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름밤의 꿈 외 1편
모든 여름밤의 꿈
내륙 위로 깰 잠을 다 자고 도착한 밤의 여름, 뱃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너의 젖은 팔을 붙잡고 있으면 세상은 아직도 팽창 중인 검은 컨테이너라는 비밀이 들렸어요 어둠 속 모래가 날리고 나무 자라고 풀이 돋고 물방울 맺혀가는 동안 포도나무 가지에 걸린 금속 사각면체 안에서 서로 등 돌린 한 쌍의 몸이 두 개의 붉은 전화기 붙들고 우네, 이 마음을 심장보다 더 오래 삼키고 있었습니다, 다 녹아 줄 게 없네요, 모든 여름밤을 한 꺼풀씩 모으고 있으면 나는 신에게 가장 멀리 있다는데, 궁금했어 숨겨달라는, 이 몸 좀 숨겨달라는 기도가 왜 발톱, 손마디의 눈부신 빛, 팔꿈치, 눈꺼풀에 반사되는 빛과 머리칼 속을 헤매고 다니는 안개, 품속의 암흑보다 불용성不溶性으로 태어나는지
사랑은 기침하고 숨 쉬고 기침하고 자기 눈물로 자기 몸 적시는 푸른 종이 티라노사우루스, 느리게 미쳐가는 너의 올빼미, 내 그리움은 아무리 거대해져도 길 잃지 않는 초록 정원으로 된 미로 이건 비밀이 아니에요 나의 지옥을 다 뒤집어 파내도 찾을 수 없는 이야기 물이 견디는 고아의 시간을 거꾸로 되감아 고아가 되길 기다리는 나 한 아이의 인간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여기 감기를 사산하고 살아남은 몸 honey
수요일에서 수요일로 흘러가는 거리가 쑥스럽도록 길기만 하지
꿈에서도 혈액의 물결조차 닮는 데 실패했지만 무모하게 살아 움직였습니다 생명이란 뭐지? 두 손으로 얼굴 가리고 누운 내 머리에 프리지어를 어지리프, 스피릿을 릿피스라고 읽어줄 수 있는 하나의 선물이었다가 baby, how trembling에서 how trembling, baby로 가는 태풍이었다가 엉엉,에서 엉엉,으로 다시 엉엉에서 엉엉으로 돌아가는 비구름, 네가 내 멱살을 붙들고 뭘 보고 있어? 뭘? 물으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뭘 보고 있어? 해골 빛 숲속에서 정령의 시체를 끌고 가는 소리로 네가 말하면 보고 있어? 내가 낳지 않은 나는 나를 비추지 못해 대신 숲의 표정을 체위를 비추며 대답했어요 계절이 늙어갔네요 물의 역사처럼, 폭우 속에서 화가가 그리는 폭우보다 느린 속도로 계절이 물의 원형처럼 늙어갑니다 보고 있어? 나뭇가지를 들춰 돌아봤는데 너는 깨질 것처럼 볼륨 높인 이어폰을 정령의 잘린 머리에 끼우고 노래 틀고 있었네
머리가 절단된 가슴은
정령인지 인간인지 구분되지 않았답니다
대지는 머리 없는 몸
모두가 자신이 대지의 머리라고 고함치며
서로를 겨누다가 쏘기도 전에 찌르고 주저앉았다
널 보고 있어 baby 네 허리 위로 피어나는 프리지어 모양 뼈들을
이건 비밀 아니야 baby 나의 지옥을 다 태워도 타버리지 않는 이야기
내륙 위에서 잘 잠을 다 자고 너와, 해가 진 여름의 상한 배에 올랐습니다 멍투성이 얼굴을 쳐들고 차가운 난간에 팔꿈치를 누르고, 바람 때문에 담배에 불 잘 붙지 않네요 바닷바람 상처에 좋지 않아요 흉 지지 말고 한 대만 태우고 어서 이리 와요 돌아오는 배에서 얼굴이 깨끗하게 나아 있기를, 이 세상에서 돌이킬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의 상처들, 새로 불붙일 담배들뿐이니까 자정에서 자정으로 미끄러져가는 거리가 쑥스럽도록 기네요 조종실 뒤편에 앉아 모터 소리에 온몸이 깎여가며 불안하게 잠들어 있는 네 몸을 덮은 이슬, 이슬 속 달빛들이 진동했지요
슬립 나이트sleep knight
열여덟 살 무렵
누군가 여름방학 동안 사슴의 가죽을 씌운 공기총으로
행인들의 등을 쏘고 다녔다
살아남아 개학을 맞은 우리들은
탈영한 병사처럼 몰래 어른이 되어갔다
모두가 잠이 든 나라에서는 잠꼬대를 하는 자가 왕이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도 아쉬운 겁니다
하단에 Sorry to see my ass라는 글자가 프린팅된 무인 전투기가 하늘을 가르며 때로는
우리가 마저 깨뜨리지 못해 남아 있는 것들을 파르르 흔들고 지나갔는데
