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외 1편
무엇
어떤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숲속을 달리는 아이들과 반짝이는 꽃과 열매
명랑한 토요일의 구름과 함께
해가 지도록 아이들이 뛰어다닌 건
숲이 아니라
숲속에 깃든 무엇
빠르게 흙빛이 되어가는 나뭇잎들과
창백한 달
어둠이 무심히 다가왔다
차갑게 식어가는 공기 속에서
한 아이가 손을 놓치고
세 아이가 길을 잃고
다섯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어둠은 제 모습을 숨기지 않고
그러나 무서운 건 어둠이 아니라
어둠 속에 깃든 무엇
가방이 사라지고 안경이 사라지고 신발이 사라지고 이름표가 사라지고 숨소리가 사라지고
누군가 아이들 옆에서 하나씩 집어 갈 때
찾아 나선 사람들이 두 손으로 움켜쥔 건
촛불이 아니라
촛불에 깃든 무엇
알 수 없는 것들이 알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이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어떤 두려움은 신에게 매달렸다
정확히는 신이 아니라
신에게 깃든 무엇
어떤 부끄러움은 밤보다 먼저 이곳을 떠났다
어떤 미래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어둠의 가시덤불에 갇혀
톱 연주를 하듯 바람도 떨면서 우는 밤
피로 물든 맨발의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건
쿵쾅거리는 우리의 심장이 아니라
심장 속에 깃든 무엇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섬이 되어 가슴에 박힌
붉은 시월의 숲 속에서
잠이 든 아이들은 일요일의 아침을 기다렸다
영원이 아닌 한 접시의 수프
아침이 아니라 아침 속에 깃든 무엇
회색 숲
무심히 걷다가 발이 닿았어. 당신은 모르지. 잠들었거나 밖에 나갔거나. 현관문 손잡이가 굳어 있는 손처럼 차가웠어. 장갑을 걸어 두고 몰래 나왔어. 새로 산 거야. 겨울이 올 거야. 그런데 왜 언니가 생각났을까. 따뜻한지는 모르겠어. 어쩌면 좋아하는 색이 아닐지도 몰라.
길 위에는 차들이 많아서 바람은 느리게 걸었지. 검은 비닐봉지도 그림자처럼 걷고 나를 스치는 여자아이의 비누 냄새도 오래오래 걸었지. 아이는 끝까지 걸어서 어른이 되었을까. 바닥으로 흘러내리던 두 눈이 갑자기 멈추었어. 자물쇠처럼 닫혀버린 입. 낙엽처럼 해진 날개. 회색 길 위에 회색 새가 펼쳐져 있었어. 어떤 삶은 죽음이 보호색이라는 듯이. 차바퀴들이 회색을 묻히고 다녔어. 회색의 살점이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퍼져나갔어. 길고 긴 회색의 밤이 왔어.
칠이 벗겨진 나무들마다 층층이 걸려 있는 불빛들. 밤에 태어난 아기들은 회색 얼굴을 하고 회색 꿈을 꾸고 엄마들은 아기들의 회색 눈동자를 오래오래 씻겨주겠지. 언니는 그래도 좋았을까. 물속에 기억을 담그고 식어버린 작은 뺨에 입을 맞추며 오래오래 견뎠을까.
유령선처럼 신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는 밤. 나만 아는 번호를 눌렀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어. 현관문 손잡이가 굳어 있는 손처럼 차가웠어. 그 위에 장갑이 걸려 있었어. 언니도 남몰래 다녀갔을까. 밤에 우는 사람들은 조용하기도 하지. 내가 밖에 서 있는데 집 안에서 내 목소리가 들렸어. 지울 수 없는 이야기처럼 회색 눈이 내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