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밭에 서서 외 1편

 
 

  붉은 밭에 서서

 

  농협에서 은행잎처럼 수북하게 빌려온
  한 포대기의 징그런 돈 냄새
  거칠은 농부의 손은 이제 자라다 만 가지와
  고춧대의 목덜미를 비틀어서 뽑아낸다
  초코파이와 요구르트와 화장지를 사러 가는 그곳에서
  화투짝 모양의 닳아버린 밭뙈기를 담보로
  빌어온 원금을 늙은 호박잎에 이쁘게 싸서
  되돌려주기는 일찌감치 글러버린 이웃들

  까무룩한 늦잠 한가운데서
  뿌리째 뽑혀 나와서 허둥지둥
  먼 가을하늘 한가운데에 예끼
  자빠뜨린 눈물 글썽이는 고추와 가지
  바람이 불면 귀밑 머리칼이 늘어나서
  옥수숫대처럼 파르르 울고
  붉고 쭈글쭈글한 고추가 대롱대롱
  여적 눈을 뜨고 살아 있다

  멋쩍은 노을을 뒤집어쓰고서 먼 산으로
  도망가자고 참새가 아침부터 짹짹 한다
  보랏빛 가지가 아직 부풀지 못한 채로 주렁주렁
  한낮에도 시커먼 어둠을 낳고 있다
  속 뒤집어진 밭 속으로 저벅저벅 찾아 들어가는
  먹이를 한 줌 줍고 있는 지친 날개들
  찢어진 헝겊처럼 웃는다
 
 

  별빛당

 

  희고 차가운 항아리에
  어찌 당신의 웃음이 다 찰 수 있는지요
  뜨거운 빛을 삼킨 몸은 이제 항아리의 말처럼
  동그랗고 하얗게 머물고 있네요

  그날은 당신의 말이 너무 뜨거워서
  너무 뜨거워서 뜨겁다는 말도 까먹었는데
  요즘은 뉘엿뉘엿 꽃잎을 내려놓고
  날짜를 내려놓고서 머리를 긁어요

  이제는 차가워지는 가을을 지나서
  술이 취한 고라니 한 마리처럼
  인적이 드문 골짜기까지 후비고 다니며
  수국처럼 하얀 손목을 붙들고 놓쳐요
  집으로 돌아오는 환한 발자국의
  총총한 별을 올려다보고 있지요

  그곳은 따뜻하고 아름답지요
  이곳은 차갑고 시들시들해요
  그러나 당신의 마른 손가락 냄새로
  그윽해지고 또 엎드려 있어요
  
  

이기인

1967년 인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혼자인 걸 못 견디죠』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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