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지나간 5분 외 1편

  

그렇게 지나간 5분

  

  대상포진 예방주사 무료로 맞을 수 있는 기간이 다 끝나간다며
  햇살같이 따듯한 음성 하나가 전화기 저편에서 닫힌 마음의 빗장을 푼다

  창밖을 보니
  바람이 서쪽으로 부는지 서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눈이 갈피 없이 내린다
  그 어지러운 눈 속에 키메라1에서 튀어나온 페가수스가
  지구의 난세를 평정할 영웅을 태우고
  하얀 날개를 펴고 다리를 끌어올리더니 방향을 가늠하고 날아간다

  잠시 꿈을 본다

  눈 속에 내가 있다
  수포처럼 눈이 온몸에 와 달라붙는다
  체온을 물고 늘어져 줄줄이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것들이 다시 얼어 눈이 되고
  점점 쌓여가는 눈이 아득하다

  혼자 가는 미술관2은 쓸쓸하다
  곁에 있어야 할 너를 생각하는 순간이다

  꿀벌과 천둥3은 어떤 관계일까
  아주 아득한 꿀벌들의 소리를 기억해낸다
  지난여름에 들었던 천둥소리도 기억해내지만
  내 오감과 감성은 음악의 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꿀벌과 천둥 속에서는 라흐마니노프가 춤을 추고 있는데

  카톡이 왔는데 소리만 눈 속에 섞여 휘날리고
  순간 대상포진의 지독한 통증이 옆구리를 관통한 듯
  한 마리 큰 애벌레가 눈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본 것 같다,

  그렇게 지나간 5분
  
  
  

4월 어느 날

  

  도시는
  생강나무 산수유 개나리 히어리 풍년화
  노란 화목花木으로 노릇노릇 익어가고
  나는 그 속을 걸으면서
  익어가는 도시를 먹어치운다
  먹힌 도시는 사라지고 새로운 도시가 생성되고
  도시로 배부른 나는 버스를 탄다
  창밖으로 보이는 변두리 우듬지에 듬성듬성
  피기 시작하는 진달래를 따서
  내 속에서 익어가고 있는 노릇노릇한
  도시에 얹어 화전을 부친다.
  진달래는 진달래로 죽고 또 다른 진달래가 피고
  이미 죽은 도시는 내 배 속에서 출렁거리고
  차창 밖의 새로운 도시는 버스에 얹혀 달려가고
  그 속에 나와는 상관없는 타자들이
  함께 달려간다
  문득, 어느 타자와 눈이 마주치고
  난 그 타자에 의해 죽고 말았다
  내 속에서 도시는 탈출해 버스를 내리고
  타자는 도시와 나를 잡아먹고
  배부른 몸으로 무한한 어딘가로 가고 있다
  4월 어느 날
  무지한 자에 레비나스4의 철학은 죽고
  도시는 생생하게 노란 꽃들을 품고
  다른 꽃들을 맞아들일 채비를 하고 있다
  너이면서 나이고 나이면서 너인 타자들의 무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로를 먹어대고 있다.
  

주석

  1. 『키메라』: 존 바스의 소설로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와 그리스신화를 재해석하여 쓴 작품.
  2. 『혼자 가는 미술관』: 프랑크 슐츠가 독일 청소년을 위해 지은 미술책.
  3. 『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가 일본 하이마쓰시에서 실비로 3년마다 열리고 있는 콩쿠르를 배경으로 쓴 소설.
  4. 프랑스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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