울 신메뉴를 만들었다. 스프를 만드는 동안은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뭔가 찜찜했지만 할 말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괜한 말을 했나, 상반된 생각이 오가며 엎치락뒤치락했던 것이다. 유채의 콘셉트에 맞게 호박을 재료로 스프를 만들고 호박을 재료로 쓰는 김에 호박크림을 넣은 샌드위치까지 만들어보았다.
  마침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이웃인 야식배달업 사장이 들어왔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 사장은 저녁에 출근했다. 올봄에 개업하고 한여름까지 죽을 쑤더니 지금은 배달앱에 맛집으로 등극했다. 직원과 알바생을 늘이고 청년 사장은 일이 많은 저녁에 출근하고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는 청년 사장에게 설은 유채샌드위치를 내놓으며 품평을 부탁했다. 청년 사장이 엄지척을 해 보였다.
  여기 음료들은 뭔가 밍숭맹숭해요. 복숭아티는 더 달아야 하고요, 천연재료만 써서는 안 돼요. 아무튼 더 달고 더 강하게.
  여름에 청년 사장이 묻지도 않은 품평을 했을 때 설은 좀 빈정이 상했지만 결국 그 말을 반은 따랐다. 대부분 천연재료를 유지하되 아이스티는 맹숭하지 않도록 액상과당을 써서 더더 달게 했다.
  그도 설에게 마음 상한 일이 있었는지 여름내 발을 끊었다가 최근 다시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설도 모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상가가 공평하게 전력을 배분하지 않고 처음 들어온 가게에서 상한선 없이 끌어다 쓰게 놔뒀다. 그 바람에 초기에 들어온 유명피자집이 전력을 반이나 선점했다. 운 좋게도 설의 카페는 먼저 사장이 전력을 증설해두었고 그걸 알고 나눠달라는 청년 사장의 청을 설은 거절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뭉텅 나눠줄 수는 없었다.
  요즘 그 집 맛있다고 소문났던데요. 설이 말하자 청년 사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카페를 나갔다. 새로 온 야식배달집 알바생이 유채에 한 번 오더니 계속 들락거렸고 급기야 청년 사장도 오늘같이 설의 카페를 다시 찾고 있었다.
  설도 야식배달집처럼 배달앱을 이용할까 생각한 적 있다. 애들도 주장하고 청년사장도 권하니 가만있을 수 없었다. 팬데믹 시기에 오는 손님만 받는 일이 나태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를 팔아야 그 비용을 감당하려나 따져봤다. 배달 수수료가 있다고 상품값에 다 반영할 수도 없고 많이 팔자고 알바생을 고용하면 그만큼 매출이 늘지 따져볼수록 회의적이었다. 이런 가게에서 장사가 되든 안 되든 치르는 비용처럼 무서운 존재는 없었다. 알바생 시급이 그랬다. 그런 돈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설은 그냥 혼자 꾸려나가기로 했다.
  퇴근시간에 혁이 전화를 한다. 설은 겨울 메뉴를 만들어봤다는 말을 한 뒤 먼저 퇴근하라고 한다. 혁은 귀가하면 설거지와 집 안 청소를 했고 주말에는 빨래를 해서 딸내미들 속옷까지 얌전하게 개켜놓았다.
  카페 영업을 밤 9시까지 연장한 지도 일주일이 돼간다.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손님이 없는 공간에서 설은 화분의 습도를 확인하고 마오리전사들에게 물을 준다. 습도계는 쇠꼬챙이에 엄지손톱만 하게 달려 숫자를 표시하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설은 화장실 가는 김에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킨다. 수돗가에서 대걸레를 빨고 변기가 지저분해 청소까지 해둔다. 화장실 청소는 설의 몫일 때가 많았다. 맞이하는 손님 유형을 생각하면 공유지의 비극을 탓할 수도 이웃에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은 투덜거리며 대걸레를 들고 카페로 돌아오고 있었다. 카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달렸고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는 시커먼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까마귀였다. 바닥을 차고 오르는 까마귀 부리에는 무언가 물려 있었다.
  어, 어 설이 소리치는 사이 까마귀는 높이 날아올랐다.
  소포라에 꽂혀 있던 습도계가 온데간데없었다. 소포라는 코로키아 화분에 의지해 기우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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