우리만은 흔들지 못했지요, 주저앉아 이렇게 아쉬운 겁니다
미치도록 화가 나 날뛰는 사람이
화가 나서 날뛰다 미칠 것 같은 사람을 향해
독일 노인의 얼굴 모양을 한 유리컵을 던져 전방으로 눈부신 파편들이 튀어 올라도
어디에서도 잠은 오지 않았어요
잠든 사람처럼
잠에 빠진 사람처럼 도무지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당신은 나도 모르는 고개 떨군 나의 기사
나의 모든 걸 지켜주려다
당신의 곁으로 격발되는 마음까지도 봉쇄해버렸답니다
대리석 위에 잠든 이의 얼굴을 조각하면 잠든 대리석의 얼굴을 만질 수 있고
잠든 채로 죽은 이의 얼굴을 조각하면 잠든 대리석의 얼굴을 만질 수 있습니다
침대 위에 누워 검은 칼에 발목이 잘릴 뻔한 기억을
안고 잠든 소년이
침대 위에 누워 목이 잘릴 뻔한 기억을 안고 깨어 있는 소년을
재워주는 시간을 처음으로 사랑의 붉은 뼈라고 불렀대요
더 이상 지어지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건물 한켠으로 차가운 베개를 들고 가 쓰러져 잤습니다
빛이 없는 오늘의 마을에서 처음 만난 애인과, 서로의 목소리보다 숨소리만을 더 많이 듣던
전화기를 시궁창에 내다 버리고
나 무릎과 무릎 사이에 베개를 끼우고
베개를 잃어버린 애인은 우는 자세로
잤어요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애인이 얼굴을 돌리는 게 보였는데
내 얼굴이었습니다
내가 애인의 옆구리 위에 까맣게 얼룩진 팔을 걸칩니다 애인이 잡음 섞인 한숨을 내쉽니다
내 왼손이 애인의 셔츠 위 하얀 옷감을 구겨 유령의 얼굴을 새깁니다
빗소리가 들려올 때면 애인은 한 뼘씩 더 나보다 위로 기어갑니다
애인이 우는 줄 알았는데 무릎이
무릎의 미루나무 모양 상처가
바닥을 할퀴는 소리였습니다
비가 오는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갈대밭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애인의 눈이 감긴 동안 갈대들이 먼지처럼 갈려나가 애인의 형상으로 오래도록 솟구쳐 올라 있습니다
갈대로 태어난 애인은 너무 빨리 늙어버리고야 맙니다
그제야 애인이 우는 줄 알았는데, 믿고 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침하고 있었습니다 내 기침 소리를 따라
쇠붙이들이 휘날리는데 낙엽이었어요
내가 몸을 돌리며 휘두른 오른쪽 손등이 플라스틱 푸른 화분을 쳐서 넘어뜨립니다
모래가 몽땅 쏟아져나오는데 거기에도 빛은 없었습니다 애인의 몸속에 매복해 있는 빛이
몸 밖으로 끝내 탈주하지 못해 지쳐
꺼져가며 말을 합니다
지랄하지 마
그래야 더 절실할 때 지랄할 수 있어
기다려
지랄이 어엿한 소녀가 될 때까지
모두가 잠이 든 나라에서는 몽유병자가 군주가 될 수 있습니까
저 먼 곳에서 무인 전투기 추락하는 폭발음이 들려오고 애인이
터져버릴 듯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몸속의 빛을 사살합니다
사랑해
염증 나도록 사랑해
손이 자라고 손가락이 자라도록
그래야
걔들이 손으로 너를 놔줘
Sorry to see my ass
애인의 오른쪽 무릎이 내 옆구리를 걷어찹니다
내 머리가 애인의 머리를 향해 밀착되고
애인에게서 흐르는 눈물이 내 눈 속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그거 압니까? 세상에 있는 몇 개의 사인은
잠든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익사
아사
그런 세상이라서, 세상이라서 이렇게, 이렇게 아쉬울까요
아직도 못 잠든 사람처럼 주저앉아
내가 지켜줄게요 나를 사랑하지 않도록
내가 지키겠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손발이
이 세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서요나
2018년 계간 『페이퍼이듬』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물과 민율』이 있음.