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아픈 여름 외 1편
발이 아픈 여름
계속 비가 오고
잠이 들면 비가 오는 꿈을 꾼다
벽시계에서 물이 떨어지지만
웃을 수 있는 게 꿈의 아름다움
한숨을 몇 번 쉬고 나면
물이 새지 않는 노란 내 방으로 돌아온다
고양이는 컨디션이 나쁜 날이 있었지만
금방 말썽꾸러기가 되어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고
발을 깨물러 달려왔다
고양이는 마음껏 나를 터치해도 되고
나는 원하는 만큼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 없어서
잠든 고양이 옆에 앉아 고양이를 오래 바라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들의 지저귐과
풀벌레 울음이 들어와서 좋지만
새벽까지 담배 연기가 들어오는 밤이 있어서
7월이 가기 전에 여름이 지긋지긋하다
생각해보니 창문을 닫고 사는 겨울에도
12월이 가기 전에 12월이 지긋지긋했다
연락이 뜸해졌지만 여전히 파비는 중요 인물
파비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고
파비가 들어와 잠이 드는 상상을 하며 일어난다
파비가 내게 할 일은 이제 없지만
파비는 그간 내게 한 일로
아직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한다
오늘도 7시 조금 넘어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반려동물에게는 성실한 직장인이 최악
나 같은 백수가 최고
어제보다 발이 조금 덜 아프지만
아직 밖에 나갈 정도는 아니라서
나는 오늘도 고양이에게 최고 최고 중에 최고
73년 후의 항해
지구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지구에 있지만
여기선 그렇지 않다
낮과 밤이라는 지구의 강박이 그리울 뿐
그러고 보니 여기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겐
여기가 없고 우리가 그들
추억, 그중에서도 실연과 실패
길이 멀 때
그것만이 끝까지 버리지 않는 장난감
나올 수 있는 점괘가 다 나와서
우리의 점괘는 같아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모이면 카드점을 친다
생존을 위해서 건강의 개념을 다시 세운다
돌아가면 우주에 대해
광활하다는 표현은 쓰지 않을 거다
우리가 잘못되면
오직 우리가
우리를 구하러 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지나친 각성에 시달리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다 아는 말은 전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무엇도 확신하지 않지만
우리가 도착할 좌표에
정말로 그 행성이 있기를
사실 우리는 우리의 확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확신에 의해
이 길에 있다
낮과 밤이 없어서 낮과 밤을 만들어
낮과 밤의 일을
신경증 환자처럼 구분하여 지키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개를 데려오지 않았지만
정해진 시간마다 정해진 곳에 가서 먹이를 준다
그는 몇 분 동안 마음속에서 우주선으로 나온 개를 바라본다
나도 그 개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공중에 떠서 자는 게 지겹다고
복도로 나간다
나도 그를 따라 나간 적이 있다
우리는 매일 일기를 쓴다
우리보다 우리 일기장이
지구에 돌아갈 확률이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일기를 쓰는데
일기를 쓸 때
여전히 인류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구와 비슷한 것을 찾으러
우리는 계속해서 가고 있다
3년이 되어간다
김개미
강원도 인제 출생. 2005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작은 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