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박스 외 1편

  

서프라이즈 박스

  

  내 삶은 이제 자루처럼 닫히고 밀봉된 채 내 앞에 놓여 있다.
─장 폴 사르트르, 『벽』 중에서
  

  공개할 수 있어?
  놀라움을 증폭시킬 수 있어?
  미끄러운 외관을 배신할 수 있어?
  비밀과 공존할 수 있어?
  
  내 앞에
  놓여
  있는
  박스를 열거나 열지 않을 수 있다는
  선택이 나에게
  있으며
  보관되거나
  전시되는 선택도
  나에게
  있다니 서프라이즈
  
  고요한 호수 위
  떠간다
  박스의 뚜껑이 흔들리고
  물결이 일고
  나는 천천히 흘러가고
  먼 곳의 창고에 불이 붙고
  
  아직 열리지 않은 것
  
  

밥과 술

  

  그와 나 사이에는 밥과 술이
  넘어간다
  각자의 입으로 각자의 배 속으로
  우리는 기분이 좋아서 말을 나눈다 자꾸만
  
  어느 날 그와 나는 낯선 도시에서 야키토리집에 갔다 꼬치를 각자 하나씩 들고 한 입씩 베어 물고는
  넘어간다 웃음이
  하이볼
  한잔씩 마시며 넘어간다 시간이
  집에서 산책을 기다리고 있을 개를 생각하다가
  아직 마치지 못한 일도 생각하다가
  꼬치에 매달린 마지막 대파를 빼먹으려는데
  냅다 대파가 나가떨어진다
  그가 웃는다
  
  문득 나는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거의 매일 나에게 밥을 잘 챙겨 먹었냐고 묻는다 나도 그에게 밥을 먹었느냐고 묻는다 묻는 것은 쉽고
  내가 그를 믿을 수 없을 때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는 모르겠지 술이 넘어갈 때 어떤 진실을 알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느끼는 것은 쉽고
  
  어쨌든 아직 그와 나 사이에는
  밥과 술이 있다
  곧잘 넘어간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