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 외 1편

  

겨울잠

  

  희망은 짓이길수록 살아나는 파란 흐름이었다

  영혼을 커피 캔처럼 쭈그러뜨리고 머리를 부풀려 광대한 꿈이 익어가는 중이라는 한 줄 광고도 잊지 않았다
  마인드컨트롤의 수법을 써본 것이다

  파란 문으로 들어가는 행운의 청년을 그렸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육중한 기둥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의 유체이탈이었다
  흐르지 않는 맥이 뛰지 않는, 파란

  매일 달라지는 해와 달을 이력서에 그려 넣는다 고지서와 이력서들이 몸을 뒤트는 방에서
  해와 달은 갈수록 홀쭉해지지만 혼자만 아는 일, 서서히 헛웃음에 길들여진다

  칸이 너무 많아서
  칸이 영 영 없어서
  이력서에서 북극곰 냄새가 났다 그 먼 곳이 그리워졌다

  스펙은 자라지 않아 빈 칸이 저물고
  열망, 목숨 같은 꽤 쓸 만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칸은 보이지 않았다
  붙여주기만 하면 차가운 밤을 뒤져서라도 별을 따올 수 있을 텐데

  마지막 이력서에서 해와 달이 겨우 눈짓만 남겼다
  아무도 곁에 없다는 것은 뿌리가 지구 밖으로 달아났다는 끄덕임이다
  무연고자의 무덤 속 북극곰의 따뜻한 잠에 들 파란 청년은 절망이라는 질 나쁜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서랍 속의 제니

  

  빨리 자란 아이가 어른스럽다는 것은 재미난 이야기예요

  내 키가 저 여자의 키 만해졌을 때부터 나는 서랍 속에 갇혔어요
  누군가의 손길만 닿아도 물러터지는 복숭아가 꼭 나 같아요

  여자의 눈은 찢어진 아시아풍 내 눈은 동그란 서양풍
  그러나 우리는 사이좋은 DNA 출신이지요

  여자가 서랍을 뺄 때마다 싸움이 시작되었어요 가만히 놔두면 얌전히 곯았을 텐데요

  여자는 늘 높은 톤으로 반복되는 입김을 지녔어요 공부해야지 밥 먹어야지
  그런 말이 특별히 나를 긁는 건 아니지만요 무어든 트집을 잡아야 내 무른 살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 같아요
  제때 넣어주는 밥이 질리는 개 사료 같다고 투정질을 하지요 여자가 속으로 울든 말든요
  정성을 쥐어짤수록 화가 나는 나이라고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요

  괜히 미워하고
  괜히 싸워서
  내가 마음에 썩 들어요
  물오른 복숭아 빛 치마를 들썩거리면 날개를 단 것 같아 좋아요

  서랍 속에는 학교 학원 지율학습으로 난 길이 울렁거려요 어느 쪽이든 공부의 엄한 신이 나를 노려보고 있지요
  나는 피해가다 툭하면 갈색 흠집이 생겨나요

  저 여자가 나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때쯤이면 엄마라 부르겠지요
  눈물 나는 이야기는 멀어질수록 좋아요
  빨리 자란 아이가 어른스럽다는 말에 웃음이 맛있는 침방울들을 튀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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