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자로 살아가기 외 1편

  
  

빚진 자로 살아가기

  

  스스로 빛을 꺼버리며 빚을 던져주고 간 당신들
  내가 죽을 때까지 다 갚지 못할 게 분명한
  그 빚이
  나를 살아가게 만듭니다

  열심히 살아야 조금이라도 빚을 갚지
  그런 마음으로 밥을 먹고
  주어진 일을 하고
  벗들과 술도 한잔합니다
  기운을 내야 합니다
  먼저 간 당신들이 남긴 빚 덕분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겠다던 당신 말씀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럴 리가요
  그럴수록 당신은 더 많은 빚을 우리에게 지웠는걸요
  여직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증거인걸요

  빚은 주는 사람 마음이 아니라
  받는 사람 마음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갚을 빚이 없다는 이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살아왔다고 하는 이들
  나는 이제 그런 이들을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도 빚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감히 그런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빚을 갚기 위해 살아갑니다
  내가 빚을 갚아야 내가 남길 빚도 조금은 있을 테니까요

  이토록 건방진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먼저 간 당신들이 남긴 빚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낭중드라이버1
  ─박진수 화백
  

  어머니는 좌익 노동운동가였고
  아버지는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

  남한 사회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온
  빨갱이 새끼가 발 디밀 곳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이 공장 저 공장 닥치는 대로 떠돌았다
  주머니에는 늘 드라이버가 있었다

  나이 육십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시회도 열었다

  폐지 가득 실은 손수레를 미는 할머니를 그렸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앉아 계신 모습도 그렸다
  어머니 옆에 커다란 해바라기를 그려 넣었다

  촛불 집회 때 두 번 나갔다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무리 속에 끼어본 적 없어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혼자 울다 돌아왔다

  건너온 세월을 돌아보니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드라이버로 수없이 풀고 조이던 나사못들이
  팔십 평생의 뼈마디마다 박혀 있을 거였다
  
  
  

〈주석〉

  1. 공장 다닐 때 주머니에 늘 드라이버가 들어 있었다고 해서, 낭중지추囊中之錐에 빗대어 스스로 만든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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