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 풋감 외 1편
요절, 풋감
한여름 장맛비에 떨어진
회오리밤톨만 한 대봉시 풋감 몇 개
가지에 막 자리 잡은 어린 것들 떨구려고
무수한 빗발 그토록 쏟아져내렸는가
먹구름 사이로 터져나온 조명은
배꼽을 드러낸 채 누워 있는
푸른 주검들 향하고 있다
오가는 발길에 차일 것 같아
얼른 주워 들여다보는데
반듯한 진록빛 몸에 생긴 실금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투명한 선혈,
길바닥에 내 발길을 접착시키고 있는
점도 높은 끈적거림
여린 것 추락한 자리에 주저앉아
어금니를 깨문 채 오열하다가
파리한 얼굴로 어깨 들썩이다가
혼절해 바닥에 누워버린
감나무 암록색 이파리들은
어린 주검들의 유족일까
태풍이 여름의 꽁무니를 뒤쫓을 무렵
가을 볕살 따가울수록 봉긋봉긋
불끈 쥔 내 주먹보다도 크게
문실문실 속살 차오를 대봉시들
한밤중 길가의 외등처럼
주홍빛 오랜 속울음을
요절한 벗들의 꿈으로 매달고서
가지마다 허공을 밝히고 있을
푸른 눈망울들, 감잎들과 함께
남은 물방울 몇 떨구고 있다
좁은 길
우리가 서로 만나러 갈 때 당신은
넓은 길 지름길 찾는 내게
그런 길 말고 험한 길로
좁은 길로 오라시네
무슨 일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호젓하고 은밀한 길로
비탈지고 꼬불꼬불한
고샅길 에움길로만 오라시네
지붕 낮은 마을로 이어진 길
이웃들 고단한 발길조차 뜸한 길
모퉁이 돌면 더욱 좁아져서
더러는 없어져서 보이지 않는
홀로 가는 발길 헛디딜세라
길 없는 길에 나보다 먼저 나와서
당신이 내민 손 붙들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길로만 오라시네
허완
1962년 경기 파주 출생. 1989년 시 동인지 『교사문학』에, 1994년 가을 『황해문화』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황둔 가는 길』 『내가 길가의 돌멩이였을 때』, 공저 『별난 박물관 별난 이야기』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