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 열기 열기 외 1편

 
 

  폭포 열기 열기

 

  사랑하지 않아.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 지쳤지만 뼈와 살로 똑똑히 울리는 나의 목소리
  마룻결 따라 멍하니
  흐르는
  물살

  거실에는
  어제와 같은 햇빛이 들고 소파에 걸친 나의 뼈는 부드럽게 뒤틀려 있고 나는
  사랑 이야기에 있어 은퇴한
  연금생활자가 되었다.

  반쯤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 분다.
  커튼 갈고리에 깊숙하게
  꿰어진
  맥없는 매달림에 대한 보상으로

  이쪽으로도 가끔 부푸는 커튼

  돌아오는
  들어오는

  따뜻하고
  머리 아픈 젊은 장면들

  수증기와 무지개가 번갈아 펼쳐진 폭포 끝까지
  빛과 물을 뒤집어쓰며 현실감
  느껴지는 적당한 광채에 나의 전체를 빼앗기며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어 아름답게
  침묵하며 미친 듯이
  웃으며 함께 다다랐던 느낌. 거의 완성될 뻔한 그런 느낌이 빠져나간

  뼈.
  

  기념품

  습한 기운 조금
  남아 있는 뼈의 겉면으로
  거실의 먼지가 반짝거린다. 살아 있는

  기억들이 차가워진다.
  그림 같던
  카탈로그 속 자연 이미지 같던 기괴하고
  무결한 사랑 한복판에서
  터지며 굴러떨어지던 장기들 멈출 수 없을 것 같아. 지루한 채 슬픈 채로

  쏟아져버릴 것 같아.

  미지근하게 다
  식어버린 온몸의 뼈마디로 이제 평생을 청소하고 그렇게

  흠 없는 과거처럼 청소된 평생과
  눈 마주치며 식사하고 때때로
  어르고
  재우며
  무심히 거느려야겠지만. 평생이란
  그늘진 안정감이

  여기 누워 내가 갉아먹을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액수의 연금이 아직은 잘
  가늠되지 않는다.
  

  열기

  무리해 집중하거나 허약한 몸
  단련하며 다시 일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내 젊음을 억지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소파 밑으로 모이는 물살이 더 가늘어질 때면 왜
  얼굴로 흘러들어오는 여러 굵기 여러
  방향의 피 줄기가 모조리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피 대신 옅은 분노가

  가짜가 힛 힛 웃으며 나를
  치고 갔다는 기분이 빛 없이

  위로 없이 나의
  뼈를 어루만진다.

  협탁에는 아프리카의 크고 조용하고
  날카로운 여행지들이 인쇄된 카탈로그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진 채 오후의 어둠에 잠겨 놓여 있다. 사랑에 대한 기대감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춰질
  전형적인 이미지에 반발하지도 않은 채 조금은
  자포자기한 채
  

  빅토리아 폭포

  나와 비슷한 보폭으로 뛰다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속마음 같은 흰 상처를 바라보  고 언덕 너머 흐르는 오후를
  이해하고서는
  한순간 깨진 앞니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세계,

  바람과 빛에 헝클어지는 정도를 조절하지 못해 앞을
  너무 많이 보아서

  남겨둘 수도 있던 사랑의 신비도
  기운도
  망가트리기를 멈추지 못하며 엎어지는, 그런 세계가 있을까 궁금해한 적은 없었어. 나보다 어리석은 세계와 나란히 앉아

  해 지는 거실을 두 눈에 담으며 더욱 무력해질 날을 기다려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카탈로그가 선택해 보여준 걸음걸이, 나와의 부드러운 접점은 저 거대한 폭포였어. 분당

  5,500만 리터가 108미터를 떨어져 내리는

  멀리서도 귀가 먹먹해진다는 어둠.

  둔탁한 혼자.

  카탈로그 귀퉁이가 부풀며 젖어간다.
 
 

  gleaming tiny area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의 소파에 주저앉았습니다 1인용이라기엔 크고 2인용이라기엔 비좁은. 거실 창으로 들어와 짐 가방의 손잡이 · 잠든 화초

  · 먼지 냄새나는 심장 · 소파 팔걸이를 번갈아 비추던 저녁의 빛은, 당장은,

  정말 중요한 말 대신 다른 자질구레한 말들만을 골라 전해주는 듯했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나를 위로하듯

  일부를 살짝 지워내듯 소파의 모든 실밥과 색, 무늬들을 빗겨가며 붑니다 여기
  이런 무늬가 있었나? 새삼스레 부드럽게 깨어나는 감각 속에서 헷갈리기도 했어요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가구들

  배치가 바뀌거나 바닥이 세게 눌린 흔적도 없었으나 거실 한가운데 놓인 짐 가방은 왠지

  언제 이 집에서 나와 바퀴를 굴린 것인지 왜 집과는 상관없는 바위와 흙 포장도로 사이를 거닌 것인지 기억해낼 수 없었습니다


  

  이토록 무겁고 조용한 세계 속에서 가방은 빙빙 도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따뜻한 실로

  재봉되었던 빛 안쪽은

  바깥 사람들 바깥 여흥이 꽉 쥐고 있던, 너무나

  확실하게 느껴지던 박음질로부터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저 화초처럼 사그라들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울지 않고

  긴장하고 있었어요

  자발적으로 떠난 여행에서도 내내 나의 집 거실만을 떠올렸다면 대체 어떤

  팔걸이가 어떤 실밥이 날 떠나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요 할 말 다 떨어져 어두워진 빛이

  입을 뗍니다

  은색 원기둥에
  여러 개의 가는 선으로 연결되어 모빌처럼 회전하던

  가볍고

  어지러운 말들을 멈추며
  
  

김연덕

2018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가 있음.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